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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발굴/宋錫夏의 한국 민속 재음미/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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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宋錫夏의 한국 민속 재음미
조선의 가면 연극·무용
글:송석하宋錫夏 역:김영식金榮植
석남 송석하
오랫동안 조선 여행의 인상적인 대상이었던 ‘바가지’ ‘천하대장군’도 지금은 식상한 감이 있다. 물론 어느 정도 깊게 들어가 문화사적으로 연구하면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을 터이나 그러기에는 상당한 시간적 노력이 따라야 하니 아무래도 여행이라는 전제 하에서는 좀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저녁노을이 드리워질 때, 초가지붕에 둥실 떠오른 몽환적인 ‘바가지’는 시재詩材도 되며 여행에서의 좋은 인상도 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부수적인 수확으로, 여행을 하기 위한 목적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 유명한 ‘천하대장군’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 기차 창으로 보이는 것은 충북선 정봉丁峰 부근의 것과 조치원 부근 금융조합에서 선전용으로 세워 놓은 것 정도이다.
잠시의 휴가나 주말여행을 즐길 때, 좀 더 학구적 태도로 그것을 즐기는 습관을 붙였으면 하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 자신의 여행도 더욱 인상적인 것이 되며, 또 그것이 전문학자에게는 때로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40여 년 전 영국군 대위 카벤디시Captain Carvendish라는 사람이 인천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 경성에 들어와 지금의 경원선과 거의 같은 코스로 보천보普天堡를 거쳐 백두산 탐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귀국 후에 책 한 권을 상재하였을 때, 그 노작 중에 그와는 거의 인연이 없는 조선인이 그린 극채색의 풍속화를 수십 매를 친절하게도 원색판 또는 그라비아판으로 삽입하였다. 그 후 약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것이 민속학자에게는 매우 큰 참고가 되어 풍속화가 적은 조선에게는 무한히 소중한 것이 된 예도 있다.
이야기가 길을 벗어난 듯하나, 지금은 ‘바가지’, ‘천하대장군’ 등의 천편일률적인 영역을 벗어나 그밖에 살아 있는 문화현상에 착안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 일례로 그로테스크한 가면이 있다. 가면은 어느 민족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그 발생관념에서 나누자면 종교적 가면․연극무용가면․수렵가면․토템가면 등 약 10여종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현재 조선에 전해지는 것은 그 중 종교적 가면과 연극무용가면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 관해서는 아키바 다카시秋葉隆교수가 지금은 폐간된 잡지 ≪돌멘≫에 상세히 소개하였고, 최근에는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씨가 총독부 조사 자료 「부락제」에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으니 그것에 관해서는 아쉽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여기서는 가면무용 및 가면극에 관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조선의 가면무용․연극은 문헌상으로 천수백년 전인 삼국시대부터 꽤 발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벼슬까지 지낸 석학 최치원이 '향악잡영'에서, [金丸. 廻身悼臂弄金丸 月轉星浮漫眼看 縱有宜療那勝此 定知鯨海息波爛 月顚 肩高項縮髮崔嵬 壤肩群儒鬪酒盃 聽得歌聲人盡笑 夜頭旗幟曉頭催. 大面. 黃金面色是其人手抱珠鞭投鬼神 疾步徐趨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束毒. 蓬頭鸞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冬冬風瑟瑟 南芬西躍也無端. 狻猊.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震埃, 謠頭悼尾馴仁德 雄氣寧同百獸才] 라며 가면연극․무용을 서술하였다(산예狻猊는 현재의 사자). 시대를 내려와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고대의식 나례儺禮(가면을 쓰고 귀신을 쫓는 의식으로 신라시대에 이미 수입)가 본래의 희극적 요소에서 일부가 연극화되어 민간연극으로 발달하여 고려말에는 잡극이라 칭하는 것이 중국에서 수입된 수당풍서역계隋唐風西域係의 무용 및 기술奇術․서커스와 함께 특수한 발달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것들이 그대로 전승된 사실은 성종 때의 학자 성현成俔의 저술에 의해 밝혀졌는데, 그 후는 우인극偶人劇('민속예술'(도쿄) 2/4 '인형극'(쿄토) 4 각 졸고 참조), 곡예 등은 분리되어 가면극만 독특한 발달을 한 듯하다. 이 가면극 및 가면무용은 또 나라의 지원을 받아 중국 사신 등이 오면 관람용으로 제공되었는데, 그 사실을 전하는 가장 유명한 문헌은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및,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보이는 황나黃儺(조선인으로 중국의 환관)의 접반接伴기록 등일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 유명한 곳은 평양․황주․봉산․홍제원 등이고 경성부 외京城府外 녹번리에는 관에서 설치한 도가都家(숙소)가 유명했다(지금 이곳은 우인극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특히 경성 부근의 가면극을 ‘산대도감山臺都監놀이’라 부르고, 지금의 아현정 부근의 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며, 양주군의 것을 ‘별산대別山臺’라고 한 것이다. 남도의 것은 경남 합천군 율지리栗旨里(과거 초계군 낙동강 상류 화물 집산지- 대구역에서 대암소 버스 종점에서 배로 건넜으나 지금은 쇠락한 한촌)의 가면극을 본원으로 하여 파생된 ‘오광대五廣大’ 가면극 및 ‘들놀이野遊’ 가면극이다.
그렇지만 이것들도 모두 밀려오는 시대의 조류에 저항하지 못해 점차 밀려가, 약 20년 전부터는 거의 중절되거나 숨이 끊어질 상태였으나 최근 향토예술의 부흥과 농어촌민의 오락 진흥의 기운에 힘입어 다시 신생명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지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방을 단지 여행자의 편의를 위하는 의도에서 말하자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양주별산대
앞에서도 잠시 말한 ‘산대극’의 아류로, 경기도 양주 구읍(의정부역에서 약 1리)에 거주하는 하급관리에 의해 전승되어온 순수한 민속예술이었으나, 근대가 되어 점차 세미프로페셔널로 경도되고 있다. 현재는 재래 관계자의 사망․고령․이산 때문에 계승자는 있어도 연기적으로는 많이 떨어지는 듯하다.
이 극의 주류사상은 파계승에 대한 증오․착취에 여념 없는 특권계급양반에 대한 반감, 다양한 연애의 갈등을 그린 멜로드라마적인 것 등이다. 가면은 23개가 있고 그밖에 인형 1개 및 소도구 등으로, 줄거리는 전부 12과장科場(경景이라고도 번역될까?)의 야외극으로(정식 소요 연출 시간은 약 10시간이나 지금은 많이 축약하여 한다) 첫 마당이 집단무용으로, 그 후는 ‘팔먹중’이라는 돌승과 ‘노장’이라 불리는 노승의 파계를 테마로 하고, ‘포도부장’ ‘취발이’ ‘연잎蓮葉’ ‘눈꿈쩍이踕目’ 등의 애욕 행위 및, 양반계급이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도정 등이며, 조선의 민간신앙에 깊게 뿌리내린 무속의 관념도 곳곳에 보인다.
양주의 ‘별산대’는 지금은 연중행사로 활발히 행하지 않고 외부의 초대(물론 보수는 지불해야 한다) 또는 특별한 때에만 행하여지므로 일반적인 관람은 매우 불편하나, 그 지방에서의 견학을 위한 상연은 농번기를 피해 미리 부탁하면 큰 비용 들지 않아도 보여 주는 듯하다. 또 경성 시내 고물상에서 흔히 보는 옛날 가면은 대개 이 ‘산대’ 가면인 것도 덧붙여 놓는다.
남도 지방(동래․김해․통영․진주)
남도의 가면극은 동래․수영(동해남부선)․부산에서는 ‘들놀이野遊’라고 하여(수영, 부산 모두 지금은 중절), 김해․창원․마산․진주․통영 등에서는 ‘오광대’라고 한다(창원․마산은 지금 모두 중절). 기타 의령․율지․안동 등에서는 현재 사라졌고(안동의 신사가면무용神事假面舞踊은 지금도 있다), 남해도에서는 별도로 ‘중매구’라는 가면무용이 있고, 경남 각지에는 ‘지신밟기地神踏’라는 가장무용이 있다. ‘지신밟기’는 가면무용은 아니지만 음력 정월 15일上元 문자 그대로 지신을 다스리는 행사이며, 정초 인사가 끝날 무렵부터 후에 서술하는 ‘줄다리기索戰’가 시작될 때까지의 행사로 ‘줄다리기’ 비용 염출의 근원도 이것에 있다. 이것은 유명한 ‘쾌지나칭칭나네’라는 민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전남의 여자 원무인 ‘강강수월래’와 함께 유명한데 후일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므로 지금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러한 남도의 가면극들도 ‘산대극’과 같은 테마로, 파계승에 대한 증오․양반계급에 대한 반감, 다양한 연애의 갈등을 그리는데 그 내용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어, 진주의 경우에는 음양오행의 사상에서 발생된 ‘오방신장五方神將’의 장면이 별도로 있어 ‘오광대’라 칭한 연유도 실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남도의 가면극들은 경성 부근과 달리 순수한 민속예술로, 대개 정월 15일 전후에 행해진다. 그 중에서도 온천 마을 동래는 ‘줄다리기’ 직후에 열리는 예이므로 한 번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줄다리기는 류큐琉球의 줄다리기와 같은 형식으로 암수로 나뉘고 직경은 가장 굵은 것이 5,6척이나 되고 길이도 수백 척에 이르고 승부도 수일간 계속하여 결정하는 것으로, 대풍 기원의 관념이 들어 있으므로 쌍방 모두 몹시 진지하게 임한다. 종래 유명한 곳은 수원․대구․진주․부산․동래 등이었으나 지금은 규모가 큰 곳은 동래밖에 없고 연중행사라고는 하지만 경찰의 허가문제로 행사 날자가 일정치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동래의 가면극은 ‘줄다리기’의 여흥행사인 탓에 장면도 적어 양반모욕 장면뿐이나 그 연기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이것도 근년은 열리지 않는 해가 많다).
김해의 그것은 동군同郡 가락(부산 또는 경부선 구포에서 김해행 버스를 타고 김해에서 환승)이라는 곳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규모는 크지 않으나 장면은 전부 하는데, 역시 정월 대보름 행사로 음력 1월 15일 전후에 행해진다. 수년전 폐지된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통영(부산․여수에서 기선편과 구舊마산에서 발동기편이 있다)은 상당히 대규모로 열리는데 여기는 대보름 행사로 행할 때와 풍어제로 행할 때가 있어 후자는 대개 음력 2,3월경이다.
진주는 순수한 대보름 행사이나 행하는 해와 행하지 않는 해가 있다. 이 지방은 또 출연자가 옛날 그대로이므로 연기도 상당히 훌륭하며 특수한 장면도 있어 한 번 볼 가치가 있는데 액션의 템포가 대체로 느린 것 같다.
서도 지방(봉산․해주․강령)
서도 지방에 현존하는 가면무용․가면연극은 봉산(경의선 사리원)․해주․강령 이외에는 전혀 없는데 봉산의 가면연극․무용만큼은 단연 발군의 것으로 전국에서 이에 필적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 외로는 함남 북청에 사자춤과 가장행렬인 ‘관원놀이’가 있는 정도이다.
봉산의 가면연극․무용은 그 연혁이 상당히 오래되어 약 5백년간 전승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의 무용․연극은 어느 정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데 그 중 수당의 흐름을 받아들인 것은 거의 명료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 수당의 무악도 실은 고창高昌, 구자龜玆, 안국安國, 미국米國, 강국康國 등 서역제국의 계통을 잇고 있으며, 무용은 ‘이란’, ‘사마르칸트’, ‘소구트’ 풍의 건무健舞가 중국무용계를 풍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조선의 무용에도 다소 영향을 미쳤을 터이나, 진나라 진수의 '삼국지' 및 '후한서', '위지' 등에도 나온 바와 같이 조선 민족이 대체로 가무를 애호하였다는 점을 헤아리면, 우리 고유의 무용에 약간 외래의 무용을 도입한 후 잘 소화하여 현재 전해지는 바와 같은 무용으로 대성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용 상으로 봉산의 가면연극․무용은 건무의 형식을 취한 것으로 고려말기에 근원을 발하였다고 대개 인정할 수 있는데 이는 봉산 구읍 내에 준세습적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이것이 경의선 개통과 함께 사리원으로 옮겨져 변함없이 매년 음력 단오날에 왕성하게 행해져 요즘은 이를 관람하기 위해 그 지역, 근린 각 군에서 모이는 관중이 수천 내지 수만을 헤아린다.
대체로 조선의 연중행사는 기후와의 관계가 밀접하여 남도 지방은 가혹한 추위가 약간 누그러져 봄의 호흡이 느껴지는 음력 정월과 가을에 접어들기 약간 전인 추석에 행해지고 중부의 개성 등에서는 음력 4월 8일 석가탄신일이 최대의 명절인데 북도 지방은 음력 단오가 가장 성대하므로 각종 축제도 대개 이 날을 중심으로 행해진다. 마을의 머슴이 씨름대회에서 우승하여 상품으로 받은 소를 타고 젊은이들을 이끌고 석양을 받으며 당당히 개선하는 것도 이 때이며 밤낮으로 혹사당하는 며느리가 꿈에서나 끼었을 금반지를 그네뛰기 대회에서 받는 것도 이 단오날이다.
두견새의 첫울음소리가 들리는 사리원 경암산 아래의 광장에서는 낮에 씨름대회와 그네뛰기대회가 열리는 것은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으나 노을이 질 무렵부터는 전국에 자랑할 만한 가면연극․무용이 있으므로 이미 화톳불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림에서만 볼 수 있을 듯한 우아한 무용수의 ‘4상좌춤四上佐舞(무언)’이 있고, 다음이 ‘팔먹중’ 중의 ‘첫 먹중’의 과장科場인데 이것은 악기의 빠른 리듬에 맞추어 악대로부터 맹렬한 기세로 등장한 ‘첫 먹중’이 지면 무대 중앙에 드러누워서 춤을 시작하여 드러누웠을 때는 다리로, 엎드렸을 때는 허리로 리듬을 맞추면서 이윽고 서서히 일어나서 허리를 구부정히 굽힌 자세中腰로 춤추다가 선 자세의 춤立舞으로 바뀌고 얼굴을 가린 손을 한쪽씩 떼어 관중에게 보인 후(이 때 무서운 가면을 보고 관중은 왁―하고 함성을 지른다), 장렬한 건무로 바뀐다. 펄럭이는 한삼(손을 덮기 위해 소매 끝에 붙은 긴 천)과 허리띠는 허리에 찬 낭랑한 방울소리와 아무렇게나 꽂은 버들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혼연일체하여 관중으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하고 단번에 클라이맥스로 이끄는 연기는 현재 어떤 무용대가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대담하며 힘찬 것이다(이 춤도 무언). 이하 나머지 ‘일곱 먹중’의 무용 및 연기가 있고 마지막으로 전원의 난무가 있는데 각자가 나름대로의 포즈로 춤추면서 리듬만 맞추어 가는 것은 찬탄할 만하다. 이어서 ‘노장(파계 노승)’과 ‘여사당(떠돌이 매춘부)’의 음탕한 장면과 기타 수회를 거쳐 사자춤으로 이어지는데 사자는 사람 크기보다 약간 크고(안에는 두 사람이 들어간다), 계속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 빛을 받으며 새하얀 털을 흔들거리며 장려하게 춤추는 것은 영어의 원더풀 그 자체이다.
이렇게 하여 멜로드라마의 ‘양반’ ‘미얄할미’ 등의 과장이 있고 마지막으로 ‘남강노인’의 대사 “동창이 밝았노라, 아이들은 일어나거라……”가 시작될 즈음에는 짧은 여름밤도 희끗해하게 밝아지는데, 지금은 대개 12시경에 끝나도록 과장을 조정한다.
관람은 모두에게 무료이나 편하게 보려면 길이 약 150미터에 폭 70미터인 이 야외연예장을 둘러싼 관람석이 있는데 이것들은 대개 음식점이 설치하므로 사이다든지 맥주라도 사서 먹으면 여유롭게 볼 수 있다.
사리원의 이 행사는 매년 열리므로 꼭 한 번 보기를 권하고 싶은 것으로, 철도회사 등이 주최자와 협력(tie-up)한다면 임시기차 요금 할인을 해도 좋을 정도의 행사임을 단언한다. 또 최근에는 봉산과 동일하나 황해도 재령과 신막에서도 공연하게 되었으나 둘 다 봉산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북도 지방(북청 사자춤 및 관원행렬)
조선의 사자춤에는 벽사진경辟邪進慶(액막이)의 종교적인 상징적 사자춤, 예술적이며 사실적인 사자춤, 이 양자의 중간인 사자춤으로 대개 3종류로 구별할 수 있는데, 전술한 사리원의 사자춤은 사실적이고, 통영․수영(전자는 하지 않고 후자는 소멸)의 경우는 중간형이며, 북청의 그것은 완전히 종교적인 것이 특색이다. 마치 도쿄의 정월에 사자가 오는 것과 같은 관념이다.
일본 사자춤의 계통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수입설과, 고유무용인 사숨춤․멧돼지춤에 수입된 사자춤이 혼합되었다는 설이 있고, 수입지에 관해서는 앗시리아설․인도설․중국 경유 인도설․중국설 등 학계에 의견이 분분한데, 북청 사자춤은 조형미술상에서도 현재의 가면은 엉망이지만, 관념상에서도 일본 사자춤 연원의 고찰에 상당한 시사를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북청 사자춤은 음력 정월 15일 대보름 행사로, 그날 밤 일행은(그밖에 여러 동물가면이 있다) 피리 등의 악기를 선두로 하여 부잣집을 방문하여 먼저 안방(조선의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방)의 문을 열고 물어뜯는 흉내를 내고 다음에 부엌에서 똑같은 행위를 하는데 이는 악마를 물어 죽이는 관념이다. 또 때로는 아이를 향해서도 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도 필경은 무병무재를 기원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여 안뜰에서 잠시 동안 춤을 추고 다른 집으로 가는데 방문한 집에서는 응분의 희사를 하여야 한다. 이 구경은 아이들로 상당히 혼잡하므로 이리저리 밀쳐질 각오를 해야 한다.
가장무용인 ‘관원놀이’는 동군 토성리土城里의 전승행사로, 이 부락은 조선의 건국공신인 여진족 이지란李之闌을 낳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 행사는 동부락민의 그 해의 무병식재無病息災를 바라기 위한 일종의 액막이 행사로, 각 시대의 관원(문무)의 복장을 한 무리가 부락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자못 관존사상이 강한 조선다운 정황으로, 그중에서도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양악대까지 출연하는 것이다. ‘관원놀이’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으나 민속학 상에서 말하자면 마을 주민에 의해 행해지는 부락제와 그 제단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관원놀이’는 가면과는 전혀 연관이 없으나 부수적으로 사자춤도 춘다.
이상으로 조선의 가면연극 및 가면무용의 개황에 관해 서술하였으나, 일견 매우 가치가 없는 듯한 오래된 전승 향토예술에도 버리기 어려운 점이 있어, 실제로 소화 12년(1937년) 5월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민속학회 주최 ‘제1회 조선향토무용민요대회’(상연종목은 봉산가면무용․연극)를 열었을 때에는 미처 다 수용하지 못한 관중으로 특별히 연장 공연까지 했을 정도였는데, “뭔가 부족했던 점을 충족시켜 주었다”라는 현대무용가의 말이 당시의 일반적인 평이었다. 본래 향토예술이라는 것은 그 땅과 환경이 낳은 가장 적절한 것이며 게다가 가장 민중과 친밀한 것이 특색으로, 제 아무리 숭고한 예술도 이것을 모태로 한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반드시 이를 재음미하고 감상할 여유를 갖추어야 한다. 단오라든지 추석의 연 1,2회의 행사에 도회인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행사에 농어민이 열중하는 소이도 실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여행자가 주의해야 할 것은 조선의 이러한 행사는 경찰의 허가를 필요로 하므로 매년 날자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지만, 행할 때와 행하지 않는 때가 있으므로 미리 경찰서나 주최자에게 조회할 필요가 있다.
조선민속학회원
출처:≪관광조선≫(1권 3호. 1939년 10월 15일)
역자 김영식∙중앙대 일문과 졸. 2002년 ≪리토피아≫ 신인상(수필). 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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