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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소시집/안성덕/그믐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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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소시집/안성덕/그믐 외 4편
안성덕
그믐
뭘 감추는 걸까
무슨 생각 그리 골똘한 걸까
깜깜한 그믐 말고
환한 보름에 들여다봐야 알 수 있을까, 달
슬며시 그대 손목 잡으려던 생각
절굿공이 맞잡고 쿵덕
쿵덕 찧으려던 방아
멋쩍어 그랬을까, 그대 모른 척했다
그믐밤이었다
끝내 안 보인
눈 감은 그 대답으로 나는 버텼다 달의 뒤편을 기웃거리며 한 쟁반 은근할 보름을 고대하며
곰곰 생각해보니 그대
어두운 그믐 같은 속내 보여준 거겠다
어느 가을밤 누님처럼, 달도
뒤돌아 소슬바람 소리로 옷 갈아입는 거겠다
안 보여 준 게 아니라 차마
못 본 거겠다
허밍
목청껏 부르지는 못하고 그저
콧소리로나 따라가는
갈잎 부딪는 소리로나 흥얼거리는
산등성이엔 희미한 낮달
강변 버드나무 가지 위
컬컬하게 속울음 삼키는 까치
밭아가는 강물 속
제자리에서나 뒤채는 피라미
물수제비 뜨는 건너편 저 중년이
텀벙텀벙 건넜을 청춘처럼
하늘엔 구름 몇 조각
불러 본다고 다시 노래가 되랴,
시절이 다시 오랴,
어깨에 앉은 노을같이
상강 지난 새벽 식어가는 방구들같이
서럽지는 않게
노래가 되지 못하고, 흐음 흠 따라가는
가을 강
귀가
새벽 5시 반
남양아파트 엘리베이터 구석에
찌그러진 Cass Light 맥주 깡통, 누군가
먹다가 반쯤 남겼네
이제 안은 충분히 환해서
깜깜한 바깥세상 홀짝홀짝 짚어오던
라이트를 껐나,
바싹바싹 타는 사막 같은 세상 앞에
오아시스처럼 남겨두었나,
아니 아니네
병째 들이부어도 허한 속 채워지지 않아
밑이 빠졌나, 확인한 것이네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 속불
집 안에 옮겨붙을세라
잔불 다독이고 들어간 것이네
두고 간 맥주 깡통처럼 반은 찌그러졌을 사내
빈 깡통은 요란할까 봐 몇 모금 남겨둔 사내
새벽기도 다녀오다 만났네
깻잎 조림
뉘 집이라 다르랴만,
푹푹 날은 찌고 일은 고되고
백 리나 달아난 식구들 입맛 걱정에
돈 세듯, 푸른 향기를 차곡차곡 접었겠네
텃밭만 한 살림살이
언제 좀 펴지려나,
가슴 졸이듯 졸이고 졸였을
간간한 깻잎 조림, 모처럼 밥이 다네
잎 잎 달붙은 깻잎을
지그시 눌러주는 아내의 밥숟갈에도
한 장 말없이 얹어주네
찬 투정 아침 밥상이 손바닥만큼 염치없네
졸이고 졸여야 더, 간간해지겠네
나도 세상도
속수무책
꼼짝없이 묶여
도리 없습니다
사나흘 가을장마에 냇물이 불었나요,
오래 발길 끊었던 당신
대책 없이 주저앉은 나를 지나치는
더욱 잰걸음은
다신 놓치지 않겠다, 길목 지키는 징검돌
내 조바심 까닭인 것을 오늘에야 깨닫습니다
어정어정 다가온 왜가리가
송장인 듯 움쩍 못하는 내게 말을 붙입니다
길 재촉하는 당신은
혼잣말하듯 발치에서 잠시 맴을 돌고요
남은 정, 마저 떼려는 거겠지요
늦도록 눌러앉아
왜가리보다 더 길게 목을 뺏을 뿐입니다
돌아가기를 포기한 철새 한 마리
제 몸에 채찍을 대네요
스스로 묶인 나 어찌 해 볼 도리 없네요
징검돌 사이 빠져나간 끝내 손 담글 수 없는
당신 이미 멀고요
●시작메모
벚나무 잎에 복사꽃 같은, 주차장에 핀 꽃 이름을 묻는 이의 소매를 끌며 ‘그냥 꽃’이라 일렀습니다.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밟으며 올라갑니다. 어디선가 목탁 소리 들립니다. 절간은 아직 멀어, 두리번거립니다. 딱딱 딱딱 탁목새네요. 앞서가던 이가 닥닥 닥 돌 봉숭아를 찧어 손톱에 처맵니다. 다섯 살배기 오줌발인 듯 쪼르르 마른 폭포가 나립니다. 벼랑에 매달리던 옛길 아니어도 숨이 찹니다. 철계단을 딛는 발소리가 텅 텅 잘 맨 장구 소리 같네요. 투두둑, 은행알 떨어지는 우화루 옆 돌담에서 또르르르 감로수가 대롱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적묵당 마루에 걸터앉습니다. 소슬바람에 땡 땡그렁 처마 끝 풍경이 웁니다. 바싹 마른 가을볕에 요사채 창호지 숨 쉬는 소리 들리는 듯합니다. 산마루엔 이미 반 뼘 햇살. 미처 못 들은 새벽 싸리비 소리, 스님 방 찻물 끓는 소리, 서리 내리는 소리는 아껴 두기로 합니다.
“오지 않는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꾸 가”(최남선 「혼자 앉아서」)던 입동 전날 불명산 화암사에 올랐습니다. 온몸으로 가을을 들었습니다.
*안성덕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몸붓』, 『달달한 쓴맛』.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아라문학》 편집위원. 원광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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