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5호(2009/가을)/신작시/마상쇼 외 1편/황지형
페이지 정보

본문
황지형
마상쇼 외 1편
―석류굴에서
혀를 말아 천장에 붙인 틈새로
뾰족한 이빨들이 쑥덕거렸다
수천 년 다물었던 말문이 트여
곱들이, 톡톡이, 장님엽새우,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던 신비한 말들이 자랐다
목젖마다 걸린 말들은
느릿느릿 돌이 되었다
선거공약을 내뱉는 TV에서는
하얀 말보다 검은말이 뛰어다녔다
말벌에 쏘인 말을 타고 달리는 유목민처럼
말의 옆구리에서 떨어질 듯 묘기를 부릴 때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아라고나이트처럼 만발한 검은말은
무색투명한 광택의 희귀한 구설수를 낳고 말았다
혓바닥에 침전물이 떨어질 때마다
천장을 향해 까만 석순이 자라났다
단단한 말뚝에 고삐를 걸고
전속력으로 빙빙 돌다 놓아버리면
말은 걷잡을 수 없는 원심력으로 궤도를 이탈할 것이다
회오리치는 화면 속으론 누군가 빨려들 것이다
수백 년 자라온 석순의 언어는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신비한 법
먼지구름을 날리는 야생마처럼
포말로 흩어지는 후보자의 기호를 보았다
말의 말미엔 하나 같이 고삐가 풀어지고 없었다
넥타이를 풀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꼽을 넘나들던 그가 살구나무 흐드러진 담장을 넘었다 하이힐이 또각또각 달빛을 찍어냈다 그림자가 뿌리내린 골목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뒤적거렸다 단말마의 비명에 누군가 전봇대 뒤로 웅크렸다 발톱을 세워 어두운 골목을 힘껏 할퀴자 저음과 고음이 달빛 위에서 시시비비 꼬여들었다 그의 발바닥에서 묶였던 방울소리가 풀어지곤 했다 환기구멍으로 달빛이 빨려들었다 어둠을 삼킨 골목에서 발정 난 나비들이 가-르-릉 거렸다
여섯시 삼십분에 멈춘 시곗바늘처럼 클래식 넥타이를 맨 그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초저녁 선잠은 달콤했지만 전화벨 소리엔 민감했다 황급히 뛰쳐나가는 발자국에 나비는 갈기를 세우고 입가를 핥아댔다 만취한 자동차의 불빛이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미처 넥타이를 풀지 못한 틈바구니에서 어둠의 잔해들은 흩어지고 말았다
골목을 메웠던 발톱 소리들도 숨어들었다 빛의 정수리가 벽을 허문 새벽에서야 비닐봉지의 옆구리에서 하품이 흘러나왔다 나비가 담장을 폴짝 뛰어넘었다 대리운전사인 그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골목 안으로 재빨리 사라진 뒤였다
황지형∙2009년 ≪시에≫로 등단.
추천1
- 이전글35호(2009/가을)/이 시인을 다시 본다/재발굴/메주 외 4편/김영희 09.12.21
- 다음글35호(2009/가을)/신작시/운수암 가는 오후 외 1편/장이엽 09.12.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