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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단편/기다림/최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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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61회 작성일 09-12-21 00:44

본문

|신작단편|
 기다림
 최창수


1.
지하철 6호선 망원역 3번 출구 앞에서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내 앞으로 한 사내가 지팡이로 바닥의 장애인 인도 블럭을 더듬거리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문득 어제 병원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하얀 벽 사이로 알코올 향기가 가득한 병원의 내과 접수대 앞의 환자 대기석에 앉아 덤덤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는 기침하는 젊은 남자,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할아버지가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졸음을 쫓는다.
“황신락黃神樂님 들어오세요.”
진료실 왼편은 갈색 침대 옆의 벽에 인체해부도가 걸려 있었고, 오른편에는 안경을 낀 서글서글한 표정의 의사가 데스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판막증입니다, 심장이 많이 손상 되어 있네요. 완치하려면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게다가, 환자분께서는 호흡이 불규칙하군요. 심장과 폐의 혈관도 많이 손상되어 있고…….
의사의 전문적인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내 시선은 데스크 앞에 놓인 십자가에 집중 되었다. 근엄한 상징 앞에 앉아 있으려니 몸이 못 견딜 것 같다.
진료실을 빠져 나온 뒤 처방전도 받지 않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병원 입구에서 주차장으로 가려고 했을 때 앰뷸런스가 내 앞을 가로 막아섰다. 차 뒷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나온 피투성이의 여자가 이동식 병원침대에 실려 들어갔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 먹은 햄버거를 쓰레기통에 토해냈다. 코로 시큼한 위액이 올라온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중학교 3학년 때 학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적향상을 위해 들어가야만 했던 그 통조림 공장은 얼마나 역겨운 부속 도서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서연고’라는 훈장과 ‘과학고’, ‘민사고’ 따위의 무의미한 직함은 레프트, 라이트 놈들 할 것 없이 목을 매다는 것이 현실이다. 나 자신도 부모에게 떠밀려 그런 것을 위해 이미 입시 준비반 따위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 보아도 먹었던 것을 토하고 싶은 심정이다.
연필을 가지고 연습장에 낙서를 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옆자리 여자아이의 연습장에는 세일러 문이 그려져 있었다. 만화책에 나올 만한 퀄리티로 아주 세련미 있고 깔끔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아이의 옆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참고서와 연습장, 학원 강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몇 시간이나 훔쳐보았을까. 그 아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리던 것을 멈추고 참고서를 뒤적거렸다.
며칠이 지나 그 아이는 쉬는 시간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공부하는데 집중이 안 된다면서 왜 자꾸 자신을 쳐다보느냐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나도 모르게 ‘그림’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그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정면으로 본 얼굴은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세울 필요가 없는 귀족 코에 얇은 입술이 시디처럼 작은 얼굴에 조화를 이루며 댕기 마냥 땋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감청색 교복 안에 받쳐 입은 하얀 셔츠와 타이, 파란색 치마는 하얀색 긴 양말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정하영鄭河永. 자신은 벽란여중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왜 그림을 그리느냐 묻자 자신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했다. 우리는 비록 이성적으로 사귀지는 않았지만, 함께 있는 것이 마냥 좋았다. 학원은 공부하러 오는 곳이라기보다 그녀가 그리는 새로운 그림을 보며 나는 그것에 대해 만화 스토리를 짜거나 그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학원의 교육에 비해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지만 행복했었다.
그녀의 밝은 옆얼굴을 훔쳐볼 수 없게 된 것은, 프리지아 꽃향기가 짙게 나던 겨울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었다. 첫 눈이 내리던 날, 어둠이 짙게 깔린 학원 주위에는 조금씩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학원을 나와 우리는 손을 잡고 걷던 중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안녕, 그녀는 밝게 웃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눈에 비치는 밝은 빛이 우리를 축복하듯이 감싸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빛을 따라 육중한 코뿔소가 한 마리 달려왔다. 둔탁한 엔진 음과 함께 나의 발키리를 데려갔다. 그 순간 하영은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주상복합 건물들, 사차선 도로, 통조림 공장이 내 눈 앞에서 무너졌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세상이 펼쳐져 있을 때 십 미터쯤 튕겨져 날아간 그녀의 머리는 부서져 있었다. 마리오네트 관절 인형처럼 제각각으로 따로 놀고 있는 팔 다리는 완전히 꺾어져 있었다. 크림슨 색의 물감이 그녀의 육체와 검은색 아스팔트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뛰어가야 하는데, 나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가야 해. 빨리 손을 잡아야 한다고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이대로, 이대로 있으면 모든 게 부서져 버려. 계속 심장 뛰는 소리와 함께 머리속을 어지럽히는 내 안의 소리는 티브이의 볼륨을 맥스로 올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어두컴컴한 세계는 하얗게 내 시야를 가렸다.
내가 깨어난 것은 그녀가 날아가 버린 날로부터 삼일 뒤였다. 나는 어떻게 병원에 왔는지도 몰랐다. 부모로부터 들은 바, 그 현장에서 내가 사람들이 비키라는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돌처럼 굳어 있었는데, 구급요원 중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뒤로 밀려 바닥에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이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전혀 깨어나지 않아, 다들 나를 그녀가 데려갔다고 생각 했다고 한다.
나는 부모에게 그녀가 있는 병원의 영안실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시신은 이미 화장되었고 지금은 내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만 했다.
한 달 동안 병실에 누워 지냈다. 티브이도 보기 싫고, 좋아하던 댄스음악도 듣지 않았다. 밥만 먹고 대소변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내 머릿속은 사실상 백지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의 얼굴이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사고 당시 그녀를 비추던 찬란한 빛만이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퇴원 후, 그녀의 유골함이 있는 납골당에 갔다. 영정사진을 봐도 그녀의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 그 자체일 뿐, 아무런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영의 얼굴은 그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빛에 녹아버린 것일까. 아니면, 나의 뇌 속에 그녀의 그림자가 덮여 버린 것일까.
분명한 건, 아름다운 하영은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부서진 채로 뜨거운 불 속에서 아름다움의 싹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는 것이다. 반면, 하영을 죽인 덤프트럭 운전사는 오 년형을 선고 받았다. 정말, 세상은…… 술이 떡이 되게 마시고 여중생을 쳐 죽인 쓰레기가 고작 오 년.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다 깨어났을 때는 새벽이었다. 형광등 조명을 켜자 땀에 젖어 있는 내 몸이 보인다. 왼쪽 손목의 혈관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새파랗게 한 줄로 쭉 이어진 선로 같은 푸른 동맥이 미웠다. 하나로 이어지지 못한 것들도 많은데, 내 몸의 일부라지만 너무 아름다웠다.
갑자기, 나는 서랍에서 커터 칼을 꺼냈다. 더 이상 나에게서 아름다운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외치며 왼쪽 손목에 칼날을 대는 순간 잠시 망설여졌다. 그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초조한 기분이 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칼날이 피부를 찢지도 않은 상태에서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커터 칼로 팔목을 가로로 그었다. 피부를 찢고 뜨거운 혈액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내 육체 곳곳은 뜨겁게 덥혀지고 있었다. 눈에 뜨거운 이슬이 고였다. 뿌옇게 습기가 찬 안구는 안개가 낀 것일까. 하얗게 물든 시야에 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누군지 알 것 같다. 빨리 와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고통은 지나가 버렸다. 그 아이의 얼굴을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은 그렇게 안도감과 함께 날아간다.
그 날, 그렇게 나는 처음 리스트 컷을 했다. 그 행위는 내 고교생활 전반을 채워주며 왼팔과 오른팔에 무수한 가로와 세로의 상처자국을 남겼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안경을 끼고 교복을 입었던 작은 키의 꼬마는 그 날로 사라졌다.
잠깐 본 거울 속에는 꼬마 대신 하얀색으로 탈색된 머리카락에 호일퍼머를 해서 여기저기 부풀어진 머리이고, 귀에는 체인으로 연결된 피어싱이 빛나며 눈에는 붉은색 컬러렌즈를 낀 채 각질마냥 메마른 입술에는 화살 모양의 피어싱이 꽂혀 있다. 양쪽 손목에는 리스트 컷을 한 흉터자국으로 가득하다. 검은 가죽 재킷과 애나멜 팬츠는 백팔십오 센티의 큰 키를 받쳐주고 있었다. 레더부츠는 뒷굽이 아주 뾰족하다. 나는 찡그린 얼굴에 걸쳐져 있는 입술에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2.
두 번째 열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담배를 입에 문 내 앞에 교복차림에 의미 없는 단어와 욕을 지껄여 대는 사내들 너댓 명이 서 있다가 그 중 한 놈이 불 좀 있냐고 건들거리며 묻는다. 나는 그 말에 일회용 라이터를 건넸다. 라이터를 받은 녀석은 갑자기 솟아오르는 불길에 깜짝 놀라 피우려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라이터 레버를 플러스 표시에 젖혀 놓고 개조를 해놓은 효과가 큰 것 같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아, 애송이.
그 순간, 담배를 떨어뜨린 사내는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왔다. 간단하게 그가 뻗는 주먹을 피하고 손목을 잡은 동시에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곤 얼굴 정면을 정확하게 부츠 뒷굽으로 찍어버렸다. 다른 녀석들이 달려들었지만, 풋내기들이라 간단하게 팔을 꺾거나 기본적인 던지기로 땅바닥에 쓰러트리니 놈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쳐 버렸다.
그 날 이후, 날로 심해져가는 가슴 통증이 심장약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심장 강화를 위해 배웠던 유도와 합기도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주 멋지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혼자 살던 나는 전갈을 두 마리 키웠다. 하얀색의 모습을 띈 놈의 이름은 ‘스팅’이었다. 반면, 검은색을 띈 놈은 ‘마크’.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스팅’을 데려왔었다. 먹이도 대충 간단한 곤충 종류를 주었을 뿐 애정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조그만 유체라서 그런지 그냥 먹이인 귀뚜라미를 주면 조용히 받아먹는 정도였다. 애완견과 다를 바 없고, 독도 없는 것 같아서 무섭지도 않았다. 자극시키면 몸을 움츠리며 도망가는 꼬맹이 같았다.
어느 날, 재혁이 내게 물었다. 왜 전갈을 키우냐고.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기르다 죽어버리거나 혹은 쓸모없으면 가차 없이 버릴 것이라 말하자 그는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차라리 두 마리를 키우지 그래? 네 성격에 전갈이 그냥 죽어가는 건 흥미 없을 거야.”
“그것을 두 마리 씩이나 키워서 뭐하게, 내 방이 무슨 동남아 밀림이라도 되는 줄 아냐?” 
나의 물음에 재혁은 책을 읽다가 덮고 말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네게 있어 지루한 사육보다 생존본능의 짜릿함이 마음에 들 거야.”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마크’를 구입했다. 이미 ‘스팅’은 중간 크기로 자라 있었기에 스팅과 같은 크기로 자란 것을 골랐다. 색도 대비를 이루는 검은색. 재미있는 것은 두 놈의 성격이 매우 틀린 것이었다. ‘스팅’은 항상 모래 밖으로 나와 있었고. ‘마크’는 돌을 파헤쳐 그 속이나 모래 안으로 파고들어 숨어 있는 편이었다. 두 놈은 충실하게 애완동물의 생활을 했다. 먹이인 귀뚜라미를 충실히 먹고, 모래를 상대로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두 마리를 키워도 별 영향이 느껴지지 않아서 지루함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녀석들의 먹이가 소진되어 가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죽어가는 날만을 기다렸다.
일주일 뒤, 나는 아주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먹이인 귀뚜라미는 놈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녀석들은 귀뚜라미가 아니라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꼬리로 상대를 공격할 줄 알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녀석들은 집게로 서로를 잡아채고 던지는 등 마치 그래플러 식의 레슬링 싸움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두 놈은 서로 싸우는 것일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나는 뒤늦게 배우게 된 놈들의 습성은 재미있었다. 원래 전갈은 암수끼리 두면 상관이 없지만. 먹이가 한정되는 공간에서 같은 성 개체를 두게 되면 싸움을 하게 된다. 특히, 먹이를 챙기지 못했을 때 그 싸움은 격렬하다.
인터넷 지식 검색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재미있는 케이지 싸움이라면 최고였다. 나는 더 이상 귀뚜라미를 주지 않았다. 햄스터의 새끼인 살아있는 핑키와 일반인들이 보기에 징그럽게 여겨지는 하얀 밀윔을 사서 넣었다. 물론, 먹이를 절대 그냥 주지는 않았다. 딱 한 마리만 던져줬다. ‘스팅’과 ‘마크’는 먹이를 사이에 두고 미친 듯이 싸워댔다. 싸움에서 진 놈은 다른 수조로 옮기고 이긴 놈에게 먹이를 주었다.
냉동된 귀뚜라미를 조용히 먹을 때와 달리 두 녀석은 예전에 비해 공격성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핑키의 살을 집게로 잡아 뜯어가며 독을 쏘기까지 하는 녀석들은 싸움에 있어 더욱 영리해져 있었다. 고맙다, 최재혁. 역시 너는 내게 있어 얼마 되지 않는 친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 있어 친구는 한정된 품목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교실에 앉아 똑같은 교과서로 배우는 녀석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다자이 오사무를 읽고, 아무것도 모르는 고딩에 가까운 나라는 놈은 국가와 시대를 넘는 슬픔을 공감해버리는 감성에 취해 바보짓을 할 무렵 내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간단하게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기회였다.
평소 세상에서 완전히 보내버리고 싶었던 놈이 있었다. 택용이라는 놈이었는데. 녀석은 아무나 붙잡고 돈을 요구하거나, 누구라도 심하게 따돌림을 시키는 주동자였다. 세상은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자라서 각 분야에 걸쳐 뻗어 있기에 약자들이 못사는 것이다.
그 날도, 리스트 컷에 의한 상처를 만지고 있었는데, 놈이 다가왔다.
“커터 칼 가지고 노는 거 재미있냐? 나도 좀 껴주라? 또라이.”
찡그린 택용이 놈의 얼굴은 거대한 칼자국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기분 나빴다. 나는 왼쪽 손바닥을 커터칼로 조용히 훑었다. 화끈거리고 뜨거운 혈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편, 택용은 아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실실거리며 웃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내가 제압당할 수도 있었다. 그가 내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 피가 흐르는 왼쪽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훓었다. 이죽거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묻은 피나 닦지 그래.”
내가 택용의 옆구리를 가리켰다. 그는 옆구리 부분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엎어졌다. 그리곤 이 새끼가 사람 죽이려고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거 내 피인데? 덩치는 산만치나 크면서 겁이 많네.”
나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택용은 자신이 찔린 줄 알았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것에 큰 수치심을 느꼈는지 내게 옥상으로 올라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옥상이라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人間失格을 다 읽어 가고 있었다. 
7교시가 끝나고, 택용이 말한 대로 옥상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기 패거리를 이끌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에 든 인간실격人間失格을 내려 놓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택용은 아까처럼 죽이네 살리네 하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주먹을 간단히 피해버렸다. 옥상에 온 이상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계속 펜스 쪽으로 이동했다. 생각대로라면, 깔끔하게 놈을 먼저 보내고 나도 천천히 다이브 할 수 있는 위치다. 택용은 씩씩 거리며 내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가 주먹을 뻗었다, 나는 간단하게 우측으로 피했다. 그러자 택용의 곰 같이 육중한 몸이 머리부터 먼저 떨어지더니 퍽! 하는 소리가 났다. 3초 뒤, 학교를 울리는 비명소리가 울리자 아이들과 선생들이 뛰어 나왔다. 옥상에 있던 택용의 패거리와 뒤늦게 싸움구경을 온 아이들은 놀라 아래층으로 뛰어 가거나 오들오들 떨며 주저앉거나 기절하기도 했다. 나는 미친 듯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들 기다리라구, 이제 슬슬 지겨운 학교에 스완턴 봄을 날리고 자폭할 거니까. 다자이 마냥 다미가와 상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같이 살 가치가 없는 쓰레기도 뛰어내릴 자격은 있으니까. 이왕 가는 김에 재미있게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두 팔을 벌리고 허리를 C자로 꺾으며 뛰어내렸다.
중력은 내 몸을 가볍게 만들고 빠르게 낙하했다. 이제 일 초 뒤면 나도 완전히 박살이 나겠지,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깨어나 보니 몸이 욱신거렸다. 죽은 건 택용이었고, 나는 뛰어나온 아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가벼운 찰과상을 입고 기절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일로 인해 교장과 담임은 사표를 냈고 교내폭력 단속 기간이라 경찰들이 수사를 하느라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유일하게 재혁만 다가왔다. 모두들 택용의 횡포에 그 동안 숨죽여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를 죽인 것은 결국 따져보면 나였기에 모두들 나를 피했다.
“아직은 아니야, 탈출한 다음에 소망을 이루라고. 네 논리대로라면 최소한 통조림 공장에서 썩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을 거 아냐? 제발 사람 놀라게 하는 건 그만 둬.”
병원으로 찾아온 재혁은 조그만 책을 내밀며 말했다. 책 제목은 무소유였다.
“이건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내게 주셨던 책인데 읽어보고 많은 것을 느꼈어. 어제  읽던 중에 너에게 필요한 구절이 있더군. 그래서 어제 새로 한 권 사서 너에게 선물로 주는 거야. 참 79페이지 부분은 꼭 읽어봐. 나는 그만 학원에 가야해, 퇴원하고 보자!”
재혁에게 책을 받고 나는 하루 종일 그 책을 읽어봤다.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이 보기에 카오스의 삶을 사는 내게 있어 절제와 지혜는 대체 어떤 의미란 말인가.
분명한 것은, 녀석 덕분에 고교 생활은 ‘점수’와 ‘탈출’을 위한 수단으로 조용히 흘러갔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씩 무단결석을 해준 덕분에 여러 번 부모와 선생님들에게 혼이 났지만.
스물다섯 해가 되어 작가가 된 재혁이 첫 고료를 받은 날, 나는 녀석이 쏜다기에 나갔다. 처음엔 술인 줄 알았는데 수제 케이크 집에 가서 차와 함께 타르트라는 케이크와 와플을 먹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호러물을 좋아하는 놈이 좋아하는 게 계집애들 마냥 딸기 케이크라니. 술을 한 잔 마실 만도 한데 너무 얌전한 게 아니냐고 묻자 재혁은 웃었다.
“공포소설을 쓴다고 해서 지네튀김이나 피가 흐르는 레어 스테이크를 먹는 건 아니니까. 카쿠라神樂씨.”
말을 마친 재혁은 조용히 포크로 케이크에 있는 딸기를 꽂더니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참, 내 이름을 일본어로 부르는 것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고 보면 내 이름도 한심하다. 황신락이 뭐냐, 황신락. 자칫 아라카미아쿠荒神惡, 신악神惡으로 불릴 수도 있는데.
그건 그렇고, 정말 이 녀석은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놈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몇 번 봤던 여자가 지나갔다. 기억이 맞다면, 영문학과의 박사코스를 밟고 있는 ‘글래머 엘리트 퀸카 누님’이다. 이런 녀석에게 저 여자는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했다.
“저 여자 어때? 영문과 퀸카, 되게 지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아?”
내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자 재혁은 케이크를 먹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뭐가 지나갔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남은 케이크에 다시 손을 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툭 치며 짜증을 냈다.
“이 자식아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이런 재혁의 모습은 정말 호러물과 어울리지 않는다. 온갖 몬스터와 악마, 고문과 추함을 묘사하며 독자들에게 공포심을 자극하는 이 녀석은 하얀 피부에 가는 눈꼬리에 색기色氣가 있는 눈동자와 가녀린 눈썹, 조각 같은 코, 계란형의 얼굴, 빨간 입술을 가진 이 녀석은 정말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가 내게 줬던 책과 전갈들의 싸움만 해도 그렇고, 하지만 나를 더욱더 놀라게 했던 것은 재혁이 그 때 케이크 집에서 지나가던 여자와 갑자기 결혼을 해버린 사실이다. 내가 모르게 녀석에게는 또 다른 눈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전갈을 키우지 않게 된 것은, ‘하미’ 때문이었다.
“오빠, 그거 안 키우면 안 돼? 싸우는 거 보면 무섭단 말야. 그리고, 햄스터가 불쌍하지 않아?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기인데.”
그냥, 포상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파이터들도 싸우고 대전료를 받는 것처럼. 저 녀석들은 내 눈을 즐겁게 하고, 야생성을 보존하기 위한 작업인 만큼 다른 개체에 대한 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이 녀석들의 치열한 싸움이 즐거울 뿐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키우지마, 오빠는 너무 사람이 잔인해.”
너도, 게임하면서 네가 조종하는 플레이어로 적을 처리할 때 그만큼 포인트를 얻잖아. 그것과 이게 다를 바가 뭐 있지? 라고 하자 그녀는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상과 실제는 틀려, 사실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듯이 말이야.”
그렇다면 니가 한 마리 키워봐. 야성 없이 온순하게 말야! 라고 말하며 ‘스팅’을 하미에게 넘겨버렸다. 처음에는 안 키운다고 하던 하미였지만 조용하게 받아갔다.
다음날 재혁에게 ‘마크’를 넘겼다. 또 한 마리는 어디 있느냐는 그의 물음에 여자친구에게 줘버렸다고 했다. 때 되면 짝 지어줘야겠네 라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족번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내 꿈이 이루어지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담배를 새로 한 갑 샀다. 포장을 뜯고 또 한 개비를 입에 문다. 한숨을 토해내며 하늘로 춤을 추며 날아가는 짙은 연기는 깊은 밤에 혼자가 아닌 긴 여운 뒤 잠시 동안 다른 세계로 날아가고 싶을 때, 천장을 보며 태우는 맛과는 전혀 다르게 썼다.
눈을 감고 나는 꿈을 꾼다. 세계를 찢어버리는 작은 소망이 하나하나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웃는다. 그 세계는 하나로 모여 잘게잘게 조각나서 내 몸에 박힌다.
담배를 떨군 내 왼손에는 커터 칼이 들려 있다. 왼쪽 손목에는 이미 수십 군데의 상처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망설이는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어야 할 것인가, 그만 둬야 할 것인가. 오랜만에 고민하게 된다. 빌어먹을 기분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어버리자.
칼끝이 오른쪽 손목 피부에 조금씩 흠을 낸다. 찢겨진 상처 사이로 흘러나오는 붉은 액체는 몸을 뜨겁게 한다. 그것을 흘려보낼 때마다 핑크색으로 상기된 상처 주위의 살들은 빨갛게 물이 든다. 심장이 밧줄로 조이듯 아파온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 있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고조된 기분을 느낀 것은 중학교 때 수음을 했을 때가 처음이었다. 기분이 높게 쳐 올랐을 때 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방문을 모두 닫고 처음 생각했던 수음의 상상 속 상대가 누구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빌어먹을 그 일 때문일까. 어느 때부터 아랫도리의 유희에서 느낀 재미는 끝나 버렸다. 체위를 아무리 바꿔 봐도, 상대가 바뀌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육체가 서로 뱀처럼 꼬여버리는 것은 지루해져 버렸다. 하미와 첫 밤을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내게 안정을 준다는 것이 다를 뿐, 첫 날 밤에도 유일하게 내게 복수하겠다고 화낸 여자도 그녀, 하미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시절 소개팅 덕분이었다. 나는 전혀 원하지 않았던 자리였지만 일문과 후배들이 주선한 자리에 같은 과 동기가 빠지게 되어 내가 대신 나가게 되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긴 머리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하미’ 라고 해요.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나는 오른 손을 들어 어이, 메가네(안경) 머리를 올리는 게 훨씬 낫겠네 라며 그녀의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뒤로 넘겼다. 순간 안경이 떨어지면서 맨얼굴이 드러났고, 모두들 내 행동에 깜짝 놀랐다. 하미는 얼굴이 빨개지며 안경을 찾아서 썼다.
다들 나에게 불쾌감을 느끼지 전에, 나의 무모한 행동보다 하미에게 눈길이 가고 있었다. 내 말 마따나 그녀가 나온 여자들 중에서 제일 괜찮았기에, 나를 제외한 남자들은 하미에게 러브콜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덧 긴장감도 사라지고 소개팅 자리가 시시해져 버린 나는 미소를 지으며 찻값을 계산하고 조용히 나와 버렸다.
다음 날, ‘바보! 내 이마 물어내!’ 라는 문자가 왔다. 하미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첫 만남에서부터 우리는 꼬였지만, 에프터 상대로 나를 지목한 이유는 그 행동 덕분이었다. 그녀는 여고시절부터 만화를 그리느라 자기 자신에게 별다른 신경을 안 썼기에 자기 외모에 깔려 있는 매력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하루 일과는 전공과 거리가 먼 게임과 만화 그리기였기 때문이다. 동인지를 내며 인터넷을 통해 판매를 할 정도로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걷는 그녀에게 왜 만화를 그리게 되었냐고 물어보자 그녀는 자기 의지는 아니라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는데 어느 날부터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어느 날이 언제냐고 묻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미와는 편하게 지냈다. 그녀가 리드하는 대로 만나 데이트하고 통화하거나 메신저로 대화했다. 한편으로는 귀찮기도 했지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서로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단지, 중3 때부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로 리스트 컷은 중단되었다. 커터칼로 피부를 찢어가며 뜨거운 피를 확인하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했다. 게다가 그 덕분에 나는 한 번도 즐거운 기분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는 것이 귀찮았던 내게 있어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자 연애보다도 클럽에서 몸을 움직여 대고 서로 필이 꽂히면 근처에서 원나잇스탠드를 즐기기도 했던 때가 있었다.
처음에 즐긴 섹스는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체액교환에 불과했기에 재미가 없었다. 즐기고 나면 상대의 얼굴이 흑백으로 보였다. 혀가 혀를 먹어치우고 아랫도리가 얽혀도 상대의 얼굴에 있는 모공과 조그마한 땀 한 방울마저도 내 눈에는 크게 보였다. 게다가 육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화장품 냄새, 뱀의 비늘 같은 피부는 혐오감마저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너희는 더미(Dummy)가 되는 것이 낳겠다는 생각에 조금은 힘들지만 커터 칼을 가지고 다니며 섹스 전에 상대 여자들에게 제의했다. 몸을 좀 더 뜨겁게 하고 싶어 약간의 피를 보고 싶다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관계를 하기도 전에 도망쳤다.
나는 하미에게 정말 이런 제의를 하기 싫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하미가 과연 자기 자신을 나에게 허락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다른 여자들처럼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 날은 기일 전날이었다. 납골당에 갔다가 집에 돌아왔다. 내 방은 일어번역가라는 직업 특성상 일어로 된 원어책과 문법 관련 책이 꽂혀 있는 조그만 책장과 컴퓨터, 프린터, 미니냉장고, 세탁기가 차례대로 놓인 것이 전부이다. 가끔 하미가 청소와 빨래를 해주기에 나는 그녀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컴퓨터 책상 위에는 항상 담배와 라이터, 재떨이가 함께 있다. 구석에는 전갈 두 마리가 있었지만 재혁과 하미가 각각 한 마리씩 가져가서 이제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풍경은 나처럼 원룸에 혼자 사는 사내에게 적절하게 어울리는 구조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으로 들자 하미가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어디 다녀왔냐는 말에 오랜만에 친구를 보고 왔다고 하자 그녀는 자기를 버리지 말라며 갑자기 내 품에 안겼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준 뒤 주위를 둘러봤다. 하미의 스케치 북이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펼치자 평소 그녀가 그린 화려한 그림이 있었는데, 전부 엑스자로 그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아줘, 라는 말에 나는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하미는 이제 그림 같은 것은 더 이상 그리기 싫다며, 자기는 자기 자신이라며 울먹였다. 자신은 이대로 영원히 내 품에 안겨 있는 게 좋겠다고 말하며 울었다. 무슨 생각인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아니, 돌려보낸다고 해서 갈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집에 가면 숨이 막힐 것 같다며 눈물을 닦았다.
자기는 누구의 대용품이 아니라는 등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거듭해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 철부지 같았지만, 강제로 데려다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하미에게 그렇다면 오늘은 조금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냐고 물었다. 그녀가 ‘뭐든지’ 라며 수긍하자 나는 다른 여자들에게처럼 뭉뚱거리는 말보다도 솔직히 말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중학교 때 있었던 하영에 대한 일과 오늘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도 그 일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다. 비록 그녀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동안 고통을 잊기 위해 해왔던 리스트 컷에 대해 말해버렸다. 하미에게 리스트 컷에 대해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 하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옷을 하나씩 벗어던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아담한 체격이면서도 빈약한 가슴은 아니었고 살결은 너무나도 희었다. 군살 하나 없는 하미의 육체는 나에 의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나는 칼로 왼쪽 손목을 조용히 그을 준비를 마쳤다. 제발, 오늘로서 하영의 그림자는 사라져야 한다. 더 이상 고통 속에 사는 것은 힘들기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떠올린다. 내 옆에는 하영이 아닌 하미가 있기에 잊어야 한다. 내 몸을 하미의 몸에 포개며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육체가 뒤섞이는 가운데, 의식이 끝나면 팔과 침대 한켠은 조금씩 붉게 물들 것이다. 나의 시야는 리스트 컷 때 나타나던 하얗게 점멸하는 빛과 함께 슬슬 하영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하미는 자신의 다리 사이로 발기한 남성이 들어오자 얼굴을 심하게 찡그린다.
나는 아랫도리를 조금씩 움직이며 왼쪽 손목을 커터 칼로 그었다. 마지막이라서 그런 것인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왼쪽 팔에서 조금씩 뜨거운 혈액이 배어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시야에 하얗게 비춰진 것은 하영이 아닌 나의 상처를 지혈하면서 또 한편으론 피부에서 핏방울을 핥고 있는 하미였다. 그 때처럼 교복만 입지 않았을 뿐 내가 열여섯 살 때부터 고통의 순간마다 떠올렸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녀는 예전의 그대로 있었기에 나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뺨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하미는 내가 들어오는 고통에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뜨거운 숨을 토해내더니 출혈하는 나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심장이 가빠져 왔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잊으려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나와 하미 사이에 펼쳐질 육체의 쾌락 속에 영원히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리스트 컷을 하지 않았다. 서로를 아프게 하는 것보다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았기에 죽을 때까지 그녀 앞에서는 피부를 찢는 것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단지 나와 하영에게 이런 고통을 준 사람의 현실과 미래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렸다.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빌어먹을 계획은 시작 되었던 것이다.

4.
하미로부터 문자가 왔다. 5분 뒤에 도착한다고 한다. 이제, 정리의 시간이 왔다. 나는 몇 시간 전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고의가 아닌 나 역시 놈처럼 알코올에 이끌렸을 뿐이다. 내가 죽인 놈도 어차피 그 말을 했기에 상관없는 것이다. 내가 그 놈을 죽이려고 살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나 자신이 항상 죽으려다 죽을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이 날을 기다려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쓰레기에게 그 정도의 선물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 일요일 아침, 고층빌딩과 상가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각양각색이다. 물론 똑같은 옷을 입은 인간들은 다 거기서 거기다. 동네 곳곳마다 교회의 십자가가 걸려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6일 간 저질렀던 죄를 청소하려고 모여드는 것일까. 나는 그 날 이후로 성경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기에 사람들이 교회에 꼬박꼬박 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쓰레기는 기도를 마치고 사람들과 교회에서 나오고 있었다. 지인들과 악수를 나누며 성경책을 들고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해 보였다. 정말 그 얼굴 가죽을 벗겨내고 싶었다. 가족들로 보이는 중년의 부인과 아이들이 보였다.
가와사키 닌자 모델의 모터사이클에 앉은 나는 조용히 헬멧의 쉴드를 내렸다. 더 이상 그들을 바라보면 결심이 흐트러질 것이다. 조용히 차량을 뒤쫓던 나는 그의 집 근처에 이르렀다. 가족들이 내려 집으로 들어가자 차를 주차하던 놈에게 쓰레기를 던졌다. 뭐냐고 소리치는 놈에게 돌을 던지자 차 유리가 박살이 나고, 놈은 나를 끈질기게 쫓아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참을 달리다 화성시의 마을 외곽 도로에 모터사이클을 세웠다.
쓰레기가 차에서 내려 욕설을 퍼붓는다. 사람들 앞에서 공손하던 그 모습은 어디에 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서 간단하게 한 방 먹였다. 놈에게 뻗은 주먹은 코에 적중했고 놈은 길바닥에 쉽게 쓰러져 버렸다. 놈을 들쳐 매고 테이프로 칭칭 묶어버린 뒤 차 트렁크를 열어 그곳에 집어 넣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계속 달렸다. 차에 부착된 네비게이션을 끄고 무작정 철로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건널목 근처에 인적이 드문 곳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에서 놈을 꺼내어 입에 부착된 테이프를 떼어냈다.
“아저씨 오랜만이야. 빌어먹을 헤드라이트 비추는 건 여전하데?”
겁에 질린 놈은 대체 왜 이러냐며 돈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기억나? 니가 사람 쳤던 거 말이지. 그러고도 어떻게 잘 살아 있네.”
순간 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일은 이미 자기도 죗값을 갚았고 계속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소리친다. 나는 쓰레기의 발목에 로프를 감았다.
“어이, 목사양반. 사람 죽여 놓고도 성경책 몇 구절 읽고 하느님 찾으면 다들 당신을 선량하고 아름다운 목회자로 볼 줄 알았어? 세상사람 전부다? 하긴, 감추려면 뭔 짓을 못 해. 당신도 빵 다녀왔으니까 알겠지만 사형수들도 죽기 전에 하느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에 할렐루야를 외친다며? 똥 싸놓고 남이 치워주길 바란다니. 진짜로 믿는 사람들 엿 먹이네.”
제발 살려달라며, 이러면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놈은 소리치고 있었다. 팔에 로프를 둘러 묶자 부인과 자식이 있는 몸이라며 제발 살려주면 신고는 하지 않겠다고 울먹였다.
“지옥? 그런 게 있다면 당신은 왜 살아 있지? 함부로 사람 목숨 뺐어놓고 말야, 그리고 아저씨가 어떻게 살던 그건 나하고 상관이 없어. 당신도 술 먹고 사람 친 게 알코올에 취해 돌진했으니까 그런 거 아냐? 사람이 죽는 건 똑같은 이치야.”
그 때, 멀리서 기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나는 놈을 철로에 묶었다. 누워있는 놈은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점점 기차소리가 가까워져 간다. 이제 기차의 앞부분이 보인다.
“잘 가요~. 니 혼자 구원 받은 새끼야.”
순간 놈의 몸 위로 기차가 지나갔다. 기차의 앞부분이 피로 물들고 동시에 철로 주변은 조각난 놈의 몸뚱이가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십자가 모양으로 예수가 못 박혔던 포즈를 취한다. 한참 지났을까, 내 머리 위로 눈이 내린다. 철로를 붉게 물들이고 부서진 몸 위에도 눈이 조금씩 쌓인다. 타인이 봤다면 천벌 받을 것이라고 생각될 나라는 놈은 아무런 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주 평온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시골 교회의 종소리가 들린다. 참회와 안식을 노래하는 일요일 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기 위해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온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며 프리지아 꽃향기가 어디선가 내 코를 찌른다.
차 안에는 성경이 있었다. 그것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놈의 차를 운전하여 모터사이클이 세워져 있던 곳으로 가서 놈의 차량을 버린 채 다시 모터사이클을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에 하미에게 문자를 넣었다. ‘망원역 3번 출구에서 만나자’.
경찰들에게 전화를 했다, 8톤 트럭을 몰고 사람을 죽인 뒤에 뻔뻔하게 착한 척하는 놈을 철로에서 열차에 치게 해 죽였다고 했다. 그들은 무슨 소리냐며 장난전화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견찰 새끼들아 내가 쓰레기 청소했는데 너흰 그게 장난으로 보여?”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전화를 한들 소용이 없을 것 같다.
2시간 후, 나는 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뇌까리면서 말이다. 하미가 오고 있었다. 빨간 코트와 검은 부츠를 신은 그녀는 여느 때보다 귀여웠다.
매서운 추위에 떨고 있는 하미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온 그녀에게 이제,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부탁, 들어주겠어? 내 꿈을 실현시키고 싶은데. 미안하지만…들어 줄 거지?”
무슨 일이냐고 묻는 하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날 잊어줘, 그리고 나를 죽게 만들어줘. 그게 내 소원이야.”
내 말에 하미는 고개를 흔들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손을 붙잡았다. 누구도 의미 없이 태어난 것은 아니라며 자신에게 나는 어떤 의미냐고 묻는 하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이대로 손을 잡고 있으면 나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계속 피해가 갈 것이다. 내 손을 꼭 잡고 우는 하미는 나를 부둥켜안았다. 이제 방법은 그것인가.
조용히 품에서 커터 칼을 꺼낸 나는 하미의 왼쪽 손목을 칼날로 그어버렸다. 순간 하미는 내 손을 놓고 피로 물든 자신의 손목을 붙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무작정 뛰었다.
하미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계속 있을 수가 없다. 주위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경찰을 부르고 있었다. 경비들과 경찰, 공익 몇 명이 나를 붙잡으러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따돌리며 나는 승강장으로 뛰어갔다. 새로운 열차 오는 소리가 들린다. 뒤에는 계속 경찰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승강장에는 사람이 얼마 없고 열차의 불빛이 점차 강렬하게 내 시선 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나는 승강장 밖 열차로 몸을 날렸다.

강하게 튕겨져 나간 몸이 욱신거린다. 오른쪽 눈만이 모여드는 사람들을 감지할 수 있다. 나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이미 왼쪽은 날아가 버린 것 같다.
육체의 고통이 있었지만 조금씩 기어갔다. 사람들이 모여도 뱀처럼 꿈틀거리며 기어간다. 내 마지막 모습이 보고 싶어서 핸드폰에 부착된 거울에 나를 비추었다. 내 꼴은 제대로 참혹했다, 얼굴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고. 왼쪽 피부가 혈관과 뼈가 엉켜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으며 붉게 물든 이마 윗부분의 뇌도 조금씩 보였다. 눈앞에서 점점 어둠이 한 꺼풀씩 깔리기 시작한다. 육체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프리지아 꽃향기가 나고 있었다.
갑자기 떠나버려서 하미야 미안해, 혼자는 너무 외롭기에 길동무가 필요해. 아무나 붙잡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는 걸. 이제 잠깐 동안의 망설임을 잊게 하는 것도 필요 없겠지.



최창수∙1981년 광주 출생. 2006년 ≪문예연구≫ 신인상. 제4회 한남문인상 젊은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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