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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집중조명/고주희/신작시/물에 뜨는 돌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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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81회 작성일 20-01-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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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집중조명/고주희/신작시/물에 뜨는 돌 외 4편


고주희


물에 뜨는 돌



표류기에나 나올 법한 배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온갖 희한한 보물들이 거리 좌판에 쏟아지고
햇빛은 녹슨 금화처럼 뒤척거렸다


참 이상도 하지,
마음이 뜨지 못하도록 들돌로 척추를 눌러놓았는데
곡진한 허기처럼 물에 뜨는 검은,


빠져나올 노래와 젖지 않는 책 한 권쯤 가졌어도
수영하는 법을 모르는 내가
미래의 어디까지 떠밀려갈 수 있을까


앞과 뒤 옆과 옆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조망이지, 리듬에 따르면
저글링에 능한 어둠조차 낮에는 안색을 바꾸니


사랑이라는 횡포를 생각한다
검은색은 고통을 감춰준다


믿기지 않는 우연을 멈추고
이제 푸른 눈의 당신도 기억에서 지운다


정오의 권태로움,


당신과 나라는 비밀투성이가 만나
그해 가장 가벼운 몸무게를 얻게 되었지만


만져보면 스스로 흘러넘치는
얼굴만 무성할 뿐이다





최초의 세드나*



고래 뼈로 틀을 짜고 뗏장을 덮은 지하 방에는
죽은 노모의 이름을 얻은 아이와
오래오래 내 옆에서 죽지 않는 빙하기


영혼을 잃은 모든 바람은 샤먼,
인디언들에겐 왜 B형이 없을까


폭설에 중독된 창문은 주변의 소리를 지워 갈 뿐
얼음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세드나
피투성이 왼쪽 눈이 떠오른다


이 방의 좌표를 모르고 표류하는 영혼의 이름도 모른 채
매일 밤, 불을 지펴야 하는


바다코끼리의 기름을 구하러
창을 들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 계절이 있다
과묵한 그가 사냥하러 나간다, 중얼거릴 때
벌목을 피한 마지막 나무의 심정이 된다


문밖에 어슬렁대는 짐승들,
피 냄새에 오래 굶주린 바다가 비릿하다
물려받은 한 척의 범선을 부수어 막막한 오늘을 버틴다
김 서린 창문에 그린란드의 마지막 주소를 쓰고 또 쓰며
이곳의 항로를 불사른다


바다라는 말에 눈송이가 닿는 동안
무거워진 아이가 가라앉는다


작살꾼들이 몰려오고 있다

 
   * 세드나sedna : 이누이트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





사기꾼이 완성되는 계절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오*


여름의 중심을 가젤처럼 견뎌 본 사람은
광기의 자세를 어떻게 외면할까


바닥을 보는 일이 바다를 걷는 일과 같다면
새장을 여는 일이 사막이 시작되는 일과 같다면


세상 끝에 서 있는 바람은
돌아갈 집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나무 아래 묻힐 그림자의 이목구비가
초현실적이라고 말해야 할까


긴 여행으로 하얗게 녹아내린 밤에
갑자기 새를 버리고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애꾸처럼 피고 지는 경계는
온통 어두워질까


눈이 그늘진 사내를 피한다 해도
한 번 새겨진 입술은 지워지지 않더라고


기도가 간신히 어떤 계절을 골라잡을지
바닥은 비릿한 입술이 되고


섬엔 비밀이 없는 게 비밀이야,


말만 잘하면 한 철 눌러앉았다가
여자를 버리고 가는 철 지난 사기꾼이
완성되는 계절


장마가 오기 직전 치자꽃은 어디로 떠났더라


  *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 :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중에서.





산책의 조건



몰래 연인의 뒷모습을 담는 사람을 보았어요


우아하게 탄식이 터지는 질문
떠돌이꾼에 관한 발라드*를 들어 본 적 있나요?
그림자 밖에는 음악이라는 악천후
비밀에 가까운 것들만 답을 이루죠


겨울을 지나온 복수초를 떠올리듯
엉겅퀴꽃 물끄러미 나를 쳐다볼 때
길 밖으로만 명랑한 토끼풀을 생각해요


여전히 바람은 굉장하고
결국 사랑 하나 이루지 못한 이곳에서
잴 수 없는 풀과 이름 모를 풀의 간격


깨진 진공관 앰프처럼 우리는
수리가 안 될 수도 있겠어요 지옥을 떠나온 개처럼
검게 부푸는 트럼펫을 입이라 우길 수밖에 없겠어요


매일 밤 손톱을 자르는 피아노를 배경으로
황량해지는 한 사람의 미래


가끔 들려오는 일요일의 소식에
다 자란 어른들이 멈춰 서서 울기도 하겠네요


어쩌다 당신을 닮은 저녁과 마주치는 날이면
가벼운 묵례로 답하겠습니다


* 떠돌이꾼에 관한 발라드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미아



눈부시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트렁크 바깥의 기후


가지런한 자세로 일상을 버텨도
어긋난 태풍의 경로처럼 고통과 열망은
소멸을 모르는 한 몸


공중에서 사라지는 공중, 발끝이 처음인 떨림
기억이 감지되면 죄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노래들
구름이 또 다른 구름을 몰고 시간을 관통해도
실격을 모르는 새처럼 창 너머인 것들


사라진다면 기뻤을 어제,


망망대해 속 몽유와 별이 혼숙인 것처럼
감정이 두려운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도를 베끼고 있다


월요일에 시작된 불면이
모든 요일을 다 써버린 일요일에야 잠들 무렵
밤의 활주로는
웅성대던 낮의 경로를 모두 지우고


자리를 바꿔 앉은 천연덕스러운 연인들


부풀릴 어둠을 찾느라
말이 끊긴 지점과 비상구 사이에 모호한
목적지만 잦아지고 있다





■시론


음악이라는 한없는 끄트머리



재즈는 게토Ghetto(흑인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아무도 정확한 출생을 모르는 아이 하나가 무섭게 내게로 왔다. 형체가 흐릿한 그 아이처럼 성립이 되지 않는 질문이 나를 데리고 놀았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줄도 모른 체, 애초에 밤인 그런 것들이 친근했다. 근친처럼 굴다가도 고통스럽게. 우울도 무기력도 아닌 다른 질감의 상태에 음악 듣기는 생존 방식의 하나였다.
사라지는 성질 때문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것들.
몇 년을 기다린 곡의 제목을 놓칠까 봐 라디오를 떠날 수 없었던 흔적은 지금까지도 종종 드러난다. 그렇고 그런 것 중에서도 유독 분명한 기억. 이를테면 선 라Sun Ra의 음악을 들을 때쯤 자율학습하던 학교 운동장의 어둠은 어떻게 빛났는지, 온통 함박눈으로 뒤덮인 도서관에서 조 패스Joe Pass의 음악은 나를 어떻게 바깥으로 내몰았는지, 주로 딴 세상에 가 있던 나의 눈과 귀는 음악과 함께 무엇을 보았는지, 이름도 모르는 나무를 멀뚱히 보며 밤의 거리를 얼마나 쏘다녔는지.
한 번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는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음악일 것이다.
압도되는 순간 사라지는 검은 일요일처럼 낯선 문장은 이전의 낯선 음악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귀에 달린 손으로 이 세계와 악수할 수 있을까.


음악 속에서 나는 이목구비가 흐려지는 악조건입니다.(졸시/ 「라 폴리아」 부분)


내가 흠모했던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외곽에 카페를 차렸다. 수 만장의 음반 사이를 드나들며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그날의 시집을 정했다. 옛사람이 정인에게 머리카락을 헌정하듯 노래를 선곡하고 테이블 한쪽에서 독서를 했다. 주문을 받고 안주를 만들고 시를 썼다. 음악은 하나의 연대이면서도 모두 흩어질 때만 완성되는 불완전 리듬.
이제 있기도 없기도 한 그들과 공통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재즈는 형식이지 장르가 아닌 것처럼 블루 노트가 블루한 것만은 아닌 것처럼.


다시 나로 돌아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세계는 계속 태어나고, 재해석 되고, 사라지지 않는 소행성처럼 내 주위를 돈다.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왜 나는 자꾸 스크래치를 내려는 걸까. 흐릿한 경계 혹은 윤곽에 대해서만 받아 적는다고 해도 쓺의 연속을 ‘허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삶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알 수 없는 세계의 한끝에서 나의 시는 영원히 방황해야 할지 모른다. 매번 길을 잃고도 이어지는 끄트머리들로 끝내 계속일지 모른다.





*고주희 2015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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