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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젊은시인 집중조명/정진경의 시/해설/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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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60회 작성일 09-12-21 00:50

본문

해설
미지수 ‘x’는 존재를 구해낸다
―정진경의 시
김대성|문학평론가


1. 시인 : 속도를 먹다
속도는 시간과 공간을 지운다. 아니 시공간을 게걸스럽게 먹으며 제 몸을 불려간다. 속도는 제 몸에 또 다른 속도를 더 한다. 김수영식으로 말해 속도는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다. 가속加速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여 제 몸을 불려가는 속도의 동사형이라고 할 수 있다. 속도가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인다는 것은 그것들을 자신과 같은 형태로 환원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속도에는 종류가 다른 사물들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강력한 등식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등식은 다름을 같게 하라는 명령이다. 속도 속에서 사물들은 하나의 ‘몸’으로 수렴되어 제 몸을 불려나가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속도를 모든 것을 빨아들여 저 스스로를 불려가는 자본주의의 ‘몸’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인간이 속도에 매혹되는 것은 사물들을 하나의 형태로 환원해버림으로써 그것을 파악하고 다룰 수 있게 만드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속도는 산술에 능하다. 종류가 다른 두 개체도 하나로 합해버리거나 곱하고 나눈다. 요컨대 속도는 술어述語적이다. 
‘A는 B이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떠올려보자. A와 B는 엄연히 다른 것임에 불구하고 ‘~이다’라는 술어적 명령에 의해 이 둘은 화해롭게 만난다. 속도는 이 결합을 화해롭게 만드는 명령을 속성으로 하고 있다.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은, 아울러 우리가 속도에 매혹되는 것은 이 화해로움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 달콤함은 사물을 명명하고 규정지음으로써 그것을 도구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쓸모없는 것들은 소멸하고 쓸모 있는 것은 속도 속으로 편입된다. 아니 그보다 속도가 사물의 쓸모와 쓸모 없음을 구획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속도는 사물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현실 속에 존립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지만 결코 사물 그 자체를 온전히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속도가 지배하는 공간은 사물들의 화해로운 조합에 의해 보다 매끄러워지겠지만 그 만큼 많은 결락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매끄럽게 구획되어 있는 도시에 외려 ‘미아’가 많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은 도시를 떠돌고 있는 미아들, 술어적 폭력에 의해 산산조각나버린 사물들이 속도를 빌리지 않고도 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속도의 질서에 제 몸을 던져 사물들을 구출해낸다고 할 수 있겠다. 시적 언어는 사물을 사물로서 드러내며 사물이 스스로 말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지껏 들어보지 못한 그 말들은 폭압적인 속도에 의해 조난당한 말들, 탈구脫臼되어 있는 말들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탈구되어 있는 말言이 기거할 수 있는 공간寺을 마련하는 이를 우리는 시인詩人이라고 불러오지 않았던가. 
요컨대 시인의 존재는 속도 방지턱과 유사하다. 제 몸 불리기를 멈추지 않는 속도는 시인에 의해 ‘도약’한다. 이 사고를 ‘도약’이라고 표현한 것은 제 몸이 허공에 떠 있는 동안 속도는 자신의 속도에 대해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도가 제 속도에 의해 전복될 때 우리는 그간 탈구되었던 말들을 획득할 할 수 있다. 이 시간을 ‘사물의 말’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해도 좋다. 

2. 미지수 ‘x’ : 방정식을 만들다
정진경은 속도의 질서에 의해 수치화되어 있는 존재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수치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밝혀낸다. 그 행위는 군더더기 없이 잘 짜여 있는 옷감을 다시금 풀어 실타래로 만들어버리는 훼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훼방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공식을 눈앞에 펼쳐보인다. 할당 받은 우리들의 수치가 어떤 연산과정을 통해 배당된 것인지를 풀어서 보여주는 그의 작업은 잘 짜여져 있는 규칙들에 의해 단순화되어 있던 세계와 존재들을 다시금 복잡한 숫자들과 연산들의 관계로 흐트려 놓는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들을 규정하고 있는 각종 수치들은 자명함을 상실하고 의미의 권역에서 이탈한 기표가 되어 우리 앞에 서게 된다. 의미의 좌표를 상실한 개체들은 역설적으로 어떠한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 단독성(singularity)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문제들을 정답이라는 목적지까지 이르는 경로에 대해 고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다시 문제로 돌려 세우는 연산을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정진경의 연산은 사물을 교환가능한 방식으로 수치화해버리는 속도의 연산을 무화시킨다.
정진경의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방정식을 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의 방정식은 ‘x값’에 알맞은 수치를 추적하는 데 골몰하지 않는다. 예컨대 등식이 참이 되게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변수의 값에 관계없이 항상 참인 ‘항등식’에 미지수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 미지수에 의해 항등식은 설 곳을 잃어버린다. 바꿔 말해 그가 ‘푸는’ 방정식은 ‘x값’을 찾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 ‘x’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정진경이 마련한 ‘x’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명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등식’을 이루어왔던 숫자나 수치들이 위태로운 상태로 탈바꿈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x’의 자리가 대칭항과 ‘x’와의 관계의 패턴이나 공식을 구획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외려 우리가 미처 지각하고 있지 못한 패턴이나 공식을 보여줌으로써 항등식으로 여겨왔던 관계들이 자명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규칙을 공유하는 구조에 의해 이루어져 왔던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자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정진경의 시는 문제를 푸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만드는 것에 골몰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도구화되어 있던 사물에 미지의 ‘x’를 부가함으로써 그 쓸모의 체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라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정진경이 푸는 방정식은, 아니 정진경이 만들어내는 방정식은 고고학적 시선을 근간으로 한다. 그 시선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진보론적 역사관에 의해 구획되는 선형적 질서의 결을 거스르는 솔질을 닮아 있다. 진보론적 역사관에서 과거는 현재를 위한 시간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현재 또한 미래를 예비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충만한 시간’은 자꾸만 이후로 미루어진다. 문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과거적 권위에 결박당해 있는 탓에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진보적 역사관이야말로 매번 현재를 포기하게 만드는 하나의 ‘환등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진경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만들어지는 ‘상품’에 집중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시인의 고고학적 시선에 포착된 상품들이 ‘환등상’으로 규정됨으로써 비판적 자리를 확보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외려 그 상품들 속에 내장되어 있는 역사를 불러냄으로써 교환 가능한 방식으로 구획되어 있는 ‘상품’을 ‘사물’로 재구성하는 데 집중한다. 바꿔 말해 시인의 고고학적 시선은 상품들 옆에 ‘x’라는 미지수를 만들어내며, 그 미지수에 의해 상품들은 균질화 된 체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경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시인이 부가한 ‘x’에 의해 ‘상품’의 자명성은 위태로워진다. 

통로는 좁았어요 에스컬레이터로 도착한 층계에서 핸드백 같은 하이힐 같은 그리고 벨트 같은 짐승들 허울을 보았어요 내게도 하나쯤 매달려 있는 쇠가죽 핸드백 지퍼를 열때마다 슬프게 눈 껌벅거리는 황소의 긴 숨소리가 옆구리에 지근하게 파고들었어요 세상 모든 짐승들이 뿜어내는 숨소리의 올가미에 나는 깔려 있었어요 어둠을 찍어 짐승들은 내 뇌리에 벽화를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어요 뿔을 그리고 등뼈를 그렸어요 천정 어디쯤엔 별 몇 개, 옛날 수림을 찾아 푸른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층계를 빠져 나오기도 전에 슬픔을 껴안은 조그만 동굴 하나, 수렁처럼 아득히 뚫려 있었어요

―정진경, 「알타미라 벽화」 부분(알타미라 벽화, 현대시, 2003)


 백화점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상품들은 ‘상품’이 아닌 ‘짐승의 허울’로 전도顚倒된다.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이 동물들의 가죽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외려 핸드백, 하이힐, 벨트처럼 보인다고 의뭉스러운 어조로 말하는 시인에 의해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여 상품이 만들어지는 선후체계가 붕괴된다. 시인의 눈에는 진열되어 있는 것이 상품이 아니라 동물의 허울에 다름 아닌 셈이다. 상품에서 동물의 모습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현현하고 있는 상품을 동물로 간주하는 이 전도야 말로 정진경 특유의 방정식을 만드는 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방정식은 ‘x값’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다만 ‘x의 자리’를 만들어줌으로써 상품의 자명함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 위태로운 자리에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의 자질들과 조우하게 된다.

상품과 동물의 이 같은 전도는 얼핏 자본주의 상품 시장을 비판하던 기왕의 시선들과 궤를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통해 동물의 형상을 포착해냈던 시선과 달리 시인은 동물의 형상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기에 그들의 ‘숨소리’를 더욱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황소의 긴 숨소리가 옆구리에 지근하고 파고들”며 “세상의 모든 짐승들이 뿜어내는 숨소리의 올가미에 깔려” 있다는 시인의 토로는 문학적 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생생한 실감에 의해 상품으로 치환되었던 동물의 허울과 시인 사이에 은폐되어 있던 ‘벽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시인이 벽화를 그리는 사람이라고 서둘러 규정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진경은 벽화를 그리기보다는 벽화를 그릴 수 있는 벽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벽화는 사물들이 사물로서 드러내며, 사물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정진경이 마련한 벽화는 사물들의 말로 채워져 갈 것이다. 이렇게 마련되는 말言들의 공간寺, 그것이야말로 시적 언어가 발현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3. 몸 : 사건을 기록하다

그런 점에서 인류의 척추뼈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하고 있는 작업(「등뼈에 관한 프로파일링」) 또한 ‘과거-현재-미래’가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역사 서사’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앞서 확인한 것처럼 정진경에게 있어 자본주의 상품은 배척해야 할 대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척추와 같은 것으로 전이되어 있는 탓에 부정의 대상으로만 간주될 수는 없어 보인다. 대신 그는 이 자명한 ‘척추-상품’들 곁에 ‘x’라는 기호를 가져다놓음으로써 현재라는 확정된 시간,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존재들의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 권력의 양상들을 비춘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마련한 ‘x’라는 미지수는 반사(reflection)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반사는 반성(reflection)을 촉발한다. 그것은 현재를 ‘도착 지점’이 아니라 ‘조난 부호’로 돌려세움으로써 응당 가야할 자명한 경로들을 회의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도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올곧은 등뼈가 없다는 건

직립은 진화의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등뼈는 몸을 지탱하기에 급급한 골조가 아니라

욕망이 지향하는 대로 끓는

빙점을 기억하지 않는 용광로이어서

휘어질 수밖에 없다

―정진경, 「등뼈에 관한 프로파일링」 부분


정진경에 의하면 인류의 진화를 가능케 했던 직립보행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인간의 몸은 “욕망이 지향하는 대로 끓는/빙점을 기억하지 않는 용광로” 같은 것인 터라 “휘어질 수밖에 없다”. 인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등뼈(척추)가 가변적이라는 시인의 언급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던 진화적 질서를 무너뜨린다. 시인이 진화의 정점으로 간주되어 왔던 인간의 몸, 다시 말해 직립이 진화의 끝이 아니라 외려 퇴화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은 멈춤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인간의 몸은 유한하지만 욕망은 “썩지 않고 불변하는 몸”(「혀는 묘혈을 타고 올라」, 알타미라 벽화)을 가지고 있기에 그 욕망이 실현되는 장소인 인간의 몸은 변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변형에 대한 경고를 인간의 몸에 대한 신성화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외려 시시각각 변모하는 인간의 몸이야말로 증식하는 ‘욕망의 공식’을 확인할 수 있는 ‘벽화’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상품을 전도시킴으로써 사물의 언어를 포착해낸 것처럼 정진경은 인간의 몸에 새겨지는 욕망의 공식을 통해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인간중심의 신화를 탈신화화 한다.

정진경이 인간의 몸에 관한 시를 지속적으로 창작하고 있는 것 또한 욕망이 은폐하거나 왜곡시켜 왔던 기록을 시시각각 변하는 몸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의 몸은 ‘사건’이 기록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몸이 “신성과 혐오를 동시에 함유하고”(「유통기한이 지난 여자」) 있다는 진술은 자연스럽다. 인간의 몸은 얼핏 욕망에 정복당한 식민지처럼 보이지만 그 힘이 언제나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몸은 욕망의 ‘프로파일링’이자 ‘알리바이’가 기록되는 장소이기에 ‘욕망의 실현’은 곧 ‘공식의 노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의 변형된 척추뼈에서 TV라는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벽걸이형 TV 인간」). 나의 몸은 나의 욕망에 의해 온전하게 포섭되지 않는다. 그곳은 사물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구이든 간에 알리바이를 요구한다는 건

몸 어디선가 철거덕,

덫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취조하려 들면

나는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알리바이는

내게서 증명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서 증명된다

―정진경, 「알리바이」 부분


정진경의 「알리바이」는 “굴절된 렌즈로 나를 보고 있”는 타인들의 시선에 대한 냉소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알리바이가 당신에게서 증명된다’는 진술을 다의적으로 해석해보자. 이때의 당신을 2인칭 ‘너’라는 축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테지만 한편으론 ‘나’라는 ‘주관’이 온전히 포섭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나’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몸에 새겨져 있는 욕망의 기록들을 비추어봄(reflection)으로써 가능한 것일 텐데, 이때 몸에 새겨져 있는 기록에는 ‘자아의 욕망’뿐 아니라 사물들의 형상까지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몸을 비춰봄으로써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행위는 얼핏 “나르시시즘의 함량이 과도한 거울”을 맹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굴절된 것은 타인의 시선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몸 또한 “굴절된 렌즈”를 통해서 바라보지 않았던가. 이 굴절된 렌즈는 일차적으로 자아중심적인 욕망에 의해 왜곡된 시각을 의미하겠지만 그것을 다시 한 번 더 ‘굴절’시켜보자. 이 ‘굴절’은 자명한 등식을 이루고 있던 질서에 미지수 ‘x’를 기입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이중으로 굴절된 시선에 의해 우리는 인간의 몸이 욕망만이 기입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환기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몸에는 욕망의 실현을 위해 계산 가능한 방식으로 도구화해버린 사물들의 흔적 또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은 것은 이미 지워져버린 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의 몸이야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물들과 몸이 만나는 ‘미지의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욕망의 공식이 가려버린, 혹은 기록되지 못한 정보들까지 확인할 수 있다.

해변가 단층의 아귀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기상청 통계자료를 맹신하고 있었다 그곳엔 태풍이 안타를 친 기록은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한 여름 열기를 가려줄 선글라스와 모자, 비치솔만 해변가 모래 위에 빼곡히 꽂아놓았다. 홈런은 예견하지 않은 도면에 그려진다는 걸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무안타 기록자가 가진 내공 같은 건 관심이 없었으므로

정진경, 「무안타 기록자의 홈런」 부분


“예견하지 않은 도면에 그려”지는 홈런은 “기상청 통계자료”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사건’에 다름 아니다. 인용문에서 지칭하고 있는 ‘태풍’은 세찬바람을 지칭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욕망에 의해 식민화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몸 또한 태풍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욕망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된 장소처럼 보이지만 결코 완전하게 장악당하지 않는 곳, 동시에 지워지지 않은 사물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곳, 인간의 몸이 시시각각 변형되는 것은 욕망의 변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물과 접촉하기에 몸은 저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변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사물을 교환 가능한 방식으로 변형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을 온전히 장악할 수는 없다. 인간의 ‘몸’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앞서 정진경이 거스르고자 했던 진보론적 역사관념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현재를 미래를 위한, 미래를 예비하기 위한 목적론적인 시공간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열리는 공간으로 재맥락화 하고 있는 태도에서 ‘안타’라는 기록이 없어도 ‘홈런’이라는 사건이 도래할 수 있는, ‘태풍-몸’의 예측 불가능한 속성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4. 시선 : 수술을 하다

정진경의 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는 동사를 ‘본다’로 꼽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시인에게 있는 ‘본다’는 행위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우선 시선으로 포착된 대상을 장악하는 폭력적 기능을 수행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본다는 것’은 주체의 시선으로 대상을 장악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대상 또한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본다는 행위’의 기저에 괄호쳐져 있는 ‘(마주)본다’는 의미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① 우리 속 원숭이가 우리를 보고 있어요 바나나 껍질 같은 미끄러운 속셈을 보고 있어요 너희 조상은 나라며 비웃고 있어요 가면을 둘러쓰고 웃던 우리들 표정이 벗겨지고 진화된 세월의 껍질이 먼지를 털고 있어요

―정진경, 「우리 속의 우리」 부분. 알타미라 벽화

② 지금은 수술 중

다음 관람자는 경계선에 서서

마취제를 투여하세요

살아오면서 조립한 의식들은

입구에 있는 보관함에 넣어두고

비밀번호 하나만 외워 두세요

붓끝이 도려내는 환부를

이식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미술관 벽면에 해부해 놓은

프리타 칼로와 만나면

수술은 금속성 메스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은 과감히 버리세요

상징의 비법으로 시술되는

프리다 칼로 메스

피를 흘리지 않는 칼질은

꿰매는 방법도 신화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정진경, 「지금은 수술 중」 부분


정진경에게 있어 ‘본다’는 행위는 자아라는 소실점을 중심으로 대상을 수렴시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시적 소실점에 의해 구성된 세계는 1인칭 자아에 의해 식민화된 세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정진경의 시에서 빈번하게 마주하게 되는 ‘본다’는 행위가 매번 ‘보여진다’는 상황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인용 ①).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계가 언제나 전도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을 때, ‘본다’는 행위는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것으로 변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본다는 것이 대상을 장악하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나 또한 대상에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게 만드는 탓에 나를 보고 있는 대상에 의해 ‘나의 위치’의 자명함이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그들을 보고 있는 우리들이야말로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존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주체의 자리’가 타자와의 관계항 속에 놓일 때 비로소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게 있어 ‘본다’는 행위는 회의와 반성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보는 행위에 의해 나라는 존재는 강화되기보다 위태로워진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가지고 있던 것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다. 보기 위해서는 나를 도려낼 각오를 해야 한다(인용 ②). 그가 ‘본다’는 행위를 ‘수술한다’는 행위와 등치시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진경에게 있어 본다는 행위는 언제나 대상에게 보여진다(인용 ①)는 것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인용 ②)는 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EMB000009d80a58.jpg 대상을 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쌍방향적인 시선은 자명한 것처럼 보였던 대상과 나의 자리에 미지수 ‘x’를 부여한다. 그 미지수 ‘x’에 의해 확고했던 우리들의 위치는 흔들린다. ‘나는 나다’라는 자명함이 ‘나는 x다’라는 불확정적인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미지수 ‘x’는 ‘관계’를 직조하는 중요한 공식이며 존재를,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쇳말인 것이다.


김대성∙2007년 ≪작가세계≫ 신인상 평론부분 당선. 주요평론으로 「종언 이후의 시공간과 주체성―골방과 수용소의 동물들」, 「감각의 사전과 찢겨진 서정시」, 「죽음과 글쓰기 : 애도(불)가능성에 관하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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