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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신작시/운수암 가는 오후 외 1편/장이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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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엽
운수암 가는 오후 외 1편
등산화 끈을 동여 묶는 동안
집 전화는 자동음성 안내로 넘어갔다
방신리를 지나 운수암까지 이어지는
꾸불텅한 오르막길
운전대를 돌릴 때마다 중심은 기울고
바퀴 아래 흙먼지는 소스라쳐 달아났다
돌박이를 키우던 무렵
몸살기에 취해 이불에 뒹굴던 날
손끝까지 파고드는 통증일랑 모르는 척
숟가락총을 물고
어미 눈을 찌르며 보채던
창자의 꼬르륵대는 울음소리에는
어떤 토도 달 수 없었던 기억이
모퉁이를 도는 것만큼 반복되는 오후
오늘 하늘이 어제의 하늘과 다르던가?
대웅보전 앞마당에 새 한 마리가 굼뜨게 난다
비로전 용마루는 높고 보의 그늘은 어둡다
유독 안경 너머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는 날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안경점을 찾아 되돌아갈까 망설인다
이참에 막힌 귓불을 뚫어 볼까?
주저앉는 마음 다그쳐보겠다고
몸이 먼저 불쑥불쑥 일어서는
운수암 느티나무 밑
변신
쪽파를 다듬는데
멀건 점액질 속에서 벌레가 꿈틀
떨어졌다 0.7밀리미터쯤에 다리도 없다
갑작스러운 알몸 출현에 낯빛 뻘게진 건
저나 나나 피차 일반
겹겹이 쌓인 겉잎 뿌리 다 놔두고
하필 삐죽이 솟은 외줄기에 떨어졌다
머뭇거림도 잠시, 녀석이 움직인다
한쪽 끝 부분을 디디고
1자로 몸을 세우더니 죽죽 늘이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기웃거리며 건널 곳을 찾는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그럼 그렇지 넌 이제 끝장이야
라고 조소를 보내는 순간
똬리를 틀더니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녀석은 나를 따돌렸다
매운맛이 허파 깊숙이 파고든다.
살아남음이란
간절함으로 거듭나는 것
나는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바닥에 박고
물구나무가 서고 싶어졌다
목을 길게 빼고 괄약근을 조여 본다
둥글게 몸을 말고
거실바닥을 굴러볼까?
네 번 튕겨지고 사라졌던 그 녀석이 저기서,
허연 이를 내놓고 웃고 있다
장이엽∙2009년 ≪애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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