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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초점/설태수/퇴옹 성철의 선시와 윌리엄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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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17회 작성일 20-01-1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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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초점/설태수/퇴옹 성철의 선시와 윌리엄 블레이크


설태수


퇴옹 성철의 선시와 윌리엄 블레이크



Ⅰ.
존재에 대한 인식은 각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현상에 대한 안목의 깊이에 비례하여 인생관의 폭이 결정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심원한 사상이 녹아있는 시와 예술 철학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점점 더 탐닉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갈증이 근원적으로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몸을 통해서 그런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누구든지 좋아하는 노래나 스포츠에 열광한다거나,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현상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어떤 일에든 깊이 심취해있을 때에는 그 일과 하나가 된 나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의 몸 또한 의식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공의 개념을 저절로 잊게 되는 것이다. 엘리엇T. S. Eliot이 “시간을 통해서만이 시간은 정복된다.”(173)라고 갈파한 것은 이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공 속의 ‘자아’를 통해서 ‘무아’를 향유하고 싶은 역설의 세계를 인간은 갈구하는 것이다. 무아無我라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없는 나’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이것은 무심無心을 “없는 마음”(성철 1992, 255)이라고 표출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데, 몸도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 존재하기에 고정된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의 경우에도 그것이 고착되면 변화하는 몸의 이치와 맞지 않으므로, 아집에서 벗어나 어떤 일 또는 대상에 몰입되어 무아경을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이와 같은 무념무상의 경지를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으며, 싫은 일도 불가피하게 하게 되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부닥친 상황에 휘둘리게 되어 심한 낭패감을 겪곤 한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어떠한 인생관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각자는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될 수 있고 노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에 따라서는 감각의 세계에 함몰되어 감각의 범주에 드는 것만 인정하게 됨으로써 감각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고, 이와는 반대로 감각이라는 형이하학의 세계를 통하여 형이상학의 세계를 넉넉하게 유추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도 한다. 형이하학의 현상계를 통해서만이 설득력 있는 형이상학의 이성理性 및 초월적 세계를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는 감각이라는 것이 오히려 심오하고 광대한 형이상학의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창문 역할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유한성을 지닌 ‘지금 여기’에서 ‘영원성’을 간파하는 안목이 형성될 수 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의 세계가 선명하게 각인되는 것처럼 유한성이 있기 때문에 무한성의 세계를 우리는 나름대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보면 유한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계가 영원성을 감득하게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감지하는 제유적 안목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빛나는 안목을 선승禪僧 퇴옹 성철性徹과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을 작성하게 된 취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깊이 있는 통찰력은 적지 않은 시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렇지만 성철과 블레이크에게는 돋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설법과 시에는 환희delight가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블레이크의 경우, 「런던London」, 「굴뚝 청소부The Chimney Sweeper」같은 시에서 그 시대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 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언급 대상을 존재에 대한 시인의 깨달음과 관련된 시에 국한하고자 한다. 성철(1912-93)은 블레이크(1757-1827)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고, 블레이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으며, 이들을 동시에 조명한 연구 자료도 아직까지는 전무하다. 그래도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글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연구방향도 논문에서 추구되어야 할 영역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두 사람의 시와 진술을 비교해봄으로써 이들 세계관에는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는지 일별하고자 한다.


Ⅱ.
퇴옹 성철은 1981년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된 선승이다. 그는 매년 초에 신년법어, 음력 4월 8일에는 초파일법어를 설파하였는데 법어마다 찬미와 환희로 가득 차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신년과 초파일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환희에 찬 설법은 눈여겨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일반 대중을 향한 그의 진술의 장점은, 그 속뜻이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일단 부드럽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와 잡다한 일상에 휘둘리면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설법이 아득한 메아리처럼 여겨지면서도 수긍하게 되는 면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의 진술에는 거부하기 어려운 정연한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84년 신년법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삼라만상이 하나도 광명 아님이 없으니 나는 새, 기는 벌레, 흐르는 물, 서있는 바위가 항상 이 광명을 크게 말하여, 일체가 서로서로 비추어 참으로 거룩하고 무서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무리 불행하게 보이는 존재라도 광명이 가득 차있으니, 모두는 참으로 행복한 존재입니다. 이 광명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를 초월하여,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도 항상 있었으며 우주가 소멸된 후에도 항상 그대로입니다. 이 광명은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니, 인간의 본래 마음은 허공보다 깨끗하여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성철 2003, 20-21)


낱낱의 개체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광명이 가득 차있다는 그의 설법은 세부적이면서도 가늠하기 어려운 광막함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거룩하고 무서운 장관”인 그 세계가 “마음의 눈으로만” 보인다는 점에서 평범한 사람들도 그런 세계를 감득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가 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허공보다 깨끗하다는 “인간의 본래 마음”을 되찾는 일이, 가득 차 있는 광명을 발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는 그는 구체적 방안을 쉬운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아무리 오랫동안 때가 묻고 먼지가 앉아 있어도 때만 닦아내면 본 거울 그대로 깨끗합니다. 그리고 때가 묻어있을 때나 때가 없을 때나 거울 그 자체는 조금도 변함없음과 같습니다. 금가루가 아무리 좋아도 거울 위에 앉으면 때가 되어서 거울에는 큰 장애입니다. 그리하여 성현들의 금옥 같은 말씀들도 이 거울에게는 때가 되어 본마음은 도리어 어두워집니다. 그러므로 성인도 닦아내고 악마도 털어버려야 합니다. (성철 2003, 32-33)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금가루가 아무리 좋아도 거울 위에 앉으면 때가 되어서 거울에는 큰 장애”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 다수가 선호하는 금가루도 거울에 뿌려지면 방해물밖에 안 된다는 언급은 금에 대한 일상의 통념을 부숴버리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어지는 연장선상에서 “성현들의 금옥 같은 말씀들도 이 거울에게는 때가 되어 본마음은 도리어 어두워”진다는 통찰은 퇴옹 성철의 깨달음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아닌가 한다. 성현들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은 우리가 지향할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딛고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귀한 말씀이라 해도 강을 건너가게 하는 배에 그치므로 강을 건너면 그 배를 버려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석가, 예수, 공자, 노자 등 모든 성현들의 말씀도 기껏해야 수단으로서의 역할 이상은 못 된다는 것이 된다.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세계가 곧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하루하루를 무난하게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도처에 곤경이 도사리고 있으며, 좀 극적으로 표현하면 죽음이 늘 발밑을 따라다니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생은 속성상 그 기간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극단적으로 보면 매순간이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불완전한 유한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생에는 방일함을 경계할 수 있는 긴장감이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꽃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안타까운 유한성에서 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생멸의 관계를 거시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인식이 가능하지 못할 것도 없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고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입니다. 이것은 모든 만법의 참모습으로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성철 2003, 88)


그리고 생과 사를 부침浮沈하는 파도에, 불멸을 바다에 비유한 성철의 다음 설법은 막연한 상념에 머무르기 쉬운 불생불멸의 개념을 비교적 명쾌하게 제시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생사生死란 바다의 파도와 같습니다. 끝없는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났다 꺼졌다 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났다가 죽었다 합니다. 그러나 바다 자체를 볼 때는 늘고 줌이 없지요. 삶과 죽음 그 자체도 그렇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 자체는 바다와 같이 광대무변하고 영원해서 상주불멸常住不滅이며 불생불멸입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삶과 죽음은 하나이지 둘로 볼 수 없습니다. (성철 2003, 345)


이처럼 생과 사를 하나로 보고 불생불멸을 존재의 기본원리로 체득한 자에게는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며, “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성철 2003, 146)이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각인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흔히 쓰이는 ‘성불成佛’이라는 용어도 ‘부처가 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중생이 본래부처本來是佛”라는 뜻이기 때문에 성철은 1982년 초파일법어에서 이렇게 설법하고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성철 2003, 42-44)


여기서 우선 주목해야할 대목은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즉 “만물은 서로 의지해서 존재할 뿐相依性”(성철 1992, 140)이라는 표현과 통하는 것으로서, 각각의 개체들이 평등관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물리학자는 “개개의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상호 역동적인 관계에 놓여있다”(양형진 173)고 진술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의 싹이 틔워지는 일, 하나의 꽃이 열리는 일, 한 생명이 살아가는 일, 그 모두가 빠짐없이 전 우주적 진동”(177)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맥락에서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라는 선언과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다는 성철의 설법은 깊이 있는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처럼 개개인이 본래 부처일 뿐만 아니라 “만법이 청정하여 청정이란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가없는 이 법계에 거룩한 부처님들로 가득 차 있다”(성철 2003, 77)는 것을, 안타깝게도 대다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탐貪, 진瞋, 치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는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이 셋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탐욕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탐욕이 성냄과 어리석음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성철과 블레이크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보인다. 블레이크도 현상계에서의 무한성을 통찰하는 방편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만약 지각知覺의 문들이 깨끗해진다면 인간에게 모든 것은 현재 있      는 그대로―무한으로 보일 것이다.


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 every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 infinite. (Blake 114)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깨끗한 안목이 있다면 모든 것이 무한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서 무한을 간파하고 못하고는 결국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 맑고 심원한 안목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해서 탐, 진, 치가 제거된 마음을 지니게 되면 지금 현재에서 빛나는 영원을 체득하게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서 블레이크의 장시 「천국과 지옥의 혼인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는 “영원은 시간의 산물産物들과 사랑에 빠져 있다.Eternity is in love with the productions of time.” (Blake 108)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시간의 산물들’이라는 것은 현상계를 말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A와 B가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은 이 둘이 1:1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며, 둘 사이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적인 면(크고 작음 또는 많고 적음 등)에 상관없이 질적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서로가 우열 관계 속에 있으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객관적으로는 한 쪽이 우월하다고 해도 진실한 사랑의 상태로 접어드는 순간, 절대 평등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라일락 꽃향내와 ‘영원’은 가치 면에서 절대 평등을 이루고 있으며 서로가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라일락 향기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해도, 길지 않은 향내의 그 시간이 곧 영원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설태수 2011, 81) 이렇게 볼 때 풀잎 하나 티끌 하나는 물론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낱낱이 영원성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철 선사의 파도와 바다의 관계에 대한 설명과도 잘 통한다.
또한 블레이크의 시 구절에는 성철의 환희에 찬 설법과 어렵지 않게 연결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천국과 지옥의 혼인」에서 “에너지는 영원한 희열이다.Energy is eternal delight.”(106) 라고 노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질량은 에너지’(E=mc²) 라는 물리학적 시각으로 볼 때 만물은 에너지가 각각의 질료에 따라서 형상으로 나타나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에는 기류와 빛이라는 에너지로 충만해 있고, “진공이라는 것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김성구 103)는 점을 미루어 보면, 블레이크는 자신을 비롯한 전존재의 영원성을 자각했으며, 이를 환희에 차서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깨달음은 다름 아닌 상상력에서 우러난 통찰력에 있다고 보았으며, 힐튼Nelson Hilton은 그렇게 해서 얻은 깨달음을 가리켜 “해방”이라고 하였다.


이성이나 이해로는 인간적 속박의 영역에서 우리를 전적으로 향상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질투의 사슬이며 마음이 꾸민 수갑이라 해도, 의미의 여러 사슬 속에 이미 얽혀있다 해도, 우리의 해방, 이를테면 눈 깜빡이는 한 순간에 거듭 변화될 때의, 그런 해방의 열쇠를 발견하는 것은, 사슬과 족쇄의 본질, 현재에 대한 지각 및 그 변환의 속성에 대한 상상력에서 우러난 통찰력에 있다.
     
Neither reason nor understanding can wholly lift us from the realm of human bondage. Yet, though we ourselves are the chain of jealousy and the mind-forg'd manacles, already inscribed in the chains of signification, it is in an imaginative vision of the nature of those chains and fetters, the nature of present perception and its transmission, that we find the key to our release; a release when we shall again be changed, in a moment, in the twinkling of an eye. (Hilton 89)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상상력이란 통념적인 그런 상상이 아니라, 어떤 대상의 본질을 지각할 수 있는 통찰력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이다. 깊이 있게 수도하는 수행자들이 지닌 안목이자 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상계를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그런 정신적 속박을 창의적 상상력으로 깨트림으로써, 모든 것은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 이미 영원성을 누리고 있는 존재임을 간파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 속의 현상계色界가 곧 무한계空性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힐튼이 언급한 “해방”이라는 것을 성현들의 말씀에도 얽매이지 않는 차원으로 본다면, 창의적 상상력이라는 것은 앞서 언급한 “맑고 심원한 안목”과 다르지 않다. 블레이크의 이러한 안목은 장시 『예루살렘Jerusalem』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 일부를 살펴보자.


금과 보석으로 된 여러 수레에는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온갖 색채로 별처럼 빛나고 눈부신데 사자, 범, 말, 코끼리, 독수리, 비둘기, 파리, 벌레
그리고 너무나 놀라운 뱀은 보석과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인간화하고 있다.


On Chariots of gold & jewels, with Living Creatures, starry & flaming
With every Colour, Lion, Tyger, Horse, Elephant, Eagle, Dove, Fly, Worm
And the all wondrous Serpent clothed in gems & rich array, Humanize.(Blake 839, Jerusalem, 98: 42-44.)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이 이성理性과 관습의 억압에서 벗어날 때 세계는 새롭게 깨어난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짐승과 벌레 이외에도 뱀까지 보석 빛깔로 반짝이는 모습으로 인간화한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 광물 돌마저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모든 형태들, 심지어 나무, 금속, 흙, 돌조차도 인간화되었다.
 모든 인간화된 형상들이 살아서 나아가고 지쳐서
 수많은 해, 달, 날, 그리고 시간이라는 지상의 삶 속으로 돌아가;
 쉬고 나서는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가슴 속으로 깨어난다.


 All Human Forms identified, even Tree, Metal, Earth & Stone.       
 All Human Forms identified, living, going forth & returning wearied
 Into the planetary lives of years, Months, Days & Hours; reposing
 And then awaking into his bosom in the life of Immortality.


─(Blake 841, Jerusalem, 99: 1-4.)


여기에서 블레이크가 말하는 ‘인간화’라는 것은 “진정한 상상력을 지닌 참된 인간으로서 시적詩的 천재”(Durr 13)를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예수를 의미하고 있다. 그에게는 예수가 오관의 감각 능력 이상의 것을 지닌 시적 천재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설태수 2013, 135). 그뿐 아니라 인용된 4행에서는 예수를 연결고리로 하여 온갖 피조물이 빛나고 있음과 동시에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가슴 속으로 깨어난다”고 하였다. 천지만물이 하나의 가족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블레이크의 경우 예수가 창조적 상상력을 대변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의 시에 드러난 세계관은 불교의 연기법과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블레이크 시와 비교해볼만한 성철의 선시 한 편을 살펴보자.


가없는 풍월은 눈眼 속의 눈이요         
다함없는 하늘과 땅은 등불 밖의 등불이라
버들은 푸르고 꽃이 예쁜 십만의 집에는
문을 두드리는 곳곳마다 사람이 답하네.


無邊風月眼中眼
不盡乾坤燈外燈
柳靑花明十萬戶
叩門處處有人應(성철 1992, 158)


이 시에 대하여 성철 자신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삼천대천세계의 곳곳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여기 불러도 ‘예’ 하고 저기 불러도 ‘예’ 합니다. 곳곳마다 부처님 없는 곳이 없고 곳곳마다 진여眞如 아닌 곳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고 한이 없는 연기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성철 1992, 158). 그런데 이와 같은 풀이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진여’라는 용어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불교사전에서는 진여가 여섯 가지로 설명되어 있는데, 1.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2. 있는 그대로의 본성·상태. 3. 궁극적인 진리. 4. 우주 그 자체. 5.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6.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곽철환 665)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설명이 있다 해도 진여가 무엇인지는 명쾌하게 파악되기 어렵다. ‘참모습’ ‘본성’ ‘진리’ ‘청정’ ‘궁극’ ‘지혜’ 등의 어휘가 추상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식 역량에 따라 각기 천차만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진여를 ‘우주 그 자체’라고 풀이한 것이 어느 정도 구체성을 띤 것으로 이해되지만, 우주라는 것도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개념은 추상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선시일수록 이를 음미하는 독자의 안목에 따라 그 뜻이 국한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는 제1행의 ‘눈 속의 눈’과 제2행의 ‘등불 밖의 등불’이 아닐까 한다. 눈 속에 눈이 또 있다는 것은 육체의 눈이 전부가 아니라 영혼의 눈도 있다는 뜻이 된다. 이와 동시에 육체의 눈과 영혼의 눈은 서로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혼의 눈은 깨달음의 눈으로 치환될 수 있는데 이 눈은 깨달음의 정점인 구경각究竟覺(번뇌를 완전히 소멸시켜 마침내 마음의 근원을 깨달음, 곽철환 62)에 이르게 하는 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등불 밖에 등불이 또 있다는 것도 일차적 의미로는 매일매일 해가 뜬다는 것이며, 우리가 속해있는 태양계 같은 것이 전우주적으로는 무수히 있을 거라는 추측도 포함될 수 있다. 그렇기에 빛나는 세계가 가없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유추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는 “부처님의 몸은 광대무변하여 시방十方 세계에 꽉 차서 없는 곳이 없으니, 저 가없는 허공도 대해大海 중의 좁쌀 하나와 같습니다. 부처님의 수명은 영원무궁하여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우주가 없어진 후에도 항상 계셔서 과거가 곧 미래요, 미래가 곧 현재입니다.”라고 한 성철의 설법(성철 2003, 49)에도 연결된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을 통하여 현세와 영원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형이하학의 세계는 형이상학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구체적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한한 영원계와 유한의 현실계가 상즉相卽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영원의 존재는 바로 여기(현실)에서 포착된다는 뜻이다. 즉, 영원의 존재는 현실세계 속에 차있어서, 현실의 순간순간에 영원은 포착된다는 것이다”(다무라 요시로 140). 이와 관련된 내용이 시로 간결하게 표출된 것도 있다. 성찬경의 시 「찢어진 백지의 파편」에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중략)……
무에의 회귀일까.
영원에의 회귀일까.
그러나 백지의 파편에는
여전히 거룩함이 서려 있구나.
백지의 파편도 백지이다.
영원의 파편도 영원이듯이. (성찬경 334)


그리고 성철의 시 제3행 “버들은 푸르고 꽃이 예쁜 십만의 집”이라는 표현은 존재 자체가 나름대로의 빛을 뿜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존재하는 것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그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성철의 설법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수긍이 가는 구절이다. 제4행 “문을 두드리는 곳곳마다 사람이 답하네”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서로서로 반응하고 서로 의지해있는 연기성緣起性의 세계를 극적인 광경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복잡하고 심오하다는 연기법이 성철의 선시를 통하여 함축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표현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블레이크와 성철의 시, 설법에는 이처럼 빛과 환희로 충만해 있다. 블레이크가 “에너지는 영원한 희열delight이다” 라고 했을 때 ‘delight’이 빛과 무관하지 않음은 어휘에서도 그 암시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추상적 개념도 정신의 ‘빛’에 비유될 수 있다. 『천수경』의 “깨달음을 지닌 이 몸은 광명의 깃발이다受持身是光明幢”(김도원 15) 라는 구절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는 ‘존재’가 빛이라는 환희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존재’의 경우에는 어떻게 인식될까. 비존재이기 때문에 아예 인식조차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감각의 관점에서 보면 비존재, 즉 없음無의 세계는 인식되지 못하므로 ‘환희’라는 용어가 적용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음’이라는 것은 감각의 세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지 ‘있음’有의 세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공조차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미묘한 것들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이 영국 물리학자 디락Paul Adrien Maurice Dirac(1902-84)에 의해서 밝혀졌다. 그러므로 있고 없음이란 감각을 기준으로 구분될 뿐이다. 따라서 감각의 유무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존재>에는 ‘없음’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다. 간략히 말하면, 無는 有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 사이에는 빈틈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만약에 이들 사이에 빈틈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둘 사이가 무관한 관계라고 한다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깨달은 자에게는 유와 무가 ‘하나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인 것도 아닌’不一而不二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것은 생과 사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관점에서 ‘불이不二’ 관계로 인지될 수 있는 것과 같은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다.
 
Ⅲ.
넓은 의미의 <존재>가 성철과 블레이크에게는 공히 미美의 세계로 체득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안목은 비범함을 넘어 심원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삼아 영어단어 Beauty(미)를 철자상의 구조를 통해서 살펴보면 Be(존재하다, 있다)로 시작된 것이 예사롭지 않다. ‘존재 그대로가 미의 세계’라는 암시가 마치 단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통용되는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협소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키이츠John Keats 식으로 본다면, “미美는 진리이고, 진리는 미”(이재호 354) 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래의 미 개념에 잘 들어맞을 것이다. 존재의 관점에서 미를 본다면, 화산의 폭발모습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치솟는 치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산폭발이 지구 존재의 한 표현이듯이 통증 또한 몸에서 터지는 불꽃으로 은유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전개되든 각각의 현상은 존재를 증명하는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레이크와 성철의 시에는 <존재>의 미에 대한 찬미와 진리에 대한 찬미가 서로 원융무애로 통하고 있다 해도 별로 무리가 없다.
그러므로 블레이크의 창조적 상상력은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영원의 존재인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온 예수를 블레이크는 “시적 천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 으뜸이라고 설교한 예수의 모습으로 현신하였기에, 창조적 상상력을 지녀야만 비로소 낱낱의 개체와 전 우주적 존재에 현현顯現한 신의 섭리를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조물마다 창조주의 입김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볼 때 존재의 모든 구성 원자는 형태만 달리 할 뿐,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블레이크의 세계관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임종 시에도 자신의 즉흥곡으로 “할렐루야와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황홀경의 활력에 넘쳐 불렀다”(샌더즈 475)고 한다. 깊이 있는 깨달음이 육화되지 않고서는 나오기 어려운 모습이다.
이에 비하여 성철은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 있는 그대로가 부처”本來是佛임을 깨닫고 있다. 부처가 이 세상에 온 것도 이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에게는 삼천대천세계가 광명의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의 인식체계에는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발상이 용납되지 않는다. “선과 악은 헛된 분별이어서 악마와 부처가 이름은 달라도 몸은 한 몸입니다. 악인은 때 묻은 옷을 입은 사람, 부처님은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과 같습니다. 때 묻은 옷을 입었다고 사람을 차별 대우하면, 이는 옷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성철 2003, 359). 이와 같은 발상은 색(현상계)이 곧 공이라는 투철한 깨달음 없이는 형성될 수 없다. 더욱이 색즉시공에서 더 나아가 공공空空이라 하여, 공에도 갇히면 안 된다는 경계는 참으로 아득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성철과 블레이크는 서로 종교가 다른 데서 오는 발상이 다를 뿐 깊이 있는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이들의 커다란 공통점은 ‘마음의 때’, 즉 성철의 경우 “거울에 뿌려진 금가루”가, 블레이크의 경우 “때 묻은 지각知覺의 문들”이 각각 깨끗하게 씻겨 졌을 때, 비로소 삼라만상 그대로가 부처로 보이고 현재가 곧 무한으로 체득되는 환희의 세계를 통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간략히 말해서, 마음의 때라는 것이 욕심의 산물이고 보면 깨달음의 희열이라는 것은 욕심의 뒷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다음 언급은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욕망의 절대적 포기를 감행할 수 있는 사람은 외관상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그리고 어떤 기쁨이나 소유물이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흘러넘치는 하나의 대 환희에 젖어 참으로 별천지의 안식을 누릴 수 있다”(Schopenhauer 162). 그런 점에서 깊이 있는 각성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어떤 마음의 경지에 이르렀는가에 달려있음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세명대>


  본 논문은 2018학년도 세명대학교 교내학술지원비로 작성되었음. 





*설태수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열매에 기대어』, 『푸른 그늘 속으로』 등음. 세명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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