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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신작시/진화를 끝마친 남자 외 1편/정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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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기
진화를 끝마친 남자 외 1편
이제 막 꼬리뼈의 진화를 끝마친 남자는 홀가분했다
금식의 기간을 사막에 바친 짐승의 육욕에 비해 남자는
온몸이 꼬리뼈다, 당신 앞에 앉아서 오래도록
질서를 지키기 위해 닳고 닳아 없어진 자리
돌출된 꼬리뼈의 흔적은 당신 앞에서의
마지막 죄책감이다
금식의 시간을 사색에 바치지 않았던 까닭은
쉽게 깨닫는 것이 결핍을 합리화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건조한 바람이 상처 위로 내려앉는 동안
무늬만으로 남는 일이
생존의 유일한 방법임을 터득한 남자
물려받은 유전자를 다시는 물려주지 않기 위해
제 뼈의 어디든 진화의 흔적을 새길 수 있었다
석류나무 꺾꽂이는 남자의 유일한 부업이었다
부러진 자리는 언제라도 뿌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당신을 분지르는 남자,
그렇게 남자는 진화를 마치는 중이었다
바닥의 눈
바닥으로 가라앉아 있던 당신의 눈알이
방울져 떠오르다 수면에서 터져버린다
얼음 밑으로 불쑥 솟아오른 얼굴 위를
스케이트 날이 지나고 썰매꼬챙이가
사정없이 구멍을 냈다, 그 후로 당신은
얼음의 시간을 살았고 저수지 속으로 들어가
시간의 얼음이 되었다, 다리 밑에서 인부들은
닥나무 껍질을 벗겨 입이 큰 가마솥에 삶았고
우리는 잘 벗겨진 닥나무를 훔쳐 얼음판에 헛매질을 했다
그때마다 한번도 밑을 들어낸 적이 없었던 바닥을
얼음판은 보여주었다, 응달 밑 고무얼음은
혓바닥처럼 출렁거렸다, 바닥이 얼음을 통해 본 하늘은
차고 날카로운 것있고, 당신은
바닥의 눈이 되었다, 나는
바닥의 어두운 시간을 마주하고 있는 빙판과
그 위를 지나는 날 선 것들에 기대어
당신의 얼굴위로 얼음을 지칠 수가 없었다
젖소들은 서로 하품을 주고 받았고
닥나무 껍질은 다리 밑 여울을 타고
당신의 머리칼을 하류로 흘려보냈다
깜빡거리는 당신의 눈동자 위로
시간의 빗금이 쌓이고 있었다
정은기∙1979년 괴산 출생.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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