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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제6회 전국계간지작품상 문예연구|서형오·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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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제6회 전국계간지작품상 문예연구|서형오·수상작
서형오
위양못 이팝나무 꽃 외 1편
―일지一枝에게
위양못 언덕
이팝나무들이
가마솥이 넘치도록 쌀밥을 지어서
머리에 이고 서 있다
이팝나무 꽃
재물도 재물이지만
허기진 오월
이밥이나 많이 먹으라고
구례 외할아버지가
맏딸 이름 자리에 심어 놓은
쌀 미米, 쇠 금金
그래서 미금아 쌀금아
맨날 불렀을 것인데
위양못 언덕에
어머니 이름에
하얗게 피어난
이팝나무 꽃
눈으로 배불리 먹는
이팝나무 꽃
자갈치시장에서
바닷물이
수억만 번도 넘게
대패질을 한
자갈밭 자리에 왔다
자갈치시장
사람들은 저마다
해풍과 햇볕에 널려서
짭조름히 간이 올랐다
줄금이 숱하게 터진
도마 위에는
물 숲에서 뭍으로
적선을 하러 나온 생선이
배가 도드라지게 누웠고
식당 주인이 뚝뚝이
비늘을 벗겼다
저 비린 것에게도
먼먼 조상이 있어서
바다는
해달별 아래에
편편히 앉아
곤한 날은 껌벅이기도 하면서
한 땀 한 땀
비늘 옷을 지었겠다는 생각이 돋았고
저것도 조상을 따라
선한 사람이 차린
옹골진 밥상 위에
모로 누워서
젓가락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 왔다
■신작시
아버지의 외출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환자복 바지에 추리닝 윗도리를 걸치고
가을걷이가 다 끝난 밭의
옥수숫대처럼 외로이 서서
날마다 겨울산을 흐르는
바람의 거센 물결을 응시한 채
저물어 가고 있었다
문안을 하러 병실로 들어설 때마다 아버지는
자동차로 반나절 거리인 바닷가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잘도 하였다
챙길 것이라고는 지팡이와 모자
잠바와 속옷이 개켜진 검정 비닐봉지뿐
이곳이 마지막 거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듯
두꺼운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고 닫힐 때마다
꺼졌다가 켜지는 어둠
천만 번의 웃음과 울음으로 골이 패여
쭈글쭈글해진 입은
우물우물
침묵의 말들을
말들의 침묵을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해독하다가 일어서곤 했다
아득한 눈빛으로
하루에도 이만저만이 아니게
고향 집과 마을 사람들을 어루만졌을 마음을
나는 모르지 않아서
찍어 온 고향 사진들을 보여준 후에
검붉은 핏줄이 불거진 아버지의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핏물이 흘러가는 이 수만의 관 속에서
어떤 열망들이 피었다 졌을까
논밭에서 나는 것들로 배를 불리고
곶에 안긴 바닷물과 갯바닥에서
오징어와 전어, 놀래미, 농어, 낙지, 해삼이며
피조개, 꼬막, 소라, 쏙, 백합까지
생것을 잡던 기억의 세간들을
아무도 몰래 아득한 곳으로
모두 옮겨 놓았던 것일까
아흔세 번째로 찾아온 얼음의 계절
섣달 초여드렛날 이른 아침에
고향에 가는 것보다
더 빨리 독감을 앓아서
잠바 대신 수의를 입고
아버지는 세상 바깥으로
영 외출을 하신 것이었다
텅 빈 바람 속에서
뼈와 가시로 흔들리는
겨울나무들의 애도를 받으며
건넛마을이나 고개 너머에 사는
세상에 또 좀 오래 머문 사람을 길동무하여
생전에 흙발로 일구던
보리밭 벼논 그루터기를 밟으며
어둡고 환한 길을 걸어가신 것이었다
■선정평
삶에 대한 통찰과 시적 상상력의 깊이
계간 《문예연구》는 서형오 시인의 「위양못 이팝나무 꽃」과 「자갈치시장에서」(《문학들》 2019년 봄호)를 올해의 계간지 우수작품상으로 선정한다. 서형오 시인의 작품들은 근래에 보기 드문 전통 서정의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시가 이미지와 사유 중심의 산문적 서술로 흐르고 있는 근래의 경향에 비추어보면 전통 서정의 문법을 발견하는 재미가 점차 드물어지는 추세인데, 서형오 시인의 시적 상상력과 어법은 차분하게 전통 서정의 상상력을 펼치고 있어 자못 신선하다. 이번에 우수작품상으로 추천하는 두 편의 작품들 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위양못 이팝나무 꽃」은 이팝나무에서 연상되는 이밥의 상상력을 펼쳐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팝나무 꽃들이 밥알을 닮아 그렇겠지만, 과거 궁핍과 빈곤의 시절을 겪은 세대에게 있어서 이팝나무 꽃들은 배고픔과 이밥에의 갈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점에서 “가마솥이 넘치도록 쌀밥”을 지어 “머리에 이고 서 있다”는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눈으로 배불리 먹는/이팝나무 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에 어머니 이름을 덧붙이고 있어 서정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작품이다.
두 번째 작품 「자갈치시장에서」 역시 이러한 음식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생선이 올려진 밥상의 이미지를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시적 정서의 친연성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더러 시장에 가면 먹고 입고 일용할 물건들을 사고 파는 모습에서 문득 삶의 절실함을 느끼게 되는데, 시인은 이러한 삶의 한 순간을 서정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그 절실함으로 인해 자갈치시장의 생선들조차 “선한 사람이 차린/옹골진 밥상 위에” 차려져 “젓가락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그래서 자못 숙연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시적 서정의 울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문예연구》 편집위원회
■수상소감
염천에 검은 그늘이 그리운 한 철
아버지가 별세하시고 어머니마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바람에 고향 집은 텅 비어서 삶은 고구마 껍질 같습니다. 주인을 잃은 집채 둘에 세간과 연장들, 농구들은 병자처럼 낡아 가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그간 제가 분양받은 말의 땅도 묵정밭이 다 된 지경이었습니다. 간혹 두려운 마음으로 밭에 나가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낫과 호미를 갖다 댄 것은 작년 9월에 접어드는 그 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들이 부실합니다. 호된 꾸지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허락하신다면, 묵묵히 나무들을 심어 줄기와 뿌리를 넓혀 가는 여러 문우님들과 상을 받는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염천에 검은 그늘이 그리운 한철입니다./서형오
*서형오 2016년 《문예 연구》로 등단. 3인 시집 『낙하산을 펴다』. 청소년 시집 『급식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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