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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집중조명/이병국/시평/떠돌이꾼과 산책자, 미아의 삼위일체―표류하여 도달하는 삶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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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42회 작성일 20-01-1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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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집중조명/이병국/시평/떠돌이꾼과 산책자, 미아의 삼위일체―표류하여 도달하는 삶의 장소


이병국


떠돌이꾼과 산책자, 미아의 삼위일체
―표류하여 도달하는 삶의 장소




태양에 의해 병든, 온통 비가 뜯어먹은
쥐어뜯은 머리에 강탈한 월계관을 쓴 사내
청춘 전부를 잊었으나, 청춘의 꿈만은 잊지 않았던
오래전 지붕을 잊었으나 지붕 위의 하늘을 잊은 적 없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떠돌이꾼에 관한 발라드」 중에서


1.
우리가 경험하는 장소는 지리적으로 주어진 공간과는 다르다. 에드워드 렐프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된 것이자, 우리가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의 중심이며 추상적이거나 개념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생활 세계가 직접 경험되는 현상이다. 그는 장소를 개인과 공동체 정체성의 중요한 원천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정서적·심리적으로 깊은 유대를 느끼는 인간 실존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떠돌이꾼’은 이러한 ‘인간 실존의 중심’을 상실한 채 세계에 표류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삶의 기반인 장소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이에게 과거의 영광이 주는 실체적 감각은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존재를 붕괴시킬 위협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너머의 감각, 이를테면 꿈이든가, 지붕 위의 하늘이라든가 하는 불확실하면서 정서적 충만함으로 존재를 둘러쌓던 것들을 잃게 되면 존재는 자신을 잃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은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실체적이고 감각 가능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과 그것이 주어진 질서로 작동하는 공간에 기인하기보다는 존재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행위로서 의미화된 장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존재를 존재이도록 만드는, 다시 말해 주체를 주체이게 만드는 것은 경험이 가능한 장소에서 비롯된 행위에의 기억에 있다. 그것이 거부되었을 때, 주체는 자신의 자리를 잃고 떠돌이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를 바우만식으로 말하면 ‘쓰레기가 되는 삶’일 수도 있겠다. 폐기되지 않기 위해 붙잡아야 하는 것은 결국 주체의 행위이다. 그 행위로 말미암아 주체는 세계에 부여된 질서가 장소를 만들어내고, 그로부터 획득된 개별적, 개인적인 의미가 타자들의 행위와 만나 상호주관적이며 보편적인 맥락을 확보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써 정체성을 지닌 실존적 주체로 정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행위에 있다. 주체의 행위로 말미암아 불가해한 공간은 의미를 지닌 표상적 장소가 된다. 행위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심상지리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수행인 셈이다. 물론 심상지리는 주체가 인식하고 상상하는 관념 속에 규정된 개념이라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주체의 행위로 인해 의미화된 것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행위는 구체적 행동인 동시에 기억과 언어로 분화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언어로 매개된 장소야말로 존재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분명한 사건으로 봐야할 것이다.


2.
고주희의 근작을 읽는 자리에서 장소에 대한 언술이 장황했던 것은 일련의 시가 장소의 상실에 내몰려 있는 존재의 위태로움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존재에게 주어진 세계의 접촉면이 매끄럽지 않은 것은 세계가 강제하는 자리에 기입될 수 없는 주체의 현장성에 그 원인이 있다. 이에 반응하는 시적 주체의 불안은 이 공간에 환유의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도록 이끈다. 이때의 환유는 시적 주체가 수행하는 언어적 행위의 일환으로 추상적인 공간을 실천적 사유의 장소로 만드는 공간적 전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고래 뼈로 틀을 짜고 뗏장을 덮은 지하 방에는
죽은 노모의 이름을 얻은 아이와
오래오래 내 옆에서 죽지 않는 빙하기


(……)


폭설에 중독된 창문은 주변의 소리를 지워 갈 뿐
얼음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세드나
피투성이 왼쪽 눈이 떠오른다


이 방의 좌표를 모르고 표류하는 영혼의 이름도 모른 채
매일 밤, 불을 지펴야 하는


(……)


문밖에 어슬렁대는 짐승들,
피 냄새에 오래 굶주린 바다가 비릿하다
물려받은 한 척의 범선을 부수어 막막한 오늘을 버틴다
김 서린 창문에 그린란드의 마지막 주소를 쓰고 또 쓰며
이곳의 항로를 불사른다


바다라는 말에 눈송이가 닿는 동안
무거워진 아이가 가라앉는다

작살꾼들이 몰려오고 있다


─「최초의 세드나」 부분


이 시의 시적 주체는 폭설이 내리는 날, 지하 방에 앉아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주체와 대상이 위치한 공간이 재현하는 것은 “죽지 않는 빙하기”를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인물의 정서적 불안이다. 이들을 지켜줄 “과묵한 그”는 사냥을 떠났고 남은 아이는 “물려받은 한 척의 범선을 부수어 막막한 오늘을 버틴다”. 이누이트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인 세드나로 아이를 명명함으로써 이 시를 재정립할 수도 있겠다. 그럴 때, “지하 방”은 그 자체로 “물려받은 한 척의 범선”으로 작동한다. 배는 세드나를 붙잡아둔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구이지만 결국 세드나가 바다에 빠져 바다의 여신이 된다는 신화의 구조를 본다면, 오히려 죽음의 공간에 다름없다. 그러나 세드나는 “얼음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스스로 죽음의 공간으로 가는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세드나는 희생된 수동적 존재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능동적 존재로 바뀐다. 이로 인해 “지하 방”이 의미하는 부정적 표상으로서의 공간은 세드나의 행위로 긍정적 장소로 전회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밖에 어슬렁대는 짐승들”과 “피 냄새에 오래 굶주린 바다”는 방 안쪽으로 침범하려 든다. 방 안의 아이는 “이 방의 좌표를 모르고 표류하는 영혼의 이름도 모른 채/매일 밤, 불을 지”핀다. 그러다 결국 “물려받은 한 척의 범선”마저 부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초의 세드나’는 곧 닥칠 “작살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가 아이의 불안에 공감하고 이에 동일시하게 되는 것은 이 처연함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죽음충동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상징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에 놓인 상상적 장소에 기입된 행위로부터 파생된 고통에의 향유라 할 수 있겠다. 유사-죽음을 실천함으로써 행위자의 인식을 변형시켜 일종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장소를 희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막막한 오늘을 버”티는 저 아이의 감정을 전유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고통은 어찌해야 하나.


표류기에나 나올 법한 배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온갖 희한한 보물들이 거리 좌판에 쏟아지고

햇빛은 녹슨 금화처럼 뒤척거렸다


참 이상도 하지,
마음이 뜨지 못하도록 들돌로 척추를 눌러놓았는데
곡진한 허기처럼 물에 뜨는 검은,


빠져나올 노래와 젖지 않는 책 한 권쯤 가졌어도
수영하는 법을 모르는 내가
미래의 어디까지 떠밀려갈 수 있을까


앞과 뒤 옆과 옆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조망이지, 리듬에 따르면
저글링에 능한 어둠조차 낮에는 안색을 바꾸니


사랑이라는 횡포를 생각한다
검은색은 고통을 감춰준다


믿기지 않는 우연을 멈추고
이제 푸른 눈의 당신도 기억에서 지운다


정오의 권태로움,


당신과 나라는 비밀투성이가 만나
그해 가장 가벼운 몸무게를 얻게 되었지만


만져보면 스스로 흘러넘치는
얼굴만 무성할 뿐이다


─「물에 뜨는 돌」 전문


아이에 의해 부수어진 배는 ‘지하 방’의 ‘빙하기’를 버티는 데 쓰였다. 이 ‘버팀’은 방이라는 공간을 장소로 전회하여 의미화하였으나 그것이 불안의 상쇄하고 삶의 정박을 이끌지는 못했다. 부수어진 채 표류하는 배는 「물에 뜨는 돌」의 시적 주체의 시선에 닿아 맺힌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들돌로 척추를 눌러놓”아도 가라앉지 못하고 마음이 부유하게 만든다. 적극적 행위를 무모한 노력으로 전락시키는 힘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곡진한 허기”의 실체를 밝혀야만 한다.
채울 수 없는 결핍인 ‘허기’는 “당신과 나라는 비밀투성이”가 서로를 강제하는 “사랑이라는 횡포”에서 연유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고통을 감춰”주는 ‘검은색’의 표상을 갖는다.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낭만적 환상을 전유해 상징적 질서에 서로를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우연이 필연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사랑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상상적 환상과 이를 뒷받침해줄 상징적 세계가 관계 속에서 접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실재의 형태로 결핍을 야기할 뿐이라서 고통의 향유만을 불러온다. 이는 자기기만의 방식으로 관계의 가능성을 속삭이지만 “만져보면 스스로 흘러넘치는/얼굴만 무성”하게 한다. 기이하고 불가해한 사랑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우리 내부의 결핍된 공간이 정서적 충만함의 장소로 전회되기는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추구되어야 하는 이유는 “수영하는 법을 모르는 내가/미래의 어디까지 떠밀려갈 수 있을”지 대답하기 위해서는 “믿기지 않는 우연을 멈추고” 그 끝까지 자신을 표류하게 내버려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자신의 행위를 방기하고 표류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주체가 자신의 삶을 추동하기 위해 필요한 수행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시적 사유가 자꾸만 가정의 세계로 우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확실하고 재현 불가능한 것들과 마주하는 것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이야말로 시가, 시인이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몰래 연인의 뒷모습을 담는 사람을 보았어요


우아하게 탄식이 터지는 질문
떠돌이꾼에 관한 발라드를 들어 본 적 있나요?
그림자 밖에는 음악이라는 악천후
비밀에 가까운 것들만 답을 이루죠


겨울을 지나온 복수초를 떠올리듯
엉겅퀴꽃 물끄러미 나를 쳐다볼 때
길 밖으로만 명랑한 토끼풀을 생각해요


여전히 바람은 굉장하고
결국 사랑 하나 이루지 못한 이곳에서
잴 수 없는 풀과 이름 모를 풀의 간격


깨진 진공관 앰프처럼 우리는
수리가 안 될 수도 있겠어요 지옥을 떠나온 개처럼
검게 부푸는 트럼펫을 입이라 우길 수밖에 없겠어요


매일 밤 손톱을 자르는 피아노를 배경으로
황량해지는 한 사람의 미래


가끔 들려오는 일요일의 소식에
다 자란 어른들이 멈춰 서서 울기도 하겠네요


어쩌다 당신을 닮은 저녁과 마주치는 날이면
가벼운 묵례로 답하겠습니다


─「산책의 조건」 전문


진실은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사건의 뒷모습에서 관찰될 수 있는 무엇이며, 한없이 낮은 곳으로 향하는 시선 속에 있다. 진실을 갈구하는 시는 ‘몰래’ 바라보는 시선에 속해 있으며 “그림자 밖”의 “악천후”를 인지하는 “떠돌이꾼”에 대한 관심에 바탕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에 가까운 것들만 답을 이”룬다는 것을 수용하며 ‘정답’이 아닌 질문을 수행한다. 한편으로 ‘여전히’와 ‘결국’이라는 부사어를 지나 ‘매일 밤’ “황량해지는 한 사람의 미래”를 떠올리곤 ‘가끔’에 “멈춰 서서 울기도” 한다.
시인이 수행하는 행위는 ‘산책의 조건’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산책은 산책자의 응시 속에 포착된 세계를 정서적 도약의 계기로 이끈다. 도시의 아케이드를 산책하며 존재론적 탐구에 나선 보들레르와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산책은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인식론적 행위의 양태를 띠기도 한다. 고주희의 산책은 “잴 수 없는 풀과 이름 모를 풀의 간격”을 통해 ‘이곳’의 황량함을 감각하고 재현 불가능한 세계의 불확실함에 흔들리는 존재의 ‘뒷모습’을 발견하여 포용하려는 의지에 가깝다. 이는 ‘여전히’, ‘결국’, ‘가끔’과 ‘어쩌다’와 같은 부사어들의 낙차를 통해 추구와 좌절, 기대와 타협의 과정을 경유하여 존재의 근본적 장소를 모색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색의 끝에는 가정의 세계가 놓인다.


바닥을 보는 일이 바다를 걷는 일과 같다면
새장을 여는 일이 사막이 시작되는 일과 같다면


세상 끝에 서 있는 바람은
돌아갈 집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나무 아래 묻힐 그림자의 이목구비가
초현실적이라고 말해야 할까


긴 여행으로 하얗게 녹아내린 밤에
갑자기 새를 버리고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애꾸처럼 피고 지는 경계는
온통 어두워질까


(……)


섬엔 비밀이 없는 게 비밀이야,


말만 잘하면 한 철 눌러앉았다가
여자를 버리고 가는 철 지난 사기꾼이
완성되는 계절


─「사기꾼이 완성되는 계절」 부분


가정은 추측과 달리 성급한 결론을 내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론을 지연시키며 신중하게 세계에 접근하려는 적극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가정은 가능과 불가능의 중간을 점유한 채 어느 방향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는 도약의 지점이기도 하다. 그것을 망설임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주어진 선택지를 선택하고자 하는 충동을 유예하고자 하는 신중함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을 보는 일”을 “바다를 걷는 일과 같다면” 혹은 “새장을 여는 일”을 “사막이 시작되는 일과 같다면”이라고 결정을 유예하는 순간, 그 둘 사이에 놓인 의미망은 “긴 여행으로 하얗게 녹아내린 밤에/갑자기 새를 버리고 사라진 것들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선택장애처럼 보이는 이 유약함이야말로 자신을 표류하게 둠으로써 주체의 내부 공간을 미래의 바다로 밀어내는 장소가 되도록 이끄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바닥을 보는 일”은 “바다를 걷는 일”처럼 쉽지 않으며 “새장을 여는 일”은 “사막이 시작되는 일”처럼 황폐함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의 행위가 수행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망설임과 고민이 선행된다. “비밀이 없는 게 비밀”이라는 담백함은 이러한 사유 속에서 선택된 문장일 수밖에 없는데 진지하지 않은 척 의뭉스럽게 던져진 문장에 처소인 “섬엔”이 덧붙으면서 고립된 공간과 그곳에서 떠나는 ‘사기꾼’의 관계가 개입한다. “새장을 여는 일”은 갇혀 있는 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겠지만, 그로 인해 남겨진 공간인 ‘새장’의 비어 있음을 감각하게 한다. 결핍은 새장 안에 대상을 가둔다 해도 채워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장을 열어 타인을 떠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가정의 세계에서 타인 역시 “말만 잘하면”이라는 가정으로 소급된다는 점을 (가정하여) 고려해본다면, 떠나게 될 것은 떠남으로써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결국’ “사막이 시작되는 일”과 “바다를 걷는 일과 같”은 “바닥을 보는 일”은 도래하게 된다.
문제는 바닥을 보는 일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에 있다. 바닥을 보는 일은 바다를 건너는 일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질 감정의 문제겠으나 바닥 그 자체는 이를 기만하지 않는 한 주체의 자각을 불러오는 장소로 기능할 것은 분명하다. 가정에 의해 사유의 방식으로 ‘이미’ 경험된 바, 그것을 다시 기억하는 행위는 주체가 폐기되지 않게 할 것이다.


4.

기억은 그것이 감각하는 시간과 결합하여 주체를 특정 장소에 정박시킨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장소는 특정한 시간에 대한 기억에 의해 주체의 내부에 구축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억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으로 말미암아 더는 지속할 수 없는 장소성과 결합할 때에는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부시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트렁크 바깥의 기후


가지런한 자세로 일상을 버텨도
어긋난 태풍의 경로처럼 고통과 열망은

소멸을 모르는 한 몸


공중에서 사라지는 공중, 발끝이 처음인 떨림
기억이 감지되면 죄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노래들
구름이 또 다른 구름을 몰고 시간을 관통해도
실격을 모르는 새처럼 창 너머인 것들


사라진다면 기뻤을 어제,


망망대해 속 몽유와 별이 혼숙인 것처럼
감정이 두려운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도를 베끼고 있다


월요일에 시작된 불면이
모든 요일을 다 써버린 일요일에야 잠들 무렵
밤의 활주로는
웅성대던 낮의 경로를 모두 지우고


자리를 바꿔 앉은 천연덕스러운 연인들


부풀릴 어둠을 찾느라
말이 끊긴 지점과 비상구 사이에 모호한
목적지만 잦아지고 있다


─「미아」 전문


「미아」의 시적화자가 감각하는 시간과 그것이 불러오는 기억은 어떠한 방식으로 주체를 재현하는지 살펴볼 때, 두드러지는 것 역시 가정에 있다. “사라진다면 기뻤을 어제”는 사라지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 어제가 지금 이곳에 당도해 있음을 ‘가정’하도록 이끄는데 이때의 가정은 불안의 기원을 모색하여 그것을 상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읽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 “감정이 두려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선택인 셈이다.
(소설에 대한 담론을 차용하자면) 길이라는 것이 루카치 식으로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며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확고부동한 것이라면 좋겠으나, “망망대해 속 몽유와 별이 혼숙인” 지금, 이곳에서 길은 “고도를 베끼고 있”는, 모호한 상태에 머문다. 이런 상황에서 “가지런한 자세로 일상을 버텨도” 주체에게 인식되는 것이라곤 “고통과 열망은/소멸을 모르는 한 몸”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감각이다. 이 격차는 일종의 수난의 방식으로 주체를 길 잃음의 상태에 처하게 만든다. 아무리 “시간을 관통해도” 돌이키거나 위안이 될 수 없는 “창 너머의 것들”로 주체는 자리매김 되며 장소를 상실하게 되는 셈이다.
장소로부터 거부된 존재가 아닌, 장소를 상실한 존재라는 점에서 ‘미아’는 ‘떠돌이꾼’과는 다르다. 이는 행위의 차원에서 다른 맥락을 획득할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부시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트렁크 바깥의 기후”는 단지 정황을 드러내는 기표라기보다는 ‘트렁크’로 환원되는 일상의 외부와는 다른 상황을 준비하는 태도라 볼 수 있다. 물론 이도저도 아닌 기후로 형상화된 외부 세계이지만, 측량할 수 없는 세계와 불안정한 주체와의 역학관계를 고려한다면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거창하거나 진중한 사고를 수반하지 않는다. “자리를 바꿔 앉은 천연덕스러운 연인들”처럼 다소 엉뚱하며 유쾌한 반발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주체의 행위는 불확실한 공간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비록 장소 상실에 처하게 된다하여도 일종의 언어적 환유로라도 버티고 견디는 삶이 가능하도록, 그래서 존재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도록 공간적 전회를 수행하도록 이끈다. 추상적 공간이 규정하는 곳에서는 언제든 ‘미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행위로 촉발된 의미화된 장소는 비록 우리가 “부풀릴 어둠을 찾느라/말이 끊긴 지점과 비상구 사이에 모호한” 위치에 놓인다하더라도 ‘목적지’를 잃지 않으리란 믿음을 준다. 결국 고주희의 시에서 재현된 ‘미아’는 ‘떠돎’과 ‘산책’을 경유하여 도달한 사건의 장소인 셈이다.
고주희의 근작시를 읽으며 얻게 된 확신은 우리 삶의 내용이 잦아들지 않으리라는, 미아가 될지언정 잦아지는 길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표류하며 나아가리라는 역설적이고 중층적 결합의 양태이다. 이미 많은 말을 한 듯도 하지만 “가벼운 묵례”로 믿음에 답하고 싶다.





*이병국 2013년 <동아일보>로 시, 2017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평론 당선.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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