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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2009/겨울)/신작시/어느 싸움의 기록 외 1편/김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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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어느 싸움의 기록 외 1편
그날의 어둠은, 누군가 읽고 버린 신념 같았고
신념은 젊고 힘센 얼굴로 저녁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어제 지닌 슬픔은 누군가의 먼 길에 버려지고
저녁의 기도 밖에서
뼈는 굽고
눈은 어둡고
젊음은 식고
사랑은 늙었다
허공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던 남자는
벼랑에 뿌리내린 나무나
절벽 끝에 집을 짓는 새의 마음을
알고 싶었을까
승리와 더 많은 패배와 반역에서
남자는, 고단한 기록을 남겼다
불과 재의 일생을 거쳐
세상의 들판과 세상의 강을 건너
새로 비가 온다
어둠만이 울음처럼 남아있다
햇빛과 우레, 불같은 마음과 가시 사이에서
남자는 죽음보다 늙었다
사소해서 무고한 듯
사람 사는 게 다, 기적 같다는 선생은 궁금한 일도 슬프지만은 않다며 잎 진 나무 그늘에 무릎 오그리고 앉아 담배를 길게, 태우신다 사소해서 무고한 듯 처마 끝에선 씨옥수수가 가물어갔다
그새 저녁이 다 오고 가을이 데불고 온 슬하의 식구들은 서리 묻은 얼굴로 산모퉁이를 돌다 돌이 되었다가 그늘이 되었다가, 하고 울음이 따라간 발자국만 길게 패였다
김병호∙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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