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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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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④
귀하게 여무는 삭임의 시들
정군칠의 물집,
김응수의 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
안현미의 이별의 재구성
오래오래 삭인다는 것은 시간 이상의 품격을 지닌다. 경외스럽다고까지 할 그 어떤. 그것이 감정이든 물질이든 심지어는 젓갈이든 간에. 나는 그 감정에 옷깃 여미고 그 물질에 고개 숙이며 그 젓갈에 간절한 눈빛 보낸다. 삭이는 것은 익히는 것과 달라서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고 또 그 색이 아주 바래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원재료가 제 본색을 다 잃어버리기 직전 그 아슬아슬한 찰나에 문득 싸하게 퍼지는 느낌, 나는 그걸 ‘삭임’이라 여긴다.
삭임은, 그런 점에서 속삭임일지도 모른다. 소리로 읽으면 삭임은 속삭임의 맛을 낼 것 같다. 외침이나 절규가 아니라 속삭임, 그 간질이는 파동의 맛. 그러나 웬걸, 속삭임이 곧잘 세상을 흔들어 놓듯 삭임도 힘이 세다. 저 자신을 느슨하게 풀어서 상대방이 스스로 무장 해제토록 만든다. 삭임은 그런 면에서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한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터억 씌우는 것이다.
시에도 이런 삭임의 시들이 있다. 이성과 감정을 묘하게 삭인 언어로 포박하여 심상을 흔들어 놓는다. 세상을 향한 시선과 사유가 곰삭은 이런 시들을 대하면 마음 참 포근하다. 좌절과 절망을 앓다가도 불현듯 뜨끈한 온기 같은 게 스며듦을 느끼게 된다. 등과 밑자리가 든든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개인에 집중하거나, 난해하기 짝이 없는 언어로 혼자만의 관계망을 설정하는 시들이 늘어나는 요즈음, 나는 이런 삭임의 시들 앞에서 아연 경건하다. 삭임의 시들, 받들어 드리고 싶다. 귀해서 눈물겹다.
늦가을 사유 여무는 계절에, 삭인 시가 어떤 건지 알려주는 시집들 펼친다. 정군칠의 물집, 김응수의 낡은 전동타자기에 대한 기억, 안현미의 이별의 재구성이다. 삶의 아리고 쓴 맛을 두루 겪어낸 이들의 만만찮은 여적이 착실히 고여 골고루 삭혀 있다.
1. 정군칠, 아련한 아림과 통찰
정군칠은 섬을 삭인다. 바다 냄새 짭짤한 그 삭임 속에는 삶과 자연의 간난고초艱難苦楚가 다 들어 있어 독특하게 아리다. ‘아련한 아림’이라고나 할까? 서러운 듯 아리고 매운 듯 정겹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그의 시가 포즈만 취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섬의 시, 그러면 대체로 일단 섬의 애환부터 뇌까리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군칠은 이런 표면적 시선에서 점잖게 비껴난다. 섬을 그리되 섬만이 아니라, 삶을 그린다. 섬과 함께, 뭍과 섬을 동시에 껴안는 통찰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그리는 것이다. 소재는 섬일지언정 그의 시선이 닻 내리는 곳은 인간 삶의 현장이다. 착 가라앉은 그의 시선에 포착된 섬과 바다, 섬사람들의 하루하루는 부드러운 듯 질기다. 그것은 “품은 것 없으니 날릴 것 또한 없다”는 심심한 여유, 그 체념적 달관과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고 해서 눈매가 비관 쪽으로 실리지도 않는다. 차분한 관조 같은 역정이 거기에는 실려 있다. 역사를 삭여 넘어선 자의 너그러운 품성도 담겨 있다.
품은 것 없으니 날릴 것 또한 없다
비양오름은 사람의 주검조차 품지 못하고
묘비 하나 세우는 일 또한 없다
왜 비양도에선
소나무 억새 대나무 잎 끝이
파도에 관절 다 깎인 노파의 눈을 닮았을까
새벽부터 통통배 몰고 나간 아들과 며느리를 기다리며
생을 놓았다 끌어당기는 노파의 눈빛을 닮았을까
卍자 새겨진 컨테이너 박스 앞에
오도카니 나앉은 노파
촘촘한 주름살 사이로
바다의 골과 골을 들인다
절 마당에서 이제 막 꽃문을 닫는 봉선화가
노파의 손등에 화인으로 남는다
―정군칠, 「비양도飛揚島-卍」 전문
비양도에서 시인이 주목한 이는 늙은 노파이다. “파도에 관절 다 깎”이고 “새벽부터 통통배 몰고 나간 아들과 며느리를 기다리며/생을 놓았다 끌어당기는” 노파, “卍자 새겨진 컨테이너 박스 앞에/오도카니 나앉은.” 언뜻 이 노파는, 비양도의 벼랑처럼 가파른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노파의 눈빛을 잘 들여다보라. 몸피는 비록 말랐을지 몰라도 “촘촘한 주름살 사이로/바다의 골과 골을 들”이는 노파는 실은 보살 같다. 마침 시인도 컨테이너 박스에 새겨진 卍자에 관심 기울이거니와, 그런 관조와 달관이 노파에게서는 풍겨 나온다. 그러므로 “절 마당에서 이제 막 꽃문을 닫는 봉선화가/노파의 손등에 화인으로 남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물론, ‘화인’을 화인火印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 시 맨 첫 행인 “품은 것 없으니 날릴 것 또한 없다”와 상관짓는다면 고개 갸웃거릴 수도 있다. 무위와 무욕의 달관인데 무순 화인인가 싶을 터이다. 나는 이 화인을 화인花印과 화인化人으로 읽고 싶다. 봉선화는 노파의 손등에 꽃 그림자로 남고 그 연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남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주검조차 품지 못하고/묘비 하나 세우는 일 또한 없”는 비양오름이라고 할지라도 영 팍팍하지만은 않다.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정군칠, 「바다의 물집」 부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하는 시인에게 바다는 어떤 존재일까.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이면서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이다. 온갖 감정의 찌꺼기라든지 환란, 울음마저도 물집 터뜨리듯 터뜨려 버린 바다이다. 그러므로 바다는 그야말로 삭임의 절정이다. 시인은 그 삭임의 바다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으나 그 삭임은 오래도록 남아서 “애기 업은 돌”처럼 그를 지탱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저에서는,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이 늘 함께할 것이니 그걸 상상만 해도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삭임과 부품의 절묘한 결합 아니랴, ‘바다의 물집’은.
2. 김응수, 신인神人의 손놀림
김응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삭인다. 수많은 생명을 보내기도 하고 되살려내기도 한 그는, 아무래도 연마되지 않는 감성들을 삭이느라 만만찮은 내공을 쌓고 있다. 피해 갈 수 없는 삶과 죽음의 현장에 선 그에게 생명은 관념이 아니다. 손끝에 전달되는 생생한 파닥거림이다. 어쩌면 그의 손은, 신의 손일 수도 있다. 나는 의사라는 직분을 생명을 관장하는 신의 대리자라 본다. 그러므로 그의 손놀림은 예사롭지가 않은 것이다. 그럴 때 그의 손은 생명을 다루는 신성神性의 손이다. 그러다가 그가 삶의 이 켠을 자각하는 희로애락을 기록할 때 그의 손은 시의 손, 인간의 손이 된다. 그러므로 김응수의 손은 신인神人의 손이다. 물론 신인의 손이라고 해서 기적을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소멸과 환생의 절절한 현장을 늘 손으로 감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감성과 인식과 사유를 적절하게 삭이지 못한다면 감정이입 된 그는 온전하게 삶을 영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거기서 자신의 죽음을 응시한다면 어떻게 오늘과 내일을 살아나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응수는 다행스럽게도 참 다사롭다. 냉정과 다정 사이에서 다정 쪽으로 설핏 기울어져 있다.
그가 죽었다
심폐소생술을 그만두자
머리맡엔 이승의 평행선이 장식되고
서둘러 입술이 트도록 설명했다
형은 양손으로 뺨을 부비고
꿇앉은 형수는 내 가운을 뜯지만
딱- 하는 소리로 인공호흡기의 전원을 내렸다
그래, 꿈도 없는 잠
피곤한 마음은 우울하거나 암울하지 않고
고통으로 몸부림치지도 두려워서 부들대지도 않지*
빈 병상……
영안실로 보내고
삼주 동안 정들었던 자리만 빈 중환자실
병상으로 다가가
앉기도 하고 갈색 매트리스에 누워도 보았다
나이 든 간호사는
단련된 나이에 그러느냐고 달래지만
갈비뼈가 열 개나 부러져 아팠던 망자의 설움이 비좁은
가슴으로 들어와 삐끗하는 통증에
순간 가운을 여몄다
잘 가게
보내야겠네
나를 보내주어야겠네
*G. 로제티, 'Sleeping at Last' 부분 인용.
―김응수, 「다시 손을 씻다」 전문
마치 선언처럼 “그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이 시의 첫 연은 냉정하다. “딱― 하는 소리로 인공호흡기의 전원을 내렸다”라는 표현에 이르면 냉혹하기조차 하다. 시인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의사가 선뜻 떠오른다. 그러나 의사는 곧 사라지고 2연부터는 한없이 나약한 시인이 나타나는데, 그는 “삼주 동안 정들었던 자리만 빈 중환자실/병상으로 다가가/앉기도 하고 갈색 매트리스에 누워도” 본다. 환자와의 감정이입을 쉬 삭이지 못하는 것이다. 죽은 자의 영령이 49일 동안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중음中陰 공간에 머물듯이 그도 아마 죽은 자를 최소한 49일 동안은 저승으로 보내지 못할 것이다. 환자와 그는 “갈비뼈가 열 개나 부러져 아팠던 망자의 설움이 비좁은/가슴으로 들어와 삐끗하는 통증”을 유발시킬 정도로 교감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 교감은 마침내 가운 여미며, “잘 가게/보내야겠네/나를 보내주어야겠네” 읊조리게 만드는 것인데, 여기서 의미심장한 도치가 일어난다. “나를 보내주어야겠네”의 ‘나’를 의사(혹은 시인)로 읽을 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문득 풀어져 버리는 것이다. 살아 있는 ‘나’의 삶이 의미 없는 연명이라면 그것이 죽은 자와 뭐가 다를까. 그는 ‘다시 손을 씻’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그렇게 삭인다.
겨울밤은 일찍 찾아온다
매나니로 맞는 차가운 물빛
어린 딸을 업고 건넌다
추우냐, 겨울바람이 추우냐
까만 하늘에 회색 구름이 몰려와요
어깨를 더위잡은 딸의 가슴이 콩닥거린다
징검다리를 뛰어넘으며,
고개를 들지 마라 밤구름이 무섭지
밑을 보지 마라 살얼음이 있단다
뒤뚱거리며 좁다란 내를 건넌다
조금만 기다려라
동트면 냇물의 날숨까지 보여 주마
개나리 피는 봄도 멀지 않단다
그땐 아빠 팔뚝만큼
튼실한 다리 위로 휭허니 건너게 하마
몇 발짝 돌덩이를 건너니 어깨에 있던 딸이 등 뒤로 오고,
등 뒤에 있던 딸이 허리춤에 내려오고
아빠
이제 어린 애가 아니에요
겨울밤은 빨리 흐른다
준비 없이 매나니로 맞는 차가운 물빛
딸을 업고 건너던 내를 아비새 물을 차며 날아간다
―김응수, 「어둔 날 작은 내를 건너다」 전문
딸아이를 등에 업고 겨울밤 작은 내를 건너는 풍경이 따스웁다. 아이는 자꾸 자라 이미 어린 애가 아니지만 아빠는 여전히 딸에게 등 내밀고 있다. 아이가 아무리 컸다고 하더라도 아빠에게 아이는 늘 보호해야 할 아이일 따름이다. 아빠는 말한다. “추우냐, 겨울바람이 추우냐” “고개를 들지 마라 밤구름이 무섭지/밑을 보지 마라 살얼음이 있단다.” 이런 존재가 아빠이다. 아빠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이런 식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현대사회에서 아이와 아빠의 이와 같은 교감은 사라져 버린 것 아닌가. 나는 이 시의 이면에, 이런 부정父情이 부정되는 세상 고발의 의미가 흐르고 있다고 믿는다. 사장된 부성 가치의 재발견을 위하여 시인은 자기 경험을 슬며시 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혹 누군가는 이를 낡은 가치라고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부정父情 회복에 적극 찬동한다. 자본주의 현대사회는 상품구매자인 모성과 여성을 띄우면서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하게 남성과 부성을 일그러뜨린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여린 문화적 편린들이 사람들 감성을 장악하고 있다. 아이의 등이 되고 등불이 되는, 두텁고 그윽한 부성父性 발현이 그립다.
3. 안현미, 발랄한 전복의 재발견
안현미는 과거와 현실과 미래를 통시적으로 삭인다. 안현미에게 시간은 삭이는 것이다. 물론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공간을 안현미식으로 삭이어 재구성한다. 그는 부조리한 이 현실, 이 지구라는 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도저히 그대로 놔둘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어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때 유력한 도구가 언어의 재구성이다. 언어의 기표와 기의를 시 속에서 발랄하게 뒤집는 것이다. 언어가 전복되면서 현실의 시공간도 시 속에서 전복되는데, 여기서 묘미가 발생한다. 세계가 단순히 뒤집어져 보이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전복의 재발견이다. 그러나 전복되었다고 해서 애초의 문제의식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식은 문제의식대로 삭여 있는 채 존재한다. 이것이 다른 시인과 안현미를 구분 짓는 변별점이 아닌가 싶다. 그는 발랄한 전복 속에서도 문제의식을 공글리는 반면, 최근 난해시를 써대는 시인들은 대상을 완전히 이전해 가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 행과 한 행 사이를 이어갈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식이 수렴되지 않고 흩뿌려져 버린다. 이런 몽롱함을 노리는 것인가, 미몽 속을 헤맬 때가 적잖다.
소통되지 않은 자의식, 폐쇄된 인식 세계를 강압적으로 제시하는 시들 속에서 안현미의 삭인 시들, 발랄한 전복은 오연히 빛난다.
저녁을 훔친 자는 망루에서 펄럭거리는 깃발에 피를 퍼부었고, 권력과 자본의 화친은 미친 화마를 불러왔다
북적이는 시장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지혜롭게 늙어가던 포도나무는 철거용역들이 함부로 휘갈긴 빨강 래커 스프레이 해골들만 득시글득시글거리는 철거촌에서 포클레인에 찍혀 죽었다
한 번 태어났지만 돈이 없으면 두 번도 세 번도 죽어야 하는 세상
저녁을 훔친 자들만의 장밋빛 청사진
뉴타운천국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내 집 주니 셋집 주네?
풀 풀 풀 정처도 없이
뿔 뿔 뿔 정체도 없이
어떤 사람들은 어느날 느닷없이 왼손을 잘리고 남은 생을 오른손잡이로 살아가야 하는 왼손잡이처럼, 자신의 뿌리를 잘리고 남은 생을 자신의 뿌리 바깥에서만 살아가야 한다
―「뉴타운천국」 전문
복받치는 울분의 감정을 삭이고 삭이는데도 맵싸한 통탄 같은 뇌전雷電이 등허리를 훑어내린다. 씁쓸하고 아프다. 시인의 발랄한 전복조차 서럽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두껍아 두껍아 내 집 주니 셋집 주네?” 발원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양이 애절하다. ‘뉴타운천국’이 어떤 천국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그 천국은 “한 번 태어났지만 돈이 없으면 두 번도 세 번도 죽어야 하는 세상”이며 “지혜롭게 늙어가던 포도나무”가 “해골들만 득시글득시글거리는 철거촌에서 포클레인에 찍혀 죽”는 천국이다. “자신의 뿌리를 잘리고 남은 생을 자신의 뿌리 바깥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삶터를 빼앗긴 자의 원성이 자자한 이곳은 천국天國이 아니라 천국賤國이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과 자본의 화친은 미친 화마를 불러왔다.” 이제 힘없고 갈 데 없는 사람들은 타버린 온 생애를 걸머진 채 “풀 풀 풀 정처도 없이/뿔 뿔 뿔 정체도 없이” 흩어져 피폐의 한 생을 진물로 견뎌야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들린다.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뉴타운천국에 길게 퍼진다.(「여자비」 중에서) 동냥젖으로 키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뉴타운이 들어서면서 지상에서 사라졌으나 젖으로 이어진 생명의 끈조차 없애지는 못했다. 어떻게든 세상은 다시 전복될 것이다.
나하고 나 사이에 늙고 엉뚱한 종족들이 있지 내 별로 놀러오는 나들 나들 때문에 그 종족들은 불편하다고 불평하며 불안했어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사랑했지 난 정드는 게 특기니까 하루가 영원 같고 영원이 하루 같은 무협 판타지 같은 날들이었어 난 그날들을 CD로 구웠지 구워진 CD 속에서 난 무릎이 아팠어 너무 많은 감정을 과소비하고 게다가 너무 많은 눈물을 삭제했으니까 수만년 전부터 이 별은 아팠어 늙고 엉뚱한 종족들은 이 별의 종말을 전지구적으로 살포하면서 우리 종족의 언어를 모두 쓰레기통에 넣고 서둘러 이별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우리 종족의 위대함은 휴지통이라는 아이콘에 있지 ‘복원’이란 단추를 내장하고 있는 그러니까 이별을 이 별로 굽거나 이 별을 이별로 굽는 따위의 일은 우리 종족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란 거지 고통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통을 받는 방법은 선택할 수 있다, 빅토르 프랑클, 멋지지? 이게 이 별의 재구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이란 엉터리 판타지 같은 이 시에 대한 키워드야, 친절하지?
―안현미, 「이 별의 재구성 혹은 이별의 재구성」 전문
나도 이 별을 재구성하고 싶고 이별을 재구성하고 싶다. 원치 않는 이 별 구석구석쓰레기 같은 자취들은 모조리 지워 CD로 보관하고, 사랑하는 의미들로만 이 별을 구성해서 이별 같은 것은 필요할 때만 재구성하고 싶다. 정드는 게 특기인 사람들, 감정과 눈물을 제대로 흘릴 줄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별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다가 이별을 하게 되면 또 어떤가. 이별은 이별대로 재구성하면 그뿐. 말장난 같은 반복과 어의 전성, 의미 전복들을 헤치고 찾아낸 이 시에 관한 내 재구성은 이와 같다. “하루가 영원 같고 영원이 하루 같은 무협 판타지 같은 날들”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나를 압박하고, 늙고 엉뚱한 종족들은 “이 별의 종말을 전지구적으로 살포하면서 우리 종족의 언어를 모두 쓰레기통에 넣고 서둘러 이별하고 싶은 눈치”지만, 어떠랴. 나는 다 삭이어서 내 식대로 사랑하고 내 식대로 이별하련다. 그러므로 ‘펄럭거리는 내 깃발에 함부로 피를 퍼붓지 마라.’(「뉴타운천국」 1행 재구성) 시인은 올연히 발랄하게 말하는데 나도 적극 동의한다.
4. 시를 삭인다는 것은
시인들이 대상을 삭여 시로 쓸 수 있기까지에는 많은 곡절이 스며든다. 아니, 어디 스밀 뿐이겠는가. 앓고 드러눕고 지칠 때까지 통곡도 하고 또 쓰러지면서 견뎌온 시간들이 거기에는 쟁여져 있다. 어쩌면 채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들쑤시며 삭이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는 입장에서는 시인들이 더 힘겨운 곡절의 시간을 맞이하길 바랄 것이다. 그렇게 아로새겨진 삭임의 사유야말로 시다운 시를 생산하는 기반이 될 터인 까닭이다.
자,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삶의 아리고 쓴 맛을 두루 겪어낸 이들의 만만찮은 여적이 착실히 고여 골고루 삭혀 있다.”고 썼다. 과연 그렇게 느끼셨는지 궁금하지만, 내 글은 여기까지다. 혹 그 느낌이 모자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그 점을 감안하고 다시 읽어주시길 간곡히 요청 드린다. 시를 삭인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기울여 그 시에게 애정을 쏟는 것이다. 삭이는 만큼 시에서 경외의 기쁨 얻으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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