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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소시집/김중일/너의 너머의 너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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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소시집/김중일/너의 너머의 너울 외 4편
김중일
너의 너머의 너울
1.
얼마 전 산과 바다로 사람들을 보낸 적 있는
너는 내 뒤에 산꼭대기를 보고
나는 네 뒤에 너울성 파도를 보고 있다
2.
내가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웅크리는 대로
강풍은 내 턱밑으로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만들었다
한동안 나는 담뱃불을 붙이는데 애먹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라이터를 켜는 순간
너는 피자마자 사그라지는 라이터 불을 두 손가락으로 순식간에 집어서 쑥 뺐다
빨간 보자기 같은 불이 라이터에서 생각보다 오래
길게 뽑혀 나왔다
마술처럼 뽑아도 뽑아도 한동안 계속 나왔다
내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자
너는 길섶에 버릴 수도 없는 불꽃을 꿀꺽 삼켰다
너의 눈두덩이가 금세 붉어졌다 오늘도
나는 너의 너머의 일을 모르고 혼자 두고 어디로 갈 수도 없다
너는 점점 바위처럼 까매지고 있는 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다
나는 해일처럼 바다로 밀려가는 산을 등지고 앉아 있다
각자 등지고 있는 것을 아직 돌아보지 못한다
3.
바다보다 높이 치솟아 엄청난 해일처럼 바다를 삼킬 예정인 육지와 모든 산들이 바다를 막 덮치기 직전의 찰나인 오십억 년 동안 우리는 그 산과 바다 사이에 새떼처럼 우연히 모이고 필연이 흩어졌다가 어느 사이에 흙먼지나 물보라처럼 다시 가득 차서 이렇게 같이 오늘도 해 뜬 후 점점 어두워져만 가는 낯빛으로 있다
4.
바다를 등지고 앉은 너의 어깨는 마른 빨래처럼
수평선에 나란히 걸쳐 있다가
가끔 울컥
너의 어깨는
방파제 넘어 범람한 너울성 파도처럼
수평선보다 높이 튀어 오르고 넘쳐
내 옷을 적신다
흔들리는 너의 어깨가 테이블 위로 치솟았다가
바닥에 엎질러진 물처럼 철썩 쏟아진다
나는 엎질러진 물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5.
오십억 년 전부터 바다로 밀려오는 중인 산에 휩쓸려
그 일부가 되기까지
나는 오늘도 산을 등지고 있다
밀려오는 너울성 산에는 물방울처럼 무수한 봉분들이 튀어 오르고
이제 곧 서로의 등 뒤가 산인지 바다인지 구별할 수도
없어질 시간이 올 텐데
오늘도 잠깐 눈 한 번 딱 감고 일어나면
그곳은 내일, 여느 작은 마을 앞바다, 뒷산, 너, 나
6.
너의 얼굴 뒤에 새파란 단두대처럼 바다가 놓여 있다
바다를 돌아보는 대신 너는 바다에 목을 맡기고
파도라는 칼날이 철컥철컥 쉴새 없이 내려쳐도
너는 아직도 이렇게 내 눈앞에 건재하고
그거면 됐지 싶었는데, 대신
너의 등 뒤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파도가 계속해서
강풍처럼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우리가 마주한 테이블을 지구처럼 빙빙 돌린다
7.
저절로 자전하는 이 땅의 누구든 산이나 바다로 누군가를 보낸 적이 있다
뜨거운 나뭇잎
저물 무렵 나는 귀신의 옷을 주워 입다가
어깨가 뜨거워 돌아보니 나뭇잎 한 장이 붙어 있다
온종일 발바닥이 불판을 디디고 있는 듯 화끈거려 발을 들어보니 밑창에 나뭇잎 한 장씩이 어느새 달라붙어 있다
내내 손에 땀이 차서 양손을 펴보니 손바닥에 손금 가득한 나뭇잎이 한 장씩 붙어 있다
낮에는 돋보기로 손금에 잔주름을 새겼다
벌레가 파먹은 나뭇잎처럼 까만 구멍만 뻥뻥 뚫렸다
너무 뜨거우면 차갑다고도 했나,
양 볼이 빨갛게 얼어붙어 살펴보니 비 젖은 나뭇잎이 붙어 있다
타오르는 얼굴이 부끄러워 집으로 뛰쳐들어 가려는데,
사방 길을 막고 제지하는 무수한 손바닥들
손사래 치는 나뭇잎들
나뭇잎에 둘러싸여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된
나는 나무가 되어 버렸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뭇잎을 기워 만든 누더기를 입고
이제부터 내 피부는 세계 곳곳의 공중에 매달리고 흩날리고 떨어지고 땅을 뒤덮고 겹겹이 쌓이고 천천히 썩어가고 있다
조만간 내 피부의 주름을 모두 이으면 지구 한 바퀴쯤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게 된
그날부터 내 피부의 부피는 곧 지구의 부피다
우주적인 나뭇잎 한 장이다
손끝에 자라는 웃음
오래전 내가 먼저 죽고, 얼마 전
죽은 너의 미소 띤 입술을 만지고 난 후부터 영화 속의 외계인처럼
손끝에 빨갛게 불이 켜졌다
사실 그것은 손끝에 맺힌 핏방울일 수도 있겠다
내가 기억하는
너는 결국엔 피가 돋도록 손톱을 맨 끝까지 자르는 사람
매일 손톱을 자르려고 책상에 홀로 앉는 사람
손톱에 까만 때가 끼는 걸 참을 수 없는 사람
소리 없는
손톱 모양의 웃음기,
손톱만큼의 웃음기,
손톱의 때만큼의 웃음기,
웃음의 기미도 싹을 자르려는 듯
그러나 너는 손톱이 자라는 속도로 조금씩 천천히 도리 없이
웃는다
와와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다니 감탄의 유언을 하며
웃는다
손톱은 몸에 마지막 남은 비늘이며
웃음은 미늘처럼 뾰족한 손톱 끝을
물고 몸 밖으로 죽어도 죽어도 올라오고
잘라도 잘라도
뜯어도 뜯어도
자라는
비를 뿌리까지 뽑아낼 수 없듯,
한바탕 소나기만 쏟아져도
둥근 무덤 위에 한 뼘은 자라는 잔디처럼
잡초처럼
오직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만 우리는 웃는다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린 모래를 거머쥐는 손끝의 손톱처럼
얼굴에 모든 주름이 팽팽히 당겨지고 선명해진다
손끝의 지문처럼
국수처럼 쏟아지는 잠
한 사발의 잠에 국수를 말아먹는 밤에
비가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밤에
폭식의 밤에
썩은 이빨처럼 까만 창문들 사이에 끼어
지구가 시커멓게 벌어진 입처럼 둥근
지구가 천공의 빗줄기를 태풍처럼 둘둘 말아
한 젓가락에 후루룩 끌어당기는 밤에
영문도 모르고
땅과 바다에 묻힌 사람들은 배가 부르다
지구처럼 지구만큼
터질 듯 배가 부르다
영문도 모르고
살아있는 나는 배가 고프다
부재자의 잠은 완전히 침수되고
들고나올 살림이 하나도 없는
부재중인
한 사람의 잠에 국수를 말아먹는 밤에
조금 식은 공기
한 사람의 체온이 꺼지자
공기의 온도가 아주 조금 떨어졌다
무게로 환산하면 몸에서 떨어진 눈썹 한 가닥 정도
부피로 환산하면 운동장에 떨어진 눈썹 한 가닥 정도
온도가 떨어졌다
식은 공기 한가운데서 인파를 향해 조용히 경고 카드를 내미는 신호등
눈금 같은 건널목을 사람들이 수은주처럼 오르내린다
도시의 톱니바퀴처럼 가로수 그늘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맞물리며 도시를 가동시키는 그늘들
톱니바퀴 사이사이를 쓸고 닦고 기름치는 사람들이 있다
마모되어 떨어진 톱니 같은 낙엽을 끊임없이
톱니바퀴 바깥으로 쓸어내던 사람이
어느 날 순식간에 톱니바퀴 사이로 빨려들어 끼어 죽었다
그 순간 거리의 공기가 다시 조금 식었다
놀란 낙엽들이 새처럼 푸드덕 날아갔다
그의 후임자가 태양버튼을 꾹 누르자
작동되는 도시의 가로수 그늘들
햇빛이 반짝이처럼 뿌려진 아름답고 검은 톱니바퀴가 서서히 돌아간다
식은 공기가 조금씩 덥혀진다
●시작메모
한 사람의 죽음이 가져오는 파장 또는 물결. 한 사람의 죽음이 일으키는 세상의 새 리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한 사람의 죽음은 세상을 리셋 시키고 재가동 시킨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산으로 모시기 전에 입관식을 지켜본 적이 있다. 나무관 속에 망자가 들어가자, 마치 새로운 건전지를 끼워 넣은 듯 내가 알던 세상이 전혀 다른 리듬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슬프도록 경이로웠다. 그것은 좋거나 나쁘거나의 차원이 아니었다.
*김중일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내가 살아갈 사람』,『가슴에서 사슴까지』.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계간 《리토피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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