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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단편/고양이와 헤이쯔마/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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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고양이와 헤이쯔마
강진
카페 ‘리치와 커피’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털은 온통 눈부신 흰색이며 오렌지 빛 눈을 가진 화이트 페르시안. 나는 카페에 여자의 고양이, 리치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 모습을 상상만 했다. 사뿐하고도 느리게 내딛는 걸음걸이와 움직일 때마다 꿈틀대는 척추 마디마디, 외부의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고 다만 가끔씩 무겁게 눈을 감았다 뜨는 고양이의 자태를.
거기까지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고양이였다. 하지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양이, 라는 곳에서 상상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양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나는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고양이가 귀머거리라니…… 그럼, 울지도 못하겠네?”
귀머거리 고양이 얘길 듣고 리치맘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그녀가 기른다는 고양이 이름이 리치라는 것을 알고부터 나는 이름보다 여자를 리치맘, 이라고 불렀다. 급할 땐 리치, 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물여섯 살. 나보다 한 살 어렸다. 그녀의 엄마는 얼마 전 재혼을 하면서 그녀에게 카페를 차려주었다고 했다. 원룸을 얻어 따로 살게 된 것도, 엄마와 함께 기르던 리치를 데려와 키우게 된 것도 그때부터라고 했다.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하면서 리치맘은 담배 연기를 천장을 향해 내뱉었다.
우리는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텄다.
“너, 고양이가 어떻게 우는지 알기나 해?”
“야아옹, 야아옹. 이렇게 우는 거 아냐?”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늘게 하려고 애쓰며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의 귓불에 매달린 은 귀걸이가 흔들렸다.
“왜 고양이가 야아옹, 하고 소리를 낸다고 생각해? 귀 기울여 고양이 소릴 들어보긴 한 거야?”
나는 다른 고양이 울음소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고양이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아끼는 운동화를 고양이가 물어뜯은 적이 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고양이에 대해 나쁜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 도도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기라도 할 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들이 싫었다.
“그럼, 어떤 소릴 내는데?”
“자, 잘 들어봐.”
그녀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입술이 천천히 과장되게 움직였다.
“미이우, 미이우.”
립씽크를 잘 못하는 가수들처럼 소리와 입모양이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소리를 듣기보다 그녀의 두툼한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유심히 봤다. 그녀는 참 매력적인 입술을 가졌다. 가끔 그녀와의 키스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나도 그녀의 입술모양을 흉내 내며 소리를 냈다. 미이우, 미이우.
며칠 후, 말로만 듣던 리치가 그녀의 카페에 왔다. 이제 녀석을 집에 혼자 두고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집에 들어가면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방문은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온통 발톱자국이란다. 슬리퍼는 신을 수 없을 정도로 찢겨져 있고, 쓰레기봉투를 헤집고 온갖 쓰레기들을 방안 이곳저곳에 흩어놓는다는 것이다.
리치는 아주 온순해 보였다. 리치맘의 말처럼 그렇게 흉악한 짓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카페 ‘리치와 커피’ 문 앞에 두 앞 다리를 세우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있는 폼이 여간 품위있는 게 아니었다. 지나간 사람들마다 쳐다봤다. 이게 무슨 종種이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 만지려고 손을 뻗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리치는 사람들이 만지려하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몇 시간이고 리치는 카페 문 앞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리치맘과 닮았다.
녀석은 정말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까. 리치가 카페에 나타나던 날, 나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리치, 리치. 자 소리가 들리나봐.”
문 앞에 앉아있는 리치의 한쪽 귀에 대고 박수를 쳤다. 손가락을 쫙 벌리고 두 손바닥을 강하게 마주치자 큰 박수소리가 났다. 녀석이 갑자기 앞발을 치켜들더니 발톱으로 손등을 할퀴었다. 순식간이었다. 상처에 빠르게 핏물이 스며들었다. 녀석의 발톱자국대로 몇 개의 금이 손등에 그려졌다.
“뭐야, 소릴 잘 듣잖아?”
“너, 바보냐? 앞에서 그렇게 손을 공격할 것처럼 가까이 가져가는데 당연히 할퀴지.”
“아냐, 소릴 듣고 놀라 할퀸 거라구.”
“너, 내 말 못 믿는구나? 그럼 내가 보여주지. 자, 봐. 내가 이름을 불러 볼 테니. 리치의 눈동자를 봐. 조금이라도 흔들리는지.”
리치, 리치. 그녀는 녀석의 뒤편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그녀 말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유리컵 하나를 집어 들더니 바닥에 떨어뜨렸다. 퍽, 제법 큰 소리가 카페에 울렸다. 리치는 앞다리를 곧게 세운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가끔 느리게 눈을 껌벅이긴 했지만 소리에 놀라서 눈동자가 흔들리진 않았다.
유리컵을 깨뜨리면서까지 그녀는 내게 리치가 귀머거리 고양이라는 걸 증명해 주었지만 나는 리치가 귀머거리라는 게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그 후로도 나는 리치 앞을 지날 때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이우, 미이우, 하고 소리를 내보기도 하고, 일부러 녀석의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떠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녀석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런데 리치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보다 이상한 것은 리치맘도 가끔씩 귀머거리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손님들이 주문을 하려고 몇 번을 불러도 못 듣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요즘엔 리치가 그녀의 카페 앞을 지키고 있다.
박봉구의 무협지 탐독
박 사장이 무협지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이 골목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트럭만 길거리에 대놓고 물건은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의 1.5톤 트럭은 물건을 잘 진열할 수 있도록 개조되어 있었다. 짐칸을 막고 양 옆으로 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트럭에는 한복을 입은 인형에서부터 나무로 깎은 안마기나 등긁개, 열쇠고리, 핸드폰줄 같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스테인리스 밥공기나 국대접, 숟가락, 젓가락을 앞부분에 진열해 놓았다.
늘 트럭만 지키고 있던 그가 갑자기 변한 걸 두고 처음엔 소문이 무성했다.
제일 먼저 생겨난 소문은 여자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홀아비인 박사장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뻔한 곳에서 여자를 만나겠다고 내빼는 짓은 못할 위인이라는 게 여자에 대한 소문을 잦아들게 했다.
그 다음엔 도박에 빠졌다는 소문이 났다. 한국산 스테인리스가 품질이 좋다는 것이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알려지면서 박 사장의 매상은 날이갈수록 늘어났다. 돈을 좀 만지게 되었으니 자연히 딴 생각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일 고래며 상어를 잡으러 가는 거 아냐? 하며 바로 앞 삼계탕집 최 사장이 물었을 때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바다이야기’에 미쳐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아침에 나타난 그의 눈은 늘 붉게 충혈 되어 있었으므로 더욱더 그 소문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곧 사실이 드러났다. 평소 구두쇠 소리를 듣는 박 사장이 도박에 미쳤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내가 박 사장의 뒤를 밟은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박 사장과 얽힌 게 많았다. 박 사장이 장사를 못하게 된다면 헤이쯔마를 파는 내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게 뻔했다. 관광객들이 박 사장 트럭 앞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나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검은 깨 캐러멜인 헤이쯔마를 팔 수 있었다. 따라서 박 사장이 만에 하나 장사를 못하게 되면 나도 이 일을 접어야했다. 이제 조금 자리를 잡은 듯한데 그렇게 되면 낭패였다.
박 사장 트럭 옆에서 검은 깨 캐러멜, 헤이쯔마를 팔게 된 것도 다 박 사장의 제안이었다. 근처 식당에서 배달 일을 하던 나를 박 사장은 눈여겨 본 모양이었다. 무작정 고향을 떠나 온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배달일도 하고 편의점 파트타임 일도 하고 하루하루 살면 그뿐 삶에 계획같은 건 없었다.
가끔 박 사장에게 점심 배달도 해 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이를 따지고 보면 아버지뻘이었지만 그는 나를 편하게 대해줬다. 담배도 나눠주고 가끔 소주도 함께 기울였다. 그러던 중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골목에서 튀어나오던 승용차와 내가 타고 가던 오토바이가 부딪히는 사고가 났다. 내가 일하던 식당 주인은 내 부주의라며 병원비를 못 내겠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내게 박 사장이 찾아와서 배달 일을 그만두고 헤이쯔마를 팔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가이드 마진을 떼어 준다고 해도 배달일 하는 것 보단 나을 테니 해 봐. 지나가는 듯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른 물건과 함께 팔던 것인데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선뜻 떼어주진 않았을 것 같았다.
박 사장 장사가 잘 안되면 덩달아 나도 타격이 있었다. 그러니 박 사장의 일이 곧 내 일이었다. 내가 박 사장의 뒤를 밟던 그날도 박 사장은 트럭에 있는 물건들을 대충 진열해 놓고 내게 트럭 좀 봐달라는 눈빛을 보냈었다. 그리고는 큰 길을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관광버스가 도착해야 일이 시작되었기에 시간의 여유는 많았다. 문제는 소문대로 진짜 도박에 미쳐있다면 트럭까지 날아가는 뻔한 일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박 사장 뒤를 따라갔다. 대학교 후문이 있는 큰 길 쪽으로 걸어가던 박 사장이 큰 길에 다다르기 바로 직전에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내가 박 사장이 들어간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라질 곳이라고는 골목 한 켠에 ‘만화’ 간판이 걸린 곳 말고는 없어 보였다. 그때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가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야학을 다니며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되짚어보니 박 사장이 없어졌다 나타날 때마다 책 한 권씩이 들려있었는데 그것이 무협지였던 것이다.
한글을 깨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박 사장에게 무협지는 무궁무진한 재미를 줄 게 뻔했다. 늦게나마 글자를 깨우치게 된 기쁨을 그는 요즘 맘껏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 나는 일이다. 박봉우 사장의 무협지 탐독.
검은 깨 캐러멜, 헤이쯔마
바람이 일었다. 빛바랜 늦가을 햇살이 도로 한복판에 머물러 있었지만 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나는 주차라인 안에 세워두었던 장애물들을 차곡차곡 포갰다. 원뿔모양의 플라스틱 장애물들이 모두 인도 위로 올려졌다. 곧 관광버스가 들어 올 시간이었다. 마른 잎 몇 개가 바람을 따라 줄지어 도로 한복판을 빙빙 돌다 흩어졌다.
마른 잎이 부러워질 때도 있다. 가볍게 바람 부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살고 싶다는 꿈, 그런 꿈이 생각날 때면 세상의 가벼운 것들이 부러워졌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삶을 무겁게 하는 건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처럼 좋은 차를 그런 싶다거나 큰 집에 살고 싶은 욕심을 버려도 삶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거워졌다. 버리면 가벼워진다고 말은 하지만 뭘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를 일러 준 사람은 없었다
시급 오천 원의 배달 일보다는 헤이쯔마 장사가 낫다고 했지만 가이드 마진을 떼고 나면 큰 돈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캐러멜 안에서 고무조각이 나와서 관광객에게 거센 항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사과를 하고 헤이쯔마를 더 챙겨줬지만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을 때 그날 매상을 모두 그 관광객에게 줘야만 했다. 법대로 하자면 결과는 뻔했다. 카페 ‘리치와 커피’가 생기면서 나는 리치맘과 같은 여자랑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과연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의심스럽다. 또 오랜만에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되어 어색하기도 하다.
금방이라도 몸이 땅으로 녹아들 것 같은 피곤이 몰려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시간이 늘어나면서부터 잠자는 시간이 하루 고작 서너 시간이었다.
관광버스가 들어오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놓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내가 장애물을 치우는 것을 보고 있던 화장품 가게 주인은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박 사장의 모습이 아직 보이진 않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루 몇 번 안 되는 장사를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어디서 쭈그리고 앉아 무협지를 보고 있으면서도 트럭을 엿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관광버스가 주차라인 안에 멈추면 관광객들은 각본대로 움직일 것이다. 먼저 그들은 가이드를 따라 화장품 가게로 들어간다. 거기서 쇼핑을 하고 있는 동안 맞은편 식당에서는 관광객들이 먹을 삼계탕을 가스 불 위에 올릴 것이고, 화장품 가게를 나온 관광객들이 횡단보도를 건너 식당에 들어서면 막 끓여진 삼계탕이 나온다. 식사가 끝나면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떠날 것이다. 그들이 버스에서 내려 다시 버스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정도였다.
트럭 주인 박 사장과 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식당을 나와 버스에 오르기 전, 그러니까 삼계탕을 먹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바로 버스에 오르지 않고 주위를 기웃거릴 때 박 사장은 트럭에 있는 물건들을, 나는 박 사장 옆에서 헤이쯔마를 팔아야 했다. 그 중 몇몇은 카페 ‘리치와 커피’로 커피를 주문하러 갈 것이다.
쫄깃쫄깃하고 달콤한 헤이쯔마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였다. 그들은 검은 깨를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국땅에 와서 그들의 명절인 춘절春節에나 먹는 헤이쯔마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운 모양이었다.
쓰. 하우츠.
드세요. 맛있어요. 글씨도 모르던 박 사장이 말로만 가르쳐 준 중국어였다. 이젠 나도 제법 능숙하게 하는 편이었다. 이그 쓰치엔, 싼그 이완. 한 봉지에 사천 원, 세 봉지에 만 원.
고양이와 헤이쯔마
“거리가 이렇게 이쁜데 여자들이 남자를 사랑하겠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나는 들뜬 목소리를 냈다.
“저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리치맘은 머리 위에 밝혀진 작은 불빛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도 무슨 이름이 있어?”
“응, 루미나리에.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위로와 축복을 의미한대.”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아라베스크 무늬의 빛의 터널은 축복처럼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보였다. 12월로 들어서면서 거리는 일찍부터 술렁거렸다. 노점의 좌판들이 일직부터 깔리고, 간판에 불이 화려해지고, 쇼윈도에는 화려한 물건들이 진열되었다.
“이리 와 봐.”
그녀가 나를 옷가게 쇼윈도 앞으로 잡아끌었다. 가게 안쪽엔 커다란 자작나무가 세워져 있었다. 나무 밑둥은 돌무더기로 에워싸져 있었다. 뿌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서야 겉모습은 진짜 자작나무처럼 보였다. 나무의 큰 가지에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나무와 인형을 이어주는 줄을 타고 인형은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춤을 추며.
“너도 저 인형처럼 춤 출 수 있어?”
“너 팔을 뻗어 봐.”
나는 나뭇가지처럼 팔을 뻗었다. 그녀가 팔에 매달리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인형을 흉내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 쳐다봤다. 가게 안에서도 우릴 보고 웃었다.
리치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예전에도 몇 시간씩 리치가 카페를 벗어난 적은 있었다. 그래도 녀석이 멀리 가지는 않았었다. 삼계탕집 앞에 앉아있거나 박 사장 트럭 옆을 서성거렸다. 닭 살코기를 모아놨다가 한 번씩 리치에게 주는 걸 알고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녀석이 식당 안을 돌아다니거나 하지는 않았다. 카페 앞에 앉아 있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처럼 리치는 식당 앞에서도 똑같은 자세로 앉아있곤 했다. 가끔 큰 길가에 늘어선 옷가게까지 가긴 했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이번엔 어떤 남자가 차에 태워 녀석을 데리고 가버린 일이 일어났다. 카페 앞에 앉아 있는 리치를 계획적으로 데리고 가 버린 것이었다. 모두 바쁜 시간이라 그 장면을 목격하진 못했다. 리치가 없어진 것을 안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박 사장 트럭에 헤이쯔마를 정리해 넣고 막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리치맘이 울면서 나타났다. 리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리치맘과 골목을 뛰어다니며 리치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리치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잊고 이름을 부르며 찾으러 다녔다. 자정 무렵,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낯선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리치의 목걸이에 새겨진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자신을 리치를 데리고 간 사람이라고 말하며 곧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남자는 어떤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밤새 카페에서 리치를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에게서 다시 연락은 없었다. 마음먹고 데려간 고양이를 되돌려 주겠다고 말했다면 되돌려주려고 했던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리치맘이 의자에 눕는 것을 보고 카페를 나왔다. 밖은 벌써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삼계탕집 앞에 지나는데 문앞에 희멀건 뭔가가 보였다. 리치였다. 거기 리치가 앉아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앞다리를 곧게 펴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채로였다. 마치 녀석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리치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 일이 있는 뒤, 리치맘은 작은 것까지 내게 얘기했고 의논했다. 젊은 여자 혼자 카페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 했지만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지냈었다. 자기를 낳아 준 엄마마저 의지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 나는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외로움을 매일 느낄지도 몰랐다. 잠에 빠져들기 바로 전, 잠에서 깨어나기 바로 전 우주 한복판에 혼자만 덩그러이 던져진 듯한 외로움을. 그녀와 나는 급속히 친해졌다.
“오늘도 편의점 알바 안 갈 거야?”
저녁만 먹고 헤어지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어제는 영화관엘 갔었다. 그러면서 편의점에 가지 못했다. 그녀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까지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헤이쯔마만을 팔면서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계획도 목적도 없이 하루하루 살았을 것이다. 집을 떠나오면서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버렸었다. 버리려고 했다. 세상엔 나 혼자였고, 혼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떠돌이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나는 스스로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매일매일 버리며 살려고 했다. 어떤 희망도 갖고 싶지 않았다. 희망은 여러 가지로 그 색과 모양을 달리하며 나를 조롱했었으니까.
“편의점엔 어제 전화로 관둔다고 했어. 다른 일자리를 좀 알아보는 중이야.”
너를 만나고 잘 살고 싶어졌어, 라고 덧붙이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나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걷고 또 걸었는데 그녀와 나는 처음 만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화려한 루미나리에 작은 불빛이 우리들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DVD방 갈래?
벽을 더듬어가며 문 앞 숫자들을 확인했다. 이렇게 어두울수가……. 리치맘이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러준 방은 15번이었는데 숫자 15가 붙여진 문은 보이지 않았다. DVD방에 갈래? 장난삼아 한 말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아. 뭘 모르는 건지, 너무 많이 알아서 초월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였다.
이쪽이 아닌가봐. 앞이 막혔어. 사방이 컴컴해서 도대체 어디가 벽이고 어디가 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반대편에 있나봐. 뒤를 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핸드폰에서 나오는 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새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윤곽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15, 숫자가 보였다.
소파는 둘이 눕기에 넉넉했다. 정면에 보이는 스크린만 희붐하지 룸 안도 통로처럼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간격을 두고 나란히 누웠다. 그녀의 손을 찾아 잡았다. 잠시 뒤, 빔 프로젝트의 빛이 스크린으로 쏟아졌다. 스크린 크기에 비해 스크린과 우리가 있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너, 남자와 여자가 디브이디방에 들어오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따라 온 거야?”
“응, 알아. 넌 내가 그렇게 쑥맥으로 보여? 근데, 너 설마 나랑 여기서 그걸 하자는 건 아니지?”
“괜찮아, 괜찮아. 오빠 믿지, 응?”
“어? 영화 시작한다. 조용히 좀 해.”
그녀가 팔베개를 할 수 있도록 팔을 뻗었다. 여자가 고른 DVD는 얼마 전 개봉했던 ‘워낭소리’ 였다. 뭐 그런 걸 골라? 좀 재밌는 걸 골라봐. 내가 우겼지만 여자는 고집을 부렸다. 엊그제 카페에 온 손님들이 이 영화 얘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꼭 보고 싶다고 우겼다.
노부부는 나무 계단을 오르고 있다. 경북 봉화 청량사. 그들은 기도를 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곧이어 낮은 산과 좁은 길, 좁은 길을 따라 심겨진 미루나무 몇 그루, 그리고 밭두렁과 논두렁들이 이어진다. 어렸을 때 내가 몇 년 동안 산 적이 있는 산골과 비슷했다. 내겐 지겨운 풍경들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몸을 틀어 좀 더 편한 자세를 잡았다. 노인을 달구지에 태우고 늙은 소는 느리게 걷는다. 졸렸다. DVD방까지 와서 잠을 잘 것만 같았다. 내가 영화를 고를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범죄 스릴러물같은 게 재밌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긴장을 주는 그런 게……. 다시 몸을 뒤척였다. 포즈를 바꿔도 한 쪽 팔을 그녀에게 내주고는 편한 상태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벌써 영화에 빠져있는 듯 했다. 그녀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내 손을 잡아 내리며 그녀는 다시 스크린에 눈을 고정시켰다. 소에게 밥을 먹이고, 소에게 막걸리를 먹인다. 노인이 쟁기를 끌고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개흙 같은 길을 걸어간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소가 할아버지를 달구지에 태우고 길을 나서는 장면까지 기억이 나는데 얼마만큼 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매일 소를 끌고 길을 나섰으니 아마 내가 잠 든 사이에도 몇 번은 더 비슷한 장면이 지나갔을 것이었다. 매일 소랑 일하러 가는 거 말고 다른 건 없었지? 그녀는 영화에 푹 빠졌는지 대구도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수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소가 더 살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하고 수의사는 떠난다. 노인은 낫으로 소의 코뚜레를 끊어준다. 나는 그 장면에서 약간 몸을 일으켰다. 아, 하고 탄식을 냈던 것 같기도 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소는 비로소 코뚜레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자유로워진 것이다. 나는 불현듯 내 발밑을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던 마른 잎들을 생각났다. 따지고 보면,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날아오를 수 있는, 아무렇게나 휩쓸려가는 것은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마른잎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가지에 붙어 있는 잎은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었다. 늙은 소도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십여 년간 얽매고 있는 코뚜레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갑자기 가슴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영화가 끝나자 룸은 다시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리치맘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나는 그녀의 이마와 입술에 차례로 키스를 했다.
“담엔 재밌는 거 보자. 심각한 거 말고.”
“난 재밌었는데…….”
“글구 다음엔 이 오빠가 너 가만 안 둔다. 그땐 각오하고 따라와.”
“뭘?”
그녀가 몸을 밀착해 왔다. 꽃냄새가 났다. 들꽃에서 나던 은은한 향이 났다. 그리고 따뜻했다. 따뜻하다는 기억마저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녀가 그것을 일깨워줬다.
“잠깐만 이대로 누워 있을래?”
“왜? 너 설마 영화 보면서 운 거 아니지?”
눈치가 빠른 걸까. 진짜 우는 걸 알고 하는 말 같았다. 그녀가 내 눈 밑을 더듬는다. 다행히 눈물은 그새 말랐나보다. 영화가 슬퍼서가 아니라 갑자기 떠오른 기억 때문에 눈물이 나왔다고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여기서? 이 캄캄한 곳에서?”
“캄캄한 곳에서 해야 어울릴 얘기야.”
“너, 또 이상한 얘기하려는 거 아냐?”
“여기 처음에 들어왔을 때 이 방문을 못찾아 어둠 속을 헤맸잖아. 그때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 있었어. 난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떠올랐어.”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우울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가?”
“어둠이 떠올랐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어릴 적 난 저 영화에 나오는 시골만큼 깊은 산골에 살았었거든.”
리치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 얘길 들어줬다. 그녀의 귀가 내 심장 위에 놓여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녀의 꽃향기가 맡아졌다. 이야기 도중 나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끌어다 손등에 입맞춤 해 주었다.
어둠의 기억
리치, 아니 리치맘, 해가 지면 세상의 모든 빛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암흑을 경험해 본 적 있어?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 볼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지.
해가 지면 나는 마루에 누워 혼자 놀이를 시작했어.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한 번도 엄마 얘길 안했었지?
제일 먼저 어두워지는 건 앞산이었어. 앞산 뒤편에 산그림자가 지면 그때부터 밤이 시작되는 거야. 그 산 그림자가 닿는 순서대로 어두워졌지. 산자락에서 가까운 밭이 어둑해지면 이어서 논이 어둑해지고, 그 다음은 집 바로 앞 호수. 호수가 어두워지면 이미 사방은 온통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암흑이 되어있지.
그때부터는 낮에 내가 봤던 모든 것들이 이상한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해. 마루에 누워 마당에 심겨진 감나무를 보고 있으면 감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이상한 짐승들이 보였어. 왼쪽으로 뻗은 가지가 표범의 꼬리같이 보이면 반대편 가지 사이에 어김없이 표범의 눈이 보이는 거야. 그것도 퍼런빛을 뿜어내면서. 무서워서 눈을 감고 한참을 견디다 눈을 뜨면 표범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지.
얼마만큼 시간이 흐르면 다시 새로운 게 보였어. 아까 그 표범으로 보였던 그 가지가 이번에는 박쥐처럼 보이는 거야. 이상하지 전혀 닮은 동물이 아닌데도 그렇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했어. 때론 박쥐 옆으로 비단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게 보이기도 하고.
호수를 빙 둘러 왕벚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한 번은 그게 성난 말처럼 보이는 거야. 자기 등에 탄 사람을 견디지 못하고 발악하는 포악한 말처럼. 앞다리를 들어 올리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울부짖는 말이 점점 뚜렷이 보이면 정말 어디선가 히이잉 말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니까. 분명히 그건 매일 보는 감나무이고 왕벚나무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 어둠 속에서 그것들을 무서워했던 것 같아.
다음 날, 눈을 뜨면 거기 감나무와 왕벚나무가 서 있었지. 표범이나 박쥐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던 것들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다시 날이 어두워지면 감나무엔 눈에 불을 밝힌 짐승들이 나타나곤 했지. 버텨보려고 뚫어져라 쳐다보다가도 무서워지면 눈을 감고 귀를 막았어. 그리고는 아무 노래나 불렀어. 생각나는 노래가 끊기면 아무도 모르는 말로 흥얼거렸어. 노래소리는 점점 커졌고, 커지면서 빨라졌어. 급기야 목소리도 떨렸고.
금방이라도 뭔가가 나타나 나를 데려갈 것만 같았지. 빨리 돌아오겠다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말이야.
왜 불을 켜지 않았느냐고? 어쩌다 마루에 전등을 켜면 더 무서워졌어. 나를 에워싸고 있는 적들에게 훤히 내 모습을 다 드러내놓고 있는 것 같았지. 그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나를 사냥감처럼 노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으니까.
마당 한 켠에 장작더미가 쌓여져 있었는데 그것을 뒤집어 씌워놓은 비닐이 바람에 펄럭이는 거야. 전등이 흰 비닐을 비추면 그게 뭘로 보였는지 알아? 흰 소복을 입은 귀신처럼 보였어. 장작더미는 괴물 같았고. 웃기지?
리치맘, 넌 그 무서움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 할 수 없을 거야. 아까 우리가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사실 난 저 불빛을 보고 깜짝 놀았어. 보여? 스크린 아래 놓인 저 기계에 켜진 불빛 말이야. 저기서 빛나는 주황색 불빛이 꼭 리치의 눈빛 같았거든. 순간 리치가 여기까지 따라왔나 생각했다니까. 잘 봐. 저게 리치의 눈이라면 주변의 희붐한 게 꼭 리치의 하얀 털처럼 보이지 않아?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내 얘길 들려줬다.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는 어둠에 대한 기억을. 고맙게도 그녀는 내 얘길 잘 들어줬다.
리치의 실종
또, 리치가 없어졌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리치를 찾는데 리치맘은 리치이름을 불러댔다. 예전에 리치가 없어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크게 불러도 리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점점 큰 소리로 리치를 불렀다. 소리가 공기를 흔들고 리치가 그 진동을 느껴 그것이 자기 주인의 목소리와 진동이 같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모를까 리치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큰 길까지 달려가서 나도 리치의 이름을 불렀다. 옷가게 안도 기웃거리며 리치를 찾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리치가 결코 돌아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리치는 죽었으니까.
박 사장의 트럭에서 헤이쯔마 봉지들을 꺼내려는데 뒷바퀴에 뭔가 희끗희끗한 것이 보였다. 털, 하얀 고양이 털이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리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근방에서 리치만큼 희고 긴 털을 가진 고양이 없으니까. 리치가 아니고 다른 고양이가 박 사장의 바퀴에 치어 죽었다면 그는 벌써 떠벌리고 다녔을 게 뻔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 사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협지에 파묻혀 있을 시간이었다. 관광버스가 도착하려면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타이어를 자세히 살폈다.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살점이 짓이겨진 채 달라붙어 있었다. 거기에 흰 털이 엉켜있었다.
“리치, 리치.”
귀머거리 고양이를 부르는 리치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나는 태연한 척 헤이쯔마를 진열대 위에 올려놓던 일을 계속했었다. 빈 상자로 트럭의 뒷바퀴가 보이지 않게 가렸다. 잔뜩 흐린 하늘에서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리치맘은 카페 ‘리치와 커피’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굵어진 눈송이가 그녀 머리위에 쌓여만 갔다. 눈이 그녀를 무겁게 할 것만 같았지만 다가가 뭐라고 말을 걸 수 없었다.
리치맘을 흘끗거리며 나는 주차라인 안의 장애물을 인도 위로 올려놓았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점퍼 위로 점점 눈이 쌓여서 그녀는 눈사람처럼 보였다. 가끔 힘없이 리치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꼈다. 아직 카페 문도 열지 않았다. 오늘 장사는 접을 모양이었다.
“리치, 리치.”
나는 리치, 라고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귀머거리 고양이 리치처럼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진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리치는 죽었다고, 그래서 이제 돌아오지 못한다고, 이제 그 이름은 그만 부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세상에는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많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멀리 관광버스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벙거지 모자를 귀까지 덮어쓰고 박 사장이 눈 속을 달려오고 있었다. 화장품 가게 앞 스피커에서 나오던 캐럴은 한층 그 소리가 커졌다. 중국인 관광객이 버스에서 내리면 삼계탕 냄새가 퍼져 나갈 것이다. 나는 이젠 제법 익숙해진 중국말을 중얼거렸다.
메이디, 샤이그, 쓰. 하우츠.
아가씨, 아저씨, 드세요. 맛있어요. 하지만 리치가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리치, 리치.’
이렇게.
강진∙200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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