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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젊은시인 집중조명/등뼈에 관한 프로파일링 외 9편/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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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등뼈에 관한 프로파일링* 외 9편
삼복더위를 지고 가는 개
휘인 등뼈가 무겁다
예수도 손에 못이 박히는 시간에는
순간적으로 등이 휘면서
퇴화를 경험했다는 걸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인간인 것을 망각한 사람의 몸은 네 발로 걷는 짐승
등뼈가 수평으로 회귀한다는 걸
개가 인지할 방법은 없다
중천에 걸린 해가
진화하려는 개 본능을 엿가락처럼 늘어뜨려서
게으름을 조장해도
배부른 짐승이 만끽하는 행복과는 상관이 없다
사람 밥을 먹으면서 생겨난 습성으로 인해
직립하는 문명이 자기 거라는 생각 하지만
사람이 개 목줄을 풀지 않는 한
진화는 없다
세상 어느 곳에도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올곧은 등뼈가 없다는 건
직립은 진화의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등뼈는 몸을 지탱하기에 급급한 골조가 아니라
욕망이 지향하는 대로 끓는
빙점을 기억하지 않는 용광로이어서
휘어질 수밖에 없다
*사건을 분석하다는 뜻임.
무안타 기록자의 홈런
홈런을 칠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 땅에선 태풍이 안타를 친 흔적이 없으므로
해변가 단층의 아귀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기상청 통계자료를 맹신하고 있었다 그곳엔 태풍이 안타를 친 기록은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한 여름 열기를 가려줄 선글라스와 모자, 비치솔만 해변가 모래 위에 빼곡히 꽂아놓았다. 홈런은 예견하지 않은 도면에 그려진다는 걸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무안타 기록자가 가진 내공 같은 건 관심이 없었으므로
오랜 만에 부화한 사막메뚜기가 기를 쓰고 그렇게 날아오르는 건
20년 동안 땅에 묻은 시간을
한꺼번에 가로질러 가는 거라는 걸 몰랐다
태풍이 해변을 지나 홈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사람들 홈을 넘어가버린 공은 실종되었다 사람들은 아웃되었다
아버지 장례법
독일산 사냥개는 생전에 아버지를 사로잡았다 얼룩무늬 꼬리를 흔드는 횟수만큼 아버지 입꼬리도 같이 살랑거렸다 몸살기라도 조금 보이면 동물병원 문을 두드리고, 사냥개는 어린 시절 우리 7남매보다 주사를 맞는 횟수가 많았다 우리집 엥겔지수와 양육비를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았다
마당에서 수탉이 한 마리 옴팡지게도 울던 날
더위 탓인지 독일산 사냥개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놓았다
“얘야, 물 끓여라”
관棺이 되어 버린 가마솥 안에서 사냥개는 맛깔스럽게도 끓었다
사냥개를 애지중지한 아버지는 그날 바로 개를 아버지로 몸으로 만들었다 생전에 아버지 입꼬리와 사냥개 꼬리가 흔들리는 정도로 봐서는 종種을 초월한 사랑을 한 것 같았지만, 아버지는 인간적인 사랑을 택했다
염천의 복날, 땡볕 아래 서 있는 아버지 몸에서 사냥개가 컹컹 짖었다
벽걸이형 TV 인간
리모콘을 돌린다
시사 채널에서 야구장 중계 현장으로
화면을 정신없이 좇아다닌다
비단길을 따라 걷는 낙타 등에 실린 누들 국수
유리 진공관을 걸어 나온 사막이
그의 눈에 일렁인다
그의 심중을 간파하고 있는
50인치 대형 TV는
부동을 심리적 전략으로 하고 있다
HD로 수신되는 지구촌
다큐멘터리 시청률에 일조하려면
움직일 수 있는 그가 몸을 조정해야 한다
좌우로 아래로 목 근육을 비틀어가면서
대형 TV에서 쏟아내는 영상들과
눈을 맞추어야 한다
사라진 샤먼들이 목에 삼킨 주술들을
잡종교 교주인 TV가 계승했다
그를 지탱하는 척추뼈 1번은
정치적 식견을 높여주는 시사 프로를 경배하고
야행성 습성을 즐기는 척추뼈 2번은
성인용 프로를 경배한다
척추뼈 3번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
카타르시스 약점을 알고 있는 잡종교
즐거이 회개하는 참회의 시간은 길다
TV를 경배할수록
그의 몸 뼈들은 어기적거리고
리모콘 없이도 자동 조종되는 광신도
벽걸이 TV가 채널을 돌린다
알리바이
한눈을 파는 동안
알리바이가 뒤바뀌어 있었다
내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는 건
굴절하는 렌즈로 나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심중에서 커져가는 의혹 덩어리는
반대방향으로 엇갈리는 사슬을 채우고
나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같은 길도 오가는 방향에 따라서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는 걸
기억하려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르시시즘의 함량이 과도한 거울을
네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굴절되는 렌즈가 알리바이에 개입되는 순간
오른 쪽이 진실이고
왼쪽이 거짓이라는
후경이 가진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이든 간에 알리바이를 요구한다는 건
몸 어디선가 철거덕,
덫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일이다
누군가 나를 취조하려 들면
나는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알리바이는
내게서 증명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서 증명 된다
합법적인 이혼 판결문
신 앞에서는 평등할 거라고 생각한 여인이
옥황상제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왕의 장례에 자신을 희생시킨 장례위원회에게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저승사자를 보내라고 간청을 한다
통풍도 없는 왕릉에 순장되어
오금 절어 흘리는 방뇨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간을
이승에서의 축첩과 살인죄가 죽은 자에게는
왜 허용 되냐고 항명을 한다
회생을 모르는 남자와 치루는
무덤 안에서의 초야를
이승을 넘어서지도 저승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오르가즘을 아냐고,
저승에서는 이혼을 원한다고 애원을 한다
하지만 옥황상제가 내린 판결문
여인을 왕릉 안에 유폐할 것
왕과 장례위원회는 치외법권이 적용되므로 면죄하고
하극상을 범한 여인에게는 항명죄를 추가할 것
기간은 옥황상제와 저승사자가
여자로 바뀌는 그 날까지로 할 것
펌프질
암 종양을 오린 왼쪽 유방이 찌릉댄다
어린 나무 그루터기만 봐도
복령 같은 젖무덤이 부풀어 오르는 그녀
가벼워지는 것이 생이라며
한 잎 한 잎 꽃멍울을 주워든다
헝크러진 암세포가 찌릉대며 수화기를 타고 뻗어온다
젖줄을 잃어버린 모태는
썀쌍둥이를 출산하는 꿈을 꾼다
하나의 젖멍울을 올려다보는 두 쌍의 눈
이제 막 눈을 뜬 아기 안구 뒤에서
1억 3천 7백만 개 세포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아기의 정서는 배고픔 본능 하나가 아니라
1억 3천 7백만 개 세포가 만들어낸
감정이 혼합되어 분출되고
그녀는 심장이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을,
산모는 한 명의 생명만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셀 수 없는 다리들이 엉켜서 오글거리는
아기들이 방긋 웃는다
한쪽뿐인 여자 젖멍울을 펌프질 하는 작은 입들
젖줄이 사방으로 튄다
지금은 수술 중
그때부터 저는 강박적으로, 제 눈으로 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대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프리다 칼로
지금은 수술 중
다음 관람자는 경계선에 서서
마취제를 투여 하세요
살아오면서 조립한 의식들은
입구에 있는 보관함에 넣어두고
비밀번호 하나만 외워두세요
붓끝이 도려내는 환부를
이식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미술관 벽면에 해부해 놓은
프리타 칼로와 만나면
수술은 금속성 메스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은 과감히 버리세요
상징의 비법으로 시술되는
프리다 칼로 메스
피를 흘리지 않는 칼질은
꿰매는 방법도 신화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철근으로 지탱하고 있는
한 여자 강박증,
그림은 화가의 내면을 현상한 사진이에요
예술이 신경증 일종이라는 말
공감이 되는 순간이죠
강박증 환자끼리의 교감이
처방전이랍니다
썩은 환부를 재생하는 7000원 치료비
프리타 칼로 수술은요
이열치열 후끈하게 달구어지는, 시술법
유통기한이 지난 여자
유통기한이 지난 여자 몸에서
마개가 시원하게 터진다
여자가 열지 못한 마개를 시간이 딴다
연초록잎 팔랑거리던 엉덩이는
팔자걸음 위에서 간당거리고
여자 귀에 속살거리던 금기목록들은
이제는 난청이다
머릿속 뇌파로 확장되어 가던 말들이 엉켜
스프링이 되어 튕겨나온다
나이-영계
미모-성형의 갈등
몸-S라인을 위한 다이어트 강박증
시대의 담론을 무사하지 못 한 여자
쌍피 전략을 포기한 화투패 껍질처럼
덩그라니 던져진 여자를
여자는 품에 안는다
여자 몸에 담긴 내용물이 세상으로 쏟아진 후에야
아줌마 길로 들어선다
신성과 혐오를 동시에 함유하고 있는
세상에 가장 무섭다는 며느리 늙은 것과
여자 늙은 것
속설이야 어떻든 여자는 유통기한을 안다
베아트리체바이러스
자살을 관리하는 프로젝트, 자살클리닉은 어디에도 없다 자살을 방조하는 기사들로 신문 사회면은 음산하게 웃고 있고, 스탕달을 강박증에 몰아넣은 한 여자 죽음이 바이러스로 진화되어 있다
유명 연예인에 대한 환상이 절연되는 시간, 우울증을 견디던 TV 시청자들에게 베아트리체바이러스가 감염되었다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1,620회 바느질로 꿰맨, 제가 만든 축구공을 차보는 것, 300원 일당을 받는 파키스탄 노동자 아이들에게 자살은 가족의 생명이다 하강할수록 날카로운 송곳날이 그들을 찌른다
자살은 이루지 못한 욕망을 등식으로 한다
추락은 뿌리를 뻗으려는 심리적 반동
슈팅의 강한 욕망이 죽음을 가속한다
노동자 아이들에겐 바이러스도 N0 골인이다
시작메모
몸, 정신이 투사되는 현상학적 반응체
인간의 몸처럼 극단적인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도 드물다. 생명과 관련될 때는 한없이 신성시 되다가도 섹슈얼리티와 관련될 때는 한없이 타락시 된다. 몸은 형태는 또 어떤가? 군살이 없이 잘 다듬어진 몸매는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인식되지만 형태가 망가져버린 몸매는 탐욕의 상징이나 나잇살,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으름으로 인식된다.
사회의 인식이 말해주듯 몸은 단순히 몸의 문제가 아니다. 몸은 단순한 물질덩어리가 아닌 인간의 정신이 투사되는 현상학적인 반응체인 것이다. 그러나 몸과 정신이 가지고 있는 역학관계는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몸은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몸이 가진 본능이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몸의 속성이 욕망을 자극하고 내면의 속성이 몸을 움직인다.
그런 탓일까, 현대 사회는 몸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다. 그것도 정신적 작용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외형적인 형태에 관한 담론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행하고 있는 성형이 위선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인식하지 못 한다. 단순히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 타인들의 눈에 자신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성형이 유행하는 시대를 보면서 조물주는 무슨 생각을 할까? 성형은 사람의 몸을 통해 측정되는 시간의 정체성을 소멸해 버린다. 시간을 칼로서 위장하는 것이다. TV를 보면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의 얼굴들. 요즘은 저승사자가 일하기 참으로 곤란한 시대인 것만은 사실이다.
몸을 화두로 잡고 있는 나 또한 이런 사실들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 한다. 언젠가 시로 형상화 했듯이 사람의 몸은 무구한 역사를 가진 책이다. 최초의 인류에서 시작된 유전자뿐만 아니라 수 십 만년 동안 누적 되어온 습성 등 인류의 모든 것이 몸에 각인되어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몸은 반응하고 미세하게 변화되어 가고 있다. 반응하고 변한다는 점에서 몸은 사랑스럽다. 그것은 몸에 내재된 원초적 본능일 수도 있고 정신적 자아에 의해 조종되는 고귀함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귀천을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푸코가 쓴 푸코가 쓴 광기의 역사를 보면서 느낀 것은 가장 짐승적인 본능으로 회귀할수록 인간은 몸은 위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것이 잔인하고 처절하도록 슬픈 존재이지만 솔직해지는 몸의 반응은 오히려 고귀하다. 정신의 영악스러움이 문제인 것이지 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몸에는 인간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태도가 묻어 있다. 몸의 형태는 현대의학으로 바꿀 수 있지만 심리적 현상에 의해서 반영되는 몸의 태도는 바꿀 수 없다. 몸에서 정신적 위선은 묻어나도 태도의 위선은 묻어나지 않는다.
정진경∙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알타미라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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