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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2010년/봄) 젊은시인집중조명 해설/눈먼 하와의 사랑법/손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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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눈먼 하와의 사랑법
―고우란의 시세계
손남훈|문학평론가
1. 금기의 존재 방식
모든 금기는 파괴되고 난 이후에야 금기로서의 생명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엄밀히 말해, 파괴되지 않은 금기란 그 금기를 지켜야 할 주체들의 인식 영역 바깥에 금기가 존재하거나, 금기가 파괴되었음에도, 파괴된 금기와 금기파괴자 사이에 아무런 인과 관계를 찾을 수 없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파괴되어버린 금기와 금기파괴 주체의 존재 양식 변화 사이에 그럴듯한 인과론적 절차가 매개될 때라야 (파괴된) 금기는 (파괴되지 말았어야 할) 금기가 된다.
인류 최초의 금기, ‘선악과의 나무를 따먹지 말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뱀의 유혹에 따라 하와와 아담이 따먹지 않았다면, 그것은 금기가 아니다. 선악과가 금기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면, 선악과는 동산 나무의 많은 실과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이미 동산 중앙으로 발을 옮기었을 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동산 중앙의 나무에 있는 과실이 금기의 대상으로 인식된 것이다.
물론 금기가 금기로서 자리매김 되기 위해서는 금기를 지정하는 최초의 명명, 신의 신성하고도 권위적인 발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금기임을 공동체 내부인들에게 유포 ․ 각인시키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금기가 금기임을 듣고 아는 것과 달리, 금기를 깨고 난 뒤 아는 것은 금기파괴자의 존재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금기는 하와와 아담 이후로 지금-여기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빠짐없이 주체를 포획하고 규정하며 구성하게 한,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군림해왔다. 금기를 인식하고, 파괴의 매혹에 포섭되어 위반하며, 금기 파괴가 확인되어 처벌 당하는 일련의 서사적 연속은 금기가 사라지고 새롭게 규정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금기의 강박적 반복에서 배태되는 금기 파괴의 매혹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다.
2. 적극적인 유혹 (당)하기
녹아라, 내 푸른 그리움의 뼈, 흘러, 사무쳐/ 슬어라, 뱀 떼처럼//일어서 나를 외우는 초록 떼//혀 돌고, 잎 돌고, 숨 돌아가는 자리에/마음은 초록뱀처럼//솟구쳐라, 곶자왈로, 비자나무 숲으로 몰려드는 초록, 초록뱀//몸이 길어지는 병을 앓아서 초록초록 죽지도 않는 초록뱀들, 징그러이 몸이 몸을 감고 나를 집어삼키는 저 질긴//머리를 먼저 허공에 내어주고/꼬리로 숨을 쉬는// 사랑아,//죽지 않아 미쳐버린 초록뱀 한 마리 내 속으로 스윽 스며들 때 화들짝 놀라며, 물러나며, 다가가며 손톱으로 뱀의 허물을 벗기고 싶었지//내가 왜 사랑을?//돌멩이로, 하이힐로 콱, 찍어버리고 싶었지//달아나버려, 달아나게 해 줘//미끌미끌한 몸뚱어리, 꼬리가 보이지 않는 저 초록뱀//네 혀가 한 마리 납작 벌레로 기어 거북 등껍질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꽃말미잘처럼//오래 전 나였던 뱀아,//내 혀가 네 소리를 잘라 먹고 햇살까지, 햇살까지 잘라 먹고/겨우내 치를 떨다가 내 혀까지 잘라먹고//그 독에 내가 다 녹아 사라지는 게 사랑이라니!
―「초록뱀을 삼켜라 1」 전문
만약 위 시의 화자가 창세기를 읽는다면, 하와가 사랑한 대상은 아담이 아니라 뱀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엄밀히 말해, 창세기에 제시되고 있는 적극적 금기파괴자는 하와와 뱀이니 말이다. 금기가 금기임을 처음으로 인식시켜 준 뱀과, 금기가 금기임을 인식하면서도 파괴를 감행한 하와와는 달리, 아담은 처음부터 금기 파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 않았다. 그는 되레 금기 파괴의 이유를 하와에게 돌리면서 변명하려 애쓴다(창 3:12). 물론 하와 역시 책임을 뱀에게 전가한다(창 3:13). 하지만 금기를 인식시킨 뱀과 금기파괴를 선행한 하와와는 달리, 아담은 적극적 금기파괴자라기보다는 금기파괴 동참자에 가깝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에로티즘의 조건은 금기이다. 금기가 하와에게 뱀의 목소리를 달콤하게 들리도록 했고, 선악과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곧 하와는 뱀의 금기 파괴 발언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와가 신에게 핑계댄 것과는 달리, 단순한 꾐이 아니다. 그 매혹은 하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행할 가능성으로 잠재했던 ‘욕망’을 가시화한 것이며, 그 욕망의 ‘결핍’을 외화한 것일 뿐 아니라, 뱀의 목소리와 하와의 욕망을 동일화시킨 세이렌의 노래 같은 것이다. 제 몸을 묶지 않은 바다선원들처럼, 하와는 금기의 대상을 향해, 금기의 파괴를 향해, 자신의 눈 먼 사랑을 향해, 그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인지도 모르고, 성큼성큼 동산 중앙의 나무로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 시에 나오는 구절, “내 혀가 네 소리를 잘라 먹고 햇살까지, 햇살까지 잘라 먹고/ 겨우내 치를 떨다가 내 혀까지 잘라먹고// 그 독에 내가 다 녹아 사라지는 게 사랑이라니!”라는 구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혹에 적극적으로 유혹 당하기. 설령 존재 상실로 이어지는 처벌을 받아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와 혹은 고우란 시인은 이를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전에 익숙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죠 왼쪽 오른쪽 선택은 내 마음에 있어요 오늘은 해 뜨는 쪽으로 가 보아요 이빨 없는 푸른 입들이 태양을 갉아먹고 있어요 징그러운 초록뱀들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저 초록의 입들, 지독한 집착이에요 해를 먹은 입들이 내 차를 뜯어먹어요 바퀴가 사라지고 범퍼가 사라지고 내 발목도 보이지 않아요//거꾸로 운전해요/가기 싫은 그때로 돌아가고 있어요 칭칭칭 내 몸을 감는 뱀 떼가 나를 묶고 나를 가지 못하게 해요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나는/소리를 지르지만 이곳은 소리의 늪이에요 소리에 묶였어요/돌아가고 있어요 뜨겁게/어쩌나, 캄캄해져요 묵은 재 같은 노랫소리 들려요// 길을 내는 것을 사랑이라 믿었네/길이 없는 곳에는 삶이 없었네/없는 길을 걸으며 길을 걷는 생/ 길이 끝난 곳에서 길로 누우며/당신의 속삭임은/인생은 달콤한 것/길에 드는 것을 사랑이라 믿었네/ 내 안의 노래를 잠재우며 바람이 불어요 바람은 자기가 갔던 길을 다시 가지 않네요 반복은 바람에 대한 배반이겠죠 길 밖에서 부는 바람은 길을 몰라요 바람의 결을 따라 초록뱀들이 춤을 춰요//나를 모독하는 나의 성전//…벌겋게…누웠어요 진득이 따라와요 수없이 짓밟아요 나를 먹어치우는 저 징그러운 초록의, 저 이빨 없는 입들//오실래요? 초록뱀 떼가 당신을 먹어치울 나의 성스러운 지옥으로, 길 밖의 사랑으로
―「초록뱀을 삼켜라 2」 전문
“운전”을 한다는 것은 “어디든 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유혹하는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유혹 당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화자는 “가기 싫”다고 하면서도 “그때로 돌아가”고 있다. “지독한 집착”으로 진술되는 “뱀 떼”에게 완전히 포섭당해 (“나를 묶고 나를 가지 못하게 해요”) “묵은 재 같은 노랫소리”를 들어야 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유혹하는 대상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기실, 이 “소리”가 “내 안의 노래를 잠재우”기 때문이다. 뱀이 하와의 귓전에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뱀 떼”는 “사랑이라”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나”를 유혹한다. 대상과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에, 아니 애초부터 그러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믿음이 가능하다는 매혹적인 속삭임은, 화자에게, “나를 모독하는” 것이고 “나를” 유혹하는 자(“초록뱀 떼”)가 “나를 먹어치우는” “지옥”임을 알면서도, 그 유혹에 기꺼이, 자발적으로 몸을 맡기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금기를 깨려는 유혹에 포섭당한 결과는 비참하다. 그리고 그 비참함이 금기를 더욱 깨지 말아야 하는 금기가 되게 한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제 몸을 동여맸던 것은, 그 금기가 매우 손쉽게 깨어지는, 그 때문에 절대로 깨어져서는 안될 강한 금기가 되어버렸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디세우스는 금기 파괴의 유혹에 금기를 지키려는 태도로 맞섰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금기 파괴의 유혹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주체의 태도는 두 가지일 것이다. 떨쳐버리기와 유혹 당하기.
하지만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오디세우스는 유혹 당했으나 몸이 묶여 있었으므로, 금기를 깨버릴(바다에 뛰어들) 여건을 갖지 못했다. 그는 금기 수호자이기는 하지만, 금기 파괴의 유혹 자체를 무화시킬 능력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금기 파괴의 유혹을 무화시키고 싶어했으나(부하들은 귀를 막게 해놓고 자신은 귀를 막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자이다. 그렇다면 금기 파괴의 유혹에 포섭되지 않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금기 파괴의 유혹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식과 금기 파괴의 유혹보다 더 강한 금기를 제시하는 방식. 오디세우스가 후자의 방식이었다면, ‘성현’이라 불리는 몇 안되는 사람들은 아마도 전자에 가까운 방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금기 파괴의 유혹에 몸을 맡기는 방식 또한 두 가지가 된다. 유혹에 소극적으로 유혹당하기와 적극적으로 유혹당하기.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유혹당하는 방식이 전자라면, 후자는 제 스스로 유혹의 언어와 동일시되는 방식일 것이다. 전자는 금기모티프를 지닌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파멸한 방식이다. 하지만 후자는 위 시의 화자가 취하는 방식이 아닐까.
금기가 응당 지켜져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그것이 파괴되었을 때, 금기파괴자가 겪게 될 재앙이 공포로 체감될 것이라 상상하기 때문이다. 금기 파괴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금기파괴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파괴와 유지의 갈림은 유혹과 공포의 농담濃淡 정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금기의 파괴를 상상할 때, 공포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하와는 금기를 파괴했을 때 겪게 될 죽음이 상상되지 않았기에, 자신도 먹고 아담에게도 먹으라고 줄 수 있었다. 즉 공포가 없는 유혹당하기는 금새 유혹하기로 전화轉化된다. 화자가 독자를 부르는 마지막 행, “오실래요?”는 바로 그 순간을 제시하며, 적극적인 유혹당하기가 역설적으로 적극적인 유혹하기가 되는 지점을 생생하게 나타낸다. 상상 가능한 공포로부터 멀어져, 사랑에 대한 믿음에 적극적으로 유혹 당하면서 동시에 독자를 유혹하려는 화자의 언어는 아담에게 사과를 건네는 하와의 손과 같다.
3. 유혹자의 부재
나무에서 초록유전자를 추출하여 내 몸 안에 심고 싶었으나 나무는 그럴 때마다 내 몸에서 종이냄새가 지워진 때 묻은 발자국만 빨아대어 빛의 입자들을 죄다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어느새 어스름이 끌고 간 그늘 속에 그림자들은 몸 뒤척거리다 살비듬이 떨어진 자리마다 군데군데 새 살을 만든다지만 손이 없어 옹색해진 나는 끝내 내 몸을 만질 수 없어서//짐승의 아가리 속에 들어가 그 붉은 혓바닥 위에 올라 푸른 바다울음을 끌고 들어가 물컹한 목젖을 젖혀놓고 훌쩍 속살 깊숙이 감추고 싶었으나 그럴 때마다 나를 집어삼키는 어둠에 놀라 긴 긴 밤이 서러워 붉게 물든 낱말을 앞에 놓고 무릎까지 꺾고 말아 나는//발이 묶여 똑같이 불구인 당신을 떠나지 못하고 마냥 꽃 앞에서
―「초록 뱀을 삼켜라 4」 전문
하지만 유혹하는 자, “초록 뱀”은 화자의 상상에서 존재할 뿐, 어느 곳에서도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에덴에서 추방 당한 하와에게 두 번 다시 금기 파괴의 유혹은 없었던 것처럼, 시인에게 사랑이라는 믿음을 속삭여 줄 어떤 유혹자도 현존하지는 않는다.
시인의 상상 속에 존재한 유혹자는 기실, 스스로 “나무에서 초록유전자를 추출하여 내 몸 안에 심”어 유혹하는 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의 발로인 것이다. 금기 파괴의 유혹마저 사라져, ‘사랑의 믿음’이라는 금기를 파괴하지 못하는 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란 그것밖에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뱀은 뱀이되, 초록뱀이 아니고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시인이 유혹자가 될 리 만무하다. 초록의 강렬한 원시성과 매혹적인 목소리를 겸비하지 않는 한, 시인의 언어는 “푸른 바다울음을 끌고 들어가”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붉게 물든 낱말”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꽃”이 되지는 못한다. 시인의 “낱말”은 유혹자의 달콤한 언어가 시인에게는 없음을 증명한다. 낱말이 꽃이 되기 위한 유혹자도, 유혹 당하는 자도, 유혹이 가능한 금기에 대한 신성한 인식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저 지독한 사랑의 믿음을 표명하는 언어는 “사랑은 천직”(「밤하늘」)이라는 말 밖에 없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말이기에, 사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은 유혹의 언명이 아니기에, “불구”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둘시네아, 불의 키스는 일생에 딱 한 번뿐이라오//그가 혓바닥을 내밀어 조국이란 낱말에 힘주어 내 몸에 침을 묻히자 풍차는 돌아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날마다 낡은 소총을 들고 술 취한 밤거리를 돌아 거인을 향해 진격했다// 왕벚꽃 축제 행렬이 흔들리는 봄날인데 흐음, 서글프다//광장의 뒤편에서 오, 피의 사냥, 또 다른 축제 행렬이 뜨겁게 쏟아져 흐르는데 크라잉, 서글프다, 외투를 두껍게 걸쳐 입고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초록 물총을 하늘로 쏘아 올리며 크라잉, 서글프다//그런데 왜 뒤통수의 젖은 물기는 쉽게 마르지 않는 걸까? 록큰롤 음악에 맞춰 마이크를 옆으로 틀어잡고 롤 롤 롤 롤링스톤 하, 서글프다//크라잉, 수많은 눈초리 속에 목적마저 잃어버려 크라잉//진달래 빛 사월을 걸어 수수꽃다리 오월, 때죽나무 꽃그늘까지 환한 유월이 터뜨리는 함성을 주먹으로 틀어막은 채 크라잉, 크라잉, 그래 그래//이제는 입을 한껏 크게 벌려 너도나도 모두 함께 더불어서 울어볼 테야//야이 야이 야이 야 아이 엠 어 돈키호테, 노 아엠 낫 해피, 어, 바퀴벌레// 두 유 크라잉?//바람이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출렁거리는 역사처럼 크라잉, 크라잉//서글프다, 한패거리 우리는 좀 슬어 낡아빠진 태극기를 손에 들고 왼손에는 성조기 들고//흐음//서글프다, 몸이 몸을 번갈아 바꿔가며//서글프다, 그렇지?/아니다//그가 전복하는 건 다만, 자신의 혀일 뿐이야 크라잉//그 빈 몸뚱어리,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조국은 오로지 불의 키스를 바란다/서글프다, 나는
―「처절한 거짓-크라잉」 전문
그렇다면, “처절한 거짓”인 줄 알면서도 돈키호테의 어조로 “둘시네아”에게 말해야 한다. 차라리 풍자를 향해 돌진한 돈키호테의 세계는 행복했다. 상상이 현실을 압도하던 돈키호테에게 최소한 ‘알 돈자’는 ‘둘시네아’로 보였을 테니까. 최소한 “좀 슬어 낡아빠진 태극기를 손에 들고 왼손에는 성조기 들고” 있어야 하는 분열의 자화상을 “서글프다”라는 아픈 토로로 뱉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인의 언어가 더 이상 유혹의 언어도, 금기를 파괴하는 언어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가 전복하는 건 다만 자신의 혀일 뿐”이라 고백할 때, ‘처절한 거짓’은 ‘철저한 사실’이 되며, 서글픔은 “크라잉”이 된다. “돈키호테”가 “바퀴벌레”라는 자의식, 더 이상 유혹이 통용되지 않는 “주먹으로 틀어막은” 세상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인준’ 화가가 보여준 것과 같은 온 몸으로 쥐어짜는 울음, 우는 자신마저도 비하되고 우스갯거리가 되어버리는 철저한 자기 비애의 울음 밖에 없다. 그것은 “내 그리움의 뼈다귀에는 푸른 독소가 묻어있네”(「초록뱀을 삼켜라 3」)라는 진술에서 전제되어 있는 자기 파괴의 욕망으로 시인을 데려가거나, 무책임한 “극락사 방향”(「초록뱀을 삼켜라 3」)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꽃을 보러 갔다가/바다를 보러 갔다가/정작은 무엇을 보러 갔는지도 잊어버리고/바닷가를 걸었다/주름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주름 많은 사내 몇 농 하는 소리를 들었다/알고 보면 갯내만큼 음탕한 것도 없어 흐흐/그 말에 바다에선 물고기가 뛰고/눈쑥부쟁이도 눈부시게 피었다/혼자 걷는 한적한 바닷가/어느새 내 안에도 밀물이 들어 부풀어진 몸/바다의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나는 길을 향해 오줌을 누었다/모든 길이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그 바람에 바다는 쏴아쏴아/끝없는 길을 낳았다/꽃씨가 스는 걸까/꽃씨가 서는 걸까/뜨거운 기운이 발밑을 간질이고/농의 색깔은 노랑이나/연두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길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길 밖과 길 안을 번갈아 딛는데/갑자기 노을이 내 안으로 번져/없다고 믿었던 도화살이, 내 안의 길이/파닥파닥 꼬리를 치고 있었다
―「꽃을 보러 갔다가」 전문
하지만 시인이 택하는 방향은 놀랍게도 “잊어버리”기다. 채우기 위해 여행을, “바닷가를” 간 것이 아니라 되레 비우기 위해 그는 “꽃”으로, “바닷가”로 간다. 이제 시인은 유혹 당하지도 유혹 하지도 않으며 언어의 물질적 현현을 욕망하지도 않는다. 보이는 사물 그대로를 날것으로 감각하고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나”는 “길을 향해 오줌을 누”는 완전한 비움과 “내 안에도 밀물이 들어 부풀어진” 온전한 충만을 동시적 현재성으로 체험한다. 발산과 수렴의 비가역적이고 비선형적인 터닝 포인트가 “스는” 것과 “서는” 것의 동일성을 묻게 하고, “길 밖과 길 안을 번갈아 딛”게 한다. 파도가 밀물과 썰물의 모순되지 않는 산물이듯, 현실과 상상, 금기와 금기 아닌 것 또한 시인에게는 더 이상 대극점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길 안도 길 밖도 시인이 디딜 수 있는 땅이라면, “뜨거운 기운이 발밑을 간질이”게 한다면, “노을이 내 안으로 번”지는 것도 모순은 아니다. “내 안의 길이/ 파닥파닥 꼬리를 치”고 그 역동적인 기운에서 자기 갱신과 구원의 강렬한 시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면, 시인의 시쓰기는 계속되어야 할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이, 거기서 나타나는 새로운 언어로 기꺼이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는 금기가 은폐한 파멸의 노래가 아니라 사랑이 낳은 명자꽃의 빛 알갱이들을 환상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손남훈∙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비평전문계간지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공저로 <지역이라는 아포리아>(산지니, 2009)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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