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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초점/임규찬의 강의실 속 문학 이야기ⓛ/임규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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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50회 작성일 09-12-2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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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比․批|임규찬의 강의실 속 문학 이야기ⓛ
<일 포스티노>와 네루다와 문학
임규찬




1.

나의 문학강의는 언제부턴가 영화로 시작되었다. 영상시대라는 새로운 문화적 환경을 고려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수강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문학을 만나게 하고자 하는 내 나름의 대중화 전략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도 수강생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문학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쯤이면 알 만한 사람은 당연히 떠올릴 법한 영화이다. <일 포스티노>와 <죽은 시인의 사회>. 저학년일 경우 <죽은 시인의 사회>가 좋았다. 막 ‘입시지옥’을 통과한 터라 중·고교 때 받은 교육을 반추하며 문학을 통해 구속이 아닌 자유로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낭만적 시기가 바로 대학 초년생이지 않던가. 해서 영화 자체는 고등학교 시절을 문제 삼고 있지만, 우리의 극렬한 입시전쟁 속에서는 대학에 막 입학해서가 오히려 이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이 영화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대면할 수 있는 그런 모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언제부턴가 <일 포스티노>를 더 선호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영화에 기대했던 교육적 내용 이상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새롭게 성찰케 하는, 그리하여 나를 위한 교육 자료로 영화가 깊어졌다.

잘 알다시피 <일 포스티노>는 저 유명한 칠레의 노벨상 수상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다룬 영화이다. 아니 파블로 네루다의 삶이 아니라 파블로 네루다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무명 청년 마리오의 이야기가 더 근간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네루다와 마리오가 자연스럽게 펼쳐 나가는 생활 속의 이야기야말로 어떤 문학입문서보다 효과적인, 문학적 실감의 연속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 망명객으로 찾아온 네루다. 섬의 우체국에서는 세계 각처에서 네루다에게 보내오는 우편물만을 전담할 우편배달부가 필요하게 되고, 어부가 되기 싫은 마리오는 기꺼이 그 일을 자청하여 자전거와 함께 네루다의 ‘일 포스티노’가 된다. 네루다는 공산주의자인 우체국장이 보기에는 탄압받는 위대한 사회주의자이지만, 마리오에게는 그저 매혹적인 연애시로 뭇 여성들의 가슴을 울리는 재주 있는 시인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네루다를 팔아 나폴리의 여자를 꼬실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네루다의 시집을 사들고 네루다의 사인을 받고 어쨌든 시를 이해해보려 애를 쓰는 마리오를 보라.

그 과정이 문학적인 면에서 참 인상적이다. 가령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나고 온 날이면 창가에 멍하니 서서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는다. 마치 진작 알고 있던 단어였지만, 그것이 전과 아주 다르게 다가와 마치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서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와 주고받는 감각적이며 시적인 대사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바다에 관한 시를 한편 들려주고 나서 그 시의 감상을 묻는다.


“이상해요.”

“무슨 뜻이야? 무서운 비평가로군.”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이상하다구요.”

“어떻게?”

“단어가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았어요.”

“파도처럼 말이지?”

“맞아요, 파도처럼요.”

“그건 운율이라는 것이야.”

“멀미까지 느껴졌어요.”

“멀미?”

“마치 배가 단어들로 이리저리 튕겨지는 느낌이었다구요.”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뭔데요?”

“은유라는 거야”

“느낌이란 그렇게 순간적으로 생기는 거야.”

“그렇다면 제가 세상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마리오는 그렇게 성큼 시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그 세계는 그로서는 처음 가는 낯선 세상이었지만, 이미 자기 가슴속에서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미개척의 세계이기도 했다. 마리오는 그렇게 자신 속에 잠들어있던 시의 세상을 일깨운다. 마침내 연인 베아트리체 루소를 만나면서 시의 불꽃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삶을 달구기 시작한다.

가령 다음 장면의 대사는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 지면상 여기서 길게 논할 수 없지만 여러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좋은 문학 자료이기도 하다.


“큰일 났어요! 사랑에 빠졌어요.”

“그런 건 곧 나아.”

“낫기 싫어요! 계속 빠져 있을래요.”

“누군데?”

“베아트리체 루쏘. 한눈에 반했어요. 홀딱이요.”

“첫눈에?”

“아뇨. 십 분간 쳐다본 후에요.”


영화에서 네루다의 일방적 지도로 문학 이야기가 이루어졌다면 감동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 문학적인 영화로서 가치는 거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위 대사에서 볼 수 있듯이 마리오가 문학적 인간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하여 네루다와 사실상 대등한 형상으로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자기 목소리로 살아있기 때문에 좋은 영화인 것이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베아트리체 루소와 이모 사이에서도, 또 그녀의 이모와 네루다 사이에서도 그러한 문학적 활력은 싱싱하다. 가령 루소와 이모 사이의 싱싱한 대사를 보라.


“대체 놈이 뭐라 했니?”

“메타포요. 제 미소가 나비처럼 펼쳐진데요.”

“메타포? 그걸로 무슨 짓을 했니?”

“짓이라뇨? 그건 말이에요.”

“놈이 뭘 만졌냐구? 그 놈은 입말고도 손이 있잖아!”

“안 만졌어요. ‘순수한 소녀는 흰 바다 같아서 신비하다’고 했어요.”

“다 알아들었어! 말로 건드리기 시작하면 곧 손으로 할거야.”

“말이 어때서요?”

“말이 세상에서 제일 몹쓸거다. 그놈이 ‘메타포’로 네 가슴에 불을 질렀구나. 가진 거라고는 달랑 그거 두 쪽밖에 없으면서.”


아마도 언어의 양면성, 문학의 이중성을 이만큼 명료하게 대면해 놓은 양면 거울은 보기 힘들지 않을까? 언어나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사이비성과 진정성을 날카롭게 대조해 놓음으로써 위선과 순정, 거짓과 참을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언어적 힘이 이렇게 살아 있다.

그 외에도 네루다의 연시를 가지고 마리오와 이모가 보여주는 에로스와 외설성 문제, “책을 준 적은 있지만 내 시를 도용하라고 한 적은 없네.”라는 네루다의 말에 “시란 쓴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라고 멋지게 받아치는 마리오의 수용미학 등 문학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문학적 재료가 도처에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또한 사랑과 혁명, 연애와 민중 사이의 메타포 혹은 그 합체야말로 세계의 고전들이 두루 내포하는 미학적 속성이기도 하다는 것, 당장 우리의 경우도 춘향전이 함축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는 것 등등……. 그 외에도 원작 소설과 네루다의 자서전 <추억> 등 2차 자료 역시 번역되어 나와 있는 터라 영화와 더불어서 더 많은 토론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육적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교육적 측면의 것이 아니다. 네루다를 계속 만나게 되면서, 특히 자서전 <추억>을 읽으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몇몇 단상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

개인적으로 <일 포스티노>가 좋았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네루다 때문이었다. 그런 실감을 가질 정도로 영화 속의 네루다는 참 멋졌다. 말하자면 멋진 시인 네루다를 멋지게 형상화했기 때문에 영화는 그만큼 리얼리티를 갖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실화처럼 생각하는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네루다는 1948년에 대통령을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여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고 체포될 상황에 처하자 1949년 칠레를 탈출하여 1952년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잠시 머문 적이 있긴 하다. 어쨌든 이 영화가 실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의 시인 네루다, 혁명의 시인 네루다, 자연의 시인 네루다가 비교적 한 형상으로 온전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네루다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실제 삶과 견줘 보면 영화는 말년의 네루다에 가까운지라 다소 안정적이면서 그만큼 정적인 면에 기울어져 있다. 이 점은 네루다 자서전 <추억>을 읽어보면 더욱 체감되는 측면이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만난 네루다가 자꾸만 나 자신을 새로이 성찰하고, 또 우리 문학을 새롭게 보라고 마음을 부추긴다. 다른 무엇보다도 네루다의 자유로움이 참으로 부러웠다. 그리고 그것이 열에 들뜬 듯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정말 ‘자연自然’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유로 생동하는 희열, 충만한 생명력이 자재하다.

네루다의 자서전 <추억>을 읽고 맨 처음 와 닿는 가장 강렬한 인상은 그의 놀라울 만큼 많은 여성 편력과 그 과정에 대한 적나라한, 그러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묘사였다. 가령 이런 식이다. “조금씩 조금씩 나의 두려움은 강렬한 환희로 바뀌어 갔다. 내 손은 그녀의 땋은 머리를, 부드러운 눈썹을 그리고 양귀비처럼 보드라운 눈꺼풀과 두 눈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다. 나는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을, 넓고 둥근 엉덩이를, 그리고 나를 휘감고 있는 다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산 이끼와 같은 촉촉한 음모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에서 깨게 해서는 안 되는 일고여덟 명의 다른 남자들의 몸이 파묻혀 있는 짚더미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일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과부는 나를 만난 후에도 검은 옷을 벗어 버리지 않았다. 검은색과 자주색 비단을 두른 그녀는 마치 비탄이라는 쓴 껍질을 가진 눈처럼 흰 속살의 과일 같았다. 어느 날 오후 세탁소 뒷켠에 있는 내 방에서 그 쓴 껍질이 벗겨졌고, 나는 타오르는 눈[雪] 같은 그 과일을 어루만지며 탐험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러나 나의 왕성한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나에게는 과분한 것 같았다. 그녀의 부르짖음은 급해졌으며 그녀의 뜨거운 심장은 나를 조기 폐망으로 이끌 것 같았다.” 그의 연시가 왜 실감과 감동을 함께 하는지 이 역시 자연스러운 삶이 말해주는 듯하다.

또 하나는 이런 류의 사회주의자나 꼬뮤니스트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네루다가 펼쳐내는 상식 밖의 자유로운 이념과 실천의 양상이 선연했다. 사실 상식 밖이라 했지만 우리, 아니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상식’이 ‘비상식’일 수 있다는, 아니 이겠다는 반성을 네루다는 던져주었다. 맑스레닌주의 원전과 규율과 획일성과 집단화 등으로 결국 정리되는 우리식 꼬뮤니스트만이 주의자가 아닌, 우리가 모르는 훨씬 자유로운 영혼들이 같은 이름으로 자기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뒤늦은 새로움으로 통렬하게 다가왔다.

특히 비교적 현대적이라고만 생각해왔던 파블로 네루다가 사실 우리 근대문학의 대표적 인물들과 거의 동시대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같은 1904년생 소설가 이태준이 1951년 중국에서 네루다를 직접 만나 이야기도 나누었다는 사실이 매우 뜻밖의 일처럼 다가왔다. 또한 이기영 역시 1952년에 소련에서 네루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그 둘이 한데 잘 묶여지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네루다의 <추억> 속에 북조선이나 이태준, 이기영 등은 나오지 않았다. 네루다의 글 속에 수없이 많이 언급되는 정감어린 지명과 이름들 가운데 ‘우리’ 것은 없다. 그것을 네루다의 삶의 행적 안팎에 놓고 보면 네루다가 소련을 위시하여 중국, 북조선 등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만큼, 비네루다적인 어떤 거리감을 우리는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네루다를 좀 더 깊게 만나면서 느끼게 된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가 네루다와 우리 근대문학자 사이의 차이와 거리감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재료, 나를 이루고 있는 재료로 계속해서 작업할 것이다. 감정, 존재, 책, 사건, 그리고 전투에서 나는 잡식성이다. 나는 전지구를 먹어 삼키고 싶다. 나는 온 바다를 마시고 싶다.”라는 네루다의 거대한 잡식성과 지구적 형상에 비추어 우리는 확실히 순정한 순혈주의와 민족적 형상에 갇혀, 닫혀 있었다. “내 시가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제한 없이, 한 방에 머물러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뻗어 나가려는 경향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나는 책에 파가 있다고 범주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삶 그 자체와 같이”라며 네루다가 창출해낸 엄청난 혼종과 융합, 메타포의 우주화에 비해 우리의 문학적 색채는 이즘이나 이념 혹은 집단적 흐름에 결벽에 가까운 집착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 점에서 “나는 항상 정의定義나 딱지에 관심이 없었다. 미학에 관한 토론은 죽도록 지겹다. 나는 자기 나름의 미학을 가진 사람들을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의 검시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것의 출생신고증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월터 휘트먼은 ‘그리고 외부적인 것은 그 무엇이라도 나를 통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문학의 온갖 장식품들은 벌거벗은 창조 행위를 대신할 수는 없다”라는 네루다의 말은 비평가로서 나의 정체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했다.

아울러 네루다가 리얼리티와 관련해서 발언한 유명한 다음 대목은 나의 비평적 태도, 더 나아가 우리 문학사를 반성하는 데도 참으로 날카로운 비수가 아닐 수 없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리고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단지 비현실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이성적인 시인은 모든 얼간이들까지도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지독히 슬픈 일이다. 단순 명료한 규칙이나, 신이나 악마가 처방한 성분도 없지만, 이 두 중요한 신사들은 시의 영역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 이 전쟁에서 한 번은 첫째 신사가 이기고, 그 다음에는 두 번째 신사가 이기지만 시 자체는 결코 지지 않는다.”


그런데 네루다의 정치적 측면과 현실적 실천을 중요시하면 할수록 그가 내뿜었던 ‘사랑의 시’가 더욱 새로워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이 경향이 초창기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네루다와 늘 함께 했던 한결같은 주제가 사랑이었다. 모든 작품에서 사랑의 정취가 살아 숨쉬기에 누군가 ‘서양에서의 마지막 위대한 사랑의 시인’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던가. 물론 네루다의 사랑을 육감적인 사람과 교감으로서의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사랑, 우주에 대한 사랑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민중, 연애와 혁명이 하나라는 그런 혼종과 융합이 네루다의 본질적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새삼 우리의 시인 가운데 그래도 누가 네루다를 닮았을까 했을 때 이상화가 가장 먼저 달려온다. 아마도 「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침실로」를 내치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만 몰고 갔던 나의 획일성과 편향성을 네루다는 들추어낸다. 왜 「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함께 묶지 못하고 편 가르듯 어느 하나에 집착하고 강박하려 했던가? 침실과 들판이야말로 네루다 식으로 똑같이 생명의 밭인 것을…….

그리고 그렇게 다시 만난 네루다가 최후로 나를 이끄는 것은 거대한 자연의 뿌리였다. “나는 갑자기 이상한, 억누를 수 없는 힘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산의 향기였다. 어린 시절 항상 나를 감싸주었던, 그러나 도시의 소란 속에서 잊어버렸던 들판의 냄새, 식물의 냄새였다. 나는 흙의 자장가에 파묻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산의 향기, 들판의 냄새, 식물의 냄새, 흙의 자장가로 지칭되는 자연이야말로 그의 모든 시가 언어로 활성화한 ‘메타포’이며, 생명 자체의 움직임을 함축하는 ‘이미지’이며, 인간적 삶을 지향케 하는 ‘서사’이다. 하여 두 권의 자서전을 다 읽자 다시 맨 앞 장으로 나를 돌려놓는다. <추억>의 첫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치 마지막 장면처럼.


“화산들 아래로 눈덮인 봉우리를 인 산 기슭에, 거대한 호수를 끼고 향기를 피어 올리며 정적이 깃들어 있는 칠레의 산림……. 내 발은 죽은 나뭇잎더미에 빠져들고, 잔가지들이 바스락거린다. 거대한 라울리 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고, 새 한 마리가 숲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머리 위로 난다. 날개를 퍼득이며 햇빛이 미치지 못하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제 은신처에서 오보에처럼 노래를 부른다.(중략)

보이지 않는 새의 찌르는 듯한 울음소리가 정적을 가른다. 식물 세계는 땅의 음악을 온통 휘저어 올리는 폭풍이 닥칠 때까지 부스럭거리며 침묵을 지킨다.

칠레의 산림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행성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풍경에서, 그 진흙탕에서, 그 침묵에서 솟아나와 세계를 누비며 노래하였다.”


“나는 내가 태어난 그 땅처럼 뻗어 나가려고 몸부림치며 나 자신이 되어야만 했다”라고 했던 네루다. 땅과 삶과 문학을 하나로 살아낸 그이기에 저 자연처럼 이리도 가깝게 나를 또다시 찾아오나 보다. 아니 나도 모르게 그를 찾아가는가 보다.


임규찬∙전남 보성 출생.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평론집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저서 <한국 근대소설의 이념과 체계>, 편역서 <일본 프로문학과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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