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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신작단편/내일을 향해 쏴라/김석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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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43회 작성일 10-08-1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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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해 쏴라

김석렬





시간 혹은 세월

예비역 대위 독고獨孤 씨는 학군 출신 장교다. 6년 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한민국 맥주시장 점유율 1위 회사에 무난히 입사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여기까지는 뭐 괜찮았다. 문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처럼 뭔가가 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독고 씨는 2년 반 만에 모두들 못 들어가서 환장하는 회사를 겁도 없이 때려치우고 서른두 살에 국문과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지도교수가 말했다.

“독고 군? 자네가 공부를 더 하겠다는 것은 축하해 줄 일이네. 다만 학부 1학년 때부터 봐 온 제자로서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야. 대학원 공부가 쉬운 것은 아니란 말이지. 깊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란 걸 내 모르는 바는 아니야. 먼저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경제력이 되느냐가 우선이야.”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젊고 튼튼한 주먹. 독고 씨는 견장 위로 밥풀 하나가 올려 질 때를 떠 올렸다. 그리고 약간 웃었다. 교수가 말을 이었다.

“물론 학비가 다는 아니지.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고 좋은 교수 또한 될 수 있다고 봐.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질 않아. 결혼도 해야 하지 않나? 물론 지금 나는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는 있어. 다시 말하겠네. 경제적인 건 부차적인거야. 그렇지만 기본이지. 그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야.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모두를 거기에 걸어야 하는 거지. 능력을 키우라는 말이야.”

이마에 박힌 밥풀떼기 하나가 빛을 받아 반짝일 때마다 분연히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칠 용기로 자신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며 포효했던 시절. 독고 씨는 당시로 돌아가, 내일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리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교수님? 허겁지겁 쫓기듯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삶을 살기는 싫습니다. 저도 제 의지대로 한번 살아 보고 싶습니다. 안 그러면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공부하기엔 이미 많이 늦었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됩니다.”

“독고 군? 그게 다가 아니야.”

지도교수는 진심으로 독고 씨를 걱정했다.

“누구나 다 잘 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하지. 공부 외에 또 다른 문제가 너무 많아.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람과의 관계라고 할까?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교수들 사이의 알력도 있고……. 이 세계가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해서 통하는 세계가 또 아니에요. 여하튼 한마디로 눈치껏 박박 기어야 한다는 거야. 어떻게 보면 이 문제가 더 힘들고 어려울 수 있겠지.”

독고 씨는 힘주어 말했다.

“저를 가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뭐든지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저 육군 대윕니다. 생사의 길목? 수많은 지뢰밭? 저 여기 두 발로 당당히 서 있습니다. 믿어주세요.”

그로부터 6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고 서른여덟 살에 독고 씨의 박사논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계열 작품에 나타난 패러디 양상 연구>가 통과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박사들처럼 교수가 되지 못했다. 지방 신생新生 대학에서 교양 강의가 몇 들어 왔으나 실상 가보면 폐강되거나 한 학기를 넘기기 어려웠다. 교수가 되는 길은 독고 씨에게 있어 요원한 꿈이었다. 그나마 일찍 교수의 꿈을 접은 것이 나름 똑똑한 판단이었다.

독고 씨는 먹고 살기 힘들어 맥주시장 점유율 2위 회사에 어렵게 입사했다. 그러나 그곳 생활도 고작해야 40중반까지가 한계란 걸 실감했다. 50고개까지 버틴다는 것은 독고 대위가 별을 다는 것 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독고 씨는 또 결심했다.

‘늦기 전에, 정년이 보장 되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수님 교육대학원에 갈까 합니다. 비록 중고등학교지만 정당하게 시험 쳐서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첫 수업시간 정년을 1년 앞둔 노교수는 차마 독고 대위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독고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2년 반의 교육대학원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을 때는 이미 마흔이 넘었다.

‘까짓 나이가 대수랴!’

마흔이 되기까지 독고 씨가 지탱한 힘은 예수님을 향한 절실한 기도도 부처님의 자비로운 말씀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까라면 까라.’로 대별되는 군인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고 씨는 너무 많이 깠기에 지쳤고 궁핍해졌다. 그러나 그의 정신, 여름 내내 한 벌의 구겨진 값싼 면 티를 입고 있을망정 언젠간 세상을 향해 멋지게 한방, 어퍼컷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 그런 내일의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독고 씨의 걷은 팔뚝, 엉켜진 푸른 힘줄은 여전히 꿈틀꿈틀 싱싱한 젊음과 함께 굵고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독고 씨는 공부했다, 열심히. 사법 고시, 행정 고시도 아닌, 개나 소나 본다는 중등교사 임용 시험에 목숨을 걸었다. 24시간 중, 15시간을 공부하는 인간이 있어서 16시간을 공부했다. 먹고, 자고, 싸는 행위 외에는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 했다.

봄바람과 함께 불기 시작하는 우울증도 예비역 대위 독고 씨에게는 사치였다. 다만 잠을 세 네 시간 밖에 자지 못했고 하루에 밥 한 끼, 한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들었다. 불현듯 불합격에 대한 공포가 들기도 했으나 이 역시 자신에게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나약한 인간들의 푸념으로만 규정했다.

봄이 넘어가는 길목에서 독고 씨는 이미 더 이상 볼 책이 없었다. 독고 씨는 총 21권에 이르는 중등 과정의 국어과 관련 교과서(국어, 생활국어, 화법, 독서, 작문, 국어생활, 문학, 문법)와 그에 따른 교사용지도서를 무참히도 걸레로 만들어 버렸다. 어디 그 뿐인가. 교과교육론과 문법론, 문학과 교육학 이론서, 기출문제집까지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책을 볼 필요는 없었다. 독고 씨는 열 번 스무 번, 이들을 반복 학습했다.

독고 씨는 다섯 명의 스터디원 모두를 교육시켰다. 독고 씨의 입에서는 주옥같은 교육학 이론과 문법 이론들이 누에 실처럼 줄줄이 흘러 나왔다. 스터디원 모두는 독고 씨의 합격을 기정사실화 했으며 독고 씨를 진정으로 추앙했다. 또한 독고 씨를 부러워했고 늘 독고 씨와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독고 씨는 스터디원들에게 강조해서 말했다.

“시험은 지식의 양만으로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문제에 관한 순발력과 민첩성, 꼬인 문제를 풀어내는 추리력이 더더욱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젊은 너희들의 강점이다!”


리비도

황보皇甫 씨는 도서관이 편했다. 그곳을 벗어나면 늘 불안하고 목이 쉬 돌아가지 않았다. 이유 없이 경추 3번이 저려 왔고 어김없이 폭식을 했고 당연히 토사물을 뱉었다.

도서관은 숨죽인 욕망의 자궁이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서가에 꽂혀진 책들이 날마다 썩어가고, 뭇 개인들의 생이 저물고, 곪고, 쉰내를 풍기고, 막연한 내일, 내일, 내일들에 대한 희망과 불안이, 절망이,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땅땅 때리는, 그러면서도 늘상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으며, 그러한 생각은 사치이며, 나약한 자의 변명이며, 그래서 참고 인내하는 자만이 승리하는 진리의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정말이지 꼭 그래야 하며, 오직 눈 딱 감고 하루하루를 지탱하다보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것 하나로 버텨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참 예쁘다.’

8월의 시작과 함께 황보 씨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먼발치. 애써 마주치기를 거부해 왔던, 그러면서도 보이지 않으면 괜스레 걱정이 되곤 하던 그녀. 도서관 뒤뜰 벤치에 앉아 봄볕 아래서 오래도록 꼭꼭 혼자서 밥을 씹던 그녀. 보건 교사 임용을 준비하는 그녀. 그런 그녀가 황보 씨의 맞은 편 빈자리에 앉았다. 새털처럼 많았던 지난날들 속에 같은 책상을 마주하지 못했던 것이 차라리 이상한 거였다.

황보 씨의 심장이 작게 동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이성이 이를 감금했고 매질을 가했다. 섣부른 감정은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임을 황보 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펼쳐진 책보다는 가까이서 그녀를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황보 씨의 시선이 여자의 길고 흰 손가락을 훔쳤다. 손톱에는 하얀 낯 달이 떴다. 이성의 빗장이 여지없이 풀리고 있었다.

그때, 황보 씨는 짧은 치마 속 깊은 곳, 창백한 여자의 허벅지 사이를 보게 되었다. 문득 떨어뜨린 펜을 집어 들기 위해 숙여진 고개로 살짝 벌려진 그곳은 뭔가를 내내 기다리는 쓸쓸한 시골 차부처럼 흐리고 어두웠다. 또한 폭풍과도 같은 세찬 비를 피해 숨어들어가야 할 피난처처럼 너무나 따뜻해 보이는, 그러나 다다를 수 없는 검은 장막이었다. 황보 씨의 한숨이 고통스러웠다. 관자놀이가 뻐근히 당겨졌고 무거워지는 중심이 강철처럼 서서히 달구어지며 불쑥불쑥, 쿵쾅쿵쾅 솟구쳐 오르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고 또 한편 너무나 대견했다. 하지만 황보 씨는 다시 책을 끌어당겨 시선을 텍스트에 고정시켰다.

「남애男兒 l 세상에 나 어려서 공맹孔孟의 글을 읽고, 자라 요순堯舜 같은 임금을 만나, 나면 장쉬將師 l되고 들면 정승이 되어, 비단 옷을 입고 옥대를 띠고 옥궐玉闕에 조회朝會하고, 눈에 고운 빛을 보고 귀에 좋은 소리를 듣고 은택恩澤이 백성이 미치고…….」

18종 해법문학 참고서 권2 구운몽 164페이지 ‘은택이 백성이 미치고’에서 황보 씨는 시선을 멈추었다. 난데없이 자신의 책갈피로 끼어든 여자의 연한 머리칼 한 올이 의식과 심장을 순간 멈추게 만들었다. ‘이건 뭔가’, 황보 씨는 고심했다. 여자의 깨끗한 이마와 이마 끝 잔머리 한 올 한 올, 그리고 곱고 부드럽게 늘어뜨린 풍성한 머리칼에 시선을 옮겼다. ‘이건 고문이자, 은택이다!’ 황보 씨는 탄식했다. 여자의 하얗고 긴 목덜미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땀과 함께 엉켜있었다. 쇄골 옆 살짝 드러나는 브래지어 끈과 그 끈 옆의 하얀 속살에 박힌 점 한 개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넘긴 교육학 하권 307페이지의 공기 파동에 밀려 날아들어 온 그녀의 머리칼 한 올은 무방비 상태의 몸을 내맡긴 허약하고 순종적인 여자인 듯, 황보 씨의 깊은 성욕의 골짜기로 찾아든 작고 예쁜 우렁각시였다. 황보 씨는 여자의 308페이지 ‘성교육에 있어서의 교사의 역할’부분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그녀의 대학노트 위 오른 손 펜의 회전력을 교차되는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보며 자신의 책장을 한 장 넘겨 여자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숨겼다. 황보 씨의 심장이 요동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잘 숨겼을까!’ 지속적으로 여자의 펜이 돌아가고 조심스럽게 올려진 책상 위 여자의 도톰하고 말랑해 보이는 젖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볼록볼록 얕은 자맥질로 황보 씨의 심장으로 끝없는 파동을 실어 보냈다. 황보 씨는 정말이지 자신의 그것을 사정없이 때려주고 싶었고 참혹하리만치 미웠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가두어두었던 자신의 정령을 맞은편,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그녀에게 시원하게 죄다 쏟아내고 싶었다. 급기야 황보 씨는 팽창의 끝점에서 꿈틀대는 아랫도리를 책상 아랫면에다 대고 비볐다. ‘이 놈의 성욕, 이 놈의 리비도. 제발 죽어라, 죽어. 공부 좀 하자. 제발, 좀.’ 이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42.195㎞의 마라토너처럼 ‘성교육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열중하고 있었고 황보 씨는 그녀의 텍스트 1항 「성의 문제에 대해서 자연스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를 탐독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벼야 한다. 내일의 보건 교사를 꿈꾸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2항 「성에 관한 지식과 태도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분명한 한계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현실의 한계. 나는 장가도 못 갔고 뒤지게 젊고 제 때 하지도 못하는 불쌍한 나의 처지, 나의 한계를 내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3항 「성교육에 있어서도 개인차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 강철판도 뚫을 수 있는 이 단단한 물건.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이 왕성한 리비도. 시도 때도 없이 주구장창 일어서는 이 망할 놈의 X.’

4항 「성문제에 관해서 교사 자신은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는 자세와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잘못하다간 책상에다 싸질러 버릴 지도 모르겠다. 국어교사를 꿈꾸는 나는 성인군자일 수…….’

그때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일그러진 황보 씨의 눈동자에 가서 꽂혔다. 누당에 겨우 걸친 빛바랜 황보 씨의 눈동자를 쳐다보는 여자의 눈이 맑고 깊었다. 그리고 붉고 선명한 입술이라니. 황보 씨는 벌떡 일어났다. 황보 씨의 중심에 불쑥 솟은 텐트. 그 바람에 거시기로 인해 책상이 밀렸고 오른쪽 자리 편입 공부하는 여드름이 무슨 일이냐며 황보 씨의 거시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황보 씨는 보던 책을 황급히 덥고 그것으로 아래 중요 부위를 가렸다. 그리고 열람실 책상들 사이로 뛰었다. 유리문을 밀치고 복도를 가로질러 화장실로 직행했다. 변기통을 올리고 바지를 내렸다. 하늘 향해 총신을 겨눈 황보 씨의 것이 곧 터질 것같이 붉고 컸다. 164페이지를 펴자 여자의 머리칼이 갈피 속 얌전히 누워있었다. 길고 여린 머리칼이었다. 황보 씨는 그것으로 총신을 감쌌다. 피가 흐르는 여자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여자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자신의 것을 어루만지며 뽀얗다 못해 하얀 여린 살이 비벼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 아래 심연에서부터 뭔가가 빠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고 곧 넘쳐흐르리라는 것을 알았다. 조급해진 황보 씨의 오른손이 수음의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왼손에 받쳐 든 18종 해법문학 참고서 164페이지, 지문 ‘라’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가서 머물렀다.

「공부에 세 가지 행실이 있으니 몸과 말씀과 뜻이라…….」 귀두 끝으로 탱탱하게 혈액이 고여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석교에서 여자를 만나 언어를 수작酬酌하고…….」 황보 씨는 곧 터져서 분출할 것 같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리고 ‘수작手作 하고, 수작手作 하고’를 되뇌며 더욱더 손목에 힘을 실었다.

「꽃을 던져 희롱한 후에 돌아와 미색美色을 권련眷戀하여…….」 이내 머리통 가득 수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것을 감지했다.

「불가의 적막함을 염히 여기니……」 여자의 머리칼이 살 속을 비집고 아프게 스며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나 안온한 평온이었고 너무나 따뜻한 체온이었다.

「일시에 무너 버림이라…….」 와르르 무너지는 둑의 환영이 보였다. 황보 씨는 하얀 좌변기의 공허한 샘 속으로 허망한 자신의 정령들을 죄다 쏘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올챙이 한 마리까지, 마치 연어 알을 쥐어 짜내듯 짜냈다. 그러면서 읽어 낸 164페이지 지문 ‘마’,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모든 유위有爲의 법은 꿈과 헛것,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금강경金剛經의 한 구절로, 모든 것은 헛되고 순간적이라는 뜻이다.」

갑자기 황보 씨는 자신의 종아리가 너무나 가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마病魔

‘그만 엎어져 자리에 눕고 싶다.’

제갈諸葛 씨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항문의 고통은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정수리 끝점을 향해 치달았다. 혼미한 정신으로 그냥 보내는 날들이 늘어가자 제갈 씨의 심장 역시 엄습하는 불안으로 또 조금씩 조금씩 뜯겨갔다.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하는 역도 선수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채 제갈 씨는 변기 위에서 가뿐 들숨을 몰아쉬며 비지땀을 흘렸다. 역도 선수와 차이점이 있다면 역도 선수는 앞으로 무거운 것을 들고 있지만 제갈 씨는 뒤가 항상 무거웠다. 사타구니를 타고 끈끈한 액체가 대퇴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불씨가 성성한 빨간 숯불 꼬챙이를 빠른 속도로 마구 항문에다 쑤셔 넣는 것 같았다.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를.’

제갈 씨는 절망했다.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었기에 절망했고 정말이지 너무나 슬퍼 하늘에다 대고 눈물 그렁, 충혈된 눈으로 쌍욕을 해댔다.

변을 볼 때마다 상승한 뇌압 때문에 끈끈한 뇌수가 그대로 변기에 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한 고통이 처음 찾아온 때는 막 여름이 시작되던 늦은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처음엔 그저 물 컵에 떨어진 잉크처럼 아련하게 퍼지는 가려움증이었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가지가지마다 몇몇의 단풍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던 9월의 끝자락 어느 날. 고통은 점점 커져 항문에서부터 뿌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흘러내릴 것 같은 창자를 괄약근으로 애써 조이며 왜 일찍 회개하고 기독교도가 되지 못했나 변기를 부여잡고 후회하기 일쑤였다. 이런 류의 고통이야말로 인간이 종교를 발명한 근본적인 이유일 거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항문에 집중된 고통은 단지 말초신경에 국한된 물리적인 고통이 다가 아니었다. 존재의 뿌리까지 흔드는 그 무엇에 비견할만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제갈 씨의 머릿속은 삼백만 년 전 밀림 나무 위로 올라갔다. 아침마다 한 시간씩 나무 위에서 대변을 보는 자신과 그런 자신의 뒷목덜미를 노리는 맹금류의 끼룩대는 소리. 내민 엉덩이를 항해 도처에서 한발 한발 다가오는 육식공룡의 발자국 소리로 제갈 씨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자, 저 자유의 땅으로.’

제갈 씨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바지춤을 추스르며 다시는 이런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허리끈을 바짝 조였다. 제갈 씨는 냉수 한 잔을 따라 차분히 들이킨 다음 지갑과 의료보험증을 챙긴 후, 문단속을 하고 배낭 가득 책을 싸서 집을 나왔다. 사거리의 은행으로 간 제갈 씨. 침착하게 ATM기에서 현금을 뽑아 가슴 깊은 곳에 찔러 넣고 맞은 편, ‘추 대장항문클리닉’과 ‘함 대장항문클리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온통 치질공화국이군.”

제갈 씨는 ‘추 대장항문클리닉’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원 건물 앞 조경수로 심어진 단풍나무 몇 개의 빨간 잎이 제갈 씨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는 듯 외롭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니 대변을 싸지르다 시뻘건 피를 항문에다 매단 채 땅속 깊이 거꾸로 머리를 처박고 있는 제갈 씨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카운터 접수를 마치자, 간호사가 다짜고짜 물었다.

“어디가 아파요?”

“그게 그러니까요. 뒤가…, 변기에다 피를 좍좍…, 그러니까 쏜다고 해야 하나?”

“일루 들어오세요.”

수술실은 생각보다 협소하고 단순했다.

“아랫도리 벗으시고요, 올라가세요. 아니 죄다 벗으세요. 팬티는 옷 아녜요?”

제갈 씨는 피와 변이 묻은 팬티를 손에 들고는 새 팬티를 챙겨 오지 못한 자신의 부주의함을 뉘우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리대라도 차고 올 것을…….’

제갈 씨는 진찰대에 거꾸로 누워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하고 많은 것 중에서 왜 하필 똥구멍이냐!’

낯이 팔려서 울었고 시험을 코앞에 둔 이 중요한 시기에 엉덩이를 까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서럽고 처량해서 또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을 때, 온기 없는 원장의 손길을 느껴졌다. 원장의 손놀림은 놀라웠다. 찌르고 넘어졌다 싶으면 베고, 베였다 싶으면 다시 찌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막 정글에서 사슴사냥을 하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튀어나온 전사처럼 일사천리로 수술은 진행되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제갈 씨는 생각하고 꿈꾸었다. 따사로운 봄이 오면 나는 교단에 서서 김지하의 ‘새봄’을 가르칠 것이다. 교정의 사철나무 숲으로 새가 울고, 수업 종소리가 봄볕과 함께 사뿐히 내려앉는 풍경 속,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모습을. 한 손에는 가느다란 회초리를, 한 손엔 중학교 1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를 들고 가볍게 교탁을 내리치고 솜털 보송한 애기들을 집중시킨 다음에 이렇게 구라를 칠 것이라고.

“선생님은 그러니까…, 힘들게 교단에 서게 됐다. 지금부터 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삼백만 년 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것이다. 인간이 정글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 이룬 눈부신 성과들 사이사이로 한줄기 까무룩 햇볕이 내려 왔고 그 햇볕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 존재의 거대한 뿌리에 엉겨 있는 숨겨 놓고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인류의 슬픔. 그 처절한 고통. 선생님은 그 고통을 이겨내고 이제야 너희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나무에서 내려온 지는 삼백만 년 전의 일이다. 몹쓸 병이 이 땅에 떠돈 지도 딱 그만큼이다. 선생님이 감내한 그 아픔. 병마와 함께 했던 시간. 이 선생님은 눈물로써 삼백 예순 날 울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어이! 거기 뒤에 귀걸이 한 놈. 졸면 뒤지는 수가 있다. 아울러 나는 폭력 교사다. 세상의 갖은 폭력을 이겨 내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 이 선생님이 겪은 모든 폭력을 너희들에게 죄다 되갚음 해 주겠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나로 인해 배우게 될 신성한 폭력으로 너희들이 세상 도처에 깔린 폭력을 절실히 깨닫고 또한 배우게 어 선생님을 본으로 삼아, 세상의 무자비한 폭력을 향해 너희들은 처절한 응징의 폭력을 감행하여 말소된 폭력의 세상을 너희들 손으로 만들고, 폭력은 폭력을 낳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폭력은 다시 폭력을 낳고…….”

원장의 손이 물러가자, 제갈 씨는 누 떼가 지나간 강의 바닥처럼 누더기가 된 그것을 아련하게만 느꼈다. 제갈 씨의 그곳은 이리저리 마구 기워졌으며 이리 패이고 저리 패였으며 그것은 늙은이의 오래된 입술처럼 볼품없었다. 다만 홍조만은 새색시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첫날밤의 신부처럼 원장이 다녀간 그곳으로 점점이 이는 고통이 까무룩 검은 밤, 안개처럼, 마취가 풀리며 무섭게 엄습해왔다.

원장을 대면한 것은 사냥이 끝나고 나서 이틀 뒤였다. 사냥 도중 밟혀 쓰러진 풀들은 제법 제 빛깔을 찾기 시작했으며, 물길은 제법 제 길을 찾았는지 사냥터는 예의 그 처량한 살풍경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었다. 쓰라림도 대체로 진정기에 접어들었다.

“만족하십니까? 퇴원 예정일은 이틀 뒤 월요일입니다.”

원장은 생각보다 허약하고 노쇠해 보였다. 인류를 몹쓸 병에서 구원해내는 전사. 제갈 씨를 지난 이틀 동안 병동에다 버려두고 정글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다녔을 원장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의 외모고 뭐고 간에 너무 고마워 눈물까지 ‘콱’ 쏟을 뻔 했다. 제갈 씨가 대답했다.

“훌륭했습니다!”

원장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제갈 씨는 잘려나간 뿌리 덕에 날이 갈수록 뒤가 허전함을 느꼈다. 간호사는 항문을 찾아 도는, 고기를 찾아 도는 재규어처럼 잰걸음으로 뛰어다니며 날마다 사냥터를 훑고 다니다 때가 되면 재갈 씨의 항문에다 무신경하게 좌약을 들이밀고 주사를 놓았다. 환자 수만큼 창밖 단풍나무 붉은 잎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시험에 대한 걱정 또한 활엽수림처럼 하나하나 그 잎을 더해가며 점점 무성해졌다.

제갈 씨는 화장실에 앉아 기도했다.

“인류를 나무에서 내려 보내지 마옵시고, 더불어 재발하지 마옵시고……. 나무들이 인류를 내치지 말게 하옵시고, 또한 재발만은 절대 안 되옵시고…….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사옵나이다. 제발 넉넉히 그 품으로 삼백만 년쯤만 더 안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바라옵나이다.”

제갈 씨가 퇴원 수속을 하던 날은 임용 시험을 이십 여일 앞 둔 시점이었다.


그리고 내일

검은 밤이었다. 고향집 뒷산, 사공(四共) 씨는 울었다. 콧물이 섞인 눈물이 입술로 묻어났다. 길게 토해내는 입김이 눈밭으로 가서 꽂혔다. 살아있는 게 이런 것일까. 눈 쌓인 땅은 차고 찼다. 엉거주춤 짚고 앉은 양손바닥으로, 무릎으로 축축한 물기가 올라왔다. 죽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른손바닥에 눌려 있는 초록색 개줄이 그렇게 말했다. 최소한 그는 죽어야한다고,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고, 개줄을 목에다 칭칭 감고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지금 당장 ‘콱’ 죽어버려야 한다고, 그래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나온 시절, 가끔씩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사공 씨는. 그러나 그것은 타인에게서 빚어진 자신의 연민과 동정이 다였다. 그 외의 눈물은 인정할 수 없고 인정되어서도 안 되는, 남자인 자신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억울했다. 사공 씨의 뜨거워진 눈시울로 또 눈물이 글썽이다 흘러 넘쳤다. 산 아래, 눈물 속에 비친 고향집 불빛이 눈물 속에서 흔들렸다.

울음의 시작은 가족 모두 둘러앉은 저녁시간, 라면에서 비롯되었다. 쉰 김치와 함께 푹 삶아진 라면이 밥상으로 건너올 때, 사공 씨의 어머니가 말했다.

“라면 묵어가 되겠나? 소고기국도 있는데…. 마, 소고기국 묵어라.”

젊어서 혼자가 된 큰누나가 밥을 푸다 말고 끼어들었다.

“마, 됐네요. 다 끓이가 김이 펄펄 나는데 우얄끼고.”

이때까지만 해도 사공 씨는 빙긋이 혼자 웃었다. 기분도 좋았고 꿈자리도 괜찮았다. 환한 미소의 부처님께 정성스레 세 번 절하는 꿈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잠자던 눈을 뜨면 포근히 밀려왔던 라면 냄새도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밤늦게 탄광 일을 나가곤 했다. 낮에는 남의 집 논을 갈아주고 밤에는 주섬주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깜깜하고 무서운 길을 걸어 탄광으로 향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몰래 숨겨둔 라면을 끓여주곤 했다. 아버지는 어린 사공 씨를 깨웠고 어김없이 라면을 덜어 주며 딱 한마디만 말했다.

“더 주까?”

사공 씨가 죽음을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는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잘 익은 면발에 젓가락을 꽂는 순간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리고 통화는 간단했다.

“……내 이름은?”

몸 속 흐르는 피가 죄다 말라버린 느낌이었다. 사공 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방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딱딱하게 굳은 아들을 보며 아버지가 딱 한마디만 말했다.

“떨어졌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공 씨는 젓가락으로 면발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맨 먼저 사공 씨의 어머니가 울었다. 엄밀히 말해서 젓가락으로 라면을 떠 입으로 가져가기 직전, 사공 씨의 눈시울은 붉어지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발을 코앞에 두고 이걸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사공 씨는 이내 긴 한숨과 함께 고개가 숙여졌고,

“그 시험이 그래 힘드나?”

아버지의 말에 이내 눈물이 벌컥 쏟아졌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는데, 억지로 참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큰누나도 따라 울자 사공 씨도 갑자기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 꼴을 보던 아버지는 뒤돌아 벽을 보고 한숨을 길게 쉬다 눈시울을 훔쳤다.

영하로 내려간 기온, 바람이 불고 사공 씨는 눈물을 닦았다.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어온 자신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이제 어디에다 발자국을 찍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손에 들린 개줄을 보자 다시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산언덕 아래 세상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생경한 어둠 속에서 잠든 듯 고요했다. 그리고 그 어둠 저편에는 수많은 총구가 자신을 향해 조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공 씨는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었다.

사공 씨가 총을 빼 들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자 여기저기에서 총성이 울렸다.



김석렬∙경북 경주 출생.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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