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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시/쓴다 외 1편/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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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
쓴다 외 1편
레닌그라드엔 눈이 내리고 나는 잠을 설쳤다 그리하여 쓴다 유충을 품은 서어나무의 경계심에 대해 파리에라와 칼라바르콩과 피마자와 솔라놈 멜론게나의 순정에 대해 그리고 이미 모든 것을 눈치 채 버린 어린 애인의 함박웃음에 대해 바로 그리하여 일식에 관한 여덟 가지 테제를 옮겨 적다가 늑골을 드러낸 자전거처럼 한때 그 자전거가 지나다녔을 지구 위의 어느 골목길처럼 교미를 막 끝낸 암사마귀와 그 암사마귀가 한창 교미 중이던 오후에게는 좀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고 그리하여 獸皮 등받이 의자를 사랑한 사제에 대해 또박또박 역도산이 처음 흘린 눈물처럼 폭력과 성스러움에 대해 신에게 속한 동물들에 대해 알 마문이 뚫어 놓은 대피라미드의 구멍에 대해 그리하여 제기동역 4번 출구에 앉아 황기를 팔던 노파가 질겅질겅 씹던 껌의 점성에 대해 이제 막 세운 게르 앞에서 馬頭琴을 탄주하던 처녀의 높고 느린 집착에 대해 恒河의 모래알을 세듯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경쾌하게 피어나는 무늬들 그리하여 저 산맥도 벌판도 굽이굽이 흘러 지금도 울리는 칼빈 총 소리 캔서론의 해변이 불타고 있다 리오니스의 초원이 불타고 있다 스콜피아의 정글이 불타고 있다 토우론의 목장이 불타고 있다 파이콘의 항구가 불타고 있다 카프리카의 도시가 불타고 있다 아쿠아리아의 바다가 불타고 있다 리브란의 법원이 불타고 있다 버곤의 숲이 불타고 있다 마침내는 龍山이…… 龍山의 大韓民國이 불타고 있다 점점 대뇌피질에서 菌絲가 자라난다 그리하여 아직도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니 먼촌 이모의 흰 발목에 돋던 소름에 대해 느닷없는 그 비논리적인 瀆聖에 대해 명랑한 유리처럼 그러니까 HD 포르노처럼 길가메쉬의 수메르어 판본과 아카드어 판본에 대해 유머의 정치경제학적 비판에 대해 언젠가 동쪽으로 불어 갔던 바람처럼 비단거북이의 문득 사라진 줄무늬처럼 정성스럽게 그리하여 茅台酒와 새우청경채볶음과 철없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차츰차츰 위중해지는 십팔 세기의 찻잔처럼 시어핀스키 삼각형에 대해 그 어느 개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다고 四旬節의 질긴 침묵에 대해 단란한 목책들처럼 늘어선 무한등비수열의 수렴 조건에 대해 증오한 적도 갈망한 적도 없는 이웃의 시체 위에 붉은 흙을 뿌리던 초모자 쓴 인디오처럼 세로 치리포를 날아다니는 푸른 모포나비의 숨겨진 귀에 대해 할 푼 리 모 사 흘 미 섬 사 진 애 묘 막 모호 준순 수유 순식 탄지 찰나 육덕 허공 청정 그리고 그리하여 도무지 헤아릴 길 없는 극명에 대해 그리하여 나는, 畢竟
•「지리산」;余力爲, 「Plastic City」; Edward James Olmos, 「Battlestar Galactica-The Plan」.
美
나무는 저마다 심장 하나씩을 감추고 있다 어떤 새는 나무의 심장을 본떠 둥지를 짓는다 그 나무 아래 어제처럼 새가 오갈 길을 더듬는다, 문득
문득이다 길이 갈라지고 시간들이 쏟아진다 한순간 호수 한가득 천 개의 귀가 열린다
必滅! 必滅!
지구가 나부낀다
채은∙2003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으로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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