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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흐름진단/시/가을의 서정/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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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403회 작성일 09-12-21 01:07

본문

|흐름․진단/시|

가을의 서정

진순애|문학평론가



∙홍윤숙, 「이 한 순간」 전문(≪문학·선≫, 2009. 가을호)

∙김광림, 「낙엽落葉을 밟으며」 전문(≪유심≫, 2009. 가을호)

∙문인수, 「코스모스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전문(≪시와시학≫, 2009. 가을호)

∙박철, 「노인과 아이」 전문(≪애지≫, 2009. 가을호)

∙유종인, 「가을」 일부(≪시와 사람≫, 2009. 가을호)

∙이승은, 「가을 잔등」 전문(≪열린시학≫, 2009. 가을호)

∙이윤택, 「꽃을 바치는 시간」 일부(≪시인세계≫, 2009. 가을호)




가을은 죽어버린 시가 소생하고 잃어버린 시가 찾아오는 계절이다. 가을은 깊어가는 고독 속에서 계절이 익고 사람이 익으며 시가 완성되는 시간이다. 가을은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새로 두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리고”,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가면서”(김광균, 「秋日抒情」) 완성되는 이중성의 시간이다.

가을은 지난여름이 얼마나 위대했나를 반추하게 하고 다가올 시련의 겨울에 대비하도록 깨우쳐주는 성찰의 시간이다. “Herr: es ist Zeit. Der Sommer war sehr groß./Leg deinen Schatten auf die Sonnenuhren,/und auf den Fluren laß die Winde los.//-중략-//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Wer jetat allein ist, wird es lange bleiben,/wird wachen, lesen, lange Briefe schreiben/und wird in den Alleen hin und her/unruhig wandern, wenn die Blätter treiben.”(Rilke, 「Herbsttag」)라는 릴케의 「가을날」처럼 가을은 우리를 홀로 성찰하게 하면서 완성시키는 이중성의 시간이다.

김현승도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중략-//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가을의 기도」)라고 이중성의 가을을 노래했다.

가을은 우리를 침묵의 세계로 유인하여 고요 속에서 기도하게 한다. 가을은 고요하고 성스러운 기도 속에서 죽어버린 시를 소생하게 하고 잃어버린 시가 다시 찾아오게 하는 서정의 시간이자 세속이 숨죽이는 시간이다. 가을은 우리를 세속의 무게에서 가볍게 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유인하는 이중성의 시간인 것이다.


목적지는 없었다

다만 길이 있을 뿐

끝이 없이 먼 길을

가고 또 가야 했던 지상의 날들

머물 수 없이 아득한 길 위에서

이따금 걸어온 길 뒤돌아보고

보이지 않는 전방을

막막한 가슴으로 더듬으면서

문득 확인한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 것도 없음을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 있는

이 한 순간

한 순간의 현존을 알뿐이다.

―홍윤숙, 「이 한 순간」 전문(≪문학·선≫, 2009. 가을호)


‘생이란 한 순간의 현존’일 뿐임을 깨닫게 하는 그 ‘한 순간’을 가을의 시간으로 읽자. 봄날의 ‘한 순간’도, 여름날의 ‘한 순간’도 아니고 가을날의 ‘한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생이 ‘한 순간의 현존’임을 깨우치게 하는 ‘지상의 한 순간’이자 우리를 천상에 이르게 하는 사유하며 기도하는 시간인 까닭이다. 사유하며 기도하는 가을의 시간은 ‘목적지도 없고, 끝도 없어 보이는’,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끝이 없는 길’뿐인 아득한 지상의 시간을 천상의 시간에 이르게 하는 ‘성찰의 현존’을 열어주는 ‘한 순간’인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시간이 다시 돌아와 살아있게 하는 시간이므로, 사유하며 기도하는 시간 속에서 인간의 가을이 살아나고 시가 소생한다.


낙엽 위를 걷다보면

온갖 세상사

짓밟는 기분

오오라

발자욱 소리도 덜나

구름 위 걷는 기분이라

이대로 주저앉아

이것 저것

죄다 잊어버린 채

그만

정처 없이

잠들어 버릴까봐

―김광림, 「낙엽落葉을 밟으며」 전문(≪유심≫, 2009. 가을호)


오직 가을에만 가능한 ‘낙엽 밟는 일’은 지상의 온갖 세상사를 밟는 일의 은유에서 멈추지 않고, 가을의 기도처럼 구름 위조차 걷게 하여 천상에 이르게 하는 일의 상징이다. 세속의 무게를 덜어내고 세속의 목소리를 숨죽이게 하는 가을의 서정은 가벼워진 낙엽 속에 은밀히 내재되어 있어서 우리를 가을잠에 취하게 한다. 낙엽 밟는 일은 가을의 사유이자 기도와 다르지 않게 ‘이것 저것, 온갖 세상사’ 잊게 하고 가을잠에 취하게 하여 우리의 현존이 순간에 있음을 깨우치게 하는 오래된 일인 것이다. 이처럼 가을잠은 ‘낙엽 밟는 일’ 속에서 깊어가며 인간의 깊은 성찰을 유인하는 이중적 가을의 고독을 은유한다.


코스모스들이 손뼉 치며 손뼉 치며 죄, 웃는다.

구름이 지나가도 새 떼가 지나가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나가도

수줍게 가만가만 흔들리던 코스모스들이

기차만 지나가면 깔깔깔 배꼽을 잡고 웃는다.

기분이 나쁜 기차가 더 빨리 달려가고

코스모스들은 까무러칠 듯 자지러지게 웃는다.

―문인수, 「코스모스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전문(≪시와시학≫, 2009. 가을호)


가을은 ‘코스모스들이 웃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지상의 시간이다. 더욱이 '코스모스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 시간'인 가을이 가을에 숨죽인 세속의 시간과 대비되면서 한층 높아지는 코스모스 웃음 소리가 만개하는 가을을 은유한다. ‘손뼉 치며 웃는 코스모스 웃음 소리’가 가을 낙엽의 고독에 앞서서 가을의 화려한 유인력으로 작용한다. ‘구름이 지나가도 새 떼가 지나가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나가도 수줍게 가만가만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기차만 지나가면 배꼽을 잡고 웃게 하는 코스모스의 가을’은 고독한 가을의 화려한 전조등으로 한껏 가을빛을 발한다. 위대한 여름을 은유하면서 고독한 가을의 전조등으로 자리하는 만개한 코스모스가 이중의 가을길을 안내한다.


예닐곱 살, 파란색 바지를 입은 아이가 쥐색 치마에 등굽은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고 골목길을 지난다

할머니의 조용한 발걸음은 지구를 품으며 따뜻한 숨을 내뿜는 꽃가마다

아이는 안다

할머니의 오랜 친구가 발밑에 사는 것을

그래서 아이는 지구가 할머니의 옆동네고

지구 너머 우주의 꽃들도 물처럼 흐르는 은하수도, 모든 것이

아이의 작은 손과 이어져 있음을

할머니의 손이 아이처럼 작지만 따뜻한 건 저 지구 너머까지

세상이 그런 탓이라고 아이는 다 아는 얘기를 자라며 확인할 것이다

할머니도 한때 아이였고 행복한 순간마다 주름살을 그으며 살아왔다

아이의 미끈한 팔뚝이 가을바람에 반짝이고

이 골목에서 노인과 아이는 올 겨울도 거뜬히 보낼 것이다

나는 창문 밖으로 아이와 노인을 보내며

가슴에 파란 꿈과 쥐색 추억을 그려 넣는다

―박철, 「노인과 아이」 전문(≪애지≫, 2009. 가을호)


‘할머니와 아이’가 손잡고 가는 가을 풍경은 ‘지나가는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수줍어 하는 코스모스’가 있는, 그리고 ‘지나가는 기차 앞에서 까무러칠 듯 자지러지게 웃는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 풍경과 다르지 않다. “가슴에 파란 꿈과 쥐색 추억을 그려 넣는” 이중성처럼 가을은 ‘할머니와 아이’, ‘할머니와 코스모스, 기차와 코스모스’ 등의 이중성을 낳는 시간이다. 그것은 여름과 겨울 사이에서 위대한 여름의 ‘파란 꿈’을 접고 겨울로 가야만 하는 가을이 잉태한 이중성이다.

여름과 가을 사이처럼, 혹은 가을과 겨울 사이처럼 가을의 이중성은 파란 꿈과 쥐색 추억을 은유한다. 그러나 그 이중성은 모두 가볍다. 꿈은 무한히 가벼워서 꿈이요 추억 또한 무한히 가벼워서 추억이다. 이 둘은 또한 아름답다는 이유로 동일하다. 할머니가 가볍고 아이가 가볍듯이 하늘에 있는 파란 꿈이 가볍고 가버린 시간의 쥐색 추억이 가벼운 아름다움을 낳는다. 가을은 세속을 비우게 하는 가벼움의 근원지이자 아름다움, 곧 미의 근원지인 것이다.


은빛이 남았다 여직도 할머니는 한 움큼의 머리에 은비녀를 질렀다

입이 무거운 옛날이다가 언뜻 옛날도 엉덩이가 무거운 옛날이다

무쇠가위로 붉은 고추의 배를 가른다 내생來生을 토해내 듯

노란 고추씨들이 고산족高山族 아이들처럼 흩어졌다

그래도 가위로 치를 전쟁이야 있는가, 무수한 할복 끝에도 코끝만 맵다

할머니 자꾸 등만 보여 주신다 혁명이 졸아든 얘기를 듣고 싶은 등짝이었다

원숭이 새끼마냥 업히고 싶은 등이었다 끝내 세월에 업혀갈 저 등짝,

제대로 굽었다 어중뜨기 죽음이 와서는 미끄러져 나동그라질 등성이다

노래도 끊기고 가문 저수지처럼 기운도 말랐으나 비릿한 촌색시의

소싯적 연애담이 아직은 찬 샘물처럼 기억의 입술을 축일만하다고

평생을 볕에 널어말려도 눈자위가 축축한 게 이별의 손끝이라고

한켠 인적이 드물어서 토란 대가 시무룩하게 널어 말려진다

할머니 손에선 아직도 가르고 훑고 찢어발겨지는 즐거운 파탄이 있다

언젠가 죽음이 육시戮屍의 맵찬 손길로 오면

가을볕을 오래 업은 할머니의 귀 어두운 등짝으로 맞으리

―유종인, 「가을」 일부(≪시와 사람≫, 2009. 가을호)


가을은 할머니의 은비녀로, 할머니가 무쇠가위로 가르는 붉은 고추 위로, 할머니의 등짝으로, 할머니의 소싯적 연애담으로, 인적 드문 곳에서 말라가는 토란대 위로 소리 없이 온다. 소리 없이 오는 가을처럼 할머니의 죽음도 세속의 죽음도 그렇게 온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가을은 소리 없이 내리는 햇살 속에서 소리 없이 오는 죽음을 성찰하게 한다. 고요 속으로 화려한 생을 숨 죽이도록 유인하는 가을은 현존이란 ‘가을볕’과 같은 한 순간에 있음을 깨우치게 한다. 가을의 서정이 소리없이 들녘에 찾아들 듯 인간의 생 속에도 가을의 유인력은 소리 없이 스미며 은밀히 내재한다.


달마산 부챗살을 업고 있는 미황사

새털구름 마중 나와 재재재 말을 걸 듯

가을도 시월 잔등에 햇살 한 줌 흩는다

한 철 지나고 나면 모두 어쭙잖은 것

속울음 껍질째로 소쿠리에 널어놓고

몇 마장 산그늘 길을 돌아 뵈는 미황사

―이승은, 「가을 잔등」 전문(≪열린시학≫, 2009. 가을호)


무쇠가위로 붉은 고추 다듬는 할머니 등짝으로 오는 가을은 시월의 미황사 잔등에도 온다. 가을은 “한 철 지나고 나면 모두 어쭙잖은 것”처럼 “속울음 껍질째로 소쿠리에 널어놓고” 산그늘 돌아서는 세속의 세계에도 온다. 와서는 털어버리고 돌아서게 한다. 그러면서 가을은 세속에서 미황사로 발길 돌아서게 하고, 미황사에서 세속으로 발길 돌아서게 하는 경계에 있다. 미황사 잔등에서 가을의 서정이 익어가듯 미황사를 뒤로 하고 세속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도 가을의 서정은 익어간다. 가을은 그러한 시간으로 현존하듯이 세속의 생도 그렇게 현존한다고 지시하며 익어간다.


나는 알지,

지금 여기 하잘것없어

그 어떤 뜻도

가만히 앉아 햇볕 쬐는 것만 못하였네

이제 꽃을 바치는 시간

근심하는 나 자신을 두려워 말자

세상사 어긋나 공연히 절름대면서

마음속에 화를 키우지 말고

유쾌하라 유쾌하라

내 마음이여

이제 꽃을 바치는 시간

내가 가야 할 길은

저기 저 수직 상승

흐르는 시간을 가로막고 선 기암절벽

망각의 세월을 뚫고 솟구친 붉은 꽃이

주체할 수 없는 늙은이의 욕정이면 또 어떠랴

시간의 고삐를 놓아 버리고

꿈같은 현실을 지워 버리고

이제 내 사랑을 만날 시간이 되었네

―이윤택, 「꽃을 바치는 시간」 일부(≪시인세계≫, 2009. 가을호)


‘그 어떤 것도 가만히 앉아 햇볕 쬐는 것만 못하다’고 느끼게 하는 시간은 ‘꽃을 바치는 시간’이요 ‘가을의 시간’이다. ‘꽃을 바치는 시간’은 ‘시간의 고삐를 놓아 버리고 꿈 같은 현실을 지워 버리고, 내 사랑을 만나는 시간’이다. ‘꽃을 바치는 시간’이 ‘주체할 수 없는 늙은이의 욕정’에서 비롯된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은 ‘꽃을 바치는 시간’이라고 인식하는 시간이므로, ‘욕정의 시간’이 아니라 ‘욕정을 덜어내고 비워버리는 시간’, 곧 가을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간의 고삐를 놓아 버리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꿈같은 현실을 지워버리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가을은 ‘놓아버리고 지워버리며 예찬하고 헌신하는 시간’인 까닭이다. ‘꽃을 바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러하다.

바치고 기도하는 일은 예찬하고 헌신하는 일의 은유이며 ‘내 사랑을 만나는 일’의 은유인 까닭이다. 사랑을 만나는 방법 중에서 기도로의 만남이야말로 ‘흐르는 시간을 가로 막고 선 기암절벽’처럼 ‘내가 가야 할 수직 상승’의 방법에 이르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이제 내 사랑을 만날 시간이 되었다’고 헌신으로 현존을 인식하는 시간인 까닭이다.

가을의 서정은 이렇듯 현존이란 한 순간에 있다는 인식을 환기시키면서 낙엽에 내재된 은밀함으로, 코스모스를 노래하는 시간으로, 아이의 파란 꿈과 할머니의 쥐색 추억으로, 무쇠가위로 붉은 고추 가르는 할머니의 등짝에 내린 죽음의 성찰로, 미황사의 잔등에 내린 햇살로, 세속의 고삐를 놓고 사랑의 꽃을 바치는 헌화의 시간으로 고요하고 성스럽게 비워내며 익어간다. 가을의 고독은 가을의 사유와 기도를 깊게 하고 가을의 서정이 무르 익게 하는 외로운 성찰의 시간이며 가벼움과 아름다움의 근원의 시간인 것이다.



진순애∙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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