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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특별기고/하종오 시인의 연작시/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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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66회 작성일 10-08-1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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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가족사’ 연작시에 대한 잡생각


여러 시대와 사회의 뒤편에는 가족사가 숨어 있다. 전면에 나서서 선악을 행한 자나, 후면에 밀려나서 소외와 질곡으로 버틴 자나 모두 그런 일생의 갈피마다 가족사를 숨겨두고 있다. 그 가족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는 대를 이어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시대와 사회에서 한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를 진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여러 정서와 감정의 뒤편에도 가족사가 숨어 있다. 동일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각 개인이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도 가족사에서 얻은 체험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과 아무리 친밀한 관계를 맺어도 끝내 알 수 없는 영역인 가족사를 접어두고서는 한 인간과 진정하게 교감할 수 없다.
전체의 정신을 외면하고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시들의 시절에, 한편으로는 유의미하고 찬란하고 기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곤혹스럽고 실망스럽고 난처한 수많은 시인들의 시절에 나의 ‘가족사’ 연작시는 여러 시대와 사회의 뒤편에서, 그리고 여러 정서와 감정의 뒤편에서 벌어졌던 벌어지고 있는 벌어질 사건과 상황을 찾아서 성찰함으로써 다른 생들의 시의 세계를 보기 위해 씌어졌다.

2010년 2월 하종오






배반의 가족사 외 10편


한평생 농사짓던 아버지는 
도시로 나가 공부 많이 한 아들이
산천경개나 구경하며 살기를 바랐는데 
아들은 식량 주권을 주장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유기농을 하다가 망했다  

그 아들이 장가가서 사내아이를 낳고는
농사나 지으며 밥 먹고 살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사내아이도 자라서 
공장으로 들어가더니
다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평생 곡기 챙기는 안살림이 싫었던 어머니는  
여린 딸이 선보고 시집간  
도시에서 옷 잘 입고 살기를 바랐는데
딸은 장사에 실패한 남편에게 매 맞다가   
고향으로 도망쳐와 남의 논밭에 품 팔러 다녔다

그 딸은 낳아서 품고 온 계집아이를 키우며 
고향에서 함께 살기를 바랐으나 
계집아이는 자라서  
대처로 나가 유흥가를 떠돌아다니더니 
다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방문房門의 가족사 


추수철이 끝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각자 문설주에서 방문을 떼어내 
마당가 감나무에 기대놓고
헌 문종이를 뜯어낸 뒤
유리조각을 건네주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각자 눈높이에 대고는 
새 문종이를 붙여서 말렸다 

다시 방문을 갖다 돌쩌귀에 끼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농한기가 와서 바깥을 나다니는 동안 
할머니와 어머니는 
각자 유리조각에 한눈을 대고 내다보았는데 
그때 곁에서 놀던 나는 너무 어려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긴 겨울 너무 심심한 나머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귀가하기를 기다리는 줄로 알았다

내가 바깥일에 무덤덤한 어머니 나이를 지나고
안일에 무덤덤한 할머니 나이에 접어들어서야
식구들이 외출한 날이면
혼자 적막한 다가구주택 맨 위층
방문을 여닫다가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까치 한 마리가 가지 끝에 날아와서 

홍시를 몇 개나 파먹는지 헤아려보려 했었고.  
할머니는 감이파리 한 잎이 흙바닥을 뒹굴면서  
소리를 몇 가지나 내는지 들어보려 했었고. 







취침과 기침의 가족사


아버지가 안방에서 잠들면
소는 외양간에서 잠들었고
닭은 닭장에서 잠들었고
개는 마루 밑에서 잠들었고
나는 덩달아 잠들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서 보면
소는 여물을 되새김질하고 있었고 
닭은 모이를 쪼러 다니고 있었고
개는 개밥그릇을 핥고 있었고
아버지는 입가심을 하고 있었다 
곡식을 키우고 돌보던 농부였기에
잠기도 퍼뜨리고 거두었던가

내가 아버지가 된 후론 
안방에서 잠들어도 
관상수는 거실에서 부스럭거렸고
그릇은 찬장에서 달그락거렸고
쌀은 쌀통에서 버석거렸고
어린 자식은 덩달아 뒤척거렸다

내가 깨어나서 보면
관상수는 잎들이 푸르러져 있었고
그릇은 식탁에서 깨끗해져 있었고 
쌀은 밥솥에서 뜸 들어 있었고

자식은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혼자 떠돌아다니던 백수였기에
잠동무도 사귀지 못했던가







국수의 가족사


어린 남편과 얼굴 마주 못보고 
부모님이 정한 집으로 시집온 
시할머니가 며느리였을 적엔 
끼니거리 없어 
늘 밀국수를 끓여 상 차리며 
한숨 포옥 쉬었다

젊은 남편과 맞선을 보다가 
단번에 눈이 맞아 시집온 
시어머니가 며느리였을 적엔 
끼니거리 모자라
자주 칼국수를 끓여 상 차리며
입 꾸욱 다물었다

단체로 선을 보는 중에
늙은 남편이 손가락으로 찍는 바람에 얼떨결에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새 며느리는
먹을거리 많아도 
이따금 쌀국수를 끓여 상 차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면발 긴 국수를 많이 먹어서인지
명줄 긴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새 며느리가 끝까지 수발했다







부채의 가족사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쥘부채를 쥐고 있다가 
행인이 길을 물으면 방향을 가리켰고
내가 말 안 들으면 등을 두들겼다 
할머니는 뒤란에서 꽃부채를 흔들고 있다가
햇볕이 들어오면 가로막았고
내가 놀다 오면 땀을 말려주었다 
아버지는 마루에서 종이부채를 접고 있다가
흙먼지가 불어오면 흔들어 흩어놓았고
내가 엎드려 글씨를 쓰면 연습장으로 내주었다 
어머니는 한뎃부엌에서 태극부채를 들고 있다가
아궁이불이 꺼지려 하면 불꽃을 살렸고
내가 졸면 바람을 일으켜주었다  
이렇게 부채 하나 쓰는 데도 서로 뜻이 달라서
할아버지 아버지는 나를 가르치려 했고
할머니 어머니는 나를 쉬게 하려 했지만
어른들은 일하느라 바빴기에  
나는 손부채를 부치며 공부하거나 휴식했고
그래서 성인이 되어선 손으로 
일하기보다는 부채질하며 노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먼 척보다 일 잘할 때엔
나는 왼손 손부채로 입을 가리고 비쭉거렸고
먼 척이 나보다 잘 놀 때엔
나는 오른손 손부채로 눈을 가리고 내리깔았다







생로병사의 가족사


할아버지는 당뇨합병증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형은 뇌암으로 돌아가셨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었다
생로병사에도 반드시 혈연이 있을 테니
나는 무슨 병 깊이 들어 죽을까
할아버지는 아픈 중에도 남몰래 마시려고
어린 나에게 맥주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고
아버지는 복수 찬 배를 안고
나의 좁은 서재에 누워 청년이 된 나에게 아프다고 했고
형은 기저귀 차고 공원에 산책중이라며 
중년이 된 내가 건 휴대전화를 받고는 웃곤 했다 
그분들에게 내가 진 빚이 있으니
할아버지에게는 술심부름 안 한 잘못 
아버지에게는 약 해드리지 못한 잘못
형에게는 위로하지 못한 잘못
그 빚을 갚으려면 무슨 병이든 이어받아야겠지
이제 내가 세상을 떠야 할 순서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누군가 부르면 나가 맥주를 마시며
좁은 서재에 누울 자리 없어 누군가 보내온 책을 내다버리며
쓸쓸한 날에는 누군가 궁금해 하다가 휴대전화를 걸며 
늙은 동생에겐 형이 되지 않으려 하고
젊은 아들에겐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하고
태어나지 않은 손자에겐 할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한다







개꿈의 가족사


엊그저께 밤, 
세상 떠나셨던 아버지어머니가 
젊은 부부로 돌아와서는 
노인이 된 나를 부여안는 꿈을 꾸었지만
젊을 적에 나는 아버지어머니한테서 
꿈속에 늙은 내가 나타나 부여안기더라는
말씀을 들은 적 없다

그저께 밤, 
외국에 유학 갔던 아들이 
어른이 되어 귀국하자
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업히는 꿈을 꾸었지만
늙어가면서 나는 아들한테서 
꿈속에 어린 내가 나타나 업히더라는
말을 들은 적 없다 

어제 밤, 
늙은 나와 어린 내가 한자리에서 만나 
죽어본 경험담과 살아본 경험담을 나누다가
실제로 죽어봤는지 살아봤는지 의심되어 
서로 말끄러미 쳐다보는 꿈을 꾸었을 땐 
아버지어머니도 아들도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식목의 가족사 


시골집에서 해거름에 산책 나서면 
나무들이 몰려서 따라온다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나무는
아내가 마당에 심었더니 
꽃 피우던 산수유나무
아이들 눈 반짝이게 하던 나무
내 뒤에서 종종걸음 치는 나무는   
아내가 뒤란에 심었더니 
잎 흔들던 산초나무
이웃여자들 코 간질이던 나무
내 오른편에서 흔들거리는 나무는
아내가 밭가에 심었더니 
감 열던 감나무
이웃남자들 깨금발하고 손 쳐들게 하던 나무
내 왼편에서 비틀거리는 나무는
아내가 대문 곁에 심었더니 
단풍들던 은행나무
낯선 행인들 그늘에 쉬게 하던 나무
내 전후좌우 왔다갔다하는 나무는     
아내가 빈터마다 심었던 
벚나무 호두나무 모과나무 
나는 나무들한테 둘러싸여
어둡기 전에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철거민의 가족사 


막노동하며 사는 무허가집
변두리 판자촌을 쓸어내고 
신시가지를 세운다기에
쫓겨날 수 없어 싸우는 중에 
남편을 불구자로 만든 시할머니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아들을 잘 키워 장가보냈으나 
집을 마련해 줄 순 없었다

부업하며 사는 단칸방 
변두리 산동네를 뭉개고 
아파트단지로 재개발한다기에
밀려날 수 없어 싸우는 중에 
남편을 감옥으로 보낸 시어머니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아들을 잘 키워 장가보냈으나
여전히 집이 없었다

일용잡부로 사는 지하방 
변두리 구시가지를 밀어내고  
신도시로 만든다기에
떠날 곳 없어 싸우는 중에 
남편을 주검으로 묻은 며느리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아들을 장가보낼 때까지 잘 키울 순 있겠으나  

집을 가지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시할머니 시어머니 며느리는 
지상의 아주 작디작은 한 지점에서 사는 동안
대대로 집칸 때문에 괴로웠던 남편들에게
자식밖에 낳아주지 못해 괴로웠다







바닥의 가족사


네가 방바닥에 즐겁게 드러누운 덕에
귀한 아이가 만들어졌다면*
거긴 자식을 키울 만큼 낳아야 했던 
네 어머니도 밤마다 즐겁게 누웠던 자리일 것이다

네가 논바닥을 열심히 일군 바람에
많은 곡식이 자랐다면
거긴 식량을 먹을 만큼 거둬야 했던 
네 아버지도 낮마다 열심히 갈았던 장소일 것이다 

네가 길바닥을 부지런히 걸어간 탓에 
아늑한 집에 닿았다면 
거긴 남들이 일하는 만큼 일해야 했던 
네 부모님도 밤낮없이 부지런히 닦았던 터전일 것이다 

바닥은 언제나 아래쪽에만 있어 
발바닥으로 딛고 손바닥으로 짚으니
너는 그런 인생을 뒤집고 싶어 낯바닥 쳐들고 지내다가  
먼저 사라지면서 너에게 자신들을 뒤따르게 했던 
네 부모님이 그리 행하여 단단하게 다져놓은 
흙바닥 깊숙이 편편한 무덤 속에 무덤덤하게 드러누웠다     

*김나영 시인의 시「바닥론」중  ‘그 어느 날 내가 바닥에 잘 드러누운 덕분에 아이가 만들어졌고’라는 시구를 변용함.






봉분의 가족사


할머니는 살아서 한 방을 쓴 할아버지와 
죽어서도 한 방을 쓰고 싶다 해서
한 무덤에 함께 묻어주었다 
생전에 들일을 마치고 들어와
잠잘 적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품을 주었을까 등을 주었을까

어머니는 살아서 한 방을 쓴 아버지와 
죽어서는 한 방을 쓰고 싶지 않다 해서
두 무덤에 따로 묻어주었다
생전에 공장 일을 마치고 들어와 
잠잘 적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품을 주었을까 등을 주었을까

할아버지가 먼저 죽는 바람에
나중 죽은 할머니가 어울무덤을 택하였고
아버지가 먼저 죽는 바람에
나중 죽은 어머니가 겹무덤을 택하였다

우리 부부는 아직 모른다
각자 생각하고 처리할 일이 많아 
살아서 각방을 썼으니 
죽으면 화장하여 여기저기에 뿌려질까 
생전에 잠잘 적에 곁도 제때 주지 못한 나는 
그 일을 선택할 처지가 못 된다 

내가 먼저 죽은 후에
나중에 죽는 아내가 결정하기를 바랄 뿐



하종오∙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넋이야 넋이로다',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쥐똥나무 울타리', '사물의 운명', '님 시편', '님', '님 시집', '무언가 찾아올 적엔', '반대쪽 천국',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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