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5호(2009/가을)/신작시/이상한 얼룩말/이인철
페이지 정보

본문
이인철
이상한 얼룩말
―회색병동.34
아버지는 가죽나무였어
무성한 곁가지로
나를 사정없이 내리쳤지
나는 채찍을 맞으며 달리는
망아지
달렸어 페가수스까지
채찍을 맞으며
헉헉거리며
나는 무럭무럭 자랐어
어느 날 톱으로 쓱싹쓱싹
가죽나무의 밑둥을 잘라
마당이 시원해졌어
나는 아버지 그늘 없이 자랐어
이젠 달리지 않아도 돼
그러나 하늘로 가는 길을 잃어 버렸지
아,
밑둥지에서 부활한 아버지는
나를 다시 때리기 시작했어
더 낭창낭창한 가지는
내 등에 낙인으로 찍혔지
나는 더 빨리
더 멀리 달렸어
덕분에 튼튼한 말이 된 거야
낙인 찍힌
얼룩말이 된 거지
아직도 끈적끈적한 피 냄새가 나
이상한 얼룩무늬 때문에
어느 무리에도 끼어들 수 없어
나는 늘 홀로 달려
어제도 노을에 흥건히 젖은 몸을 털며
죽은 가죽나무 그루터기를 바라보았지
Yahweh.com
―회색병동.43
야훼 사이트
야후를 치다 오타를 쳤나봐
PASSWORD에 “막달라”라고 쳐 봤어
읽지 않은 메일이 수도 없이 쌓여있어
파일을 열면
사람들의 기도
스피커도 없는 낡은 컴퓨터에서
아우성치는 수십 개 국의 언어들
기도소리들이 뒤범벅으로 들려
어떤 파일을 열면
눈물이 쓰나미처럼 밀려나와
한 처녀가 여러 남자에게 윤간 당하며
신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어
다다다다닫―난사된 M60 총알이 벽을 뚫고 지나간 뒤
아프가니스탄 병사의 찢어진 살과 피가 튀어나오고
또 벽돌 같은 메일이 쌓여
타락하기 전 내가 보낸 기도도 있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날들
내가 유산시킨 아이들이 미궁에서 출구를 찾고 있어
태아도 기도를 하나봐
나도 피와 오줌을 뒤집어 쓴 채
울부짖고 있어
신이여 회개하소서
회개하소서
신이여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어
파일을 열어
신이여 회개하소서
회개하소서
신이여
내가 외친 목소리가
반복해서 메아리치고 있어
허공으로
이인철∙2003년 ≪심상≫으로 등단.
- 이전글35호(2009/가을)/신작시/시간은 피안이 없는 강이다 외 1편/박재연 09.12.21
- 다음글35호(2009/가을)/신작시/9달러 외 1편/신정민 09.12.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