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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시/죽음과 소녀 외 1편/전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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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48회 작성일 09-12-21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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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철
죽음과 소녀 외 1편
―소월의 손녀 김은숙 씨가 「초혼」에 대하여 말하다

우리 집안은 늘 유령의 냄새가 전염병처럼 번졌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시 때문이라고 했어요. 할아버지 시에는 고구려 고분 벽화 냄새가 나서 달처럼 둥둥 떠다녔대요. 내가 「죽음과 소녀」의 카페에 자주 오는 것도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듣는 것도(사실 카페에는 슈베르트의 「마왕」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술꾼이 된 것도 다 할아버지 시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할아버지의 시 「초혼」 중에서 딱 두 구절만을 큰 소리로 읊었어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지금 생각해 보면 식민지 냄새 가득한 마을에서는 숨조차 쉬기 힘들어 날마다 달로 떠나버린 마을 소녀들을 찾으러 간다고 
할아버지는, 
산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았대요. 세상의 모든 이름들이 떠나버린 마을에 달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는데도 말이에요. 어쩌면 할아버지는 권태 가득한 마을의 눈 먼 집에 더 이상 박혀 있을 수 없었던 거죠. 달도 먼 과거로 도망쳐 버려 할아버지는 찢어지고 부스러지는 허공을 이빨로 꿰맸겠지요. 

남루한 거리 
부패가 끝난 시체보다 공허하여 
눈들끼리도 서로 마주치지 않은 거리에서
달나라로 떠나 버린 소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할아버지는 허공에 달로 떠 있고 싶었겠지요.
(은숙 씨는 슈베르트의 「마왕」 속을 걷고 있었고 내 눈은 창문에 매달려 꿀꺽꿀꺽 은숙 씨의 마음속을 걷고 있었다.)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달과 해 사이 남루한 허공은 너무 넓었겠지요. 불행이 공포로 번진 마을에서 소녀들이 도망쳤으니 말이에요.

낮의 슬픔을 흡수한 적막 속에서 환영처럼 떠다녔던 얼굴들이 종소리로 울었고 찢어진 허공으로 달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 고깔모자에 붉은 옷을 입고 산 위에서 춤을 추며 북을 울렸대요.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산 위에서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 달을 보며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이빨로 꿰맸고, 하늘에서는 세상의 끝을 알리는 북소리가 둥, 둥, 둥, 울었고 창백한 얼굴들이 허공에 떠다녔겠지요. 

우리 집안은 시 때문에 저주를 받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떠돌이가 된 것도
서정주 시인이 준 세뱃돈을 남동생이 내동댕이친 것도 
(은숙 씨는 마왕이 데려간 듯 탁자 위에 엎드려 숨조차 쉬지 않았고 나는 담배만 뻐금뻐금 피워댔다. 카페 안에는 이제 주베의 「슬픈 로라」가 흐르고)



 
콘트라풍크투스

맹인 한 사람만이 사는 도시가 있다. 
그 도시에는 핀 머리만한 가로등이 오백오십오 개나 있고 
신호등이 마찬가지로 오백오십오 개 있으며 오백오십오 개의 풍향계가 있다.
도깨비1:누구야?

맹인은 지팡이도 없이 오백오십오 개의 길을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데 
그가 가는 곳은 딱 두 곳이다. 한 곳은 교회이고 다른 한 곳은 도서관이다. 
맹인이 신호등을 지날 때마다 가로등은 ‘오!’ 하면서 켜지고 
뒤를 이어 신호등과 풍향계가 소리치지 않고 팔을 들어 올린다.
도깨비2: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맹인이 다니는 교회는 맹인이 사는 집에서 오백오십오 개의 가로등을 지나서 있고 
도서관은 오백오십오 개의 신호등을 지나면 있다. 
맹인은 눈을 뜨자마자 교회에 간다. 
맹인의 교회는 오백오십오 개의 좌석이 있는데 맹인이 기도를 하면 
지상의 모든 떠돌이 신들이 나타나 기도를 한다. 
맹인은 풍향계에 따라 그날의 기도를 정하고 집에 가면서 
신호등에 그 날의 기도문을 적는다.
도깨비1, 2:(서로를 쳐다보며) 젠장!(각자 갈 길을 가 버린다.)

기도를 마친 맹인은 도서관에 간다. 
오백오십오 개의 신호등을 지나 도서관에 이르면 
지하실에 보관 되어 있는 오백오십오 권의 법전을 읽으며
그 날 하루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며 법전에 한 획을 더한다.
도깨비3:다른 놈들은 다 어디 갔어?
도깨비4:여기는 과거 전쟁터여서 아무도 없어.

가끔 길을 잘못 들어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주민들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면 
맹인은 모두 교회나 감옥에 갔다고 대답한다.
엽서보다 작은 나라에서 맹인은 나뭇가지에서 잠을 잔다. 
땅에는 눈 뜬 벌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
……
도깨비1, 2, 3, 4 …… 무수히 많은 도깨비들이
맹인이 사는 집과 교회와 도서관, 그리고 감옥을 쳇바퀴 돌듯 하면서
맹인을 찾아다닌다.
……
……

전기철∙ 198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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