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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시/꼴값 외 1편/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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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꼴값 외 1편
아직도 피가 더워
멀리 서 있는 나무가
사철나무인지 자작나무인지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또렷하다
여전히 아침이 반가웁다
새순의 경이로움 잊지 않았다
쌉싸래한 고비순의 맛을 기억한다
하루쯤 맨발로 걸어서 하늘에 닿을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은
값을 칠 수도 없는
꼴값을 하라 한다
제 값이 얼마인지 정해놓은 이도 없는데
헐값이라며 손가락을 들이대면
그건 영 서운한 일이다
꼴값을 한다는 것이
금줄을 끊을 용기를 잃고
금줄을 에돌아갈 비방에 밝아지는 것이라면
그깟 허울 좋은 값
금줄에 매어두고
철들지 않고 사는 것도
제법 즐거운 일이다.
마을의 유화遺話
각질이 수북수북 쌓이던 마을 외진 곳 쓸쓸한 풍경이 먼저 눈물을 훔치던 벽에 하루, 온기가 말갛게 흘렀다
마을의 웃음은 햇살이었다 텃밭의 상추며 시금치도 다듬어다 주고 마늘 한 쪽이라도 쥐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은 쥐가 풀방구리를 드나들 듯 살가운 풍경이 되려 애썼다 빈 집이 도회에서 흘러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을의 말초신경은 발기했다
어느 날 익명의 입에서 빈 집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왔다 회사를 다니다가 잘렸다지 아마 딸아이가 밤길 골목에서 몹쓸 일을 당했다더군 눈에 색기가 넘치는 꼴이 범상치 않아 얼굴이 복숭아 빛인 게 서방 여럿 잡겠더군…… 잡았다더군! 말들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사실이 되었다 진실을 만들어내는 묘한 입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 둘씩 풍경에서 사라져갔다
이러구러 빈 집 아닌 빈 집이 되어갈 무렵 야단이 났다 잊고 있던 그 집에 사람이 살았는데 일가족이 제초제를 먹고 모진 숨을 끊은 것이다 유서 한 장 없는 죽음은 소문을 사실로 확인시켰고 사람들은 그것 보라며 자신들의 무고함에 안도하였다
그로부터 두어 계절이 바뀐 뒤 빈 집의 벽이 숨을 쉬기 시작하였다 담장도 없는 대문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주름처럼 깊게 패일 무렵 동네에는 또 묘한 이야기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동네 지도 어딘가에 있는 지금 내가 사는 이 마을의 遺話.
박현∙1970년 충남 예산 출생. 2007년 ≪애지≫로 등단. 시집 <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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