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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단편/악행의 자서전/은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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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시절, 악마에게 고해를 한 적이 있다고 황회장은 말했다. 신부님이 아닌 악마에게 하는 고해라니. 그건 악한 일이 아닌 선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뉘우치는 의식이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었습니다. 술을 먹고 시비를 거는 취객이 있었는데,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려다가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어 그만 두었습니다. 미성년 여자 아이를 겁탈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애가 상처받을 것 같아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악마에게 고해를 한 덕택에 양심良心의 가책을 받지 않고 오로지 악행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들이 고해를 할 만큼 선한 행위인지에 대해 헛갈렸지만 악마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하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악마에게 고해까지 하는 사람이라면 연쇄살인범쯤 되는 악당일 거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황회장은 양심적인 기업인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자기 말로는 지극히 소심한 성격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젊은 시절엔 그랬다는 것이다. 겉모습만 놓고 봐도 그는 남에게 해를 가할만한 인상이 아니었다. 깊게 패인 이마의 골들이 순탄치 않았던 인생역정을 드러내긴 했지만 은색의 머리칼과 온후한 표정이 수더분한 시골 노인네의 이미지를 풍겼다. 하긴 누가 알겠는가. 사이코패스들도 겉보기엔 멀쩡한 호남인데다 모범적인 시민일 경우가 허다하니까. 그럼에도 그가 대단한 악행을 저지를 만한 위인은 못 될 거라는 믿음을, 나는 포기하지 못했다. 인생을 관조할 나이인 칠십 줄 노인의 얼굴에서 악한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두 달 간의 인터뷰로 얻은 경험도 그런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대필 작가에 불과한 내게 그는 진심어린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젊은 시절, 신앙생활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신앙을 가진 자는 심성이 착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믿음이 내겐 있었다.
그가 악마를 만난 건 신앙생활을 접은 어느 날이었다. 악마인 걸 어떻게 아셨죠? 악마등록증 같은 거라도 내보였나요? 내 말은 어딘가 빈정거리는 투가 되어 있었다. 황회장은 징그러울 정도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건 누구라도 알 수 있다고. 자신은 한눈에 악마임을 알아챘다고.
그는 말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뉘우쳐도 고해할 거리들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그래서였는지 언젠가부터 악마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사업이 번창일로에 접어들면서 그는 악마 같은 건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끊겼다. 나는 좀 시큰둥해졌다. 그의 고백들이 유치한 비유로 여겨져서였다. 굳이 더 물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건 집필에 꼭 필요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술김에 했던 말에 불과했다.
2.
황회장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장으로 가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가슴에 묵직한 쇠종이 매달려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쇠종은 금방이라도 대앵댕 소리를 낼 것처럼 흔들렸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서도 참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나는 고민했다. 누군가 알은체만 하지 않았더라도 되돌아 나왔을지 모른다.
“장 작가님 어서 오세요. 그렇잖아도 황사장님께서 찾으셨습니다.”
반색을 보인 사람은 기획실 최부장이었다. 황회장 자서전 집필 일로 자주 만나던 터라 익히 알던 사이였다. 나는 얼떨결에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최부장은 앞장서 그랜드볼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뻣뻣한 등짝을 보자 사무실 책상서랍에 처박아둔 봉투가 떠올랐다. 벌써 보름이 넘도록 처치곤란으로 남겨진 봉투.
그랜드볼룸에선 이벤트가 한창이었다. 출판기념회는 출간된 책을 보지 못하고 타계한 황갑수 회장에 대한 추모와 K그룹의 건설업 진출 자축 이벤트를 겸하는 자리였다. 죽은 자에 대한 추모와 신사업 진출 축하 무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나로선 의아했다. 하지만 그런 염려가 무색할 정도로 주최 측에서는 행사를 잘 소화해냈다. 필요하다면 망자에 대한 추모마저 마케팅에 이용하는 게 기업논리 아닌가.
행사장 한쪽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내게 누군가 다가왔다. 황회장의 아들 황사장이었다.
“책이 잘 나오게 된 건 모두 장 작가님 덕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회장님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그의 눈을 마주보기 힘들었다. 황망한 기분도 기분이려니와 어색하기도 했다. 자서전 대필 경력 십 년이었지만 이번처럼 환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대필이란 그것을 의뢰하는 쪽이나 쓰는 쪽이나 껄끄러운 면이 있는 법이다. 저자의 입장에선 남이 대신 써준 글이 되고,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능을 돈과 맞바꾸는 행위가 된다. 대필이 출판계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음에도 쓰기를 부탁하는 쪽이나 쓰는 쪽이나 드러내길 꺼려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는 그럴 만큼 글 쓰는 행위에 결벽증을 가진 사람은 못 된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일 뿐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다. 내가 내 일에 대해 잘 드러내지 않는 건 떳떳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번거로워서랄까. 대필 작가임을 알았을 때에 드러내는 제각각의 반응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도 이번 초대는 확실히 예외적이었다.
화려한 레이저 쇼와 함께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 ‘피날레’가 배경으로 깔리며 신개념 웰빙 아파트를 광고하는 영상이 펼쳐졌다. 이어 무대가 정리되고 조명이 차분하게 바뀌었다. 막이 열리고 무대 중앙으로 황사장이 걸어 나왔다. 그가 자리에 앉은 내방객들을 향해 책을 한 권 들어보였다. 인간승리의 신화로 꼽히는 황회장의 자서전을 내보이기 위해서였다.
“황회장님께서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오늘날의 K그룹을 일군 성공신화의 주인공입니다. 또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누구보다 강조하셨습니다. 여기 이 자서전은 황회장님의 삶의 족적을 기리는 책으로서…….”
나는 그쯤에서 그랜드볼룸을 걸어 나왔다. 호텔 정문 앞에서 시위 중인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K건설이 아파트를 짓게 될 재개발지역의 밀려난 철거민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보는 둥 마는 둥하며 그 곳을 벗어났다.
“고물상에서 시작해 중견기업 일군 업계의 신화, 타계하다”
“가난한 자와 장애인들의 대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실천하던 참 기업인”
나는 사무실 책상 위에 신문 스크랩을 올려놓았다. 가슴 한쪽이 여전히 묵직했다. 대필 작가로서의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최부장은 남은 잔금을 신속하게 입금시켜주었다.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는 책상 서랍 깊숙이 손을 넣어 편지를 꺼냈다. 오래 전에 윤이 보내온 편지. 나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무실 안으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뚜벅뚜벅. 복도를 지나치는 발걸음 소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내가 기다리던 소식은 없었다. 대신 새로운 뉴스가 나를 맞았다. 내가 소설을 응모한 문예지의 신인상 발표 소식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물을 먹은 것이다. 나는 인터넷 브라우저를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그때 복도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병이라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치 그 소리가 나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서랍을 열어 편지와 봉투를 꺼냈다. 그것을 안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 사무실을 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3.
배가 선회를 하는지 기우뚱 요동을 쳤다. 그 바람에 객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의 몸뚱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제멋대로 눕거나 앉은 사람들이 마치 급하게 들여다 놓은 짐짝들처럼 보였다. 나는 객실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객실 한가운데에서 낚시꾼들로 보이는 중년 사내들이 소주를 마시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윙윙거리는 배의 엔진음이 그들의 대화를 뭉텅이로 잘라 먹었다. 거센 사투리 억양까지 섞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제법 취했다는 것만은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중년 사내들이 앉아있는 위쪽 객실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남해의 푸른 섬들이 느린 화면처럼 스쳐갔다. 배는 크고 작은 섬들 사이를 유영하듯 지나갔다. 먼 바다로 나아갈수록 물빛은 점점 푸르게 변했다. 해무인지 안개인지로 인해 대기는 희부옇게 빛났다. 자꾸 눈이 부셨다. 가슴에 매달린 쇠종 때문인가. 좀처럼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외투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최부장이 준 봉투. 나는 그것을 묵묵히 들여다보았다. 이것을 왜 가져왔을까. 써버릴 생각도, 그렇다고 돌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처분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차라리 바닷물에 던져버리고 돌아갈까. 최부장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 계통에 오래 계셨으니까 듣고 기억해야 할 말과 잊어버려야 할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건 황회장님의 유언이니 받아두세요.”
최부장이 내 쪽으로 봉투를 밀었다. 얼굴엔 보일 듯 말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모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봉투를 외면하지 못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객실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앉았다. 짐을 챙기고 벗어둔 옷들을 입으면서 객실이 분주해졌다. 어느덧 배가 비금도에 도착한 것이다. 배를 선착장에 대기 위해 후진을 하는지 요란한 엔진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선착장 건너편엔 가파른 길을 따라 민박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민박집 사이로 간판을 내건 가게들이 있었고, 뒤쪽으로 함석지붕을 얹은 민가도 있었다. 민가 옆의 돌담은 태풍이 불면 와르르 무너져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사람이 사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낡은 집들이었다. 나는 앞서가는 낚시꾼들을 따라 가파른 길로 발을 내딛었다. 길은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 마을로 이어졌다. 윤의 편지에 씌어진 그대로였다. 나는 숨을 고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4.
당신의 삶을 리폼하라. 황갑수 회장의 자서전 제목이다. 흔한 스토리였지만 또한 그래서 언제나 통하는 콘셉트. ‘인생역전의 신화’와 그 속에 양념처럼 버무려진 성공 노하우야말로 자기계발 서적에 반복되는 레퍼토리였다. 황회장은 중견기업체의 신화적 인물이다. 고졸 출신으로 고물상부터 시작해 온갖 잡다한 일로 돈을 모으다가 화장품 회사를 인수했고, 종합식품과 유통업으로 사업을 넓혔다. IMF시절, 그는 엄청난 액수의 부도를 맞아 집과 재산을 저당 잡히고 혼자서 여관을 전전했다. 직원들은 대부분 회사를 떠났고, 가족들도 사채업자를 피해 다녀야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토종 약초를 이용한 웰빙 화장품을 연구했다. 이것이 대히트를 쳤다. 사무실과 공장에 다섯 명의 직원만 데리고 일군 기적이었다. 자신이 직접 전단을 뿌려가며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했다. 재기한 뒤에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사업다각화에도 성공했다. K기업이 종합그룹으로 면모를 갖춰갈 무렵 그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위암 말기. 6개월 시한부 인생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사이클로 출퇴근하며 암과 전면전을 벌였다. 그렇게 2년여를 넘긴 어느 날 암세포가 몸에서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몇 년 전에 은퇴한 그는 별장에서 은거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두 달 간의 인터뷰와 석 달 간의 집필, 그리고 한 달 간의 최종수정 작업을 거쳐 완료된 초고를 건넬 때 황회장은 시큰둥했다.
“초고는 장 작가가 완성을 했고, 저와 황사장님께서 수정을 많이 했습니다. 회사 이미지도 생각해야 해서 껄끄러운 부분은 빼고 가필도 했습니다.”
최부장이 조심스럽게 부연설명을 했다. 원고뭉치를 넘기던 황회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던가. 최부장이 언급한 껄끄러운 부분들에 대해 나는 곱씹어보았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글의 양념이 되는 에피소드들이었다. 이를테면 다방마다 돌아다니며 뱀차를 팔았다든지 외국에서 수입한 의료기기를 한 달 만에 팔아치웠다든지 금연기기를 개발했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날림이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 출판사나 회사는 그 부분들을 삭제하자는 데 동의했다. 굳이 밝혀 봐야 이미지만 손상된다는 판단이었다.
“내가 한번 읽어보고 이야기하겠네.”
황회장은 최부장에게 알았다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함께 나가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장 작가는 더 있다 가지 그러나?”
근 두 달을 만나는 동안 웬만큼 친해진 사이였다. 그날 황회장은 나와 바둑을 내리 세 판 두었다. 저녁에는 나와 함께 뒷산을 돌고 와서 식사를 했다.
“사실은 말일세. 자서전이라는 게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글 같아 내키지 않았어. 난 사실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이거든. 그보단 뉘우칠 게 더 많은 사람일세. 차라리 절실한 고백을 담으면 어떨까 싶지만 용기가 나진 않고 말일세.”
그가 내 와인잔을 채워주며 한 말이었다. 나는 좀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절실한 고백이라니. 지금 뭘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구도 사실 그대로를 글로 드러내지 않는다. 글이란 설령 그것이 일기일지라도 쓰는 순간 각색되고 윤색되고 탈색된다. 하물며 서점에 깔리는 자서전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자서전이란 기획된 원고에 불과하다. 일종의 연출인 것이다. 독자도 출판사도 성공담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황회장의 말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혹시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초고를 끝낸 시점이라 그 말이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돌려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이 하늘인지 정원인지 그 사이에 있는 전원주택 마을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와 나는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였다. 나 또한 완연히 어두워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원 군데군데 켜진 등불에 비쳐져서였을까.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활향나무가 고흐의 그림에서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어느 순간 황회장이 엷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잔 마신 와인 때문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5.
황회장의 원고 검토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렇다고 내가 크게 걱정을 했던 것은 아니다. 황회장의 자서전이었음에도 출판의 결정권은 아들인 황사장 측에 있었다. 그들이 ‘오케이’를 한 이상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내겐 있었다. 그러나 보름 뒤에 받은 연락은 뜻밖의 것이었다.
최부장은 원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 채 급히 와달라고만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한밤중에 택시를 잡아타고 별장으로 향했다. 일 년 매출 몇 조 원대의 기업체 회장이 대필작가 나부랭이를 급히 찾는 이유가 뭘까. 나로선 짐작이 가지 않았다. 별장에 도착해 최부장에게서 들은 말은 더욱 믿기 힘들었다. 초고 원고를 넘긴 며칠 뒤 황회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회복이 되었지만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럼에도 황회장은 한사코 나를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회장님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발병하신 뒤로 판단력이 흐려지신 것 같기도 하고. 장 작가께서 설득을 해주십시오.”
대체 무엇을 설득해 달라는 말인가. 그런 의문을 품은 채 나는 떠밀리다시피 방으로 들어갔다.
팔에 링거 바늘을 꽂은 황회장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는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 뒤, 최부장과 황사장에게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건강하시던 분께서 어쩌다가…….”
나는 황회장의 등을 손으로 받쳐 일으켜 앉혔다. 그는 한동안 창밖만 내다보았다. 밀서라도 받는 신하가 된 기분으로 나는 침묵을 견뎠다.
“장 작가. 내가 원고를 다 읽어보았어. 그런데 말이야.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야.”
“네?”
“나는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을 도저히 나라고 인정할 수가 없어. 나는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그건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들입니다. 자서전이라는 게 속성상 사실보다 부풀려지기 마련이구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아니야. 그 말이 아니야. 여기에 씌어진 이야긴 모두 사실이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황회장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며 황사장과 최부장, 그리고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황사장이 나를 밀치면서 황회장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황사장에게 수건과 물컵을 건넸다. 기침이 잦아들자 황회장은 다시 그들을 방 밖으로 물리쳤다. 만약을 대비한 듯 심복 최부장만 방문 옆에 남았다.
황회장의 목소리가 들린 건 다시 한참이 지나서였다. 숨고르기라도 하듯 조용하던 그가 작심한 듯 말을 꺼냈다.
“장 작가. 번드르르한 내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자랑스럽기는커녕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차피 나는 오래 살긴 힘들 것 같아. 그래서 결심했네.”
“…….”
“자서전이라는 게 자기 일생에서 잘했던 일들, 내보이고 싶은 일들을 미화시켜 내보내는 것임을 모르는 게 아니야. 그러나 난 그러고 싶지 않네. 마지막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단 말일세. 이건 내가 자네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자네만이 나를 이해해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최부장이 말한 ‘설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럼에도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순 없었다. 황회장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말을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말하는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뿌리치지 못한 것도 그런 필사적인 태도 때문이었으리라. 말투는 어눌했지만 거기에 담긴 어떤 간절함이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는 어느 부분에서는 대본을 읽듯 덤덤히, 또 어느 부분에서는 고통스러운 듯 힘들게 이야기를 해냈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거짓말같이 목숨줄을 놓았다.
6.
황 회장의 태도만큼이나 그의 고백도 충격적이었다. 나로선 좀처럼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나는 하나의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꼭 그만큼의 선행을 했네. 중소기업을 협박해서 첨단기술을 가로챈 뒤 억지로 도장을 찍게 한 날,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결정을 내렸지. 세금 포탈 사실을 폭로한 기자를 구워삶은 며칠 뒤에는 문화재단을 설립하기로 결정을 내렸어. 공장의 폐수를 무단 방류해선 안 된다고 직언하는 간부직원을 작살나게 두들겨 패 몇 개월 병원신세를 지도록 한 적도 있었어. 그 다음날 무얼 했는지 아나? 간부직원의 부인을 만나 일 년치 연봉을 전달했네.”
나는 담담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심적인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기업 총수치고 그만한 비리를 저지르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내 태도를 비난하는 이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닳고 닳은 인간임에 분명하다. 웬만한 악행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둔감해졌다고나 할까. 억지로 분노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고백에선 달랐다. 내가 느낀 건 분노보다 오히려 충격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지. 공소시효가 지나서 법적으로는 이미 용서받은 일일세.”
그는 부도난 협력업체 사장의 아내를 사랑했다. 처음에는 부도를 막아주는 대신 그의 아내를 취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자와 그녀의 남편이 몰래 관계를 지속하다가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 질투심에 불탄 그는 여자의 남편을 잔인하게 청부살해했다. 뺑소니 교통사고로 위장한 사건이라고 했다. 남편이 죽은 일 년 뒤 여자 또한 다섯 살 난 아이와 함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여자가 죽고 난 뒤, 나는 장애인들을 위한 사설 복지센터를 만들었네. 복지센터 한쪽에는 무료급식소를 갖춘 노숙자들의 사설 쉼터를 만들었어. 공교롭게도 그게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어. 그때부터 내겐 가난한 자, 장애인들의 대부라는 타이틀이 붙었지.”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묵직한 어떤 것이 가슴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이 내 안에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장 작가, 나는 내 모든 악행을 책에다 남겨야만 하네.”
황회장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내 진짜 자서전이 되어야 하네. 자넨 내 자서전을 다시 써야 해. 그래야만 내 삶이 용서받을 수 있어. 내가 쓰러졌다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나는 믿네.”
그가 한 고백의 내용도 그랬지만 형식 또한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는 왜 성당으로 가서 신부님에게 고해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대상이 왜 하필 일개 대필작가였을까. 차라리 교회로 가서 열심히 기도해 죄를 뉘우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종교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정말 자신의 악행을 문자로 남겨 세상에 알림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나는 넌지시 그런 의문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만났다가 사라진 악마를 다시 만났네. 그가 자신에게 선행을 고백하라고 말하더군. 내가 했던 선행들은 악행의 다른 이름이었어. 그걸 함으로써 악행에 몰두할 수 있었지. 나는 선행을 거부하기로 했네. 내 악행을 드러내는 것, 그것만이 최고의 선행임을 깨달았어.”
온힘을 다해 말하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대기하고 있던 주치의가 맥과 호흡을 짚어보았다. 의사는 간호사와 함께 응급조치를 취했다. 몇 차례 가슴을 압박했고, 코를 쥐고 입에 숨을 불어넣었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사람들은 숙연하면서도 침착했다.
“그 책을 내선 안 돼. 내 죄를, 내 죄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하는 짓이야.”
황회장이 정신을 차리고 외친 마지막 말이었다. 모두들 황회장의 말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직 육체의 죽음만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몇 분 뒤, 황회장은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7.
짐작대로 황회장의 고백을 자서전으로 출간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최부장은 내게 봉투를 건네주었지만 그건 유언과 정반대되는 이유에서였다. 비밀로 함구해달라는 회유. 그럼에도 나는 황회장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황갑수 회장의 악행의 자서전.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K사에게 받을 협박과 위협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래도 그것을 쓰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아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죽기 전에 내게 유언을 남긴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나는 고심 끝에 출판사에 이도저도 아닌 타협안을 냈다. 원고를 책으로 내지 말자는 제안이었다. 내 생각은 재고할 가치도 없는 의견으로 치부되었다. 출판사 기획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출판에 대한 권한은 출판사와 K사가 의논할 일이지 대필작가가 간여할 성질이 아니라고 일침을 놓았다. 내 역할은 원고를 쓴 것으로 끝났다고 아퀴를 지었다. 그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 나는 황회장의 유언을 대강이나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제 정신이세요? 그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자구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황회장만큼 윤리적인 기업인도 드물었어요. 그런데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에서 한 고백을 곧이곧대로 믿잔 말입니까? 설사 그 말이 사실이라 쳐도 이제와 뭘 어쩌자는 겁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당사자뿐인데 증명할 수도 없잖아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를 설득하느니 무쇠에 젓가락을 찔러 넣는 편이 더 쉬워 보였다. 출판사도 K사도, 황회장의 유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유언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사람은 이미 죽었고, 피해자들도 이미 20년 전에 죽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그의 유언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유언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했기 때문이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나는 내게 무거운 짐을 지운 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느 날 나는 도서관으로 가서 20년 전의 신문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황회장이 정확한 연도와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 알아내기 힘들었다. 나는 어떤 의무감에 쫓기며 짐작되는 2〜3년 동안의 신문을 모조리 뒤졌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중소기업체 사장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와 비슷한 기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신문기사를 찾아 해맨 뒤에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나는 점차 현실로 되돌아왔다. 누가 봐도 종결된 사건이었다. 황회장을 제외하곤 나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사 고인이 저승에서 나를 비난해도 어쩔 수 없었다. 대필작가에게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것부터 어긋난 포석인 것이다. 나는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불면증도 한결 나아졌다. 어느 날 황회장의 고백이 들려오지만 않았던들 동남아 어디쯤을 여행 중이었을 것이다.
“악행을 저지른 자가 말 몇 마디로 회개한다고 그 죄가 없어질 수 있을까?”
새벽녘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잠결에 들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귀에 울렸다. 방바닥에 희부연 새벽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커튼을 걷고 이슬에 젖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다. 나는 최면이라도 걸듯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데 왜……. 가슴에 매달린 쇠종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내가 고백했으니 이제 당신도 고백하라.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늘한 새벽 공기만 몸을 감쌀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8.
오십 여 미터 가파른 길을 올라가자 비자나무 숲이 시작되었다. 숲길 오른편으로 난 절벽 길을 따라 걷자 반대편 섬의 전경이 훤히 드러났다. 바다 한 가운데 파묻힌 듯 가라앉은 섬은 흡사 그림 같았다. 모래사장 안쪽으로 울긋불긋한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한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가슴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종을 붙들어 매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나는 나무들을 깎아 만든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은 빈민운동을 하던 김선배의 아내였다. 김선배는 철거용역들과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윤의 넋 나간 얼굴을 처음 봤다. 의식불명의 김선배보다 그녀의 처연한 표정이 더 깊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퇴원 후에도 김선배는 한쪽 팔과 다리를 가눌 수 없었다. 나는 얼마간의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따금 김선배의 집에 들렀다. 그때마다 김선배는 내 눈을 피했다. 다른 곳을 볼 때의 그의 눈빛은 달랐다. 맹렬한 적의에 불타는 듯 형형한 눈빛. 이따금 윤에게 돈을 건네기 위해 나는 더욱 열심히 자서전 대필에 매달렸다. 내 목적은 윤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그녀를 얻는 것이었다. 김선배의 절망적인 눈빛조차, 내 안에서 울리는 내밀한 죄책감조차 윤에 대한 욕망을 잠재우진 못했다.
“자꾸 이러지 말아요. 받을 수 없어요.”
윤이 거부할수록 나는 김선배와의 관계를 강조했다.
“나한테 김선배는 형님 같은 사람이에요. 받아두세요.”
일 년 여 뒤, 김선배가 누워있던 옆방에서 나는 윤의 몸을 탐했다. 이후로도 김선배를 만난다는 핑계로, 윤에게 생활비를 건넨다는 핑계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때마다 나는 이상한 열기에 쫓겨 윤의 육체에 탐닉했다.
“대필일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원래 하고 싶었던 건 소설을 쓰는 거였잖아요.”
언젠가 윤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김선배는 그로부터 일 년 뒤에 죽었다. 휠체어를 타고 베란다로 가서 10층 아래로 몸을 던졌다. 몇 주 뒤에 윤도 사라졌다. 그리고 이 년 전쯤 남해의 먼 섬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담담한 안부편지. 그 섬은 바로 김선배가 태어난 고향이었다. 나는 편지를 처박아 둔 채 답장을 미루었다.
마을과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었다. 함석지붕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썩거렸다. 마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나같이 열려진 대문들 앞을 기웃거렸다. 돌담이 무너져 내린 붉은 함석 지붕집 마당에서 노인 한 명이 앉아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노인은 가는귀가 먹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편지봉투에 씌어진 주소를 내보였다. 노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가 몹시 굽어 어떻게 뱃일을 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노인은 골목으로 나와 손가락으로 집 하나를 가리켰다.
모래사장으로부터 골목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푸른 함석지붕 집. 나는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지금이라도 그냥 되돌아갈까. 그럼에도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 집 역시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집의 내부가 보였다. 겉보기완 달리 마당은 깔끔한 편이었다. 한가운데에 그물이 널려 있었고, 오른편에는 화단이 있었다. 나는 수도가 나 있는 마당 한편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계십니까?”
대청마루 옆의 방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파가 고개를 내비쳤다. 낮잠이라도 자다가 깼는지 머리가 부스스했다.
“저기 혹시, 여기에…….”
노파는 답답할 만큼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대청마루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무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서울에서 온 허윤이라는 여자가 여기 있는지요?”
“윤이 새댁? 갸 서울로 가 뿌린지 언젠데 그랴. 근데 뉘신디 윤이 새댁을 찾는가?”
노파가 비로소 눈을 빛냈다. 나는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렸다. 집을 나오다 말고 다시 돌아섰다.
“어디로 갔는지는…….”
“어디로 갔는지는 울도 모르지라.”
노파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고맙게도 묻지 않은 말까지 해주었다. 뒤늦게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갸가 남편 뼛가루를 가지고 왔었지. 그려도 아주 싹싹하고 방실방실 웃으면서 인사도 잘혀서 다들 좋아라 했는디 한 일 년 살다가 혼자 남은 시에미마저 죽으니께 서울로 올라가 뻔지더라고. 하긴 답답하고 그렸겄지. 이런 섬 동네 촌구석에서 뭐 할 것이나 있간디. 색시가 하도 싹싹하고 활달하고 그러니께 뭘 혀든 잘 살 것이구머잉.”
노파의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 다시 물었다.
“뼛가루는 어디에…….”
“요 앞 바다에 뿌렸을 것이구만.”
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한참 동안 모래사장을 걸었다. 바다가 흐려지며 파도가 높아졌다. 먼 바다에서 짙은 안개가 소리 없이 밀려왔다. 안개가 퍼지는 바다 어디쯤에서 김선배가 나를 주시할 것 같았다. 나는 모래사장 위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손으로 모래를 쥔 채 한동안 꺽꺽대며 울었다. 맨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노파의 마지막 말만 기억하자고 나는 다짐했다.
9.
내가 악마를 만난 건 며칠이 지난 뒤였다. 내가 먼저 그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특별히 만나고 싶어 한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왔을 확률이 높지만 어쩌면 내가 마음으로 먼저 그를 불렀던 것인지도 모른다. 악마라면 마음이 부르는 소릴 듣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최부장을 만나기 위해 카페 ‘세상’으로 나갔던 차였다. 그는 전작을 했는지 불그레한 얼굴로 맥주를 따라 주었다. 그는 자서전이 발간된 후 K기업의 매출이 올랐다고 말했다. 자신이 새로운 건설사업 부문 이사로 승진 발령이 났다고도 덧붙였다. 평소대로 지극히 담담한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진작 돌려드렸어야 하는데, 늦었습니다.”
최부장이 나를 힐끗 보았다. 꼭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부연설명을 해야 했다.
“다른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돌아가신 황회장님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가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장 작가, 이제야 솔직히 말하는 건데요. 한편으로 나는 장 작가가 그 이야길 써주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진심이에요. 그래야 회장님도 저 곳에서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최부장은 손가락으로 천정 어딘가를 가리키며 빙글, 원을 그려 보였다. 나는 피식, 하고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부장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양복 속주머니에 넣고 익살맞게 두들겼다. 그리곤 침울하게 어깨를 구부린 채 졸기 시작했다. 굳어버린 석상 같아 툭 건드려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맞은편 최부장의 옆자리에 누군가 나타났다. 나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다름 아닌 김선배였다. 마치 엊그제 헤어졌다 만난 사이처럼 그가 스스럼없이 술을 따라 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잔을 받아 들었다. 그가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노골적인 비웃음으로 변했다. 어느 순간 김선배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색 양복에 검은색 넥타이를 맨 무표정의 남자. 나는 단 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한동안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침울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나 또한 자신에게 고해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고해를 하고 세상의 악행을 마음껏 받아들이라고.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기업인들의 자서전을 쓰는 일도 그들의 고해를 돕는 일과 다름없지 않았느냐고.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악마는 끈질기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만에 나는 겨우 다른 대답을 생각해냈다. 나는 황회장의 악행을 그의 자서전으로 쓰진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쓰지 않을 것도 아니라고. 아마도 그건 황회장의 고백이면서 나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라고. 그 누구의 고백도 아니지만 또한 모든 이들의 고백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선행의 고해성사인지 악행의 고해성사인지는 나도 모르겠다고. 악마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될 날이 있을 거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나는 꿈속인 듯 몽롱하게 보았다. 최 부장이 고개를 들고 남은 맥주를 잔에 채웠다. 문득 새로운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악마에게 고해를 한 적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은승완∙200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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