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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시/ 보라에게 외 1편/현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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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택훈
보라에게 외 1편
보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날마다 날마다 불러보는 이름
보랏빛 구름 흐르는 하늘
보랏빛 잔디 위에 누워
보랏빛 노래를 흥얼거리네
보랏빛 강심 속으로 들어간 너의 종아리와 손가락과 입술과 머리카락과 눈동자와 골목길과 교차로와 국도와 보랏빛 바다
수영금지 구역에서 보내는 계절
밤마다 아무도 몰래 물속으로 들어가네
물속에는 보랏빛 물푸레나무가 있고
그 옆에 보라가
제비꽃처럼 앉아 있네
언제나 젖어있는 머리카락
아침이면 축축해진 몸으로
나는 보라에게 늦은 편지를 쓰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네
그 편지의 사연 속에 네가 있네
보고 싶은과 처음부터 사이에서
반으로 접히는
보랏빛 물안개
허송세월
문득 허송세월이 떠올랐다
이 말을 제목으로 시 쓸 생각
으로 한 보름을 보냈다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 허송세월을 쓴다
커서가 시계처럼 째깍째깍
명멸한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어디
갑자기 다른 데서 온 것인가
생각의 해저 몇 만 리 속에서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떠오른 허송세월
이 시 제목을 정할 때까지 얼마나 걸린 걸까
한 삼십 년, 아니, 한 천 년
제목을 정하고서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불을 켜자 파랗고 빨간 불이 홧홧 오른다
창밖엔 눈이 내리면 좋겠지만
지금은 6월
12월까지 세월을 보내야 하는데
창밖엔 은행나무가 푸르다
어느덧 물이 끓고
메아리 산악회 10주년 기념 스텐 컵에
커피와 설탕을 넣고서
뜨거운 물을 따른다
티스푼으로 휘저으니
지난날처럼 커피와 설탕이 녹는다
아득한 커피 향기를 맡으며
시의 첫 행을 쓰려는 순간
제목 허송세월이 아주 먼 과거처럼 느껴지면서
점점 멀어진다
뜨거웠던 커피가 몇 분 만에 식어버리는
스물 몇 행 즈음에서
물푸레나무가 있는 계곡 위에서
커서는 명멸을 하고,
현택훈∙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다층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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