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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장편연재⑦/김현숙/흐린 강 저편 제 7회/망해사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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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46회 작성일 20-01-1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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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장편연재⑦/김현숙/흐린 강 저편 제 7회/망해사의 노을


김현숙


흐린 강 저편

제7회/ 망해사의 노을



한석이 농사일에 겸해 J시의 떡방앗간을 인수한 것은 그해 가을일을 거의 끝낸 그즈음이었다. 방앗간은 시모와 아이들이 사는 J시 아파트 인근 상가 1층에 있어 몫이 꽤 좋았다. 농번기엔 농사를 짓고 짬짬이 J시를 오가며 방앗간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점차 커나가는 다섯 아이들을 잘 키우려면 농사일만 해서는 그 뒷감당이 안되기에 부업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상가에 있는 상호, ‘훈이네 방앗간’은 점차 손님이 늘어 부업이 외려 본업으로 전환될 만큼 날로 성업을 이루었다. 덕분에 시모는 장을 보다 심심한 날엔 수시로 한석이 하는 방앗간에 들려 잠깐잠깐 일손을 거들기도 하여 더욱 일과가 촘촘해졌다. 훈이도 이미 취학 아동이 된지 오래라 타고난 근면이 몸에 밴 시모에겐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 둘째 아들 한석을 다른 아들만큼 가르치지 못한 게 늘 시모의 마음 한 켠 큰 응어리로 남아 있어 그를 위해서람 그 어떤 일이든 발 벗고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게 시모의 마음이었다. 슬하에 7남매를 두었으나 유독 그들 모자간엔 말로 표현 못할 강하고 끈끈한 그 무엇이 존재했다.
때문에 계순은 그들의 유별난 모자 사이에서 가장 큰 경악과 당혹, 그리고 갈등을 느끼며 살아 온 장본인이 아닐 수 없었다. 한석은 또한 일곱 형제 중 시모에 대해 가장 절대적 애정을 지닌 아들이었다. 그만큼 모든 시련과 애환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 온 세월의 두께가 쌓이고 쌓여 긴밀히 이어져 온 관계였다. 한석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고생하는 노모를 위해 최소한 일년에 두 차례 이상 용한 한의원을 찾아 고가의 보약을 지어오곤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계순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나이 든 노인이 평소 너무 몸을 보하면 목숨이 다해 죽을 때 고생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석의 생각은 달랐다. 옛말에도 있잖여. 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고것이 절대 헛말이 아니란께. 그런 마음을 가진 한석이기에 노모를 위해 보약을 지어올 때마다 그들 부부 사이엔 더없이 차갑고 쌩한 기류가 흘러 급기야 소소한 말 한 마디가 불씨 되어 때론 큰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었으나 한석의 그러한 효심은 시모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계순의 입장에선 시부모 봉양, 험한 농사일에 아이를 다섯이나 낳아 기른 아내의 건강엔 손톱만치도 관심이 없는 듯한 한석의 그러한 효심이 달갑게 느껴질 리 없었다. 한석의 내심이야 실상 고달픈 아내의 삶을 모를 리 없겠으나 워낙 유교적 가부장제의 삶을 살아 온, 효에 대한 그의 사고와 개념은 모든 대소사의 우위에 있음을 계순은 쉽게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러한 요소가 그들 가정 내 불화의 원천이었다. 둘이서 오순도순 방앗간 일을 하며 다정히 떡을 빚다가도 툭하면 언쟁을 일삼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매사에 기민하고 엽렵한 시모는 그들의 그러한 정황을 훤히 다 꿰고 빠삭히 알고 있기에 아들, 한석의 효를 심히 부담스러워 하고 마다하였다.
나이 들어 쓰잘데기 읎이 보약 많이 먹어싸면 죽을 때 고상 직싸게 헌디야. 시모는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살며 한석을 만류하곤 했으나 소용 없었다.
 훈이네 방앗간은 날로 손님이 늘어만 갔다. 직접 농사 지은 쌀과 곡물로 만든 떡은 맛이 좋기로 소문나 점차 찾는 이가 늘어만 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사람 안 쓰고 그들 부부 둘이 고생한 만큼 인건비 절약되고 입소문을 타 장사는 날로 번창해갔다. 농번기엔 잠시 방앗간 문을 닫고 고향 본가로 내려가 짬짬이 농사일도 겸해야 하기에 그들의 삶엔 좀체 영일이라곤 없었으나, 그에 더해 야간을 이용, 검정고시학원까지 등록, 마침내 만학도의 꿈을 이루려는 그들의 강한 의지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 돈을 벌어 하고 싶은 일은 오직 공부, 그것 뿐이라는 듯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온몸으로 그걸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모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 다섯에 인자 지들 나이 50이 넘었는디 시방 공부는 혀서 뮛헌디야. 새끼덜이나 잘 갈칠 일이제 대체 뭔 짝인지 몰겄다. 시모는 당신의 손주 다섯을 가르치는 일만 해도 제대로 하려면 그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적이 우려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석 내외는 절대 만학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간 살아오며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큰 결핍이며 한이 곧 배움임을 뼈저리게 느낀 그들이기에 그건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음을 알았다. 징허니 살다본께 돈도 벌고 아들까정 낳았는디 제때 못배운 한. 고것만은 워치케 헐 도리가 읎더란께요. 공부. 고것 붙잡고 인자 죽는 날까정 혀볼 수 밖엔요.
계순의 그러한 마음은 곧 한석의 마음과 일치했다. 순수 향학열만이 아닌 자신들의 한을 풀기 위해 시작한 공부. 그것이 과연 그들에게 어느만큼의 성취감과 만족감을 안겨줄 것인지, 아직은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지방 도시 J시엔 늦깎이, 만학도들을 위한 다양한 수준의 배움 터가 많아 기회를 잡긴 용이했다. 도처에 산재해 있는 각종 자격취득을 위한 학원과 대학들, 또한 대학원들. 그들은 먼저 중학교 수준부터 시작, 검정고시 학원을 통해 차근차근 그 단계를 밟아갔다. 밤잠 아끼며 학습에 전념, 한 단계를 통과하면 또 다음 단계로, 그렇게 그들은 고달픈 만학의 힘든 코스를 한발 한발 디뎌갔다.  
그러나 학교든 학원이든 지상의 어느 배움터에서도 사람끼리의 만남과 교류는 필수. 한석과 계순 또한 동급생, 혹은 동아리란 이름 하에 서로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들과 적절히 친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계순의 갈등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방앗간은 자신의 몫으로 돌리고 한석은 주로 바깥 일을 처리하는 게 그들 부부간 관례이긴 했으나 놀랍게도 어느날 계순은 돌연 반기를 들며 그에 대해 강력한 제동을 걸어왔다.
몇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그들이 마악 해당 지역 방통대의 신입생이 된 봄, 그 무렵이었다. 기본적인 모든 수업이 온라인 상으로 진행되긴 하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및 기타 때론 출석을 요하는 강의나 시험도 있기 마련. 그에 따라 자연히 SNS 등 각종 통신 매체를 통해 같은 과 클래스 메이트끼리 오프라인의 회합과 행사 등이 생겨났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머 감각, 그리고 뛰어난 언변을 지난 한석은 어느 모임에서나 늘 인기가 좋았다. 반면 한석의 바로 그러한 면이 가장 계순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점이란 것을 주위에 알만한 사람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계순에겐 일테면 남편집착증의 경향이 다분했다. 농한기에 마을 상조회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야유회를 다녀오던 때의 일은 두고두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 중 하나였다. 
시상에 갸가 뭔일을 저질렀다고 그래 쌌냐아. 마을 사램들이랑 춤 쫌 쪼깐 췄다고 고것이 뭔 고렇큼 아작낼 일이다냐. 매칼읎이 남세스럽게 허덜 말고 에미가 쪼깐 참아야한단 말시.
아이를 업고 마을회관 앞 동구나무 아래 서서 마을 사람들이 탄 관광버스가 와 닿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계순을 만류하며 시모가 혀를 찼다. 뼈빠지게 농사 일 하다 때론 고렇큼 나들이락두 가 신명지게 놀기도 혀야는디…….
남편 한석을 쥐 잡듯 몰아세우는 계순이 못마땅해 시모는 속이 끓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보는 회관 앞에서 또 한바탕 난리 치를 생각을 하니 온몸에서 진땀이 났으나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층층 무려 다섯 아이들의 어미라 그런 모임에 쉽게 합류하기 힘든 데다, 훈이의 감기로 미처 야유회에 따라가질 못한 아내의 소외는 아랑곳없이 한석은 늘 마을회관에서 행하는 뒤풀이까지 빠지질 않아 계순은 더욱 화가 났다.
그날의 야유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지에서 시작된 음주가무가 귀갓길 내내 지속되어 마을 회관이 지척에 닿도록 한석과 부녀회원들간 광란의 춤이 이어졌고 관광버스에서 울려나오는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는 온 마을을 뒤흔들 정도로 요란했다. 아이를 업고 동구나무 밑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계순은 억장이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버스 창을 통해 거나하게 취한 모습의 한석이 이웃집 여자와 신나게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는 광경이 바라 보였다. 농한기에 휴대용 오디오를 장만, 마을회관에 읍내 춤선생을 초빙하여 몇 달간 열심히 춤을 배운 한석은 타고난 끼를 십분 발휘, 나날이 춤이 늘어만 갔다. 
문화센타란 게 뭐시 따로 있간디. 요렇콤 춤선상 모시고 와 회관에서 배우면 고것이 바로 문화센탄겨. 한석은 그렇게 말하며 부단히 자신의 취미를 갈고 닦았으나 묘하게도 계순에게만은 마을 문화센타의 그러한 혜택을 전혀 베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순의 분노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도 이제 더 이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여흥의 마무리, 에프터를 위해 휘청이는 몸짓으로 마을 회관을 향해 걸어가는 한석을 계순이 완강히 막아섰다. 때마침 어미의 기세에 놀란 훈이가 악을 쓰며 울어댔다.  
시방 이거시 뭣들 허는 짓이여. 모다 정신들이 빠졌단께. 고렇큼 넉빠지게 놀았음 인자 그만 집으로들 가는 게 옳은 일이제 다들 미쳤단께. 당장 가잔말씨. 계순이 언성을 높이며 한석의 팔을 와락, 잡아 끌었으나 역효과였다. 대취한 한석이 적반하장, 고질라처럼 분노를 터뜨리며 계순을 질질 잡아끌어 논두렁에 꼬라박고 말았던 것이다. 시모가 달려와 겁에 질려 우는 훈을 들쳐 없고 계순을 달래 집으로 데려가는 것으로 일은 겨우 일단락 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컸다. 동네 한 가운데 온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한 한석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끝내는 그의 고질병이라 할 주특기, 출가에 관한 갈망을 들먹이기에 이르렀고, 그로인해 혼비백산한 계순이 결국 백기를 들고 사과함으로써 일단 결론이 나긴 했으나 집안 분위기는 한동안 냉랭하기만 했다.
춤을 배워 워디 카바레 출입허는 것도 아니고, 동네 사람덜끼리 술 한잔 먹고 그냥 노는 것인디 고것도 못허게 허믄 당장이락두 절간에 가 혼자 도나 닦고 살아야제 벨 수 있간. 몇 날 며칠 단식하며 밖으로만 나도는 한석의 시위에 행여 또 그가 어느 절간으로 잠적해 버릴까 두려운 계순이 싹싹 비는 것으로 일은 끝이 났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짙은 앙금은 쉬이 사라질 수가 없었다. 한석의 가부장적, 마초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수용하기엔 계순의 의식이 월등 앞 서 있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한석에 매우 집착하며 그를 많이 좋아한다는 증좌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시모는 어쩌다 서울 큰아들집에 다니러 오면 그 모든 사건의 전말을 희연에게 전달하며 아들, 한석을 향한 계순의 과한 질투를 탓하곤 했으나 희연은 시모의 입장에 선뜻 동조할 수가 없었다. 훈이 에민 투기가 넘 심하단께. 자고로 옛적부텀 투기도 칠거지악의 하나라고 혔다. 훈이 애비, 갸가 어릴 적부텀 뼉다구 아프게 일만 했은께 시한엔 쪼깐 마을 사램들과 어울려 춤도 추고 노는 거사 안사램이 더러 모르는 척도 혀줘야제 뭐시 워쩌서 그냐. 혀도혀도 어쩔 적엔 훈이 에미가 넘 징허게 헌단께. 아, 고렇큼 투기 않고 넘들처럼 춤 추고 놀라믄 새끼덜을 쪼깐 낳던지…… 글안혀. 어머님, 동서가 데리고 온 자식들도 아니고 둘이서 함께 낳은 거잖아요. 그럼 육아도 서로 도와가며 함께 해야죠. 시모의 말에 희연은 단지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일 뿐이었으나 내심은 늘 당신의 아들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시모의 어쩔 수 없는 사고에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희연이 교직을 그만 두고 경석을 따라 몇 년간 해외에 머물다 돌아 와 이런저런 곡절 끝에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 늦깍이 작가가 된 것에 대한 시모의 반응도 그와 유사했다.   
뭐시냐, 에미야, 그 좋은 선상질을 워쩌서 그만 둔겨. 쬐깐만 더 했음 평생 연금 받고 너그덜 늙어 죽을 때까정 편히 살 수 있을 판인디. 까짓 글 써갖고선 돈을 을매나 벌겄냐. 애들 간식비나 나온다냐. 시모는 적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몇 번이고 그렇게 희연을 향해 반복해 말하곤 했다. 하긴 시모의 말은 정확히 맞았다. 글을 써서 돈 벌 재주까진 없는 희연이라 아무런 반박도 못한 채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고 자괴심이 드는 건 사실이기에.        
그런 시모에게 뒤늦게 만학을 한답시고 학교엘 나가며 다시금 충돌하고 부딪치며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아들 부부가 마땅할 리 없었다. 아, 워쩌서 근다냐. 인자는 둘이 똑같이 핵굘 댕기는디 지도 더런 동무도 사귀고 놀러 댕기고 하믄 될 것이제 뭐땀시 또 난리다냐. 애들은 시에미가 다 돌보고 있는 판인디. 시상에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방은 돈이 많아 벨짓을 다 하고 다니는 세상인디, 돈이 원수란께. 뭐 땀시 비싼 돈 내고 핵굘 다니며 쌈박질만 해쌌는지 소가 웃겄다야. 
시모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계순의 생각은 또 달랐다. 방앗간을 개업한 이상 고객의 인식, 배려를 위해서라도 웬만하면 문을 닫아선 안되며 두 사람 중 하나는 되도록 그걸 고수해야 한다는 게 계순의 판단이었다. 이래저래 한석을 향한 계순의 불만, 갈등이 고조되어 집안의 평화가 흔들릴 즈음, 시모가 뜬금없이 며느리 네 명에게 망해사 나들이를 제안해 왔다. 전혀 예상 못한 뜻밖의 일이라 모두 좀 어안이 벙벙했으나 감히 어느 며느리도 시모의 권유를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어느 가을 하루, 매우 맑고 청명한 날이었다. 계순과 막내 동서, 미정은 K시 인근에 살아 동행에 문제 없었고, 멀리 장성에 사는 수현은 워낙 운전을 잘하고 기동성이 있어 상관없었다. 다만 서울에 사는 희연만이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 합류하면 될 일이었다. 일테면 집안 여자들만의 소풍인 셈이었다. 자연히 시모를 모시고 살며 방앗간을 하는 계순이 먹을 것을 담당, 떡을 비롯한 갖가지 음식을 장만하였고, 수현과 미정이 각각 그들의 차에 일행을 나눠 태워 망해사를 향해 달려갔다. 다들 시모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내심 좀 의아했으나 망해사의 가을은 고즈넉한 정적 속 더없는 운치가 있어 소풍지로선 최상의 장소라 할 만 했다. 시모의 낯빛엔 시종 흔연한 기운이 감돌았고 네 며느리들 또한 저마다 좀 상기된 표정 속에 동서들만의 첫 나들이가 적이 이채롭게만 여겨졌다.  
망해사 가는 길, 하얀 껍질의 대형 조개, 백합으로 유명한 심포항엘 들려 잔잔히 뒤척이는 만경강 하류와 서해 바다, 그 두물머리 잿빛 물살을 감상한 후 껍질 채 푹 삶은 백합 한 봉지를 사들곤 절터로 향했다. 드넓은 김제평야를 지나 서해로 흘러드는 만경강 하류. 흐느적 몸을 뒤치는 하구의 고요한 강줄기가 마침내 바다와 맞닿아 하나 되는 곳. 바로 그곳 야산 둔덕에 호젓이 바다를 굽어보며 홀로 적요를 삼키는 조그만 사찰이 있었다. 망해사. 더없이 고아한 정취이나 절터 전체를 휘도는 짙은 쓸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근원을 알 길 없는 의문에 희연은 내내 그 쓸쓸한 기운을 떨쳐내려 애쓰며 몇 바퀴나 사찰을 맴돌았다. 낙후된 마을 한 켠에 자리한 작은 사찰. 소외된 지역, 이름 없는 마을이기에 제아무리 빼어난 경관도 그 진가를 인정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잊혀져만 가는 망실의 슬픔. 희연은 사찰을 싸고 도는 호젓함의 근원을 나름 그렇게 정의하며 시모가 자리잡은, 선조 22년 진묵대사가 재건했다는 낙서전 앞 수령 400년의 유서깊은 팽나무 뒷산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기실 알 수 없는 허허함의 발원은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시가의 한 솥밥을 먹은 지 십수 년째. 이제 어느만큼은 서로의 특성을 파악하고 마음을 알고 헤아릴 수 있는 연조가 된 것. 집안 행사나 제사 때면 7남매가 모두 모여 떠들썩 웃고 어울린 햇수만도 얼마인가. 그러나 저 까마득한 신행의 밤 이후 아직도 이곳에만 오면 문득 소적함을 느끼곤 하는 이 정조는 대저 무엇일까. 이즈음 부쩍 소원해진 경석과의 냉전으로 인해 더더욱 그러한 것은 아닐지…….
그러나 계순이 준비해 온 성찬에 연신 감탄하는 동서들에 묻혀 희연 또한 어느새 완전히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곱게 빚은 온갖 떡과 과일, 층층 찬합에 정갈히 담긴 각종 반찬과 오곡 찰밥. 가마솥에 푹 삶아 건져 온 토종닭, 등 너무도 푸짐한 풀밭 위 향연이었다. 신혼 때부터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 온 계순의 음식 솜씨는 빼어났고, 특히 희연은 그녀가 만든 모든 음식이 자신의 입맛에 맞다고 생각해 온 터라 여간 즐거운 자리가 아니었다. 웃고 떠들고 먹고……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어느 아낙이 떡이 가득 담긴 함지박을 이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할매, 참 딱딱허니 곱게도 생기셨소. 근디 복도 징허니 많은갑소. 이 사램들이 다 할매 딸들 같은디 모다 참말로 예쁘요잉. 아낙이 머리에 이고 온 함지박을 내려놓으며 엉너리를 쳤다. 하이고, 딸들 아녀요. 우리 메누리들이란께요. 아들이 넷인디 오늘은 메누리들만 델꼬 소풍 나왔으라우. 오메, 그려요잉. 메누리들이 참말로 모다 참 참허네요.
아낙의 출현에 가장 먼저 눈살 찌푸리며 거부 반응을 보인 사람은 희연이었다. 보아하니 떡을 팔러 온 동네 주민 같은데 떡은 이미 계순이 해 온 것만으로도 너무 많아 전혀 아낙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고, 공연히 남의 집안 나들이에 한 다리 걸쳐 이러쿵저러쿵 말을 섞어오는 태도가 영 맘에 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점심은 먹었소? 떡 보따리 이고 여그꺼정 오니라 힘들턴디 이거락두 좀 드심서 쉬었다 가소. 시모가 식혜와 한과를 권하며 쉬어가길 권하자, 과일을 깎고 있던 수현이 얼른 배 한 쪽을 베어 아낙에게 건네었다. 계순은 마치 늘 보아 오던 이웃집 아지매를 만난 듯 그저 특유의 무던한 태도를 보였고, 농협에 다니는 막내 미정은 다소 새침한 낯빛으로 마치 속수무책의 고객을 대하듯 눈을 가들게 뜨곤 웃어보였다.
글고 여그 떡 좀 내놓고 가소. 만원 어치만 걍 알아서 주시오. 뭐시냐, 모시떡이랑 여그 없는 것으로다 쬐깐만 주면 된께. 시모가 당신의 치마를 끌어올려 고쟁이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아낙에게 주며 말했다.
고맙소잉. 참말로 고맙소. 낼 울 아덜이 뭐시냐, 수학여행을 간다는디 그 여비락두 장만헐까 허곤 나섰는디 좋은 할매 만나 횡재를 혔소. 복 받을 것이요잉. 참말로 복 받겄소. 과일과 한과 몇 쪽, 그리고 식혜 한 사발을 들이킨 아낙이 떡이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이며 몇 번이고 그렇게 감사를 표한 후 멀어져 갔다.
어머님, 떡이 이렇게 많은데 떡을 또 뭐하러 사요? 그걸 다 어쩌시려고요. 다소는 어이가 없는 낯빛이 되어 희연이 짐짓 시모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무건 떡을 이고 여그까정 올 때는 그 맴이 오죽혔겄냐. 뭐락두 하나 사주고 돌려보내야제 걍 빈손으로 보내믄 쓰겄냐. 고렇콤 혀서 쓰겄냐고오. 시모의 낯빛엔 아낙을 향한 연민의 빛이 가득했다. 그리곤 잠시 후 다시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 살아온 것 고렇큼 징허다 혀도 그려도 뭣이든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아본 적은 읎은께. 그저 먹을 건 읎는데 새깽이들은 많고 층층 시하에 허리 한번 펼 날 읎이 살아온 게 징혀서 그라제. 글고 자식덜이 많은께 언지 한번 다리 뻗고 잘 세 읎이 맴이 늘 편허덜 않고 한 시도 맑은 날이 읎는드키 살아왔단께. 저 흐릿헌 강이 꼭 내 맴 같았어야. 그려도 강을 다 건너고 나믄 언진가는 좋은 꼴 보고 살 때도 있겄지 허는 맴으로 이를 악물고 살았은께. 근디 너그들 다 잘 사는 것 본께 인자는 원도 한도 읎다. 헌디 암튼지간 끝까지 잘허고들 살아야 헐틴디 그거시 또 꺽정이다! 
흐린 만경강 물살을 아득한 눈길로 바라보던 시모가 문득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딸들은 차치하고라도 집집마다 돌아가며 늘 티각태각 부부 싸움을 하곤 하여 시모의 마음에 시름을 안기는 네 아들의 미래가 자못 염려스런 것일까. 시모의 눈빛엔 무언가 짙은 우려의 빛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다시금 곧 평상으로 돌아 온 시모가 뜬금없이 계순에게 노래 한 곡을 청했다. 밥도 맛나게 먹었겄다, 훈이 에미 오늘 창가 한 가락 혀볼쳐. 울 둘째 메누린 영락읎는 가수란께. 시모의 간곡한 청에 계순이 마지 못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노래 한 곡을 불렀다. 그녀의 시선이 팽나무 그늘 아른대는 야산 저쪽 이름모를 무덤가로 날아갔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 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갓 볶아 짜낸 기름처럼 매끄럽고 구수한 계순의 노래는 가히 마을 노래자랑에 나가 대상을 탈 만한 실력임이 충분했다. 그 정도의 노래 실력을 묻은 채 집안에만 못박혀 살아야 하는 계순의 심경 또한 헤아려졌다. 좋다아, 순간 시모가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며 계순의 민요에 맞춰 장단을 넣었다. 활달하고 선선한 성격의 수현 또한 시모와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며 흥을 돋웠다. 형님, 형님도 언릉 춤 춰요. 수현이 와락 희연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춤을 부추겼다. ‘춤추고 싶은 둘째 동서 맏동서보고 춤추라 한다’ 는 옛말이 떠올라 희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희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흥겹게 박수를 치며 호응했고, 다만 미정만이 발그레 붉어진 얼굴로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며 수줍게 웃을 뿐이었다. 시모의 춤은 전혀 다듬어진 춤사위는 아니었으나 나름의 끼와 흥, 그리고 삶의 애환이 짙게 배어나는 신명어린 몸짓이라 절로 따라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춤이었다. 한석의 끼는 분명히 노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임이 분명하단 생각에 희연은 실소했다. 
오늘 여그 소풍 와갖꼰 뭐시냐, 그 스트레슨가 뭐시깽인가 몽땅 다 풀고 간다야.
나 젊었을 적엔 스트레스가 다 워딨다냐. 몸띵이 고된 층층시하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음서 일만 쎄빠지게 해싸도 고것이 뭔 말인 줄도 모르고 살았는디 요즘 것들은 툭 하믄 스트레스 받아 죽겄다고 양광들을 떨어싼께 나도 오늘 쪼깐 그 말 쫌 써먹어야 쓰겄다. 만경강 하굿둑, 저 흐린 물에 내 쌓인 스트레스 다 내쏴뿌고 인자 훌훌 날아가야 쓰겄다.
시모는 훨훨 나는 춤사위로 한참을 더 신명지게 춤을 추었고 계순의 노래는 메들리로 계속 더 이어졌다. 더없이 뭉클하고도 순도 100프로의 감동어린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여흥, 어느 비싼 공연이 그리 짙은 감동을 안겨줄 것인가. 계순의 노래와 시모의 춤은 그날 소풍의 피날레이자 압권이었다. 희연의 눈가엔 일순 까닭모를 물기가 배어났다. 춤추는 시모에게로 다가가 앙상히 야윈 어깨를 꼭 보듬어 안았다. 울 큰메누린 언지나 얼굴이 핀다냐. 노란 탱자처럼 여워갖꼬선. 참말로 딱혀. 그 뭐시냐, 아그덜 찬값도 안되는 글 쓴다고 오지게 고생만 허고. 참말로 내 가슴 찢어진단께. 핵교도 좋은 델 나와갖고선 워쩌서 고렇큼 산다냐, 참말로 폭폭혀 죽겄당께. 그 좋은 선상질은 워쩌서 그만 둔겨. 외국 다녀와 새칠로 또 할 판인디.
으레 나오기 마련인 시모의 18번 하소가 또 시작되고 있었으나 희연은 그저 말없이 웃으며 시모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어느새 만경강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망해사, 절터를 휘감아오는 노을은 근원 모를 비감을 자아낼만큼 찬연하여 희연은 가슴이 서늘해왔다. 일행은 모두 자리를 걷고 일어나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향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초저녁 잠에 빠진 시모 곁으로 네 동서가 도란도란 밤 늦도록 이야길 나누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울로 출발하려는 희연을 만류하며 시모가 돌연 네 며느리들에게 K시 시내 구경을 가자며 채근했다. 1박2일 일정으로 모였으니 점심을 먹은 후 헤어져도 무방하다는 게 시모의 생각이었다. 전에 없이 강경한 시모의 태도에 며느리들은 모두 좀 의아한 낯빛이었으나 도리없이 시내로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모는 시내에 닿자 마자 번화가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금은방으로 며느리들을 데려갔다. 뭐시냐, 나가 시방 그간 모아논 돈이 솔잖여. 근디 이 나이에 고것을 다 워따 쓰겄냐. 니들 그간 돈 읎는 집 시집와 직싸게 고상들 혔은께 나가 시방 정표로 뭐시든 한 개썩 해주고잡아 여글 델꼬 왔단께. 맘에 드는 반지나 한 개썩 골랐음 쓰겄다. 순금 반지 한 개썩 고르도록 혀라잉. 닷돈짜리로! 다 뜻이 있은께. 난데없는 시모의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 네 며느리는 모두 아연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볼 뿐이었다.
언릉 한 개썩 고르란께. 에미야, 넌 워쩐 게 젤로 맘에 드냐. 느닷없는 시모의 제안에 가슴 한 켠이 뻐근해 와 어쩔 줄을 모르는 희연의 손을 잡아 진열장 앞으로 이끌며 시모가 재촉했다. 어머님, 그 돈, 어떻게 모은 돈인데 저희에게 쓰셔요. 저흰 반지 없어도 되는데요. 희연이 정색을 하며 마다하자 나머지 동서들도 다들 희연의 생각에 동조했다. 워쩌서 내 맴을 고렇큼들 모른다냐. 이런 디 쓸려고 돈 모았지 뭐더러 돈을 모았겄냐. 고것이 다 그간 니들이 내게다 준 용돈이여. 이따 점심 먹음서 다 야그헐틴께 우선 싸게들 고르란께. 시모의 고집은 아무도 쉬이 꺾을 수 없음을 잘 알기에 네 며느리는 말없이 진열장을 들여다 보며 열심히 금반지 하나씩을 골랐다. 네 며느리 모두 자신의 손가락 사이즈에 맞고 취향에도 맞는 반지를 고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섯 돈의 금반지는 손가락에 상당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중량이었다. 희연은 순금 대신 정교한 무늬가 박힌 두 개의 둥근 원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꼬여있고 상부에 자잘한 큐빅이 박힌 매우 정교한 디자인의 14K 반지를 골랐다. 가격은 거의 비슷했으나 모두 자신의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른 셈이었다. 
시모는 더없이 흡족해 했고 희연의 권유로 모두 결혼을 의미하는 네 번째 손가락, 약지에 번쩍이는 금반지 하나씩을 끼곤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몰려갔다. 멀리서 온답시고 소풍 준비물로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못한 미안함, 또한 시모에 대한 고마움으로 밥을 사겠다는 희연의 뜻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한정식집을 찾아 모두 자리에 앉자, 비로소 시모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혀준 반지는 말허자믄 너그 내외덜 둘이 살다 험한 꼴 보드락두 걜대 헤지믄 안된다는, 이혼금지 반지란께. 알긋냐아. 기냥저냥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서로 이해해 가믄서 오래오래 잘 살어야 헌다는 뜻이란 말시. 암튼 살다 뭔 일 있더락두 내 눈에 흙이 들가기 전엔 걜대 이혼만은 안된다는 것이여. 아니 나 죽고 나서도 새끼덜 생각해서락두 당췌 이혼만은 안된다는 걸 다들 깊이 새겨 명심혀야 쓴다. 남편은 원캉 피 한방울 안 섞인 남인께 미울 적엔 사정읎이 미운 게 남편이란께. 긍께 포도시 참고 또 참음서 걍 남인드키 살다보믄 더런 좋은 날도 안 있겄냐.
시모의 낯빛은 무언가 결연함이 감돌아 아무도 감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이혼금지 반지라니 그러면 바로 이혼금禁반지가 아닌가. 말하자면 이혼금지 링이라 할까. 희연 또한 자신의 손에 낀 반짝이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뭔가 숙연해져만 가는 기분임을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신 아들에 대한 노모의 차마 말로 표현 못할 슬프고도 애틋한 모정. 네 며느리 중 그 누구도 그걸 모를 사람은 없었다. 막대한 유산보다, 백 마디의 말보다 오직 마음 한 자락으로 당신의 간절한 바람을 전하는 시모의 혜안과 인품에 희연은 그저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었다.
 
이혼금지 링. 경석과의 결혼 생활 근 20여년. 과연 이혼의 위기를 느낀 적은 언제였던가. 홀로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돌아오며 희연은 이혼금지 링이 끼워진 자신의 약지를 내려다보며 찬찬히 자신의 결혼 생활을 되짚어 갔다. 자신의 됨됨이, 그 그릇이나 깐으론 참으로 쉽지만은 않은 고된 여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골고다의 길. 철부지 신혼 시절, 시가로 가는 험한 길을 가리켜 스스로 그렇게 이름 지은 길. 경운기 달리는 정취 있는 농로를 놓고 어쩜 지나친 엄살과 과장으로 명명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만큼 희연의 강파른 성정으론 감당키 힘든 길임이 사실이었다. 시가에 오면 늘 마음 한 켠을 채워오는 외로움, 쓸쓸함, 무거움, 그리고 시도 때도 없는 근원 모를 추위, 불안 같은 불온한 감정들. 아이 둘을 낳고 어느만큼 나이가 든 후에야 희연은 비로소 그것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 곰곰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혈연이 아닌 법적, 사회적 관계망으로 얽힌 인간관계가 빚어내는 이질감, 마찰, 불협화음, 갈등 등등. 그러한 요소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와 괴리. 그리고 미성숙한 자기 보호 본능으로 그 대상들과의 순응, 화합에 앞서, 오직 그것과의 거리 두기에만 급급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결혼 생활 20여년간 그러한 현상은 아직도 완전히는 소멸되지 않는 진행형임에 희연은 때로 심한 자괴와 자책에 빠지곤 했다. 다만 조금씩 희석되고 용해되어 갈 뿐.
영남과 호남. 그 두 지역간의 습성과 언어, 또한 정서와 문화 차이. 도농간, 학력간의 어쩔 수 없는 인식과 시각, 사고의 차이. 그러한 요소들은 차지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개체의 저마다 타고난 인성과 인품임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자신과 연이 된 시가의 구성원들, 그들의 사람됨, 그리고 선한 품성은 자신이 도저히 따를 수 없음을 희연은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인정, 베품, 선의, 이해심 등등 모든 면에서 배움이 더 긴 희연보다 그들이 훨씬 더 때묻지 않은 순도 높은 맑은 심상을 유지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헤어지는 순간 시모는 희연의 안색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미야, 요즘 쪼깐 안색이 안 좋아 꺽정시럽다. 애비랑 뭔 일 있는 거 아녀. 지발 서로 싸우덜 말고 살도록 혀. 지나고 보믄 다 벨일도 아닌께. 웃으며 옛말 허는 때가 기연시 온단께.
매사 기민한 감각의 시모는 몇 번이고 희연의 낯빛을 살피며 그렇게 우려를 표했으나 희연은 끝내 내색 하지 않았다.
 
실은 경석과의 관계에서 결혼 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문제의 핵심은 딸아이 유리의 대입시 실패였다. 늦깍이로 문단에 나온 희연이 한동안 밀려오는 청탁에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는 사이, 아이들은 부쩍부쩍 커나갔고, 그러나 모성의 보살핌을 벗어난 아이들은 희연의 원고가 쌓여가는 높이에 반해, 우르르 학교 성적이 하향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창작 의욕의 뜨거운 발진, 그 열기 또한 결코 제어가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가사와 자녀 교육이 병행되어야 하는 창작활동. 그 두 길의 중심축에 아등바등 버티고 서 되도록 평형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썼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첫 아이 유리는 대입시 1차에 이어 2차까지 전부 낙방, 결국 재수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부터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경석은 대노하여 그 모든 책임을 희연에게로 돌리며 언어 폭력을 서슴치 않았다. 잘한다, 잘해. 소설 나부랭이 쓴답시고 펄럭이더니 딸은 에미가 나온 대학도 못 보내고……. 얼굴 들고 다니겠어, 어디!!
하긴 경석으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할 상황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독학이다시피 노력하여 소위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S대를 나온 만큼 웬만한 환경에서 공부를 못한다는 건 그로선 도저히 이해 불가의 일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해석하자면 그러기에 곧 공부란 어떠한 여건이나 환경도 무관하게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역량에 달린 거란 사실은 어찌 간과하는가. 희연은 그러나 그 어떤 해명이나 변명조차 할 여력이 없었다. 우선 자신의 아픔이 너무도 커 자학을 하듯 경석의 모든 비난을 감수하며 견뎌낼 따름이었다. 유리가 마침내 대학에 들어가는 날 말없이 집을 떠나리라. 재수 학원을 가기 위해 아침마다 야윈 어깨로 무거운 가방 둘러메고 집을 나서는 유리의 모습에, 희연은 매일 아침 창가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문학을 한다는 것. 그리고 딸아이의 대입시. 그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결단코 딸애의 대입시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며 아무 일도 않고 홀로 칩거하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또한 운명을 바꿀 수만 있담, 차라리 자신이 재수를 하고 딸애가 대입 1차에 단번에 합격하는 게 백번 낫겠다는 하릴없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다. 경석과의 냉전은 계속되었고 희연은 절필했다. 아니 절필이라기 보담은 단 한 줄도 글을 쓸 의욕이 일질 않는 멍하고 우울한 나날이 흘러갔고, 늦깍이 작가, 희연은 점차 문단에서 잊혀져갔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초에 그래왔듯 희연의 일상은 아무런 욕구도 의식도 없이 그저 구름처럼 허공을 훠이훠이 떠돌 뿐이었다.
시모로부터 나들이 요청이 들어온 건 바로 그 즈음. 희연의 의식엔 사실 시가에 대한 개념조차 희미해져 가던 때라 시모의 청에 선뜻 응하는 일도 쉽진 않았다. 그러나 평소 그녀를 더없이 아끼던 시모의 마음을 알기에 차마 마다할 수는 없었다. 시모가 마련해 준 이혼금지 링. 그것의 의미가 그러기에 그녀에겐 더욱 각별할 밖엔 없었다.
 
상행선 열차의 차창을 통해 짙게 물든 가을 들녘이 스쳐갔다. 차창에 기대 귀로의 의미를 되새기는 희연의 마음에 다시금 알 수 없는 슬픔이 고여온다. 고운 단풍도 자신에겐 더 이상 찬란한 매혹이 아닌, 그 어떤 종말을 예비하는 처연함으로만 다가올 뿐임이 슬프다. 순간 시모의 말이 떠오른다. 큰애, 갸가 공부헌다고 밖으로만 떠돌아갖고선 언지 가정 교육 받을 새가 있었겄냐. 얌전히 자란 니가 뭣을 배워도 하나락두 더 배웠을텐께 서로 갈쳐가믄서 잘허고 살아야 헌다아.
아들 가진 어미로서 그런 말 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딸에 이어 아들도 낳아 기른 희연이 그걸 모를 리 없기에 시모의 말은 그녀의 심중 깊은 곳에 뭉클한 감동으로 남아있었다. 시모의 훈훈한 배려와 사랑이 없었다면 유리가 대학에 떨어진 직후 진작에 집을 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열차가 종착역에 닿았음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왔다. 희연은 서둘러 짐을 챙겨 열차에서 몸을 내렸다. 지친 몸으로 학원에서 돌아온 재수생, 유리와 아들 윤이 애타게 저녁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통닭과 피자를 사가야 할까. 경석은 요즘 거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 법이 없었다. 희연과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음이 상책이라는 태도였다. 이미 습관처럼 굳어진 방식이기에 희연 또한 외려 그게 편해져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내년 봄 유리만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게 정리되고, 그리고 난 훌훌히 집을 떠나가리.
 
희연은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를 빠져나와 역 광장의 공중 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유리가 전화를 받았다. 간만에 들어보는 밝은 음성이었다. 방금 도착했다. 뭘 사갈까. 윤이도 집에 있니. 엄마, 역에서 아빠 못 만났어요? 할머니가 아빠 회사로 전화하셨대요. 기차역으로 엄마 마중 나가라고요. 만약 만남 어긋나면 엄마, 역 그릴에서 기다리라고, 아빠가 그렇게 전해달랬어요.
이어서 좀전관 달리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유리가 말했다. 모든 게 다 제 잘못이에요. 그치만 이번에 아빠랑 화해 안하심 저 진짜 힘들어요. 맘이 편칠 않아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질 않아요. 저를 봐서라도 그만 화 푸시고 아빠랑 화해하심이 좋겠어요. 제발요, 엄마아…….
그건 엄마, 아빠 둘 사이의 일이다. 넌 신경 쓰지 말렴. 우리가 알아서 할게.
단호히 전화를 끊으며 전화 박스를 나오는 희연의 시야에 택시에서 급히 몸을 내리는 경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몹시도 지치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역 그릴에서 기다리라니! 지난 날 쓸쓸한 기억만으로 가득찬 곳. 시가에서 상경할 때면 힘든 골고다의 길을 다녀 온 보상이랄까. 모든 인간 관계나 며느리로서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으로 인한 자잘한 갈등, 피로감. 그런 감정의 찌꺼기로부터 훌훌 자유롭고 싶은 희연은 잠시나마 그릴에 들려 차라도 한잔 마시며 쉬어가길 원했으나 경석은 그걸 이해 못했다. 방금 다녀 온 고향의 토속적 체취완 너무도 다른, 환하고 화려한 그릴 분위기에 온몸으로 거부감을 표해 희연을 힘들게 했다. 한데 하필 그릴이라니…….    


시계탑을 일견한 후 황황히 역 대합실 쪽으로 달려가는 경석을 뒤로 하고 희연은 결연히 몸을 돌려 역전 택시 스탑의 긴 대열 속으로 몸을 숨겼다.<끝>   





*김현숙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단편: 골고다의 길). 1989년 《현대문학》 신인상 추천완료(단편: 어둠, 그 통로). 작품 「출모」, 「삼베 팬티」, 「어두워지지 않는 밤」, 「가지 않은 길」 ,「꽃비 내리다」, 「홋카이도 3월의 눈」, 「와디」, 「히스의 언덕」등 다수.  2002년 소설집 『하얀시계』 출간 (휴먼 앤 북스), 2010년 소설집 『노을 진 카페에는 그가 산다』 출간 (도서 출판, 개미), 2013년 장편 『먼 산이 운다』출간 (문학나무). 2010년 제 14회 이화문학상 수상, 2012년 제 1회 아시아황금사자 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3년 제 10회 한국문협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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