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4호(2009/여름)/흐름진단/소설/SF적 상상력의 실상/이경재
페이지 정보

본문
|흐름․진단/소설|
SF적 상상력의 실상
이경재|문학평론가
∙조현,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현대문학≫, 2009년 1월호)
∙서유미,「저건 사람도 아니다」(≪창작과 비평≫, 2009년 봄호)
∙김중혁,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창작과 비평≫, 2009년 봄호)
1. 장르문학과의 교섭
본격문학에 미달되는 것으로 게토(ghetto)화 되었던 장르문학이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있다. 장르문학은 추리소설, 판타지, SF 등과 같이 각각의 장르마다 창작자와 수용자가 직관적으로 공유하는 일련의 관습들(conventions)과 규약들(protocols)로 이루어진 서사양식을 말한다. 장르문학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현실을 직접 반영하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장르의 세계, 또는 그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작품들 전체를 자기반영적으로 비추어 보인다. 2000년대 한국 소설계에서는 장르문학 중에서도 SF적인 장치와 상상력이 여러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장르문학적인 특징이 소설에 활용된다는 것이 작품의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여러 사람의 논의가 보여주듯이, 장르문학의 여러 자원들을 활용하여 얼마나 새롭고 의미 있는 작품을 창조해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장르문학이냐 본격문학이냐’가 아니라 ‘좋은 문학이냐 나쁜 문학이냐’이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소설들(「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현대문학≫, 2009년 1월), 「저건 사람도 아니다」(≪창작과 비평≫, 2009년 봄호),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창작과 비평≫, 2009년 봄호))는 정통 SF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은 SF소설과 여러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과학적 사실이나 미래의 풍경을 소설의 핵심적인 요소로 차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소외와 낯설게 하기를 특장으로 갖는 반리얼리즘적 허구 서사물’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점 이외에도 이들 작품은 각기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의 비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SF적 의장을 활용하기도 하고(「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 ‘지금-여기’의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내기 위해 SF적 소재를 끌어오기도 하며(「저건 사람도 아니다」),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SF적 분위기와 동거하기도(「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품이 발본적인 지점에서 우리네 삶과 세계를 돌아보게 하며, 또 다른 사유와 감각의 영역으로 우리를 개방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은 SF 장르와의 접촉과 교섭이 우리 문학에 가져올 수 있는 축복임에 분명하다.
2. SF를 건너는 법, 혹은 조현
조현은 한국문학사에서 이례적으로 등단작부터 SF와 깊은 친연성을 보여주었다. ≪판타스틱≫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2008년 신춘문예 당선작인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냅킨, 혹은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 ‘Ⅳ.Death by Water’에 대한 한 해석」을 두고 “순문학을 중시하는 신춘문예에서 SF를 선정하다니!”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등단작을 포함해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이 SF라고 단정지을 만큼 ‘과학적 사실과 예언적 비전이 융합된 매력적인 로맨스’라는 고전적인 정의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의 작품이 SF적 분위기와 장치를 즐겨 활용한다고 볼 수 있지만, 보통의 SF들이 갖게 마련인 역동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대신 대단히 본질적이고 역사적인 사유를 서술자가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특징을 보인다.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은 이러한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도 “22세기식 하이쿠”(173), “서기 22세기, 좁아터진 지구를 떠나 처음으로 유로파를 개발하는 선발대의 고단함과 슬픔을 시로 노래한 시인 아이옌선더의 시어”(188)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를 펼치는데 필요한 대상으로 언급될 뿐이지, 그러한 시공이 서사 전개의 배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현은 ‘생의 얼룩’과 ‘로르샤흐테스트의 얼룩’을 대비시키면서, 인생의 비의秘義와 그것을 향한 열망을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검사를 받고 있는 서술자가 검사자인 ‘너’에게 하는 독백으로 되어 있는 서술방식은 작가의 주제의식을 전면화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이 때 검사자 ‘너’는 로르샤흐테스트를 신봉하는 자이고, 서술자인 ‘나’는 로르샤흐테스트와는 반대되는 세계를 확신하는 자이다. ‘너’에게 로르샤흐테스트에서 잉크무늬가 인간의 심리 상태를 판별하고 구별 짓는 하나의 기호라면, ‘나’에게 생의 얼룩이란 한 인간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이고 “삼매의 자각”(175)을 가능케 하는 작은 틈새이다.
똑같은 얼룩에서 ‘너’가 이성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읽어낸다면, ‘나’는 시로서만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의 비의를 체험한다. ‘너’는 근대의 인식론적 구조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환자와 의사라는 이분법적 편견”(186)에 빠져, “자신의 시대가 보편적으로 인정한 과학적 패러다임만을 절대진리라고 생각하는”(186) 사람이다. 그에 반해 ‘나’는 근대적 표상체계를 벗어나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나’는 ‘너’에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고귀한 목표에 대해 깨우”(175)쳐주기 위해 심리상담실에 온 것이다.
‘생의 얼룩’이란 “옆집 고양이의 죽음이나 잃어버린 구슬, 혹은 부모의 이혼”(177)처럼 “인정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177) 하는 것들이다. 그러한 얼룩들을 통해 “신비로운 꿈이 찾아”(177)온다. ‘나’는 어린 시절 얼룩이라 할 수 있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순간 처음으로 신비로운 빛을 본다. 그 이후로도 신비로운 일들을 연이어 체험하는데, 정신병리학자들에 의해서는 “환영이나 트라우마 혹은 신경해리”(177)라고 불리워질 만한 일들이, ‘나’에게는 “자신의 심연”(179)과 세계의 비의가 드러나는 경험일 뿐이다.
얼룩을 통해 ‘나’가 깨달은 것은 온 세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적 상상력에 맞닿아 있다. 군대의 수목원에서 신비로운 순간을 체험했을 때의 깨달음이 대표적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정원 안에 있는 여러 나무들이 되어 그들의 존재감으로 우주를 바라볼 수 있었지. 하여 나는 정말 신비로운 우주의 비밀을 깨달았어. 모든 생명은 길거나 짧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질기거나 연약하거나에 관계없이 하나의 ‘촘촘한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말이야.(181)
‘나’의 깨달음이란 “우주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의 연결감’”(182)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체험은 만물의 교감을 강조한 상징주의 시인 랭보가 말한 견자見者의 체험과도 연결된다. 랭보는 “‘시인’은 모든 감각기관에 걸친 광대무변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착란에 의해 견자가 됩니다.”(185)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와 존재의 비의에 다가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생애에 걸쳐 각성하고 또다시 윤회하는”(185) 이유이기도 하다. 말을 바꾸자면 “수없이 윤회하는 것은 시학에 대한 영원한 탐구”(187)이다.
그렇다면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나’의 깨달음은 “진리 그 자체는 언어 이전의 존재이므로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는 화엄경의 법신사상처럼, 언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최대한 세삼하게 그때의 경험을 묘사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인간의 언어란 정말 부실하기 짝이 없어 좀 난감하긴 해.”(183)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시詩와 시학詩學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설명조의 서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은유가 필요한”(183) 것이고, “애절한 은유”(187)는 “생의 얼룩을 건너 존재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187)게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작가의 문학관으로 읽히기도 한다. 조현에게 소설이란 ‘애절한 은유’이며, 그것은 독자를 ‘존재의 본질’에 이르게 해준다.
「생의 얼룩을 건너는 법, 혹은 시학」은 개체성의 단단한 허구적 틀을 깨뜨리고, 독자를 탈존에 대한 사유로 이끈다. 이를 통해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각과 감수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 작품은 SF적인 클리셰와 상상력이 긍정적으로 활용된 사례라 볼 수 있다.
3. 이건 SF가 아니다
서유미의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서 인조인간이라는 환상적인 소재는 곧바로 알레고리적 기호로서 환원되어 버린다. 그로 인해 SF적인 인식의 전환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확고한 관점을 보여주게 된다. 서유미가 인조인간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기계가 되어야만 견뎌낼 수 있는 현실의 가혹함 혹은 폭력성이다.
싱글맘인 ‘나’는 양육과 회사일로 정신이 없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데, 직장에는 그녀의 조바심을 자극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특히 통합디자인팀의 팀장으로 거론되는 홍은 체력과 능력, 카리스마까지 갖춘 인간이다. 가정과 회사 양쪽으로부터 궁지에 몰린 ‘나’는 결국 ‘로봇’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이 싸이보그는 “기계라기보다 분신의 개념에 가깝다”(140)고 할 정도로 ‘나’와 유사하다.
‘나’는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내가 아닌 ‘어떤 것’”(142)을 처음에는 가사 도우미로 사용한다. ‘그것’은 주부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아이디어 회의와 업무분담이 있는 날에 ‘나’는 몸살까지 걸리고, 대신 로봇을 회사에 보낸다. 사고만 치지 않기를 기원하지만, ‘그것’은 ‘나’를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그것’ 대신 다시 출근했을 때, ‘나’는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능력을 발휘해서 어쩔 수 없이 로봇을 계속해서 출근시킨다. ‘나’는 “유배지에 와 있는 죄인처럼 회사에 복직할 날만 기다”(148)리는 상황에 처한다. ‘나’가 직접 회사에 나갔을 때는 홍이 “마치 교대할 시간을 줄 테니 ‘그것’을 데려오라는 은밀한 주문”(148)처럼, “일찍 들어가서 쉬고 내일 제대로 마무리해줘요.”(148)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회사에서 활동하는 ‘나’와 집안일을 하는 ‘그것’은, 집안일을 하는 ‘나’와 회사에서 활동하는 ‘그것’으로 위치가 역전되어 버린다.
전남편이 재혼하는 날, ‘나’는 ‘그것’을 자기 대신 아이와 함께 결혼식장에 보낸다. 이제는 아이조차 엄마와 ‘그것’이 다르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회사에 갈 수도 없”(150)게 된 ‘나’는 가정에서도 아이의 사랑을 독점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회사와 가정 모두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결혼식장에 따라가고 몰래 숨어서 결혼식을 지켜본다. ‘그것’은 “전 남편의 결혼식에”(151) 가서도, 그런대로 무난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전남편마저 ‘그것’의 행동이 “나답지 않다는 걸”(151)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완전한 무력감에 빠져 직장을 빠져나왔을 때,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의 “홍과 똑같은 홍”(151)과 마주친 것이다.
여자는 어디를 보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거리를 좁혀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군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지? 생각하는데 나를 발견한 여자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그리고 존재를 감추려는 듯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여자가 허둥대며 내 옆을 지나갈 때 누구인지 떠올랐다. 반쯤 지워진 얼굴로 걸어가는 여자는 바로, 홍과 똑같은 홍이었다.(151)
사이보그인 ‘그것’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은 ‘나’만이 아니라 ‘에너자이저’, ‘워커홀릭’, ‘슈퍼히어로’로 불리는 홍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은 특수한 상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서사는 ‘인간이 된 사이보그 이야기’이지만, 진정한 서사는 ‘사이보그가 된 인간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로봇(기계)이 되지 않고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마저 유지할 수 없는 현대인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서유미의 「저건 사람도 아니다」는 사이보그라는 SF적인 소재를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인간이 처한 상황과 추구하는 가치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본래 “SF적인 바깥의 시선은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발을 뺄 수 없는 인간적인 현실과 실존적인 가치들, 그 안에서 본 시선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방점은 ‘불편하게’에 놓여야 한다. 불편함이야말로 인간과 현실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서유미의 소설은 ‘불편함’을 거느리지 못하고 있다. 너무나도 능수능란한 소설적 솜씨 속에서 독자는 편안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러한 편안함은 다루는 대상(인간의 소외)과 다루는 방법(분신의 출현)의 익숙함에서도 기인한다.
4. 우주에서 피우는 담배
김중혁의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는 이 계절에 발표된 작품 중에서 SF 장르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다. 핵심은 산문적인 설명으로는 쉽게 환원될 수 없는 종말의 분위기에 있다. 그리하여 “행성의 룰은 되돌아오는 것이지만 우주의 룰은 떠도는 것이니까”(109), “물건들은 행성처럼 떠 있었다”(132), “2021394194도 하나의 별이 되어 허공에 떠 있었다”(133)와 같은 몇몇 구절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가 서정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 작품에서 SF적인 특징은 시종일관 묵시록적인 분위기의 창출과 관련되어 있다.
2021년이 배경인 이 작품은 소멸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다. 소설의 스토리 시간은 전부 6시간이다. 작품의 주인공 ‘그’는 킬러이고, 그의 이름은 처음 2021394200이다. 앞의 2021은 연도를 의미하고, 뒤의 394200은 앞으로 살아 있을 시간을 의미한다. 손목시계에 새겨져 있는 그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1씩 작은 숫자가 된다. 그는 길가의 식당에서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만난다. 여자애의 손목시계는 그 아이에게 남은 시간이 100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가리키고 있다. 작품은 계속해서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는 숫자를 환기시킨다. 2021394200이 2021394199로, 2021394199가 2021394198로, 마지막에는 2021394194까지 줄어드는 매순간을 또렷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을 감싸고 있는 소멸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이러한 숫자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계속해서 줄어드는 특성을 통해 소멸을 구체적으로 환기시킨다. 둘째는 인간을 숫자로 나타냄으로써, 통제 받는 획일화 된 사회의 상징적 기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숫자는 “메갈로씨티의 라이프 컨트롤 쎈터”(123)라는 기관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라지고자 하는 열망에 들려 있다. 주인공 그는 블랙홀 체험관에 가는 것을 즐긴다. 그곳에서 느끼는 오르가즘에 가까운 쾌감을 “거기엔 모든 게 있거든.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내 눈엔 별의별 것들이 다 보여. 죽음, 우주, 별, 탄생, 혼돈, 살인, 심지어 섹스하는 사람들까지 보여. 아니 섹스하고 있는 내가 보여.”(113)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블랙홀이란 빛조차도 사라져버린다는 가설적 천체를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욕망에 해당하는 타나토노스(Thanatos)의 우주적 형상이다.
또한 이 작품을 지배하는 죽음과 파괴의 욕망에 걸맞게 사내의 직업은 킬러이다. 그는 죽는다는 것을 “그냥 줌아웃되는 걸 거예요. 아득히 멀어지는 거죠. 고통스럽지는 않고, 그저 모든 게 멀게 느껴지는”(119) 것이라며 낭만화한다. 사람을 죽이는 방식도 그가 생각하는 죽음의 정의에 부합된다. 그가 사용하는 담배 폭약은 그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창밖으로 밀어낸 후 폭발하여, 모든 것을 “아주 높이, 우주에 닿을 정도로 높이 솟구쳐 오르게”(120) 한다. 나아가 그는 “단 한점의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소멸해가는 것”(121)을 원한다. 이것 역시 블랙홀 체험관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욕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와의 무조건적인 동행을 원하는 여자아이 역시 소멸에의 욕망에 들려 있다. 여자애는 100시간도 못 되는 지구에서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 폭죽을 터뜨려 자신을 우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작품의 마지막은 모두의 소망이 충족되는 것으로 끝난다. 청부살해에 실패한 그는 다음의 인용에서처럼 담배 폭약의 폭발과 함께 우주로 솟구쳐 오른다. 멋지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흔들렸다. 밝아졌다. 창밖에서 누군가가 거대한 진공청소기를 들고 있는 것처럼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이 창밖으로 빨려나갔다. (중략) 2021394194는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고요한 순간이었다. 물건들은 행성처럼 떠 있었다. 2021394194도 하나의 별이 되어 허공에 떠 있었다. (중략) 2차 폭발이 시작되고 거대한 폭발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미사일이 발사되는 순간 같았다. 허공에 떠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위로 솟구쳐 올랐다. 별들은 폭죽이 되어 우주로 발사됐다. 폭발음도 별들과 함께 위로 솟구쳤다. 폭발음을 들으면서 2021394194는 자신이 가게 될 우주를 생각했다.(132-133)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등에서도 빈번하게 보이는 우주적 상상력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지하다시피 ‘가족’이나 ‘우주’에 집중하는 현상은 2000년대 소설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 때의 가족과 우주는 각각 상상계와 실재계로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중혁의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를 읽고 지극히 멀고 추상적인 우주, 종말의 감각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이 곳의 사회나 현실에 대한 실감은 어렴풋하다. 그 어렴풋함 속에서 잃어버린 공공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가치의 가능성을 발견해내는 것이야말로 독자의 임무겠지만, 먼저 그 어렴풋함을 좀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도 작가의 임무임에 분명하다.
이경재∙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현대소설의 구조와 미학'(공저). '어문학 연구의 넓이와 깊이'(공저).
추천0
- 이전글34호(2009/여름)/흐름진단/시/ 시인들의 자화상/진순애 09.12.20
- 다음글34호(2009/여름)/초점/파리와 경성, 그리고 시/조재룡 09.12.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