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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소시집/문신/공재恭齋의 비숲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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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84회 작성일 20-01-1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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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소시집/문신/공재恭齋의 비숲 외 4편


문신


공재恭齋의 비숲



오전에 볕 들더니 점심참 지나자 검은 구름이 끓는다
우북하게 끓다가 퍼붓는다
옹색하기 그지없던 모래사장이 먼저 빗줄기에 튀고
이내 썰물의 개펄 위로 비숲이 선다
저만큼 떠 보이던 갯섬이 희부연하더니 비숲에 가라앉는다
집집마다 내걸었던 미역줄기를 걷어 들이느라 고요한데
비를 머금은 미역줄기는 빠각빠각 물 먹은 힘을 써댄다
공재라고 호를 붙인 윤 모의 고택이 재 너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발바닥이 물러지도록 걸음을 놓지 못했더니
오늘은 비숲에 밀린 바람이 낭창하니 재를 넘는다
손바닥을 적시며 헤집어본들 내 눈은 번번이 비숲에 가로막히고
비숲 가운데에서 그이의 자화상을 본 듯도 아닌 듯도 하다
개펄 위로 촘촘하게 선 빗줄기를 일러 우림雨林이라고 부르는 건
안채에 청우재聽雨齋 편액을 달아 올린 공재의 뜻을 품어서일 게다
재 너머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었을 그이와 그이의 식솔들에게
남쪽 이 궁벽한 갯가에서 듣기로는 이만한 게 또 있었을까
공재의 우림은 비의 숲이 아니라 비숲이어야 하고
공재가 들었던 빗소리는 소란하나 심란하지는 않아야 하고
공재의 귓바퀴가 개펄이 빗줄기를 머금는 형상처럼 오목하게 젖어들어야 하고
귀를 막아도 공재의 몸 어딘가에서 찰랑찰랑 일렁거려야 하고
공재의 안광眼光은 세상이 아니라 이 개펄의 비숲을 노려 서늘해져야 하고
또……
그이의 자화상을 닮은 사람들이 비숲을 헤쳐 개펄을 넓히고
밀물을 부르고 배를 내고 망망한 데 이르면 닻을 내려
바로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항변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지금 비숲이 끓는다
재 넘어간 바람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저녁이 오는 동안 혀끝이 쓰라리다
후박나무에 비가 내렸다
쓰라리다, 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혀끝은 쓰라리고


하루,
어쩌면 온종일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쓰라리지 않기 위해
울음보다 가볍다는 소리까지 몽땅 토해냈는데
후박나무가 젖는다


혀끝에 박혀 있는 저녁,


어깨를 굽힌 사람이나 턱을 치켜든 사람이나
저녁에 닿는 일은 쓰라림에 닿는 일


후박나무는 후박나무답게 저녁을 맞이하고
저녁에는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므로
견습생 같은 삶이라도 어설퍼서는 안 된다


잠시 비를 긋는 심정으로 후박나무에 기대면
저녁으로 모여든 빗물이
어깨에 스미고


신의 허락 없이는 죄를 지을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 돌아온 사람만큼은
신도 외면하고 싶은 저녁


후박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빗물이 신의 혀끝에 박힌다
쓰라리다


인간이 눈 감는 시간을 기다려 신도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다





저녁 공부



감나무 잎에 빗줄기 들이치는 것 지켜보다가 낡은 서가에서 책 꺼내오는 일을 잊었다


빗소리 차근차근한 저녁에 공부하는 일은 애당초 틀려먹은 일


차라리 행인처럼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저녁을 공부하기로 한다


저녁은 본문 사이에 낀 인용문처럼 다소는 어색하게 굴기로 작정한 모양으로 스멀거리고


이마를 들면 꼭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길목에 저녁이 걸려 있다


이런 저녁이면 어른들은 술동무를 찾아 끄덕끄덕 빗줄기를 헤집어대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발목까지 젖어드는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일은


저 감나무 잎에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장을 캄캄하게 옮겨 적는 일


그런 뒤, 비 그친 감나무 잎 그늘에 낡은 의자를 내다 놓고 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캄캄한 문장을 팔팔 끓는 목청으로 읊어대는 일


그런다고 저녁이 거저 스미지는 않을 터, 연필을 쥐었던 中指의 굳은살을 깎아낸다


이 버려지는 살들에게서 더 이상 피도 눈물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감나무 잎에 저녁이 내린다


저녁에 저녁을 공부하는 흐린 生이 여기 있었다는 듯 감나무 잎이 까맣게 젖어 있다





예리성曳履聲



그해 가을
내가 어느 섬 작은 처마 밑에 세 들어 살 때,


선착장에서 가장 먼 집
섬에서도 가장 높은 집에 얹혀 살 때,


골목과 골목이 분기하다가 딱, 매듭을 짓던 집
기세 좋던 골목이 슬그머니 꼬리를 사리던 집에 빌붙어 살 때,


그 가을 내내
하룻밤에도 열두 번씩이나
그 길다는 골목을
오르내리던


예리성


그해 겨울에도
눈 폭풍처럼 그 집 작은 창문을 흔들어대던,


내가 어깨를 옹송그리며 골목을 걸어갈 때에는
돌담 그늘 같은 곳으로 숨어버리던,


이틀이고 사흘이고
두꺼운 이불을 둘러쓴 채
내게
19세기 러시아 소설을 읽게 만들었던,


섬 뒤편 대숲에서
댓잎으로
허벅지 안쪽 살을
스윽스윽
베듯
혼자 아프게 귀 기울여야 했던


예리성





마당에 목화 핀 집 대문을 가만히 두드려보다



어쩌다 굽은 골목에 들어 담장과 담장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저녁 때
어슷하게 열린 대문 너머 간장종지처럼 습습한 그늘이 내린 마당이 있고
마당을 찰랑이도록 작은 화분들과 조금 큰 화분들이 그 집 안식구의 솜씨처럼
반듯하고 말쑥하게 서서 이제 지붕에 내리고 또 마당으로 고이기 시작하는
저녁 어스름을 마중하듯 그 넓고 뾰족한 잎들이 저녁의 눈썹처럼 가지런해지는데
목화 두 송이 피어, 한 송이는 크고 한 송이는 작아서
저녁참에 마당에 나와 선 그 집 내외 같기만 하여 흐흠 잔기침도 해보고
부러 닳은 구두 굽으로 바닥도 탁탁 굴러보기도 하는데
이쯤이면 누구요 하고 처마 끝에 등 하나 반짝 켜질 법도 하건만
이제 지붕에 내린 어둠이 마당을 거의 다 물들여가도록 목화 두 송이는
꼭 그만큼 사이를 두고 피어서 마침 8월이라 먼 데서 서늘한 바람도 일고
저녁 어스름도 푸르스름하게 깊어 가는데 저기 아래 골목에서부터 탁탁탁탁
느리게 걸어온 걸음이 내 등 뒤에 와서 들숨 날숨을 번갈아 서너 번이나 부려놓고는
그 집 사람들 천둥이 떨어져도 못 듣는다우 하고는 또 탁탁탁탁
위쪽 골목으로 선한 짐승처럼 멀어져가는 것을 묽은 눈으로 지켜보다가
목화 두 송이가 아직도 거기 농아처럼 피어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는
내가 그 집 대문을 탕탕 두드려보아도 간장종지 같은 그 집 마당에 고인 어둠은
오늘 저녁에 대문 밖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던 나와 내 저녁을 모를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마당에 목화 핀 집 대문을 가만히 두드려보다
돌아서서 골목을 돌아 담장 없는 큰길에 나서기까지 마음으로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시작메모


어스름 내리는 순간을 좋아한다. 빛나는 것들은 빛나는 이유로 어스름을 이길 수 없고, 어스름은 빛나지 않는 그늘도 막막하게 두지 않는다. 묽게 그리고 얇게, 어스름은 세상의 빛과 어둠을 마구 휘저어 빛도 그늘도 아닌 세계를 만들어낸다. 나는 어스름의 경계 없음을 좋아하고 어스름의 무분별함을 찬양한다. 그럼에도 어스름은 세계를 지배할 생각이 없다. 내가 어스름을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가 이것이다. 지배할 줄 모르지만 한 세계를 닫고 또 한 세계를 여는 것이 어스름이다. 바로 그 어스름에서 내 시는 태어난다. 저녁에 앞서 어스름이 내리고 어스름 속에서 저녁의 순간을 맞이하다 보면, 눈앞에서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한 것들이 살아서 마구 튄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들을 시라고 믿었고, 그것들의 말을 옮겨 적느라 몇 자루의 펜을 부러뜨려왔다. 내 시는 어스름의 잔광처럼 이내 캄캄해지고 말 운명을 점지 받았지만, 캄캄한 세상 어딘가에서 빛의 잔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생각한다. 그 빛으로 누군가의 어둠을 더 막막하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어스름에 시 쓰는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





*문신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동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로 등단. 시집 『물가죽 북』, 『곁을 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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