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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단편/모나리자의 변명/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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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의 변명
김혜정
구름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너는 거리의 간판들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반공중에 빼곡한 '미인촌' 간판들, 과연 이 도시는 미인들의 천국이라 할 만 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끈적끈적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몸 속 깊이 스며들었다. 아침부터 몸이 반란이라도 하듯 욱신거리더니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비비, 비비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아이가 뒷걸음쳤다. 너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십대 서너 명이 지나가고 있을 뿐 개코원숭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머, 엉덩이 쳐들고 걷는 꼴 좀 봐.”
“주제에 스키니에 배꼽티가 다 뭐야?”
십대들의 키들거리는 소리가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너도 모르게 손이 배꼽에서 엉덩이로 옮아갔다. 너는 지레 머쓱해서 얼른 손을 떼고는 아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겁에 질려 두리번거리는 아이를 향해 짐짓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이가 막무가내로 울음을 터뜨렸다. 저만치서 허겁지겁 달려온 여자가 너를 흘겨보더니 아이를 데리고 종종걸음을 쳤다. 너는 얼떨떨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으나 몇 걸음 못 가서 멈춰 섰다.
쇼윈도에 개코원숭이가 비쳤다. 민소매 셔츠에 벌겋게 부풀어 오른 배꼽 아래로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를 걸친 꼴이 사뭇 우스꽝스러웠다. 너는 얼른 뒤돌아보았다. 그새 놈은 사라지고 없었다. 꺼림칙한 느낌을 털어내며 너는 다시 쇼윈도에 눈을 들였다.
비키니 차림의 마네킹이 바다를 향해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백사장이 펼쳐지고 푸른 파도가 일렁였다. 그녀의 몸매가 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자 너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쇼윈도에 비친 45도 각도의 옆얼굴 실루엣은 네가 봐도 근사했다. 볼록한 이마와 그윽한 눈매, 도톰한 입술, 길쭉하고 매끈한 코선, 엷은 홍조를 띤 피부, 한 듯 안 한 듯 엷은 화장으로 인해 너의 미모는 더욱 돋보였다. 배꼽을 드러낸 티셔츠와 스키니바지는 몸의 라인을 살려주었다. 게다가 너의 미소는 언제 보아도 백만 불짜리다. 너에게 행운을 안겨다준 모나리자의 미소, 그 미소를 보니 금세 기분이 튀어 올랐다. 반짝이는 네온들도 일제히 너를 환호하는 것 같았다.
너는 짐짓 경쾌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큰 건물을 끼고 돌자마자 선글라스를 낀 채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자들과 맞닥뜨렸다. 그녀들은 시시덕거리느라 바빠 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상의 모든 암컷들의 속성에는 늘 보이지 않는 경쟁의 기류가 흐르기 마련이었다. 너의 관심 또한 남자들뿐이었다. 너는 말쑥한 청년에게 슬쩍 다가갔다. 그는 똥이라도 밟은 표정으로 도망쳤다. 쥐뿔도 없어 보이는군. 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신사복 차림의 중년에게 윙크했다. 그는 아예 딴청을 부렸다. 나도 너 따위는 트럭으로 실어다 줘도 싫은 걸.
건물과 자동차들이 그물망처럼 펼쳐진 미로 속에서 너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눅눅한 바람이 한바탕 몸을 뒤채고는 네 등을 떠밀었다. '미인촌'의 무지개빛 네온이 확대되어 시야에 들어찬 것은 그때였다. 선택이라는 것도 어차피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이렇듯 꽂히는 데가 있기 마련이었다. 너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건물 지하로 들어섰다.
쥐색 반짝이 재킷에 분홍 벨트를 한, 붉은색 펄이 섞인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십대 중반쯤이나 되었을까. 매서운 눈초리에 숏 커트한 머리, 영락없는 흑표범이었다. 주름을 가리려고 애쓴 것이 역력한 스모키 화장에도 불구하고 삶의 고단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일 좀 하려고요.”
“뭐?”
흑표범의 입술이 한 쪽으로 실그러졌다. 네 마음속의 모나리자가 여자에게 항의했다. 당신이 내 진가를 알아요? 이래봬도 남자를 다루는 데는 선수라구요.
때맞추어 두 명의 여자가 들어섰다. 흑표범이 턱짓을 했다.
“쟤들 안 보이니? 저 정도는 돼야지.”
저 여자들은 내 발뒤꿈치도 따라오지 못해요. 난 대학까지 나왔는걸요. 한때는 잘 나가는 인생설계사였구요. 네 안의 네가 대꾸했다.
“잘할 수 있어요.”
“딴 데 가서 알아봐. 주제를 알아야지.”
몇 군데를 더 들러 보았으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맥이 빠지기도 하고 피곤해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어젯밤 일은 악몽이었다. 처음에는 사정하면서 매달리다시피 하던 남자가 네 몸을 묶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너는 두 배의 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가 비디오를 찍으려고 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갑자기 난폭해진 그가 채찍을 휘둘렀고 너는 굴복했다. 일이 끝나자 순한 양이 된 그는 웃돈까지 얹어주면서 또 만나자고 했다. 너는 그런 변태를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더 이상 그런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씩 흩뿌리던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빗물이 보도 위를 적셨다. 점멸등을 켜고 느릿느릿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너는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일까. 미래를 설계하면서 꿈에 부풀었던 날들은 어디로 갔을까.
너는 막 떠나려는 전철을 아슬아슬하게 탔다. 휴우, 안도의 숨을 터뜨리는데 네 옆에 섰던 청년이 툴툴대며 너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 옆의 중년도, 그 옆의 소녀와 노인도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삽시간에 네 주변이 한산해졌다. 승객들은 하나같이 피로해 보였고 출입문에 비친 네 모습 또한 초췌했다.
역에서 내려 지하도를 빠져나오자 축축한 밤공기가 네 몸을 에워쌌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숨바꼭질이라도 시작한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너는 깃을 접는 새처럼 양팔을 가슴에 모으고 걸었다. 조금 전까지의 조바심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한결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너는 욕실의 거울 앞에서 미소 지었다. 티 하나 없이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 좌우 균형이 잘 잡힌 얼굴, 무엇보다 밀어버린 눈썹이 마음에 들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너는 숱이 많은 눈썹을 갖고 있었다. 자고 나면 새로 밀려나온 눈썹으로 인해 눈두덩까지 시커멨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샤워 후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눈썹소제였다. 숱을 쳐내고 눈썹 산을 정리하면서 느끼는 설렘과 긴장감은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였다. 맹세코 그때까지는 눈썹을 밀어버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K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제멋대로인 눈썹을 유지하고 있을 거였다.
눈썹에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K는 이별선언의 원인이 눈썹 때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하필 눈썹 정리용 가위를 잃어버려 이틀이나 눈썹소제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와 헤어져 집에 돌아오자마자 눈썹을 밀어버렸다. 약간의 취기가 호기를 부추겼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본 미소, 모나리자의 미소였다. 다음 날 아침 눈썹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는 부분까지 깨끗이 뽑아 다듬었다. 훤한 이마를 자랑하는 고결한 여인, 반달처럼 둥글고 넓은 이마야말로 중세 이후 여성의 우아함을 가리는 척도가 아니던가. 게다가 갈색 머리와 대조를 이룬 이마가 눈자위의 윤곽까지 뚜렷하게 해주었다.
K와 헤어지기 전까지 너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입사시험 준비를 했다. 폭이 겨우 일 미터 남짓 되는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복도를 지나 맨 끄트머리 방, 손바닥만 한 창문이나마 하나 달린 게 다행이었다. 가구라고는 컴퓨터용 책상과 매트리스뿐, 옆방에서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 때문에 소음방지 귀마개를 끼지 않고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달랑 두 개뿐인 샤워실에서는 아침마다 전쟁을 치렀다. 주말에만 돌아가는 구형 세탁기는 곧 멈출 듯 덜거덕거리며 돌아갔다. 공동으로 쓰는 주방에는 바퀴벌레가 들끓고, 냉장고의 음식은 절반이 썩은 채였다. 하루 빨리 그곳을 탈출하는 것이 너의 지상과제였다. 너는 수십 통의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보험회사의 영업사원 면접을 보러가면서 너는 결심했다.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3인 동생은 수재소리를 듣는다지만 대학에 합격해도 등록금이 걱정이었고,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 때문에 엄마는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다.
면접관인 소장과 눈이 마주쳤을 때 너는 합격을 예감했다. 역시 그는 168센티미터의 키에 약간 통통하면서도 라인이 살아 있는 네 몸, 무엇보다 매사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그는 너의 미소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저녁식사를 청해 왔다. 뱃살만 빼면 모델 뺨치겠다며 엉덩이를 슬쩍 더듬고 난 뒤였다. 너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 정도의 모욕은 감수해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상사와 동료는 물론, 고객들 또한 네 이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밀어버린 눈썹 덕분이라 생각하니 너는 떠나버린 K도 고마웠다.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런 행운이 오지 않았을 테니까.
미소년 같은 얼굴에 계집애 목소리를 가진 K와는 대학 때 음악 동아리에서 만났다. 그는 요즘 시대에 희귀종들이나 하는, 종이편지를 써 보내곤 했다. 속옷을 선물할 때도 네 영혼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라는 식의 메모를 잊지 않았다. 너의 생일에는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유럽풍의 바에서 와인을 마셨다. 그는 이국의 풍경들을 이야기하며 너와 그런 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너는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그와 하루 종일 뒹굴고 싶었다. 질릴 때까지 섹스를 나누다 빈털터리가 되어 쫓겨나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처음부터 예의 같은 것은 차리지 않아도 되는 사이, 서로 너무 닮아 분리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야멸치게 돌아선 것은 순전히 고양이를 닮은 여자를 만난 탓이었다. 너는 그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다. 너는 반드시 성공해서 그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너는 천천히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거리에서의 일이 꺼림칙했다. 비비를 외치던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이 어려 있지 않던가. 게다가 낄낄대던 십대들, 어찌된 일인지 '미인촌'들은 담합이라도 한 듯 너를 거부했다. 여긴 너 따위가 얼씬거릴 데가 아니란 말야. 네 몰골을 좀 봐. 너는 그토록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요즘 너무 예민한 걸 거야. 너는 심기일전하기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K를 만나 으스대보는 것이었다.
네가 전화를 하자 K는 의외로 흔쾌히 만나자고 했다. 변모한 너를 보는 순간, 그가 뼈저리게 후회할 거라 생각하니 오르르 떨렸다. 어디서 보는 게 좋겠느냐고 네가 묻자 그는 전에 너와 함께 간 적이 있는 미술관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너는 거기보다는 그 옆의 동물원이 좋지 싶었다.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는 별로인데다 아무래도 미모를 과시하기에는 야외 쪽이 나았다. 대화가 미궁에 빠지거나 할 말이 궁해지는 경우에도 동물들이 있으니 든든했다.
너는 아침 일찍부터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여느 때보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야외에 어울릴 만한 옷과 구두를 비롯해 코디네이션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오늘이야말로 K에게 복수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K보다 출중한 남자와 동행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입추가 막 지난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하고 살갗을 간질이는 미풍은 감미로웠다. 신선한 공기가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들을 말끔히 걷어내 주었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너는 K를 기다리며 사뭇 여유 있게 산책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것으로 도리어 위용을 뽐내는 사자, 장미무늬의 검은 점을 자랑하며 눈살을 세우는 재규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난간에 매달려 재주를 부리는 불곰을 지나쳤다. 털의 무늬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표범의 우리 앞에서 너는 멈춰 섰다. ‘미인촌’의 흑표범이 떠올랐다. 개뿔, 사람 볼 줄도 모르는 주제에. 놈은 생긴 것과 달리 갸악갸악 구슬프게 울었다. 하이에나는 우욱우욱, 사슴들은 삐익삐익, 하마는 꾹꾹꾹 저마다의 음색으로 낮고 처량한 소리를 냈다. 기린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뜀박질만 했다. 한 녀석이 뛰기 시작하면 다른 녀석들이 덩달아 뛰었다. 사람들이 이따금 너를 흘끔거렸다. 너는 우쭐한 나머지 고개를 쳐들고 걸었다. 엉덩이까지 위로 들리는 느낌이었다.
2미터 남짓한 거리에 K의 모습이 보였다. 감색 재킷에 파스텔 톤의 남방셔츠, 체크무늬 스카프를 한 그의 차림은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의 표정은 빛이라고는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카페에서 ‘에디뜨 삐아프’의 샹송을 들으며 홀로 커피를 마시고 온 사람의 것이었다. 그새 이혼이라도 했다면 기꺼이 위로주라도 사줘야지 싶었다.
K와 대면하는 순간, 너는 가을 햇살 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표정을 연출했다. 무릎 위까지 올라온 쉬폰 원피스에 실크 머플러, 테일러드 재킷으로 포인트를 준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목소리를 살짝 띄웠다.
“오랜만이야.”
그는 너를 알아보지 못했다.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너는 속으로 그를 비웃으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
네가 악수를 청하자 그는 손을 뒤로 빼며 비켜섰다. 냉랭한 기운이 잠시 대기 중에 머물렀다. 한때 마음은 물론 몸을 나눈 사이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졌다. 네가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자 그는 약속이 있다면서 줄행랑을 쳤다. 그의 뒷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비로소 너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벤치에 벌렁 누워 유유히 떠다니는 새털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몸도 함께 둥둥 떠가는 것 같았다. 어느새 기울기 시작한 해가 오랜 기억의 뒤편, 한창 주가가 올라가던 시절로 너를 인도했다.
일에 대한 의욕은 날로 강해지고 수완은 더욱 유연해졌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높이는 것이었다. 너는 고객들과 대화할 때면 콧소리를 내며 상냥하게 웃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너만의 명품무기였다. 너의 고객은 주로 남자들이었고 너는 계약을 맺기 위해 그들과 서너 번, 많이는 대여섯 번도 만났다. 처음에는 차를 마시거나 저녁을 먹고 다음에는 술을 마시거나 노래주점에 갔다. 브래지어 속으로 손이 들어와도 슬쩍 눈감아주었다. 도가 지나쳐 입술을 깨물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계약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날이 네 고객의 수는 늘어나고 네가 속한 팀의 매출도 올라갔다. 소장은 보험업계의 불황 타파에 일조한 너의 공적을 치하하고 보너스로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첫 월급을 탄 날 너는 엄마를 찾아갔다. 그새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엄마는 다짜고짜 눈물부터 흘렸다. 역시 넌 내 딸이야. 어렸을 때부터 똑 소리가 났지. 늙은 엄마의 눈물은 추했다. 동생은 야간자율학습 중에 전화를 걸어 이제 등록금 걱정은 안 해도 되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너는 자랑스러운 딸이자 언니로 거듭났다. 가족뿐 아니라 주변의 모두에게 만족을 선사하는 수호천사 역할에 충실했다. 피곤해서 눈이 안 떠지는 아침, 눈비가 오는 날에도, 심지어 다이어트를 위한 설사약 때문에 탈진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마음은 새로운 각오와 투지로 불타올랐다.
드디어 너는 고시원을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서 지하철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원룸은 네 생활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었다. 너는 알람소리가 울리기 전에 일어나 너만의 샤워부스에서 샤워를 했다. 아침은 커피 한 잔으로 때웠지만 허기 같은 것은 좀처럼 느낄 수 없었다. 가끔 고시원 앞을 지날 때가 있었는데 그곳 생활이 아주 오래 전 일만 같았다. 그런 데서 궁상맞게 책과 씨름하는 친구들을 내심 무시했다. 그래도 자기관리 차원에서 이따금 친구들에게 저녁이나 술을 샀다. 그녀들은 은근히 너를 시샘하면서도 네가 사주는 저녁과 술에 대한 답례로 조언을 해주었다.
“이런 데서 밥 먹는다고 다 귀족이 되는 건 아냐.”
“귀족?”
“아직도 몰라? 있잖아, 그거…….”
볼에 실리콘을 넣어 코와 볼 사이의 주름을 없애 귀족처럼 보이게 하는 수술이 있다는 걸 너는 처음 알았다. 두 번째 보너스를 받은 날 귀띔해준 친구와 함께 성형외과에 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고객은 한층 늘어났고 그들은 더 오래 너를 쳐다보았다. 여자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도 너를 흘끔거리다 차이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결혼식을 앞둔 신랑이 파혼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곧 너의 VIP고객이 되었다.
너는 나날이 콧대가 높아졌다. 통장에는 잔고가 쌓였다. 하지만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얼굴이 조금만 작아도 연예인 저리 가라 할 텐데 말야. 요즘 동안이 트렌드잖아. 귀족수술 후 의사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당분간 삶의 원칙을 정했다. 미모로 가꾸는 데만 투자하자. 그것만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의사는 너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핀 후 정면, 측면, 45도 각도에서 촬영했다. 네모형인 얼굴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포인트였다. 옆으로 퍼진 광대뼈를 줄이고 각진 턱을 깎아내는 것은 물론, 늘어진 부위를 밀어 올려 부드럽고 귀여운 얼굴형으로 바꾸는 것, 비로소 너만의 황금비율을 찾아냈다. 거기에 모나리자의 미소라니, 두 말이 필요 없었다. 의사는 수술 후 보름은 입을 크게 벌리지 말고 딱딱한 것을 삼가며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이동시킨 뼈가 고정되는 데는 한 달, 수술 전과 같은 강도로 붙는 데는 서너 달 정도가 걸린다고. 너는 그동안 원룸에서 뒹굴며 뼈가 붙기만을 기다렸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 그 정도는 기꺼이 투자할 용의가 있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잔고가 줄어드는 것이 불안했지만 얼굴만 작아지면 그까짓 돈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을 터였다.
높은 콧대와 날렵한 콧날, 둥글고 커다란 눈, 도톰한 입술로 변모할 때마다 너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너는 점점 요요해지고 매력덩어리가 되어 갔다. 욕망 또한 갈수록 커졌다. 미래를 상상하면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마음이 들떠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몸무게가 조금씩 줄어든다 했는데 어느새 말라깽이가 되어 있었다.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을 찾아다녔지만 곧 토하고 말았다. 순전히 신경성이라고 했다. 운동으로 근육량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트레이너의 본격 조언을 받으며 운동하는 중에도 틈틈이 체형의 좌우대칭이나 피하지방의 불균형한 분포를 막기 위해 카이로프 락틱, 즉 척추교정과 경락마사지를 받는 것은 물론, 피부의 탄력을 높이기 위해 보톡스와 필러, 메조테라피를 주사했다.
어느새 너는 심장을 제외하고 진짜는 하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누가 봐도 풍만하고 탄력 있는 가슴, 살짝 도드라진 쇄골, 실팍한 골반, 쭉 뻗은 종아리, 탱탱한 엉덩이, 굴곡 없는 얼굴뼈와 근육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물론, 그 과정이 모두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종아리근육 퇴축수술 때는 마취에서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는가 하면, 가슴 수술 부위에 피가 고여 한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 사이 너의 잔고는 바닥이 나고 대신 카드가 늘어났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돈을 벌었건만 수술비용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드로 진 빚이 수 천만 원이었다. 이 카드를 저 카드로 돌려막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생명보험을 담보로 신용대출을 받았다. 대출받은 돈을 신용카드 결제하는 데 썼다. 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친구들은 대놓고 너를 무시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만나는 것조차 꺼렸다. 영업소 소장이 너를 괴물 취급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퇴사를 종용했다. 너는 꼭지가 돌 지경이었다. 전부터 시기해오던 친구들은 그렇다 쳐도 돌변한 소장의 태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두고 보라지, 모두 내 앞에서 납작 엎드리게 될 날이 있을 테니까. 오기로 버텼지만 너는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어느 순간 스스로 비굴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일구어온 삶인데,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당당한 자신을 되찾고 싶었다.
“선생님, 콧대를 더 세우고 싶은데요.”
성형외과 전문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면에 희색을 띠었다. 네 얼굴에 알맞게 디자인된 실리콘을 코 연골골막 아랫부분에 삽입하는 융비술만이 대안이었다. 기왕이면 고어텍스를 삽입하고 싶었지만 너무 비쌌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더니, 수술 후 코와 눈꺼풀이 붓고 피멍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붓기가 가라앉기는커녕 코가 아예 비뚤어졌다.
“보형물, 잘못 삽입된 거 아녜요?”
“그건 아니고, 조직의 수축 때문에…….”
의사는 그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얼버무리고는 몰딩으로 완벽하게 복구하겠다며 수술비도 받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물질이 들어간 코에 염증이 생겼다. 결국 보형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보형물을 넣었다. 비뚤어진 모양은 교정되었지만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길고 코끝이 얇아져 돌출되었다. 이번에야 말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작정이었는데 병원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돈을 더 버는 방법밖에 없었다. 최상의 서비스, 역시 모나리자의 미소만이 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너는 더 우아하고 그윽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주변의 반응은 싸늘했다. 마감 날이 가까워오는데도 단 한 건의 계약도 맺지 못했다. 어디를 가나 찬밥 신세로 입사 이후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날은 아침부터 소장이 면박을 주는 터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고객면담을 핑계로 회사를 빨리 벗어났는데 하필 고객이 펑크를 냈다. 너는 고객관리 차원의 메일을 보내면서 시간을 때우자 싶어 PC방을 찾았다.
스팸메일이 스무 통이었다. 모두 삭제를 했는데 하나가 다시 떴다.
일상탈출을 원하는 분!
네가 바라던, 그야말로 너를 위한 문구였다. 그렇고 그런 일이겠지 하면서도 왠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접속을 하자 순식간에 근육질의 남자들이 화면에 꽉 들어찼다. 가짜 이력에 합성사진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놀라웠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너는 그들을 만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필, 그때 엄마로부터 휴대폰이 걸려왔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어놓았다며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너는 엄마를 간신히 진정시킨 후 다시 사이트에 접속했다.
굶주린 늑대처럼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너는 그들과 차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때로 드라이브를 하고, 볼링이나 스쿼시를 치기도 했지만 마지막 코스는 어김없이 여관이나 모텔이었다. 보험설계사로 버는 수입보다 부수입이 많아졌다. 너는 새로운 고객들이 짓궂은 행위를 요구해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빚이 줄어드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관람객들이 모두 떠나자, 동물원은 한적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새들의 노래도 뚝 그쳤다. 어느새 동물들도 제각기 우리에서 잠들었다. 총총한 별들로 인해 하늘을 더욱 검고 깊어 보였다. 별빛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를 살아나게 했다. 세상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것인가.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각기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야 한다는 자각, 헛되이 살아왔다는 자괴감이 가슴을 헤집었다. 너의 내부에서 무언가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지독한 외로움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울음이 복받쳤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플래시를 여기저기 들이대었다. 너는 벤치에서 내려와 나무둥치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로 인해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플래시 불빛이 멀어지자 너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간간이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뿐, 벌레들이 꾸물거리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너는 점차 마음이 평온해졌다. K와 이별하고 취직한 후 처음 맞보는 안락함이었다. 너는 그대로 나무나 바위, 새나 다람쥐, 풀벌레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다시금 현실의 고뇌들이 너를 지배했다. 온몸이 결려왔다.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가랑이와 사타구니까지 뻐근했다. 너는 근육을 완화시키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문득 몹쓸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병원에 가는 것은 그 자체로도 끔찍했다. 바람이 산들, 뺨에 와 닿았다. 무언가 몸에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몸이 노곤해지면서 스멀스멀 졸음이 몰려왔다. 비몽사몽간에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감겨들었다. 니 꼴이 왜 이러니? 제발 병원부터 가봐, 이것아!
한동안 두 개의 얼굴로 살아가는 것은 적잖은 스릴을 안겨주었다. 물론 회의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너는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모나리자의 미소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게 틀림없었다. 적어도 너는 그렇게 믿었다. 다만, 회사에 출근하면 졸음이 쏟아졌다. 낮의 고객들을 전처럼 대하는 게 힘에 부쳤다. 나중에는 그들이 묻는 말에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그 즈음 엄마의 어리광은 생떼 수준이었다. 날마다 전화를 해서 집에 한 번 다녀가라고 성화였다. 요즘 자꾸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다고.
“너, 왜 이렇게 됐어?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내가 너무 예뻐져서 샘이라도 나는 거유?”
“대체 그 꼴이 뭐야? 무덤에서 막 기어 나온 것 같잖아.”
엄마는 너를 흉측한 짐승 보듯 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다 먹고 살려다 보니.”
“순리대로 살아야지.”
“엄마는 내가 번 돈으로 살면서 뭔 참견이 그리 많대?”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고는 너도 모르게 움찔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엄마와 동생을 돌보는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 벗어버리고 싶은 짐이었다.
엄마는 구식 재봉틀 앞에 앉아 덧버선과 베개 따위를 만들면서 계속 구시렁댔고 너는 대거리에도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밤의 고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좀 만날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달리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너는 마땅히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엄마의 고약한 잔소리를 들으며 밤을 보낼 일이 아뜩했다.
그는 그 일의 첫 고객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너는 그 일을 하지 않았을는지도 몰랐다. 그는 맹인이었지만 체격이 좋고 젊었다. 무엇보다 매너가 좋았다. 털이 참 부드럽군. 그는 털이 많은 네 몸을 어루만질 뿐,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다. 그 즈음 네 몸은 이상할 정도로 털이 늘어났다. 누가 볼까 부담스러웠지만, 다소 괴이한 취미를 가진 그 때문에 제모를 보류했다. 그가 주는 봉사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해괴한 요구를 하고도 인색한 치들과는 달랐다. 몇 날 며칠 쫓아다니면서 갖은 아양을 떨어도 계약이 될까 말까 하는 낮의 고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꼭 이 시간에 나가야 되는 거야?”
“지금 밤낮을 가릴 때가 아니라니까.”
“망할 년.”
너는 엄마에게 보험회사의 명함을 내밀었다. 혹시 주변에 인생설계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나 하라고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제발 병원부터 가봐.”
현관까지 따라 나온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꼭 발정 난 암고양이 같아. 집요하게 나를 쫓는 엄마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야말로 거세당한 수고양이처럼 중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쭈글쭈글한 배를 드러낸 채 벌렁 누워 있는가 하면 변을 볼 때조차도 화장실 문을 닫지 않았다. 구멍 난 팬티에 와이어가 헐거워진 브래지어를 걸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엄마의 경우를 보면 오십이 넘은 여자는 여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더 이상 연민이 생기지 않았다.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왔다는 그는 여느 때와 달리 몹시 격렬했다. 막대한 유산을 받은 그가 단골고객이 될 거라 생각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소장의 냉대, 엄마의 잔소리, 친구들의 따돌림, 수술 후유증과 일말의 불안 따위들을 일거에 날려줄 만한 행운이었다.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너는 다시 낙관적이 되었다.
드디어 너는 한 가지 직업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단골손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네가 연락했을 때는 이미 그의 휴대폰이 끊어진 후였다.
이상하게 다른 고객들 또한 너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재수 옴 붙었다며 투정을 했다. 무엇보다 난폭한 행동으로 위협하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너는 무언가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완벽한 미인만이 할 수 있는 고소득 일자리, 그것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밤의 거리에 즐비한 ‘미인촌’은 너를 위해 존재하는 비상구나 다름없었다.
새벽이슬이 잔디를 적실 즈음 너는 깜박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몸이 축축했다. 손발은 차갑고, 마비가 될 것처럼 저렸다. 너는 근육을 풀기 위해 몸을 움직이다 흠칫 놀랐다. 팔과 다리가 온통 털투성이였다. 거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두 발뿐만 아니라 두 팔까지도 아래로 길게 늘어진 채 손바닥은 땅에 대어졌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손톱과 발톱은 네 몸에서 자란 것이라고 차마 믿기 어려웠다. 이빨에서 나는 딱딱 소리도 평소의 이빨 부딪치는 소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표범의 심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악어의 가죽이라도 벗길 힘이 있는 이빨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너도 모르게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영락없는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너는 두 팔을 높이 들어보았다. 네 몸통도 따라 들렸다. 너는 온몸을 휘감아오는 공포를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쳐든 채 눈을 감았다. 이건 아냐,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거야. 어느덧 너는 몸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햇살이 네 이마에서 미끄러져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는 그 빛을 모두 끌어안을 듯 가슴을 활짝 폈다. 그래, 너무 피곤하면 헛것을 보기도 하는 거야. 너는 자꾸 까부라지는 몸을 가까스로 일으켰다. 그때 인기척이 났다. 너는 잽싸게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고 눈곱을 털어냈다.
멀리 사육사가 너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온 그가 너를 달래듯하며 이리 오라, 고 손짓했다. 네가 고개를 젓자 그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왜 이러시나, 하며 네가 돌아서는 순간, 네 옆쪽에도 뒤쪽에도 사육사가 보였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숨어 있었다는 듯 여기저기서 사육사들이 튀어나왔다. 네가 도망치려 하자 그들이 사뭇 위협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너는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옴쳐 멀리 뛰기를 시도했으나 결국 붙잡혔다. 누군가 네 다리에 마취총을 겨누었다. 너는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의식이 몽롱했다.
학명 Papio
분류 긴꼬리원숭이과 개코원숭이속
네가 눈을 뜨는 순간, 표지판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여남은 마리의 개코원숭이들이 나무 위에서 노닥거리며 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원숭이들을 한 곳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한 놈이 무리를 향해 무슨 신호를 보냈다. 덩치 큰 수컷이 나무에서 내려오자 다른 놈들이 뒤따랐다. 하나같이 엉덩이를 쳐들고 걷는 것이 다른 원숭이들과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새끼원숭이 한 마리가 어미의 등에 기마자세로 올라탔다. 놈들은 우두머리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네 곁으로 다가왔다. 너는 이를 악물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근육이 팽팽해지고 뼛속까지 뻐근했다.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현기증이 났다. 순간, 놈들의 눈동자가 너에게 고정되었다. 고립무원, 세상에 네 편은 하나도 없지 싶었다. 너는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맨 앞에 선 놈과 한참 신경전을 벌였다. 놈이 물러서지 않고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네가 먼저 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놈도 지지 않고 네 목덜미를 낚아챘다. 엎치락뒤치락 한참 육박전 끝에 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기, 비비다.”
한 무리의 관광객이 몰려왔다. 놈들이 하나 둘 철창 쪽으로 다가갔다. 이내 우리 안팎이 소란했다. 바나나를 비롯해 비스킷과 뻥튀기, 잡다한 음식물이 우리 안으로 날아들었다. 너는 가슴이 울컥했다.
바람 한 줌이 네 코끝을 스쳐갔다. 갑작스레 주변의 기류가 바뀌면서 알 수 없는 친숙함이 네 마음에 자리 잡았다. 우리에 몰려든 아이들이 너를 향해 손짓하며 환하게 웃었다. 멀리 공작이 화려한 꽁지깃을 펼치자 기린과 사슴도 눈을 찡긋했다. 꽃과 나무들이 앞 다투어 기지개를 켜고 새들의 합창이 시작되면서 동물원은 순식간에 활기로 넘쳤다.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었다. 곧이어 북소리와 함께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너는 리듬에 맞춰 뒤꿈치로 땅을 차고, 빙빙 돌았다. 심장과 폐, 피부, 세포 마디마디까지 새롭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기 입자 하나도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마치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적어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 분명했다.
너의 입가에 모나리자의 미소가 피어났다.
김혜정∙전남 여수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졸업. 1996년 <문화일보>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 당선. 15회 서라벌 문학상 신인상 수상.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금 받음. 장편소설 <달의 문門>,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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