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6호(2009/겨울);초점/ 박찬일론/문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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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比․批|
박찬일론
― 시집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를 중심으로
문덕수|시인
1.
비유 구조 자체와 작품에 보이는 특정 비유구조는 물론 구별해야 한다. 비유 구조 자체는 일종의 틀로서 거의 영구적이고, 작품 속의 특정 비유는 거기에 결부된 사물이나 관념의 변화는 있겠지만, 비유 구조 자체의 영구성에 기생寄生하여 거의 반영구적 구조를 갖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한 단적인 예로서 기독교나 예수의 비유와, 붓다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비유는 거의 2천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시인들이 계속 이 패턴화된 오랜 비유를 계속 도습하고 있음은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생명나무의 ‘열매’(창세기 3:1), ‘뱀’(창세기 3:1~5), ‘어부’(마태 4:19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씨’(마태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마가 4:13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길’(마태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다”), 붓다의 ‘씨’와 ‘비’(수타니파타 77, “내게 있어서 신앙은 종자種子다. 고행苦行은 비다. 지혜는 나의 멍에이고 호미다. 부끄러움은 호미자루다. 마음은 얽어매는 새끼줄이다.”), ‘뱀’(수타니파타 1, “뱀의 독이 퍼지는 것을 약으로 막는 것처럼, 분노를 참는 수행자(비구)는 이승과 저승에서 다 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 낡은 껍질을 버리는 것과 같다”), ‘연꽃’(수타니파타 2, “연못의 연꽃은 물속에 들어가야 꺾을 수 있듯이, 깡그리 애욕을 끊은 수행자는, 이승과 저승에서 모두 버린다. ― 뱀이 허물을 벗고 낡은 껍질을 버리는 것과 같다.”) 등의 비유는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2천년 전과 같은 뜻으로 생동하고 있다. 비유의 영구성은, 첫째 그 구조의 자체의 영구성, 둘째 그 유의喩義의 의미 불변성이다. 문제는 비유 자체의 구조보다 유의 구실을 하는 사물의미의 불변성에 맹종하거나 그것을 좇는 것이 탈관념을 못한 증좌이지만, 박찬일은 여기서 이미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2.
박찬일의 시집에서 관심을 끄는 레토릭의 새로운 국면을 발견하게 된다. 얼핏 보기에는 아이러니거나 역설만이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더 들어가보니 다른 자질이 있고, 그것이 현기증 나는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 만들어 놓은 감옥
우주의 꼬리지느러미 위에 앉아 감상하고 계시죠?
―「이웃에 계신 하느님」에서
이 대목에도 충격적인 강한 아이러니지만, 그것만이 아닌 다른 자질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전제로 제시한 아이러니는 이 작품을 구성하는 지배적 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땅속에 계신 하느님 내려가고 계시나요 올라오고 계시나요 내려가시든 올라가시든 르완다나 소말리아로 향하시기를 바랍니다”(「아프리카 3」)는 역설이다. 역설과 아이러니는 형제간이니까 그게 그거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시는 ‘역설의 언어’라고 신비평가의 한 사람이 말했지만 이러한 아이러니와 역설이 그의 시의 구조에 작용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시의 의미 작용의 한 방법이 되고 있다.(다른 비유에서도 그런 것이 발견된다.)
하늘에 날개가 닿았다
꺼칠꺼칠한 곳이 있었고 말랑말랑한 곳이 있었다
말랑말랑한 곳에 걸쳐 앉았다
―「나비를 보는 고통」에서
이 대목의 ‘은유’는 새롭고 신선하면서 작자의 인생관이라고 할까 세계관이라고 할까, 그러한 관념의 심부에 닿아 있다. 첫째 새롭고(나비를 보고 고통을 느끼는 자체가 참신하다.), 둘째 촉각적․신체적이며, 셋째 지각知覺을 월경한 관념의 심부에 들어가 있다. 좀더 분석해 보자.
하늘에 “꺼칠꺼칠한 곳”이 있고, 또 “말랑말랑한 곳”이 있다고 한다. 꺼칠꺼칠하거나 말랑말랑한 곳은 어떤 사물(특히 과일이나 옥수수나 감자와 같은 음식물)의 표피적인 감각과도 관련된다. 이 대목의 원관념(본의)인, “나비가 하늘의 말랑말랑한 곳에 걸쳐 앉았다”는 말에서도 추론할 수 있듯이, 기독교 사상에 대한 비판, 그것을 잠정적으로 ‘니체적 아포리즘’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독성 관념이 이 은유의 밑을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나비가 하늘의 꺼칠꺼칠한 곳이 아닌, 말랑말랑한 곳에 걸쳐 앉았다고 말한다. “말랑말랑하다”는 것은 감이나 토마토 같은 과일이 익어서 먹기에 좋도록 야들야들하고 무르다는 뜻이다. 먹어서 소화가 잘 되는 촉각과 미각이 겹쳐 있다. 박찬일은 흔히 많이 쓰이는 시각이나 청각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작자의 비유가 시청각만이 아닌 촉각이나 미각 같은 보다 직접적 신체감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신체적 감각이, 단지 껍질과 같은 형해적인 비유가 아니라 동시에 내면화한 관념 그 자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관념과 사물이 동일성으로 수반하고 있다.
“걸쳐 앉았다”는 은유도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다”는 일상의 신체적 동작의 안정감이 밑받침하고 있다. 이 동작의 밑받침이 없다면 이 은유는 성립할 수 없다. 보행이나 노동에서 벗어나서 잠시 동안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는 일상의 신체적 감각은, 그대로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정신적 의미에 직결하는 맥락을 지닌다. 니체는 신체라는 것은 “하나의 대이성大理性이다. …… 이 큰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위하게 한다”고 말한다. 종교 교리의 순례자라기보다 종교를 생활하는 한 실천인으로서의 행위의 한 과정(이를테면 교회 예배당 안의 의자에 앉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전기적傳記的 사실과의 부합여부는 시론에서 필요 없다.
여기서 박찬일의 “걸쳐 앉았다”는 은유 구조를 좀더 분석해 보자. 이 비유에는 삼중三重의 의미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첫째, 일상적 생활 단계에서 “의자에 앉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아마 비유의 모태 발생의 모태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운동이 끝나거나 보행적 운동이 끝난 뒤 편안한 앉음의 휴식이라는 그런 의미가 깔려 있다. 이 첫째의 원리는, “걸쳐 앉았다”는 비유의 직접적 구조는 아니나, 그러나 생활 레벨에서 의자에 앉는 신체적 동작이 없다면, 이런 비유를 형성할 수 있는 관념적 경험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 은유의 원관념, 즉 본의本義(tenor)는 “기독교적 신앙의 의자에 앉았다”의 의미다. 기독교적 “신앙에 입문했다. 귀의했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특히 꺼칠꺼칠한 곳(앉아 견딜 만큼 부드럽지 않음)이 아니라 “말랑말랑한 곳”인 의자에 걸쳐 앉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은유의 본의는 신앙에 귀의할 수 있는 종교적 관념이다.
셋째, 위에서 말한 본의의 보조관념 즉 유의喩義(vehicle)는 “의자에 걸쳐 앉았다”는 신체적 동작이다. 감각적으로 말한다면 정지靜止(휴식, 안정)를 위한 일종의 신체적 운동감각 내지 촉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유의는 사물적, 물리적 성질을 가진다.
이러한 삼중의 의미가 겹친 복합적, 다중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은유에서, 첫째 생활 레벨에서의 신체적 경험이 중요시되고, 또 이 단계서 경험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이 은유의 원관념은 “기독교적인 신앙”이지만, 이 신앙이 걸쳐 앉았다는 유의에 직접 도입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앙 관념은 이 비유 구조의 형성 중간에서 도입된 것이다. 즉 생활레벨에서의 경험인 “의지에 앉음― 기독교적 신앙― 신앙의 의자에 앉음” 이라는 일련의 통시태通時態를 갖고 있다.
3.
박찬일이 시각이나 청각 레벨의 사물감각에서 미각, 촉각, 운동감각 등으로 진입한 것은, 얼핏 별것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감각 중에서 가장 활용율이 많은 것이 시각과 청각이고, 작품상에도 시각과 청각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감각이라는 것은 대상을 접할 때의 감각기관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각과 청각의 경우엔 주체와 대상과의 사이에 가깝던 멀든 간에 “거리”와, 그 거리가 형성하는 “공간”이 있다. 그러나 촉각, 운동감각, 미각 등은 주체와 대상과의 일체나 접촉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나 공간의 간격을 없앤다고도 할 수 있다. 박찬일이 주체와 대상과의 신체적 접촉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 하는 예를 들어보자.
허공을 짚고 올라가는 거였다.
허공이 없다면 나 여기에 없을 것이다.
―「민들레」에서
허공에 손바닥 자국이 나 있다면
그것은 내 손바닥이라고,
―「민들레」에서
멀티 콘센트 전기 차단 스위치를 누르지 마소서, 하느님. 나의 목을 직접 조르소서, 하느님.
―「멀티 콘센트 전기 차단 스위치」에서
뒤에서 걸어오는 시선이 나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붙잡히고 있는 남자 붙잡는 여자
―「여자 하느님」에서
계속 금정동에서 살아야겠다
금정동의 규율 규칙을 삼켜야겠다
―「예술가 금정동」에서
허공에 양말을 던진다
투명한 비닐봉지에 채우려는 것일까
―「투명한 비닐봉지」에서
어제는 개성에 갔다가 황진이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내년에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들여다보게 될까요」에서
물까지의 길은 얼마나 될까
목까지 차오르는 순간까지의 길은 얼마나 될까
―「어머니를 축복하소서」에서
이와 같은 예의 비유는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그러나 시각․청각의 예도 많이 있다. 문제는 「나비를 모는 고통」, 「大地의 노래」, 「민들레」 같은 중요한 작품에서 촉각․미각․운동감각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신체감각 촉각, 미각, 운동감각)을 중시한 이유는 나변에 있을까.
첫째, 자기지自己知의 근원적 체험을 중시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신체는 외벽계外壁系와 내장계內藏系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내장계는 체강体腔과 장강腸腔으로 형성되고 여기서부터 생긴 종족 유지를 위한 성性과 개체유지를 식食에 수반되어 형성된 것이 내장계다. 이 신체 내부의 세계를 외계의 우주로부터 구별하고 내장계를 보호하는 것이 체벽계体壁系다. 인간의 원생명이랄까. 그 원동력은 내벽계 안에 있는 심장이다. 이것은 생명의 원동력이다. 시각․청각의 감각도 물론 외벽계를 통해 내벽계까지 전달되나, 직접 접촉의 감각보다는 그 힘이 약하다. 대상과 신체의 접촉을 통한 일체화를 통해서 근원적인 내벽계에 존재하는 생명과 그 생명이 사유한 관념이 일체화․동일화되어 신체화할 수 있다.
이러한 작자의 의도는 신심이원론身心二元論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설령 정신의 실체를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작은 이성’인 정신은 ‘큰 이성’인 신체의 지배와 관리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이 「大地의 노래」다.
얼마 안 남았다 조금 더 내려가면 高地다 안심하고
뒹굴 수 있는 大地다
작자는 겸손하게 말해서 “하늘은 지옥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숙연하게 말해서 “하늘은 비어 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송장이 大地이다/영원이 大地이다”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조용조용한 커뮤니케이션이라기보다 일종의 선언으로도 들린다. 이리하여 그의 종교는 ‘대지’에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늘의 구멍을 찾아 날아다니는 민들레 꽃씨도 자기기自己知의 비유다. 그러나 허공인 하늘에는 구멍이 없다. 뿌리를 내리고 위로 위로 뻗어 오르며 성장할 수 있는 ‘구멍’은 대지 밖에는 없다. 허공에 기대지 않으면서 하늘의 정중앙을 향해 쑥쑥 밀고 올라갈 수 있다.
4.
그런데 여기에 조그마한 이변이 있다. “허공을 짚고 올라가는 거였다./허공이 없다면 나 여기에 없을 것이다.”(「민들레」)라고 말한다. “허공에 손바닥 자국이 나 있다면/그것은 내 손바닥이라고,”라는 말이 접속된다. 하늘에 등을 돌린 그가, 하늘인 허공이 자기 성장의 한 조건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늘/대지”의 대립은 전면대립이 아니라 조건부 대립임을 알게 된다. 그의 전체를, 이러한 세부를 무시하고 ‘니체의 아폴리즘’이라는 일방통행으로 밀고 나갈 수 없음도 깨닫게 된다.
셋째, 이러한 신체 접촉은 비유를 통해서(신체의식을 통해서) 자아로서의 개체個体와, 그 개체를 초월하는 타자의식他者意識을 갖는다. 이 두 가지 의식은 서로 맞물려 있다. 타자의식의 대표적 케이스가 ‘하느님’ 인식이다. 신에 대해 타자의식은 신에 대한 전적 부정이라기보다 부정을 유보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의 시에서는 “신은 죽었다”와 같은, 니체적 독성 선언은 보이지 않는다. 이 유보태도에서 그를 니체적 니힐리리스트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시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성모독에서 신성으로 가는 길이 있고, 신성에서 신성모독으로 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아마 신성모독에서 신성으로 가게 될 것이다.”(「시인의 말」). 후문後文이 작자의 선택이고(신성모독→신성), 이 시집의 의도나 조사措辭도 이 후문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직 회의론(skepticism)을 산책하고 있다.
그의 타자의 대표적 케이스가 “하느님”이라고 앞서 말했지만, 이러한 타자의식은 “자기 찾기”의 과정과 병진한다. 이 시집은 작자의 자기 찾기를 위한 지知의 치열한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 찾기”의 자기自己가 데카르트적 이성이건 이데아이건, 사물이건 간에 근대정신의 연장선상에 놓이지만, 그것이 그에게 가한 상처는 너무 크다. 박찬일의 발길은 이미 해체나 모더니즘 저 쪽으로 월경한 것으로 보인다. 박찬일을 모더니스트라고 단정하지는 말자.
方法이 없다
昭陽 1橋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 같은 것이 말리실 리가 없다
―「아프리카」에서
자기 찾기의 극점極點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동시에 인간의 투신이나 죽음과 같은 것에 “하느님”이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타자의식도 공존하는 작품이다. 어떤 시집이든 작자의 전기적 반영이 전무한 시집이 있겠는가마는, 전기적 사실과 시작품과는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의 끄트머리에 “아프리카에 가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아프리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목은 아프리카에서의 내전, 기아 등으로 인한 비극의 소용돌이를 방관하고 있는 비정적 시선을 체험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리라. 이러한 막다른 곳으로 자기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자기 운명을 자기화하고 있다. 누구도 이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 같다.
작은 개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개미를 밟고 지나간다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소멸=비소멸의 등가성을 강조한 역설이다. 사라져도 본질이나 실체實体(substance) 자체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일까. 어쨌든 여기서 자기 찾기, 내지 자아(self) 형성의 한 과정의 아픈 파라독스를 보게 되고, 이것은 동시에 타자의식으로 연결된다는 개연성일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기와 무관한 존재이며, 자기의 성장에는 대지大地만큼의 영향력이 없고, 다만 무서운 “공포의 대상”, 그래서 보기조차 싫은 존재이지만, 여전히 그래도 하느님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전제로 하고 있다. 박찬일의 자기 찾기는 하느님 찾기와 병진할 것으로 보인다. 타자란 자기 속에 있으니까.
문덕수∙195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꽃잎 세기' 등.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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