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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흐름진단/시/ 시인들의 자화상/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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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진단/시|
시인들의 자화상
진순애|문학평론가
∙강우식, 「사랑의 문장」(≪시와시학≫, 2009. 봄호)
∙허형만, 「겨울 아침」(≪미네르바≫, 2009. 봄호)
∙나태주, 「기찻길 옆 오막살이」(≪리토피아≫, 2009. 봄호)
∙최서림, 「입춘 지나」(≪현대시학≫, 2009. 4월호)
∙박종국, 「식물의 색」(≪리토피아≫, 2009. 봄호)
∙서동인, 「꽃이불 속에서」(≪시선≫, 2009. 봄호)
∙장종권, 「뱀과 자유」(≪문학마당≫, 2009. 봄호)
∙이지엽, 「빛과 소금」(≪현대시학≫, 2009. 봄호)
∙최춘희, 「허깨비가 허깨비를」(≪시현실≫, 2009. 봄호)
∙장이지, 「피어싱-mugan.com」(≪시현실≫, 2009. 봄호)
∙안명옥, 「볼펜」(≪문학마당≫, 2009. 봄호)
1. 시와 시인의 자화상
우리는 시에서 그 시인을 만난다. 비록 나무에 대한 혹은 꽃에 대한 시의 얼굴일지라도 시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 시인을 만나게 된다. 때문에 나무, 혹은 꽃에 대한 시보다는 나무의 길을 통해서 혹은 꽃의 길을 통해서 지어진 시의 얼굴에서 그 시인을 만나는 일은 보다 수월하다. 뿐만 아니라 세상사에 대한 야유의 시에서조차 그 시인을 만나는 일은 시를 접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수반된 일이다. 시는 어떠한 길을 통해서 이르렀건, 그 시인의 자화상을 은유한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까닭이다. 곧 시가 주관적인 장르인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와 같은 명제는 ‘왜 시를 쓰는가’라는 시인들의 근본적인, 내지는 시가 탄생한 그 순간의 어떠한 까닭인가에 천착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시를 향한 언어의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중심에는 치유 불가능한 시인의 어떤 상처가 웅크리고 있거나, 시류에서 단절된 자로서의 고독이 웅크리고 있거나, 합일되지 못한 어떤 것을 향한 상실의 공허가 웅크리고 있어서, 그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혹은 참을 필요 없이 풀어내는 것이리라.
시보다는 시인이 부상하는 일은 시 읽기의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일이겠으나, 대면하지 못한 시인을 만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기쁨임에 틀림없다. 또한 시보다는 시인을 만나는 시 읽기란, 시간이 가져온 시인과의 관계이자 그 시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이는 시로 사는 삶, 시로 사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만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삶의 기쁨과 슬픔으로 직조된 시인들의 자화상이 전면에 부각하는 시의 시절에는 은폐된 시의 새로움, 언어의 새로움, 발현의 새로움이 자못 날개 꺾인 시의 시절을 은유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로 날개 단 시의 시절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시인이 많아서 시가 많고 시가 많아서 시의 시절이 된 최근 시단의 시는 섬세하고도 세밀하게 ‘추억에서, 자연에서, 일상에서, 치욕에서’ 남모를 동굴의 언어를 길어올리고 있다. 결핍을 메우려는 내밀한 행보이리라.
2. 추억에서
눈이 내린다.
비틀비틀
초서체로
그가 온다.
후들후들
다리가 떨리도록
초서체로
그가 온다.
초서체로
미끄러지며
눈길 위로
그 사내가 온다.
무슨 글자인지
왜 오는지 모르게
초서체로 오다
눈은
내 집 앞에서
그친다.
―강우식, 「사랑의 문장」 전문(≪시와시학≫, 2009. 봄호)
‘비틀비틀, 후들후들, 미끄러지며 초서체’로 오는 ‘그 사내’의 발걸음이 ‘내 집 앞’에서 멈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므로, 「사랑의 문장」은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슬픔을 그 슬픔을 감춘 채 노래하고 있어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내 집 앞’에서 멈추는 발걸음은 ‘그 사내’의 발걸음이 아니라, ‘내 집 앞’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평등하게 내려주는 ‘눈의 발걸음’일 뿐인 까닭이다. 「사랑의 문장」은 가버린 사랑의 추억에 잠겨서 초서체로 오는 눈의 발걸음으로나마 위안을 삼고 있는 시인의 상실의 자화상을 은유한다.
회창회창 흔들리는 휘추리에서
아직 덜 녹은 눈이 호시를 탄다
나뭇가지마다 포르르 햇살 내려앉아
꽃눈, 잎눈의 눈자리에 호호 입김을 불어준다
참으로 서늘하고 평화로운 겨울 아침
지금쯤 내 고향 순천만 와온 앞바다에서는
흰 거품 일으키며 물갈기 밀려오것다
두고 온 사랑 하나 메밀꽃 일어 강그러지것다
―허형만, 「겨울 아침」 전문(≪미네르바≫, 2009. 봄호)
떠나온 고향 앞 바다의 겨울 아침은 비록 몹시 혹독한 추위 속일지라도 ‘평화로운 겨울’로 우리들 마음속에 근원으로 자리하듯이, 시인의 고향인 순천만 와온 앞바다의 겨울 아침도 그러한 겨울로 시인의 마음속에서 영원하다. 겨울 아침의 고향 앞바다는 평화로움을 넘어서 ‘두고 온 사랑 하나’로 영원히 사는 고향인 것이다. 고향이 있어서 시인이 살고 시인의 사랑이 영원하며, 나아가 시인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고향의 「겨울 아침」은 시인의 쓸쓸한 타향살이를 은유한다.
기차가 지나갈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차소리에 들썩이곤 했을
기찻길 옆 오막살이
내가 어렸을 때 저 집에도 나만큼
어린 나이의 계집애 하나 살고 있었을까
뽀오옥 휘어진 기차소리에 나이 어린 계집애의
단발머리도 날리곤 했을까
지금은 기찻길조차 바뀌어 기차도
다니지 않는 장항선 종착역 부근
녹슨 기찻길 옆 그 오막살이.
―나태주, 「기찻길 옆 오막살이」 일부(≪리토피아≫, 2009. 봄호)
사랑과 고향이 있어서 시가 있듯이 추억이 있어서 시가 살고 시의 고향이 존재한다. ‘기차소리에 하루에도 몇 번씩 들썩이곤 했을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스치며 달리는 기차를 타 본 추억이 부재하는 고령의 시인이란 매우 낯선 존재일 것이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는 단지 기차를 타 본 우리의 기억을 환기하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휘어진 기차소리에 나이 어린 계집애의 단발머리도 날리곤 했을’ 유년으로 우리를 유인한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지금은 다니지 않는 녹슨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영원히 살게 하며, 추억의 순수를 그리는 시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은유하고 있다.
3. 자연에서
새소리에 물이 올랐다
족제비털 같은 햇살이 가파른 비탈을 쓰다듬고 있다
노인들이 새처럼 먹이를 쪼아 먹고 있다
방울새처럼 해종일 재재거린다
너덜너덜해진 마음, 三冬을 버텨낸 산새 소리가 기워주고 있다
獨房 같은 몸속에서 말의 씨알들이 꿈틀꿈틀 아프게 깨어나고 있다
―최서림, 「입춘 지나」 전문(≪현대시학≫, 2009. 4월호)
입춘에 이르기까지 지난 겨울을 독방 같은 고독의 어둠 속에서 지낸 시인이 고독의 언어를 ‘꿈틀꿈틀’ 발현하고 있다. ‘노인들이 새처럼 먹이를 쪼아 먹으며, 하루 종일 방울새처럼 재재거리며 오는 봄의 풍경’은 ‘너덜너덜해진 마음, 삼동을 버텨낸 산새 소리가 기워주는’ 치유의 풍경과 합일하며, 고독한 ‘말의 씨알’들을 깨어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빛과 어둠으로 순환하는 이율배반의 자연의 원리는 시인의 그리고 우리의 독방 같은 삼동의 고독을 견디게 하는 근원적 힘인 것이다. 때문에 시인의 고독은 삼동 같은 자연의 고독과 다르지 않다.
녹색이다
하늘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뿌리 깊은
나무의 색이다
사막 한 가운데서는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에게 선택되어 부활할 수 있는 낙원의 색이다
비인간적이다
혐오하는 뱀이나 도마뱀 또는
공포를 불어 넣는 용이나 동화 속의 개구리 왕자나
괴물들의 피부를 사람들이 상상하는 색이다
태양 에너지를 피부로 곧장 흡수하는
변온동물 피부의 색이다
왜 그럴까
식물의 색은 영혼의 사낭꾼,
사랑의 색인 仁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박종국, 「식물의 색」 일부(≪리토피아≫, 2009. 봄호)
‘식물의 색은 영혼의 사냥꾼이자 사랑의 색인 仁’이라서 ‘낙원의 색’이면서도 ‘비인간적’이고, ‘변온동물 피부의 색’이기도 하다고, ‘식물의 색’을 지시하는 시인의 내면에는 ‘부재중인 인仁’을 향한 그리움이 잠자고 있으리라. 색도 없고 형태도 없어서 잡을 수도 없는 사랑의 색이 ‘녹색’이자 ‘인의 색’이라는 지시에는 식물과 사람과 만물을 향한 시인의 사랑과 그를 향한 시인의 동경이 동반된 까닭이다. ‘仁이자 영혼의 사냥꾼’인 ‘식물의 색’을 은유하는 「식물의 색」은 동시에 그를 향한 시인의 그리움을 은유한다. 그리운 행보가 찾은 시인의 사랑의 자화상이다.
서울의 아침 안개는
네온사인 밤새도록 빨아들인
한강이 짜낸 꽃이불이다
출근길 잠시 흐려진다고
경적 울리지 말자 더 환하게 웃자
신혼방 이불 속 신음소리
환희를 동반하지 않는가
서울의 아침 안개는
더 이상 안개가 아니다
재개발 구역 막다른 골목까지
숨이 차도록 피어난 안개꽃
우리들이 수놓은 꽃이불이다
―서동인, 「꽃이불 속에서」 전문(≪시선≫, 2009. 봄호)
‘재개발 구역 막다른 골목집’의 이불 속에서 ‘네온사인 밤새도록 빨아들인 한강이 짜낸 서울의 꽃이불’을 ‘신혼방의 꽃이불’에 비유하여 야유하는 것은 ‘재개발 구역 막다른 골목집의 이불 속의 삶’일지라도 ‘신혼의 꽃이불’과 같은 환희의 삶이어야 한다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향한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서울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는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도시의 밤은 더 이상 ‘신혼의 밤’과 같은 환희의 밤도 아닌 채, 단지 ‘재개발의 환희’로 채색된 문명적 자본의 밤이라는 역설이 ‘꽃이불’을 꿈꾸는 시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은유한다. 한강의 기적은 한강의 안개꽃조차 잃어버린 파괴된 기적이라고 비판하는 외로운 자화상이다.
4. 일상에서
비행기는 땅으로 달리지 못한다
기차는 철로를 벗어날 수 없다
버스는 골목길로 달릴 수 없다
유람선은 물길을 떠나지 못한다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아름다움도
기찻길 옆 추억 같은 오막살이집도
고속도로의 빛나는 속도도
그리고 끼리끼리의 오붓한 공간도
골목길에서는 만날 수 없다
논둑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몸 하나 겨우 빠져나갈만한 숲속
오솔길에서 뱀처럼 나는 자유롭다
―장종권, 「뱀과 자유」 전문(≪문학마당≫, 2009. 봄호)
자유를 꿈꾸는 시인은 ‘몸 하나 겨우 빠져나갈만한 숲속 오솔길’에서야 자유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유는 비행기를 타고도, 기차를 타고도, 버스를 타고도, 유람선을 타고도 불가능하며,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에서, 기찻길 옆 추억에서, 빛나는 속도에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골목길에서, 논둑길에서 ‘보고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몸 하나 겨울 빠져나갈만한 길에서도 자유로운 뱀’처럼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전언이다. 이는 가시의 세계에서는 자유에 이를 수 없다는 역설이자 자유 혹은 진정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는 역설이다. 허위의 삶에서 외로워진 시인의 자화상이자 깨달음의 세계를 은유하는 「뱀과 자유」이다.
말의 오해가 안개처럼 밀려올 때
불신의 눈초리가 칼날처럼 위태로울 때
어둠의 깊이가 허공처럼 아득할 때
희망의 날개가 연필심처럼 뚝 부러졌을 때
오해가 불신을 낳고
불신이 어둠을 낳고
어둠이 절망을 낳아 겨울로 가는 길목
쓸쓸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 꿋꿋한 등불,
빛이 되기 원합니다.
유혹의 입술이 과즙처럼 목젖을 촉촉이 적실 때
도둑의 은밀함이 그믐밤처럼 발소리 낮출 때
거짓의 꾸밈이 장미꽃처럼 붉어질 때
아니다 아니다 푸른 의지들이 흙먼지처럼 흩어질 때
유혹이 도둑을 낳고
도둑이 거짓을 낳고
거짓이 부패를 낳아 무덤으로 가는 도시
정갈한 식탁에 놓인 뜨거운 참회의 한 종지 눈물,
소금되기 원합니다.
―이지엽, 「빛과 소금」 전문(≪현대시학≫, 2009. 봄호)
우리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하고, ‘무엇인가 있기’를 원하면서 늘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상례이리라. 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삶이란 이미 초월적 경지에 이른 세속의 삶을 벗어난 단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의 다른 말은 꿈이기도 하듯이 그 꿈의 하나가 ‘빛과 소금 되기’라는 이지엽의 꿈은 세속의 고독에서 비롯된다. 오해와 불신과 부러져버린 희망이 낳은 어둠과 허위의 삶에서 꾸는 꿈이 ‘쓸쓸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 꿋꿋한 등불 되기’이며, ‘정갈한 식탁에 놓인 뜨거운 참회의 한 종지 눈물인 소금되기’라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통한 구원의 꿈꾸기와 외로운 시인의 자화상을 「빛과 소금」이 은유한다.
멀쩡한 낯짝으로 바쁘게 걸어 다녀도 저것들은
다 헛것이다
어둠 저 귀퉁이에 숨어 있다가
불빛 아래 모여드는 하루살이 떼처럼
은전 몇 푼에 구세주를 팔 듯
하루치 황금 몰약을 위해 육신을 던져버린
유다의 무리들
허깨비가 허깨비를 끌어안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회사에 가고
옷을 걸치고 걸어 다녀도
어디에도 없는 거짓 실체
지하 동굴에 무릎 꿇고 엎드려
허깨비 천국을 경배하며
보이지 않는 구원을 향해
두 손 높이 들어 올린다
―최춘희, 「허깨비가 허깨비를」 전문(≪시현실≫, 2009. 봄호)
실체 혹은 진실과 거짓인 허깨비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구원’을 향해 ‘두 손 높이 들어 올리는’ 일은 시인의 고독한 자화상을 은유한다. ‘멀쩡한 낯짝으로 바쁘게 걸어다녀도 다 헛것’들 사이에서 헛것 아닌 실체를 꿈꾸는 일은 역설적으로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실현 가능성이 불가함을 은유하고 있어서 허깨비들 사이에서 홀로된 시인의 고독이 보다 심화된다. 보이는 것들은 허깨비들이며 보이지 않는 것 속에서의 구원은 그 실현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하 동굴 같은 일상이므로, 시인의 고독이 깊어간다.
5. 치욕에서
폭설이 더끔더끔 내려앉는다.
천국으로 가는 무한대의 흰 시간이
어둠 속에서 자욱하다.
고가철도 아래를 미끄러질 듯 위태하게
초라한 사내가 지나간다.
난방장치가 돌기를 멈춘 방에서
폐인5호는 하늘의 강림을 덤덤히 지키고 있는
황량한 네온등을 내려다본다.
mugan.com에 딸기소녀가 입장한다.
아빠는외로워가 입장한다.
시쓰는치욕이 입장한다.
:지구는국경이지워지느라고눈보라가지천이네요.
:보이는국경만이지워지고있는걸요. 전언제나외로워요.
:이런시대에시쓰는건부끄러운일이죠.
―장이지, 「피어싱-mugan.com」 일부(≪시현실≫, 2009. 봄호)
‘딸기소녀가 입장하고, 아빠는외로워가 입장하고, 시쓰는치욕이 입장하는’ ‘mugan.com’에 우리 모두 클릭해 봐야 한다고 시는 유혹한다. ‘딸기소녀는 그냥 입장하고, 아빠는 외로워서 입장하고, 시인은 치욕적이어서 입장’하는데, ‘아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 ‘저도 언제나 외로운 이런 시대에 시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피어싱’은 시인의 외로운 자화상에 대한 ‘피어싱’이자 ‘시의 효용론에 대한 자조적 피어싱’이다. 어느 시절에나 ‘고가철도 아래를 미끄러질 듯 위태하게 초라한 사내가 지나가는’ 일은 있었고, ‘난방장치가 돌기를 멈춘 방’의 풍경도 있었다. 그에 따르듯이 ‘시의 무용론’ 내지는 ‘효용론’도 있어왔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시의 효용에 대한 자괴적인 시인들의 자화상은 계속되리라.
구멍에서 나와 쓴다
어쩔 수 없이 밀려나온 세상
쓴다는 것이 나의 일상
똥을 누며
기를 쓰며, 쓴다
사랑을 쓰다가
떠나야 할 때를 놓쳐버린
사람에 대해 쓰다가
한번 깨지면 붙일 수 없는 유리컵을 쓰다가
억울하다고 쓰다가
사주팔자에 대해 쓰다가
차면 기우는 달에 대해 쓰다가
이런 세상 살아야 하나,라고 쓰다가
무거운 상징처럼 자꾸 묻어나는
똥을 닦아내고
―안명옥, 「볼펜」 일부(≪문학마당≫, 2009. 봄호)
‘기를 쓰며 쓰는 것이 나의 일상’이라는 자조적인 시인의 자화상이 ‘쓰지 않고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볼펜의 위상’을 통해 은유된다. 볼펜똥이 자꾸 묻어나는 볼펜은 고장난 볼펜이거나 펜을 갈아야 할 시점에 이른 볼펜으로, 사용한 지 오래된 볼펜이라는 사실이다. “구멍에서 나와 쓴다”라는 말에는 다소 외설성이 내재되었으나, “어쩔 수 없이 밀려나온 세상/쓴다는 것이 나의 일상/똥을 누며/기를 쓰며, 쓴다”는 볼펜의 운명은 사실이다. 운명의 무게처럼 ‘사랑, 사주팔자, 달’의 모티프는 ‘오래된 상징’이 되어 외면할 수도 없는 시의 무게로 작용하듯이 「볼펜」은 모든 종류의 무게에 눌린 시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은유한다.
진순애∙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의 모더니티', '아니무스를 위한 변명' 외. 성균관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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