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7호(2010년/봄) 신작단편/서커스를 찾아서/손보미
페이지 정보

본문
서커스를 찾아서
손보미
“서커스에서 공연을 하는 그 아이들 몸이 얼마나 유연한지 알고 있소? 두 다리를 양쪽으로 쫙 벌리고 가슴을 땅에 딱 붙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그런 자세로 밥을 먹으라고 해도, 먹었을 거요. 마치 올림픽에 나오는 체조 선수들마냥 몸 위에서 공을 떨어뜨리지도 않고 잘도 굴렸지. 하루종일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소. 평균대보다 더 좁은 막대기 위에서 걷고, 뛰고, 돌고, 그뿐만 아니라, 공중제비를 몇 바퀴나 돌았다우.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했지, 저 아이들이 올림픽에 나가면 금메달을 따고도 남았을 거라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어요?”
나는 물론, 그가 나에게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어릴 적, 딱 한번 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쇼를 봤을 때,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 아이들은 특별했다. 딱 붙는 타이즈를 입고, 엎드린 채로 이마와 양 손 위에 촛대를 올려놓고 상체를 뒤로 쭈욱 젖힌다. 그것도 모자라서 한 쪽 발이 거의 이마에 닿을 때까지 다리를 젖힌다. 한 아이가 엎드리면 그 위에 몸을 네모지게 만든 아이들이 차곡차곡 올라가 탑을 쌓는다. 그 애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체조 선수들보다 훨씬 예쁘고 몸도 잘 구부러뜨리고 뜀뛰기도 잘 하는데, 왜 올림픽에 나가지 않는 걸까. 열심히 연습을 시키면 그 노랑머리 여자들보다 훨씬 더 근사한 모습을 보여줄 텐데. 금메달은 따고도 남을 텐데.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그 애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아이들의 기예쇼를 보여주던 서커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물론, 내가 섬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소설은 완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이야기들을 듣지 못했다면 이 소설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건 그냥, 나의 행복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 이건 내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지.
그리고, 쑥스럽지만, 이걸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건 너를 위한 이야기야. 너만을 위한, 소설.
“그럼, 행복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써 봐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그 때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란히 손잡이에 몸을 맡긴 채, 함께 덜컹거리고 있었다. 전날까지 눈이 무척 많이 내린 탓인지, 눈이 그쳤는데도 버스 안에서는 여전히 눈냄새가 났다. 그녀의 진지한 말투 때문에 그는 죄책감을 느꼈고, 뭔가 대꾸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행복한 시절?”
“응, 오빠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때요? 그럼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도 같은데.”
“내 이야기들이 그렇게 구질구질했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요. 오빠가 해줬던 이야기는 사람들이 싸우고, 죽고, 우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으니까.”
당연하지. 그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줬을 리가 없다. 그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을 뿐인데. 그는 한 번도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한, 그저 평범한 수학과 예비역일 뿐이었다. 자기 돈 주고 소설책을 사서 읽은 적이 없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돈 주고 소설책을 사 읽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 선물로 준 여러 권의 소설책들, 그는 그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문학소녀였다. 고등학교 때는 시를 썼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재능은 없는 것 같다고, 그들이 처음 만난 날, 무슨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는 순전히 그녀를 꼬시려고 소설을 쓴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의 친구들이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그를 비난했을 때, 그는 엄밀하게 말하면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대꾸하곤 했다. “난 그저 그녀에게 너의 마음을 이해해, 라고 말했을 뿐이라구.” 그녀는 그의 말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했다. 그녀는 그가 시나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빠도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는 차마,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대충 소설을 쓰고 싶다고 둘러댔다. “난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그의 잘못이 있다면 그 뒤에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는 것뿐이었다. “실은 아직도 가끔 소설을 써.”
그의 거짓말 아닌 거짓말은 놀랍게도 그들이 사귄 일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도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요즘 무슨 내용의 소설을 써요?”라고 물어보면 그는 즉석에서 이야기를 대충 만들어냈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오빠는 소설 쓰는 재능이 없어서 안 되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가엾게도, 헤어진 지 일 년 만에 우연히 만난 그녀는 여전히 그가 소설을 쓰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정말이지 가엾게도. 사실 그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예전 남자친구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도 뭔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마냥 지낸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미안, 화났어요?”
“아니, 내가 미안하다.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어서.”
원래 그는 그런 식으로 비꼬듯이 말하는 성격은 아닌데, 말을 하면 할수록 그런 식으로 말이 나왔다.
“어머나, 행복했던 적이 왜 없어요? 우리가 사귈 때 행복하지 않았어요?”
앞에 앉아있는 교복 입은 여자애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슬쩍 그들 쪽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하다. 난 별로.”
교복 입은 여자애가 와, 이 아저씨 장난 아니시네, 완전 재수 뽕이네, 하는 표정을 짓는다. 정작 그녀는 풋, 하고 웃었다.
“아닌가? 우리가 사귈 때 오빠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차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손잡이를 놓쳤는지 그녀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고 한 건데, 그의 손은 그녀의 왼쪽 젖가슴으로 가 있었다. 그는 얼른 손을 땠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 후로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들이 지나가고, 곧, 그녀가 내릴 정류장이 되었다. 그녀가 가방을 뒤지더니 혼잣말을 했다. 어머, 장갑을 두고 왔네. 가방을 뒤지는 걸 그만두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관둔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등단하면 알려줘야 해요.”
그는, 그러면 나는 평생 너에게 연락할 일이 없을 거다, 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가 창밖에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복 입은 여자애가 등신, 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맞다. 내가 등신이지. 내가 등신이다.
그럼, 행복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써 봐요. 이상하지, 너의 그 한마디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 사실은 정말 멋있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다른 멋진 소설들을 찾아서 읽어봤지만, (아마 다시는 이렇게 많은 양의 소설을 읽을 일이 없겠지.) 그리고 여러 번 다른 문장들로 시작해보았지만, 결국은 너의 말로 되돌아와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 소설의 시작은 너의 말이어야만 할 것 같았어. 소설? 아니다. 나는 항상 너에게 거짓말만 했으니까, 이번에는 너에게 진짜 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진짜 이야기.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건 너만을 위한 내 첫 번째 이야기인 셈이지.
이봐, 읽고 있어? 이건 너를 위한 이야기인데.
일주일 후 쯤, 그는 남쪽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 있었다.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때로는 눈이 흩날리는 게 보였고, 때로는 맑은 하늘이 보였고, 또 때로는 눈이 녹지 않은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후, 터미널을 빠져 나온 그는 택시를 탔다. 여객선 터미널에 가자고 하자, 택시기사가 그를 빤히 쳐다본다. “이 추운 겨울에 배는 왜 타려고요?” 그가 섬에 가려고 한다고 대답하자, 기사는 백미러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이 추운 날씨에 거기는 뭣 하러 겁니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반문해보았다. 왜?
그의 부모님은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남쪽의 가난하고 작은 도시에 그를 데려다 주었다. 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그의 부모님이 그를 데리러 오기 전까지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일 년에 몇 번씩 어머니, 아버지, 누나가 그를 보러왔다. 그 시절에 관련된 사진이 한 장 있다. 그의 가족이 잔디밭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다. 부모님의 오른쪽에는 그가, 왼쪽에는 누나가 있다.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있고, 원피스를 입은 그의 누나는 두 다리를 가로 뉘여 포개고 앉아있는데, 그 사이로 팬티가 약간 보인다. 당시에 그가 여덟 살, 그의 누나가 열한 살이었는데, 이 사진을 보자마자 그녀는 사진에 자기 팬티가 나왔다며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사진을 폐기해야 한다고 엄숙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재작년에 혈액암으로 죽었다. 죽기 직전에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그는 그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다. 어쩌면 그에게 한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다른 사진도 있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그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 옆에는 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있다. 긴 콧수염이 양끝으로 말려 올라가 있고, 쌍꺼풀이 아주 짙다. 어쩌면 한국인이 아닌지도 모른다. 다른 손에는 영국신사들이 쓸법한, 운두가 높은 모자가 들려 있다. 상체는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다. 서양식 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그는 섬에서 콧수염이 양끝으로 말려 올라간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남자를 보자마자, 사진속의 남자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남자의 얼굴에서 그 동안의 세월이 서서히 사라져갔고, 사진속의 얼굴이 되살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섬으로 간 건 그 남자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남자의 마술쇼가 있었던 서커스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래, 그는 서커스를 찾으러 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살았던 그 작은 도시에서, 삼십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작은 섬이 있었다. 작은 섬은 전체가 유원지였다. 놀이공원과 동물원, 식물원이 섬 안에 모두 있었다. 작은 도시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은 유원지에 데려가 달라고 매일 저녁 밥상 앞에서 징징거리다가 고단한 엄마에게 한 대씩 얻어맞곤 했다. 유원지에 있는 동물원을 구경하는 일이나, 놀이기구를 타는 건, 서커스를 보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어려운 일이었다. 서커스는 일주일에 이틀, 하루에 두 번밖에 공연 하지 않았다. 게다가 놀이기구 세 개를 포기해야만, 서커스를 한 번 볼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린 마음에도 서커스에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커스를 보고 온 아이들은 차마 그 광경을 설명하지 못했다. 서커스를 봤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가도, 자기도 모르게 다시 서커스를 보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일단 자신의 눈앞에 다시 그 광경이 펼쳐지면, 그 속에 빠져들어서 결국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 역시 그랬다. 아니, 그는 더 심했다. 몇 번이나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 상황을 설명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는, 너거들하고는 완전 수준이 다르다……. 마술사님이 내보고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했단 말이다.” 그가 서커스를 구경하러 간 날, 마술사는 그에게 정중하게 무대 위로 올라올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어린 그에게 통속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만화에 나오는 해적선에 있던, 양 볼이 볼록한 나무통이었다. 그는 그 안에 들어갔다. 마술사는 위엄 있는 얼굴로 통 주위를 돌아가며 긴 칼을 꽂아 넣었다. 쉭, 쉭, 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눈앞에 별이 반짝 반짝거렸다. 울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고,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와,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섞인 탄성들. 그 아이들 중 누군가 질문을 한다. “뭘 했노?” 어린 시절의 그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 “통 속에 들어갔다.” 이어지는 질문 “통 속에서 뭘 했는데?” 하지만 설명은 항상 거기서 멈추었다. 그는 통속에서 무얼 했나. 어린 그는 거기까지 설명하고 나면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게 느껴졌다. 오줌이 마려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들은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야가 와 이러노. 말을 해봐라.” 아이들이 우루루 그를 닦달한다. 그는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게 느껴진다. 그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이것뿐이었다. “너거들 중에 그 통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 있나?”
그래, 그는 서커스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서커스를 찾아서’. 이게 그가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리고 있던 문장이었다. 그녀를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날 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잠들지 못했다.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벌떡 침대에서 빠져나와 그는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검색 창에다가 그 섬의 이름을 쳤다. 섬의 이름을 치자, 화면 상단에 유원지 홈페이지 주소가 나왔다. 오, 있다 있어. 그는 질문 게시판에다 이런 글을 올렸다. “서커스 공연을 아직도 하는지 궁금해요.” 마음이 흡족해진 그는 컴퓨터를 끄고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삼십분쯤 후에, 그는 다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컴퓨터를 켰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신의 질문을 삭제했다. 담배 한 대를 핀 후, 다시 글을 남겼다. “어릴 적 서커스 공연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도 합니까?” 확인버튼을 클릭하기 전에 그는 몇 번이나 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좀 도전적인가? 아니면 너무 만만해보이나?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별 시답지도 않은 문장을 만들려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초조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꼴이란!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뭔가를 썼다가, 지웠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완성된 문장은 이랬다. “십칠 년 전에 그곳에서 서커스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서커스 공연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다가 덧붙였다. “정말 궁금합니다.”
오빠가 언제부터 그렇게 작은 일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었냐고. 조금만 더 신경써달라는 니 말에 버럭 화부터 내지 않았느냐고, 아마 어이없다는 듯이 웃을지도 모르겠다. 왜 너를 사귈 때는 그토록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원지로 향하는 여객선 안, 난간에 기대어 탁한 빛깔의 바닷물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 그 시절의 어머니, 아버지, 누나, 그리고 너. 가장 많이 떠오른 건, 너의 우는 얼굴.
정말 궁금합니다, 까지 덧붙여보았지만, 삼일이 지나도, 그의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난 돈은 별로 없지만,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직접 가보는 것도 좋겠어.” 섬으로 향하는 여객선의 승객이 자신을 포함해 딱 일곱 명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유원지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야.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을 리가 없어. 게다가 얼마나 좋은 징조야, 행운의 숫자 7이라니!” 그 중에 일행이 없는 사람은 자신뿐이었지만, 여자 둘 남자 둘로 이루어진, 일행처럼 보이는 네 사람이 그를 힐끔거렸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난 지금 서커스를 찾으러 가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괜찮았다. 더 이상 그가 괜찮지 않았단 건, 섬에 도착한 후부터였다. 여하튼,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아무런 환영인사도 없는 괴괴한 선착장을 지나, 행운의 숫자를 상징하는 일곱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삐걱거리는 다리를 건너 (그는 그 때 이런 생각을 했다 : 예전엔 이렇게 삐걱거리지 않았는데, 엄청 볼 품 없어졌구만.) 유원지 입구에 도착했다. 유원지 안쪽도 상당히 조용했다. 놀이기구가 끼익, 위험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몇 명 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즐거운 함성도, 두려움에 떠는 비명도 없었다. 그저 끼익, 끼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뿐. 더 나빴던 건, 지금껏 그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던 것에 비해 유원지 안내원은 필요이상으로 냉정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 그의 생각이다. 유원지 안내원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다만, 이 유원지를 떠나 다른 직업을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약간 무기력 해진 것뿐이다. 안내원은 어쨌든 이곳을 방문한 손님이 다시 방문할 것을 기대하면서, 될 수 있으면 친절한 인상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안내원은 서울말이 섞인 말투로 약간 높은 톤으로 말했다. “고객님,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이 유원지에서는 서커스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그 말을 듣고 바로 여객선을 타고 육지로 돌아가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다면 어땠을까?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후에 그가 들은 이야기는, 그가 원한 것이 아니므로.
그는 조금 비장한 마음으로 유원지 입구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겨울바람이 꽤 차가웠지만, 다리에 힘이 빠져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저 멀리서 공중관람차가 돌아가는 게 보였지만, 아무런 흥이 나지 않았다. 그건 그의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유원지 전체에는 아무런 흥이 없었다. 그가 담배를 꺼내 물며, 유원지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그 아주 짧은 순간, 조금 과장하는 게 허용된다면, 영점 오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유원지 입구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 그래, 돌진, 이라는 단어 외에 어떻게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것을 보게 된다. 남자는 기묘한 어투(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중국인이었다.)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담배 한 대만 빌리겠소.”
근데 웃기게도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난 예전에 읽었던 어떤 만화책을 떠올렸어. 후루야 미노루라는 일본의 만화가의 작품인데, 거기엔 이런 대사가 나와. ‘너의 인생을 리셋할 수 있는 버튼이 있다면 너는 그걸 누를 거니?’ 내가 리셋버튼을 누르고 싶을까, 그렇지 않을까.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는 잘 몰랐어. 내가 그 버튼을 누를 것인지, 누르지 않을 것인지. 그런데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왠지 그 대답을 찾은 것 같아. 너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니?
남자의 얼굴은 주름으로 쭈글거렸고, 짙던 쌍꺼풀도 사라지고, 피부가 탄력을 잃은 탓에 눈꺼풀이 눈을 반이나 덮어버렸지만, 그의 콧수염만은, 마치 그동안 흘러간 세월에 도전이라도 하려는 듯, 양끝으로 탱탱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마술사다. 남자는 분명히 마술사였다.
“마술사님!”
담배를 입에 물던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깊게 빤 후, 연기를 후 불었다. 처음에는 도넛모양의 연기가, 그 다음에는 동그라미 모양의 연기가, 그 다음에는 삼각형의 모양의 연기가, 그 다음에는 코끼리 모양의 연기(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 맹세하건데, 그건 진짜 코끼리 모양이었어.)가 그의 입에서 퐁퐁퐁 흘러나왔다.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남자가 말했다.
“난 마술사가 아니오.”
남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담배를 한 대 더 주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서커스에서 본 적이 있어요. 딱 한 번 이었지만, 사진도 있는걸요.”
그는 사진을 가지고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내 말은, 난 더 이상 마술사가 아니란 말이오. 굳이 말하자면, 전직 마술사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거 하지 않아요”
“혹시 저 기억하세요?”
그는 그게 멍청한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직 마술사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전 그 나무통 속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요. 거기에 칼을 막 집어넣으셨는데.”
어쩐지 그는 계속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 전직 마술사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다가 결단력 있는 어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네?”
“난 마술을 할 때, 일반인을 도우미로 쓰지 않거든.”
“그럴 리가요…….”
“그렇소, 분명히 그렇소.”
전직 마술사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그의 말을 잘랐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마술사를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기뻤으니까.
“이제 서커스는 없습니까?”
“없소.”
“서커스를 보러왔소?”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년 만에?”
“십칠 년 만에.”
“운이 없구만.”
마술을 그만 둔 남자와 자신의 행복한 시절을 찾아서 십칠 년 만에 섬을 찾아온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없이 담배를 뻐끔뻐끔 빨면서 벤치에 앉아있었다. 전직 마술사가 입을 연 건, 공중 관람차가 세 번째 운행을 마치고 네 번째 운행을 막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서커스는 십년 전에 없어졌소. 이렇게 서커스를 다시 찾아온 사람은 처음 보는구만. 난 아무도 그 서커스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도 그 서커스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소. 하지만 난 이곳을 떠나지도 못했지. 모두들 떠났지만, 난 왠지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근데, 그건 아마도 당신을 만나서 서커스의 마지막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였나 봐요.”
그는 전직 마술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양끝으로 말려 올라간 콧수염이 움찔움찔 거리는 게 보였다. 그에게는 그것이 왠지 측은해보였다.
“십년 전부터 이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지. 백화점이 생기고, 패스트푸드점도 생겨나고, 노래방이니, 게임방이니, 커다란 영화관도 새로 지어졌는데, 사람들이 굳이 배를 타고 이곳까지 들어와 저런 삐걱거리는, 금방이라도 사고가 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놀이기구를 타거나, 다 쓰러져가는 천막 안에서 추위와 더위를 참아가며 서커스를 구경할 필요가 뭐가 있겠소? 하지만 우리들은 마지막까지 서커스를 지키려고 노력했다우. 앵무새나 문조를 훈련시키는 걸 한 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소. 원숭이와 코끼리를 지키려고 우리가 했던 노력을 당신은 결코 알 수 없을 거요. 서커스에서 줄을 타고, 인간 탑을 만들고, 접시를 돌리기를 하던 아이들을 떠올려보면 알거요. 그 아이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건 하루 이틀 연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오. 우리는 작은 도시의 이름 없는 서커스단이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정말 뛰어난 아이들이었지. 올림픽에 나가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지.”
그들은 서커스를 지키려고 애썼다. 서커스의 단장은 풍채 좋고, 마음씨 좋은 남자였다. 단장의 아내는 공중 그네를 타던 여자였다. 은퇴한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몸이 아주 날씬했고, 상냥했으며, 우아한 여자였다. 그들은 사이가 좋았고, 함께 서커스를 지키기 위해 고민했다. 힘들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커스단을 사랑했다. 서커스단은 단장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었다. 삼십년 전, 그러니까 단장이 열 살 때, 단장의 아버지는 서커스단을 꾸려 중국에서 이곳으로 왔다. 그때는 단원만 삼십 명이었고, 호랑이, 코끼리, 침팬지, 원숭이, 문조, 앵무새, 비둘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단장은 어릴 적부터 서커스를 보며 자라왔고, 그게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결국 유원지 측에서 서커스가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어떤 해에는 일 년 동안 온 손님을 다 합해봐야 백 명이 되지 않기도 했다. 어떤 해에는 먹을 게 없었다. 줄과 공중그네를 타는 단원들이 넷, 코끼리 조련사와 원숭이 조련사가 각각 하나, 인간 탑을 쌓거나, 몸을 이용하려 기예를 보여주는 어린 소녀들이 셋. 그들은 음식을 아껴서 조심스럽게 먹었다. 어린 소녀들은 영양실조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질 지경이었다. 또 어떤 해에는 난방을 할 돈이 없어서 얼어 죽기 일보직전인 코끼리를 중국으로 보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코끼리 조련사는 삼일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같은 방을 쓰던 공중그네 타는 남자는 삼일동안 원숭이 조련사와 줄 타는 남자의 방에서 끼어 자야만 했다. 코끼리 조련사는 울면서 말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한 일은 저 코끼리와 함께 쇼를 한 거예요. 이제 나는 무얼 하란 말이죠?”
어느 날,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줄 타는 남자가 단장을 향해 소리쳤다. “단장님, 손님들이 와요!.” 유원지 측에서 도道의 높은 사람에게 돈을 쥐어주었고, 그해부터 유원지에서는 몇 가지 지방축제를 맡아서 운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유원지를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이다. 서커스 단원들은 기대에 차서 의욕적으로 쇼를 준비했다. 기예를 보여주는 어린소녀들은 머리를 예쁘게 묶고 붉은색 새가 그려진 타이즈를 신었다. 낡아서 구멍이 날 지경이었지만, 소녀들은 오랜만에 모여서 까르르 웃었다. 줄 타는 남자들은 공중 그네의 줄이 튼튼한지 점검했고, 여자들은 구석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들은 접시와 줄, 부채 등의 여러 가지 소품들을 챙겼다. 마술사는 마술에 필요한 카드와,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나무통, 비둘기, 길게 엮은 손수건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정장을 입었다. 목에는 나비넥타이를 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면서 빗으로 자신의 콧수염을 정성스럽게 빗었다. “난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그래서 콧수염을 매일 손질한 거야.” 그는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사했다. 코끼리 조련사는 원숭이 우리에 가서 원숭이에게 옷을 입혔다. 원숭이 조련사는 몇 달 전 서커스단을 떠났다. 원숭이 조련사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원숭이 조련사가 사라진 걸 가장 슬퍼했던 건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중 한명은 훌쩍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조련사님은 정말 잘 생겼잖아요. 난 그 분을 사랑했었는데.” 여하튼 원숭이 조련사를 뺀 그들은 낡은 천막을 실과 바늘, 테이프로 수선했고, 색색깔의 종이꽃도 만들었다. 하지만, 서커스를 구경 온 아이들은 손으로 코를 막고, 합창하듯 말했다. “이게 무슨 냄새지?” 그건 원숭이의 배설물 냄새였다. 조련사가 바뀐 탓에 스트레스를 받은 원숭이가 반항하느라고 아무데나 똥을 싸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숭이 조련사가 될 뻔한 코끼리 조련사는 이번에도 삼일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숭이를 조련하지 못해서 모든 걸 망쳐버렸어.” 하지만, 원숭이 조련사가 될 뻔한 코끼리 조련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서커스가 망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이제 아이들은 서커스를 재미있어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서커스는 이제 너무 시시했다.
그 후로 서커스단원들은 모두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 전보다 딱히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제 서커스가 소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먼저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그들은 매일 마치 곧 서커스가 시작되기라도 할 것처럼 무대의상을 입고, 무대를 치우고, 자신들의 소품들을 준비했다. 단장은 그런 단원들을 보며, 웃었다.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말했다. 단장은 그의 아내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단장의 아내는 그만 서커스를 철수하자고 말했다. 단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장은 이전보다 더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서커스 단원들을 연습시키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관객이 한 명도 없는 무대에서 공연을 하라고 단원들을 닦달했다. 언젠가는 새벽에는 자고 있던 단원들을 모두 깨워,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 단장은 예전, 아주 예전에 서커스가 잘 나가던 시절, 호랑이를 조련시키는 채찍을 들고 가끔 단원들을 후려치기도 했다. 단장의 아름다운 아내는 단장에게 애원하거나, 화를 내거나, 울었다. 아름답고 기품 있던 단장의 아내는 점점 말라갔고, 신경질적이 되어갔다. 단장이 그의 아내를 때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단장이 미쳤다고도 했다. 기예를 하던 소녀들 중 한명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님이 밤마다 숲으로 들어가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어요.”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그런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세 명으로 늘어났다. 모두들 단장의 아내가 제일 먼저 이 서커스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술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밤, 단장님의 아내가 나를 불렀소.”
“왜죠?”
“의논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
“무슨 의논이요?”
마술사가 단장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옆에서 쪼그린 채 자고 있는 단장이었다. 술냄새가 진동했다. 매일 밤마다 숲으로 가서 울부짖는다는 말은 역시 그냥 소문이었군, 그때, 단장의 아내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당신이지?”
마술사는 그녀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운동으로 다져진 그녀의 단단한 팔근육이 느껴졌고, 그의 배 부근에 날카로운 쇠의 느낌이 전해졌다. 칼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당신이야, 그렇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칼을 쥔 그녀의 팔을 잡으면서 물었다.
“저이가 밤마다 숲으로 가는 사실을 가지고 단원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댄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모를 줄 알았던 거야? 난 다 봤어, 난 다 봤다구.”
단장의 아내는 그를 밀어부치며 말했다.
“이것 좀 놔요, 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구요.”
“숲에서 둘이 만나는 걸 봤어. 어두워서 얼굴을 잘 보지는 못했지만, 난 당신의 콧수염을 봤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도대체 언제부터였어?”
마술사는 단장의 아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전히 몰랐다. 그는 있는 힘껏 그녀를 밀어냈고, 그녀는 넘어졌다. 그 바람에 칼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술사는 그녀가 다시 자신의 멱살을 잡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더러운 놈들. 저이는 매일매일 밤이 되면 숲에 간다구. 그런데 오늘은 가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 역시 여기에 있지. 더러운 놈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땀으로 번질번질해진 얼굴을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미쳤군요.”
그가 말했다.
“미쳤어.”
마술사는 그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날 밤, 서커스는 없어졌소.”
“네?”
“불이 났어. 불이 나서 모든 게 사라졌어. 다행히 단원들은 피신했지만, 단장과 단장의 아내는 불길을 미처 피하지 못했어. 나중에 시체를 찾았는데, 단장의 아내와 단장은 꼭 껴안고 있었다 하더군.”
전직 마술사는 그에게 담배 한 대를 더 받은 후, 이렇게 덧붙였다. “이 얘기를 한 건 처음이오. 아마, 그리고 마지막이 될 것 같소. 이제는 나도 여기를 떠나야 할 것 같소. 왜인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 같소.” 그는 문득 손이 시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는 홀로 ‘반달가슴곰’ 우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게 ‘반달가슴곰’ 우리라는 사실을 그가 안 건, “반달가슴곰-식육목食肉目 곰과의 포유류 어쩌고 저쩌고” 라고 적힌 표지판 덕분이었다. 표지판이 없었으면 아마, 그게 곰의 우리라는 사실도 그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었을 거다. 그는 몰랐겠지만, 실제로 그가 그 섬을 떠난 후에도 곰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몰랐던 그는,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어깨를 움츠린 채, 텅 빈 우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반달가슴곰이 나오겠지.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지. 뭐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는 서커스를 찾지 못했다. 아니,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서커스를 잃어버렸다. 이제 그가 보았던 그 신기하고, 즐겁고,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들던 서커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그 서커스의 괴상망측한 끝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 되었다. 그토록 모두들 잊어버리고 싶어할만한 이야기 하나를 가슴속에 품게 된 것이다.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실, 그 때 그는, 버스에서 보았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약간 걱정스런 얼굴, 창밖에서 자신을 향해 그토록 손을 흔들던 모습, 장갑도 없이 손이 시렸을 텐데. 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마지막에 그녀를 향해 자신이 했어야 하는 말을 깨달았다.
이게 이 이야기의 끝이야. 그 후로 나는 서울로 돌아왔고, 또 몇 년을 어영부영하면서 지냈어. 그리고 이제야 나는 이 소설을 쓰고 있다. 너를 위해. 순전히 너를 위해. 그 시절, 내가 서커스를 보았던 그 시절, 서커스의 아이들은 정말 굉장했어. 올림픽에 나가도 될 만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는 그때 아이였을 뿐이지만, 그건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일뿐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서커스는 서커스고, 올림픽은 올림픽이다. 서커스의 세계는 낡은 장막과 지저분한 콘크리트 무대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 올림픽의 세계는 휘황찬란한 불빛과 엄청난 돈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걸 왠지 모두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난 이런 얘기를 하려고 이 소설을 쓴 건 아니야. 단지 나는 행복한 시절을 찾으려고 했던 내 이야기를 너에게 해 주고 싶었어. 그리고, 결국 난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알게 된 것 같아. 그래, 이제 정말 알 것 같아.
손보미∙≪21세기 문학≫ 2009년 여름호로 등단, 경희대학교 강사.
추천4
- 이전글37호(2010년/봄) 특별기고/하종오 시인의 연작시/가족사 10.08.18
- 다음글37호(2010년/봄) 신작단편/내일을 향해 쏴라/김석렬 10.08.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