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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시/너의 방 외 1편/이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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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11회 작성일 09-12-2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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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체
너의 방 외 1편


나는 너를 아는데 네가 없다
요컨대 이건 네가 내게 말해주는,
최루성의 이야기들
남겨지지 않는 촉각으로 목소리로
혼자 잠들 수 없는 밤, 방에서
빛이 나간 전구도 흔적만큼은 갖고 있지
얼마나 더 해야 할까
전하기 위해 하는 말들, 전하려는 말이 아닌
나는 무디지 아니, 더디지
아니, 무디고 더디지
충분히 망가졌고 충분히 망했다
모서리마다 희끗희끗 빛나는
전구가 남기고 간 이야기들
들을 수는 없는데 듣느라 잠들지 못한다
너는 내게 너조차 남기지 않았고
나는 왜 아직도 살아서 이 참담을 듣는 거냐
짧은 필라멘트가 길었던 기억들을 보고 있다
이 방을 모두 빛내려고
그만큼 없어졌던 거지
사랑이라면 그렇게 남겨두어야 하는 걸까
남아야만 하는 걸까
사각으로 갈라진 바닥이
깊이 병들어 어둡다

너는 나를 아는데 내게 너를 두지 않는다
빛은 만질 수 있는 목소리야,
들리지 않아도 만질 수는 있는

 

 

 


친절한 세상


비가 내리고, 참으로 울상이다. 하늘을 가릴 우산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썼던 일기들로 나는 나를 지워 갈 예정이다. 자, 암송하지 않는 일기를 보아라. 관을 메고 세상 곳곳의 성당을 찾아 떠돌던, 수두룩한 기억들이 지면에 적혀 있다. 먼지 낀 거울을 보아라. 늙은 잿빛으로 더럽혀진 세월을 닦아내느라 나를 보지 못하는 나. 그 때까지, 나는 감탄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성당 끝자락의 한 가운데에 있던 제단은 붉은 제라늄이고 그 양쪽으로 늘어선 촛불들. 십자가엔 피 묻은 예수가 없다. 이 관엔 반드시 내가 들어가겠다. 기도를 시작하고 비는 내리고. 나 사랑해? 그런 걸 왜 물어봐. 이건 아마도 내일 기록될 일기. 빗줄기가 아무리 세차도 노래할 수 있는 시가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어린 아이이고 싶지만 눈은 이미 모든 걸 보고. 감당한다는 것이 무겁고 무섭다. 진심으로, 나 사랑해? 묻지 마. 고마워. 서커스는 이제 끝이다, 세상의 둘레에서는 짐승이 아닌 것들이 재롱을 떨고, 성당은 우리인 셈이다. 암송하지 마라, 내가 말하지 못한다는 걸 내가 알게 될까봐 두렵다. 십자가를 보며, 빗줄기들이 그어진 하늘을 보며. 모르고 싶은 것들이 있어. 더럽혀지지 않은 세월을 더럽힐 것이다, 더럽혀서 거울에 비춰보곤 웃겠다. 사랑해. 예배가 끝나기를 소원했기에 서둘러 성가를 부르고 사도신경을 외우던, 어린 내 모습. 더 이상 관을 메고 싶지 않다고 기도한다. 세상은 이토록 친절하다.


이이체∙2008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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