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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젊은시인집중조명/처절한 거짓 외 9편/고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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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75회 작성일 10-08-18 19:10

본문

고우란
처절한 거짓 외 9편
―크라잉*


둘시네아, 불의 키스는 일생에 딱 한 번뿐이라오 

그가 혓바닥을 내밀어 조국이란 낱말에 힘주어 내 몸에 침을 묻히자 풍차는 돌아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날마다 낡은 소총을 들고 술 취한 밤거리를 돌아 거인을 향해 진격했다

왕벚꽃 축제 행렬이 흔들리는 봄날인데 흐음, 서글프다 

광장의 뒤편에서 오, 피의 사냥, 또 다른 축제 행렬이 뜨겁게 쏟아져 흐르는데 크라잉, 서글프다, 외투를 두껍게 걸쳐 입고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초록 물총을 하늘로 쏘아 올리며 크라잉, 서글프다 

그런데 왜 뒤통수의 젖은 물기는 쉽게 마르지 않는 걸까? 록큰롤 음악에 맞춰 마이크를 옆으로 틀어잡고 롤 롤 롤 롤링스톤 하, 서글프다 

크라잉, 수많은 눈초리 속에 목적마저 잃어버려 크라잉 

진달래 빛 사월을 걸어 수수꽃다리 오월, 때죽나무 꽃그늘까지 환한 유월이 터뜨리는 함성을 주먹으로 틀어막은 채 크라잉, 크라잉, 그래 그래 

이제는 입을 한껏 크게 벌려 너도나도 모두 함께 더불어서 울어볼 테야 

야이 야이 야이 야 아이 엠 어 돈키호테, 노 아엠 낫 해피, 어, 바퀴벌레 

두 유 크라잉? 

바람이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출렁거리는 역사처럼 크라잉, 크라잉

서글프다, 한패거리 우리는 좀 슬어 낡아빠진 태극기를 손에 들고 왼손에는 성조기 들고 

흐음 

서글프다, 몸이 몸을 번갈아 바꿔가며

서글프다, 그렇지?
아니다

그가 전복하는 건 다만, 자신의 혀일 뿐이야 크라잉

그 빈 몸뚱어리,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조국은 오로지 불의 키스를 바란다
서글프다, 나는

*크라잉:중국의 현대화가 ‘인준’의 그림 제목 인용.







초록뱀을 삼켜라‧1


녹아라, 내 푸른 그리움의 뼈, 흘러, 사무쳐
슬어라, 뱀 떼처럼

일어서 나를 외우는 초록 떼

혀 돌고, 잎 돌고, 숨 돌아가는 자리에
마음은 초록뱀처럼

솟구쳐라, 곶자왈로, 비자나무 숲으로 몰려드는 초록, 초록뱀 

몸이 길어지는 병을 앓아서 초록초록 죽지도 않는 초록뱀들, 징그러이 몸이 몸을 감고 나를 집어삼키는 저 질긴 

머리를 먼저 허공에 내어주고
꼬리로 숨을 쉬는

사랑아,

죽지 않아 미쳐버린 초록뱀 한 마리 내 속으로 스윽 스며들 때 화들짝 놀라며, 물러나며, 다가가며 손톱으로 뱀의 허물을 벗기고 싶었지 

내가 왜 사랑을?

돌멩이로, 하이힐로 콱, 찍어버리고 싶었지

달아나버려, 달아나게 해 줘

미끌미끌한 몸뚱어리, 꼬리가 보이지 않는 저 초록뱀

네 혀가 한 마리 납작 벌레로 기어 거북 등껍질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꽃말미잘처럼 

오래 전 나였던 뱀아,

내 혀가 네 소리를 잘라 먹고 햇살까지, 햇살까지 잘라 먹고 
겨우내 치를 떨다가 내 혀까지 잘라먹고

그 독에 내가 다 녹아 사라지는 게 사랑이라니!







초록뱀을 삼켜라‧2


운전에 익숙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죠 왼쪽 오른쪽 선택은 내 마음에 있어요 오늘은 해 뜨는 쪽으로 가 보아요 이빨 없는 푸른 입들이 태양을 갉아먹고 있어요 징그러운 초록뱀들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저 초록의 입들, 지독한 집착이에요 해를 먹은 입들이 내 차를 뜯어먹어요 바퀴가 사라지고 범퍼가 사라지고 내 발목도 보이지 않아요

거꾸로 운전해요 
가기 싫은 그때로 돌아가고 있어요 칭칭칭 내 몸을 감는 뱀 떼가 나를 묶고 나를 가지 못하게 해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나는 
소리를 지르지만 이곳은 소리의 늪이에요 소리에 묶였어요
돌아가고 있어요 뜨겁게
어쩌나, 캄캄해져요 묵은 재 같은 노랫소리 들려요

길을 내는 것을 사랑이라 믿었네 / 길이 없는 곳에는 삶이 없었네 / 없는 길을 걸으며 길을 걷는 생
길이 끝난 곳에서 길로 누우며 / 당신의 속삭임은 / 인생은 달콤한 것 / 길에 드는 것을 사랑이라 믿었네

내 안의 노래를 잠재우며 바람이 불어요 바람은 자기가 갔던 길을 다시 가지 않네요 반복은 바람에 대한 배반이겠죠 길 밖에서 부는 바람은 길을 몰라요 바람의 결을 따라 초록뱀들이 춤을 춰요

나를 모독하는 나의 성전

…벌겋게…누웠어요 진득이 따라와요 수없이 짓밟아요 나를 먹어치우는 저 징그러운 초록의, 저 이빨 없는 입들

오실래요? 초록뱀 떼가 당신을 먹어치울 나의 성스러운 지옥으로, 길 밖의 사랑으로







초록뱀을 삼켜라‧3


내 그리움의 뼈다귀에는 푸른 독소가 묻어있네
바람이 불 때마다 흩어졌던 뼈다귀들이 노래하지

길은 왼쪽으로 휘어져 있소 
비가 와서 벙커에 물이 찼다오 캐주얼 워터
위험, 돌아서 가시오 새싹에 빨갛게 솜털이 일고 개가시나무와 가시딸기 군락지가 부드러운 봄바람에도 몸서리를, 내 그리움의 뼈다귀에는 푸른 독소가

그린 그린 그래스 골프 홈을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오

일단 정지

좌측은 낯 선 언어의 도시로, 웨이트 쉬프트
우측은 살갗이 지나치게 하얗거나 부리가 지나치게 뾰족하고
시커먼 물체들의, 와인드업 

내 뼈다귀에는 푸른 그리움의 독소가, 아, 참
그 곁엔 불구자 요양원도 있다오 
트러블 샷

내 그리움의 독소는 푸른 뼈다귀에

코스, 붉은 핀들 사이로

밤마다 산수국이 시퍼렇게 눈을 떠요 
결국 내가 피할 수 없는 길은

극락사 방향으로 뻗어 있소 캐리 오버
네게로,

꽃이라 불러 일어서는 바람에 
너도 바람꽃, 노루귀, 벌개미자리, 뚜껑별꽃, 할미꽃까지 영문도 모르면서 까르륵까르륵 웃는다오 
엎드려 보는 사이에

어리둥글먼지벌레며 벌꼬리박각시가, 이런, 러프 러프

노래하라구,
노래하란 말이야 초록뱀, 그 꼬리로

춤, 춤, 춤을 추라고?
그리움의 푸른 독을 뼈에 묻고서?







초록뱀을 삼켜라‧4


나무에서 초록유전자를 추출하여 내 몸 안에 심고 싶었으나 나무는 그럴 때마다 내 몸에서 종이냄새가 지워진 때 묻은 발자국만 빨아대어 빛의 입자들을 죄다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어느새 어스름이 끌고 간 그늘 속에 그림자들은 몸 뒤척거리다 살비듬이 떨어진 자리마다 군데군데 새 살을 만든다지만 손이 없어 옹색해진 나는 끝내 내 몸을 만질 수 없어서

짐승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 그 붉은 혓바닥 위에 올라 푸른 바다울음을 끌고 들어가 물컹한 목젖을 젖혀놓고 훌쩍 속살 깊숙이 감추고 싶었으나 그럴 때마다 나를 집어삼키는 어둠에 놀라 긴 긴 밤이 서러워 붉게 물든 낱말을 앞에 놓고 무릎까지 꺾고 말아 나는 

발이 묶여 똑같이 불구인 당신을 떠나지 못하고 마냥 꽃 앞에서 







명자꽃 탓


당신이 손톱이 예쁜 딸아이 하나 낳자고 자꾸만 꼬드기는 바람에,

손톱이 빨간 그 애가 그에 초록색 뚜껑을 열고 동화책을 펼쳐 읽다 눈을 들어 하늘색 공책에다 또, 무어라
띄엄띄엄 삐뚤빼뚤 글씨를 쓰다
그것도 싱거워졌는지
내팽개치고 달려와 
내 치맛자락까지 붙잡고 흐응, 으응 하는 바람에,

고것이
기어코 날 흔들어대는 바람에,

후우

대낮에 밑그림 그리다 
빨간색 물감을 와락 엎질러놓은 마당이 온통 

명자야, 명자. 







밤하늘


1.
어제는 쌀뜨물로 얼굴을 씻은 달이 둥그렇게 떠 있더니 
산모는 살짝 여윈 눈빛이다.

2.
나는 그대 앞에서 떠날 줄 몰라, 
헤어지는 방법을 몰라, 

어쩔 줄 몰라 자꾸만 주춤거린다,

사랑은 천직이라서.

3.
달 밝은 밤이면 둥그러지고 싶은 

내 안의 

빛 알갱이들이,








선인장


당신은 초록 이파리 흰 뱀이 물어 온 초록 이파리 뚝 떨어져 버린 초록 이파리 가지도 없고 뿌리도 없는 초록 이파리 당신은 혈혈단신의 당신은 달의 이파리 바람의 이파리 당신은 초록 이파리 

거친 바람을 읽으려다 독이 생겼을 거야 
바람의 경전을 풀려다 독이 되었을 거야 

흰 뱀 떼가 휙휙 나는 이 지상에서 달에서 흰 뱀이 쏟아지는 이 밤에 당신은 초록 이파리 흰 뱀이 물어 온 초록 이파리 

세상의 양식은 모래알뿐이라서 혀끝이 사막이라서 당신은 자기 안에 뿌리를 뻗는 초록 이파리 입뿐인 몸이라서 눈 없는 몸으로 사막을 건너가는 당신은 흰 뱀이 물어온 초록 이파리







모방의 귀재


티브이 드라마에 정신이 팔려
여주인공의 헤어스타일에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내 친구는
모방의 귀재다 암코양이 같은 베드신까지 잘도 베끼며
쉰 넘은 남편을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도가 텄다는 친구는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스리슬쩍 바람도 피우며
호호호 아유, 자기, 하면서
우유로 샤워를 하고, 검은 드레스를 입으며
어머, 어머 하면서 초밥을 즐겨먹는 내 친구는
무엇이든 전문가가 되는데 이력이 난 내 친구는
선생을 만나면 선생이 되고
사기꾼을 만나면 사기꾼이 되는 내 친구는
드라마 속 어떤 여배우의 모습도 금방 따라한다
때론 요부로 때로 교양 있게
커피를 마시고 녹차를 마시고
몸에 좋다며 이따금은 우아한 모습으로
보신탕도 즐긴다는 내 친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여배우 같아야 하기에
화를 낼 때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유지 한다 유지하려 한다 그런 친구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그 아들 녀석이 어느 날 싸우고 와서는
엄마, 그 자식 눈알을 파먹어 버리고 싶어 
했다는데, 어휴

교양이 철철 넘쳐야 할 내 친구가 했다는 말
거짓말을 하더라도 사기를 치더라도
호호호 웃으며 말해야 하는 내 친구는
화도 내지 못하고
얘야, 그런 눈알을 빼다 먹으면 못 쓴다!
하였다는데
모방의 귀재라서 이제는 
어떤 배우의 역할이라도 금방 따라하고 만다는 내 친구는
티브이에서 하느님이라도 나오면
나도 금방 하느님이 될 수도 있는데 말야
말하는 내 친구는






꽃을 보러 갔다가


꽃을 보러 갔다가 
바다를 보러 갔다가
정작은 무엇을 보러 갔는지도 잊어버리고
바닷가를 걸었다
주름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주름 많은 사내 몇 농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면 갯내만큼 음탕한 것도 없어 흐흐
그 말에 바다에선 물고기가 뛰고
눈쑥부쟁이도 눈부시게 피었다
혼자 걷는 한적한 바닷가 
어느새 내 안에도 밀물이 들어 부풀어진 몸
바다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나는 길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
모든 길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 바다는 쏴아쏴아 
끝없는 길을 낳았다
꽃씨가 스는 걸까
꽃씨가 서는 걸까
뜨거운 기운이 발밑을 간질이고 
농의 색깔은 노랑이나
연두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 
길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길 밖과 길 안을 번갈아 딛는데

갑자기 노을이 내 안으로 번져
없다고 믿었던 도화살이, 내 안의 길이 
파닥파닥 꼬리를 치고 있었다
시작메모






<시작메모>
그동안 갇혀 있었다. 

묵은 때를 벗느라 부드러운 속살 깊은 곳까지 송두리째 벗겨버린 까닭에 때로는 뼈대로만, 때로 의미로만, 또, 그림자로만 남은 글귀를 끌어안고 뼈아프게 울어야했다. 
감옥은 내가 만든 것이어서 스스로 감옥을 벗어나고자 애태웠다.
이 시를 쓰다 보니 어느새 그림자에도 빛이 들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뜻이 서고, 뼈가 솟고, 살이 붙는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는다. 자유롭다.

자연, 사랑, 욕망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다. 
딱, 그 만큼 행복하다.

고우란|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호랑이 발톱에 관한 제언}.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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