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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서평/갱신更新의 조건들;몸의 ‘자리’와 마음의 ‘방향’/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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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78회 작성일 09-12-20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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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규,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남태식, <내 슬픈 전설의 그 뱀>(리토피아)




갱신更新의 조건들;몸의 ‘자리’와 마음의 ‘방향’

백인덕|시인

1.

상식이 되었지만 신념으로 내면화하기 거북한 것들이 여럿 있다. 그 중에 ‘몸과 마음’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 진화론적 입장에 서면, 몸이 먼저고 마음은 나중이다. 신경세포, 오늘의 신경중추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의식’이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의 ‘뇌’는 기억보다 감각, 감각보다 먼저 운동에 반응한다. 움직임이 먼저고 생각은 나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일반화 하는 것은 물론 여러 오류에 노출되는 것이지만, 바꿔 써보면 참으로 다양한 쓰임새가 드러난다. 생각보다 운동이 먼저라는 것은 우리가 생득적으로 갖게 되는 타자지향 우위를 말한다. 외부의 자극이 없다면 우리의 몸은 반응하지 않을 것이고, 이 자극과 반응이 없었다면 우리의 ‘의식’도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적, 내성적이라는 말은 오랜 기간 환경에 적응해 온 진화의 역사가 응축된 존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조건에서 본다면, 시인이란 존재는 덜 진화된 종족인지도 모른다.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련한 호모 포에티쿠스(?), 혹은 호모 일루셔니스(?). 자기 마음, ‘뇌’가 아니라, 존재의 그림자 같은 ‘마음’에 온전한 ‘나’와 ‘세계’를 각인하겠다는 헛된 꿈의 돌연변이들은 충분히 지성적이다. 지성을 ‘어떤 체계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를 써 먹을 경우에만 그리고 체계를 통과하는 에너지 흐름(이것에는 체계의 감각기관을 통과하는 에너지의 흐름도 포함된다.)을 체계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만 이용하는 경우에만 그 체계는 지성을 갖는다.’고 유물론적으로 정의했을 때, 시인은 입력보다 언제나 출력이 월등히 많은 체계(반폐쇄적 체계: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하나의 ‘지성의 기록’으로 읽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 가해지는 자극과 반응의 밀도와 강도를 살펴본다는 말로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한 작품의 진정한 이해는 작품들이 가 닿은 시적 진실보다 문제의식이 비롯하는 시적 현실에서 출발해야 될 것이다.

2.

이덕규는 노동자, 농민으로서의 외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시의 비의秘儀에 정직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적 비전을 충실하게 그려내는 시인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도 앞의 평가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첫 번째 시집과 비교하여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의 ‘몸의 자리’가 일정한 범주 안에 고정되면서 오히려 ‘마음의 방향’에 대한 사유가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시인은 농부로서의 자신의 외적 현실을 시 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농경은 공간의 제한성으로 인해 쉼 없이 이동하면서 경계를 확장하는 유목적 생활방식보다는 전근대적인 생활방식으로 이해된다. 변화에 대한 적응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 이해는 사회라는 보다 큰 체계에 적용했을 때 유효하게 작동될 뿐, 개개인의 경우에는 공간의 협소성을 극복하는 다양한 전략이 구사될 수 있다. 그가 시인이라면, ‘자아의 세계화’라는 익숙한 정적 방법에 기댈 수도 있고, ‘시간의 공간화’라는 보다 세부적인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시인은 외적 자극에 감각이나 운동이라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기보다는 기억을 통해 ‘의식적’으로 조정하려고 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쟁기질하던 낡은 경운기 한 대가 보습을 흙 속에 박은 채, 밭 가운데 그대로 멈춰 서 있다

평생 흙 위에서 헐떡거리다가

한순간 숨이 멈춰버린 늙은 오입꾼처럼

―「복상사腹上死」 부분

이 부실한 무를 뽑았더니

갈라진 뿌리가 돌을

움켜쥐고 있다 뿌리가 뻗어가는 일

깜박 잊은 채, 돌이

무슨 황금 덩어리인 양

희희낙락 붙어먹고 있다

―「걸림돌」 부분


이덕규가 그려내는 농경의 풍경은 전혀 신성하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씨를 뿌려 생명을 키운다는 근엄함이나 땀 흘린 만큼 소출이 주어진다는 정직의 미덕 따위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풍경들은 해학諧謔적이다 못해 위악僞惡적이기까지 하다. 위악적 태도라는 것은 표면에 진술된 정황의 안쪽, 의미의 배후에 발화자의 진정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낡은 경운기’와 ‘부실한 무’가 등장하는 위의 두 작품은 그런 면에서 시인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낡은 경운기’는 그동안 자신에게 “시달렸던 잡초들”의 반격을 받고 밭 가운데 그대로 멈춰서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늙은 오입꾼’은 “마지막 남은 양기”를 “땅속 깊숙이” 밀어 넣는다. 또한 ‘부실한 무’들은 “뿌리가 뻗어가는 일/깜박 잊은 채” 땅 속에서마저 ‘돌멩이’를 ‘황금’처럼 움켜쥐고 있다. 이처럼 정신 줄을 놓아버린 ‘낡은 경운기’와 ‘부실한 무’가 등장하는 풍경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배어나게 하지만, 시는 끝 연에 이르러 본연적 슬픔의 정서로 전환된다. 우리는 “이 걸림돌을 찾아 날마다/더 깊은 지층을 뚫고 내려가는” 인간 욕망의 헛된 수고를 알 수 있다. 알면서 어쩌지 못할 때 우리의 일생이란 “거기, 한 사내가 이제 막 일을 마친 듯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묵한 눈망울을 굴리다”가게 된다. 우리가 유전자의 노예일 뿐이든 존재로서 무의식의 노예든 생이란 그 자체로 비극의 원천이라는 인식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삶이란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들마다 긍정이나 부정의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에 비극인 것이 아니다.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

리를 듣는 것이다.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부분


달리 이해하자면, 우리의 몸이란 반폐쇄적인 하나의 계에 지나지 않는다. 반폐쇄적이라는 것은 외부를 향해 열려있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외부로부터 에너지, 생명의 동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곧바로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사실이 무의적으로 내면화되어 우리는 ‘밥’을 신성시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저승법보다 무서운 밥!”(「한판 밥을 놀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인은 인식한다. 그렇게 본다면 ‘몸’은 존재 자체이고, 존재는 ‘몸’에 갇힌다. 몸은 존재의 감옥, 하늘 아래, 아니 하늘 너머에 오직 자유로운 것은 ‘시간’ 외에는 없는 것 같다.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망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머나먼 돌멩이」 전문


몸의 자리가 고정, 확정되었을 때 우리는 시간을 공간화 하는 전략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마음의 방향을 자유롭게 풀어놓음으로써 미지와 불가능에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머나먼’이란 ‘수수억 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시간적 개념을 공간화한 것이다. 이러한 공간화는 ‘날 선 돌멩이’가 ‘닳고 닳은 몽돌’로 형태가 변하는 과정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사족이지만, 이덕규는 몸의 자리가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들에서는 비교적 ‘돌’이나 ‘흙’을, 마음의 방향과 관계된 것들에서는 ‘꽃’이나 ‘눈’ 등의 상징을 이용한다. 돌이 견고성과 내구성이란 성질로 인해 지속되는 압력을 의미하고 꽃이 가변성이나 일시성으로 인해 변화를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적합하게 차용된 경우라 볼 수 있다. 이덕규는 ‘투신’이라는 시어를 통해 ‘날 선 돌멩이’에서 ‘닳고 닳은 몽돌’이 되기까지의 변화가 결코 자연적, 무의지적 산물이 아님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의 방향 잡기는 “돌멩이, 숨도 안 쉬고/그 두꺼운 동토의 처녀막을/맹렬히 뚫”(「위대한 체온」)는 사투의 과정이고, “생의 도움닫기 끝에 찍힌”(「오, 새여」) “돌아오지 않는 단순한 문장의 길고 먼 여운”(「마침표를 뽑다」)을 따라가는 의식적 행위이다. 그의 시는, 시 쓰기는 얼마나 유쾌한지, 더불어 얼마나 씁쓸한지 그저 따라가며 지켜볼 일이다.


3.

하이데거의 너무도 유명한 말,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 혹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계적인 언어가 아니라 생각된 언어가 필요하다. 이때 기계적인 언어란 과학적 언어로서 증명, 계산, 추론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시에 한정해서 본다면 진부한, 상투적인, 관습화된 시어나 이미지를 말한다. 이러한 시어들은 ‘생각’을 실어 나를 수 없고, 존재 혹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 반면에 생각된 언어는 존재를 불안케 한다. 외부의 자극에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존재의 배면을 뒤집는다. 이 반응이 평형상태로 돌아가게 될 때, 존재는 숨겨졌던 ‘의미’를 다시 한 번 드러내게 된다.


내 안에 시내 이루고 강 만들고 마침내 바다 되는, 수수만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원천 있다 참혹한 겨울, 봄 햇살로 밀어내고 싹 붕붕 틔워, 한 줄기 두 줄기 산지사방 휘늘어져 늘 푸른 숲 되는 내 원천 낳고 싶다 고달픈 자 병든 자여 수수만 생 살아 숨쉬는 자궁에 들듯 내 원천 숲 오시라, 그대 숨 끊어놓는 거친 바람 내 원천숲 줄기로 갈아끼워 순한 잠 재우리라, 내 안에 맑은 물 시원하게 쏟아내는 폭포같은 원천 있다 허망한,


남태식 시인은 이미 ‘원천’을 가지고 있다. 아니 ‘원천’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거기서는 ‘고달픈 자’, ‘병든 자’도 “자궁에 들듯” 갱신更新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라고 자탄自嘆하는가, 아마도 그 원천이 “순한 잠 재우”는 태내胎內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원천’은 시인이 아직 길어 올리지 못한 싱싱한 언어의 저장고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모태회귀를 갈망하는 도피적 심리의 귀착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마 이를 직감한 시인은 그래서 ‘허망한’이라는 끝 행을 힘주어 붙였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과학에서 생각으로 가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뿐이 없다고 했다. 도약跳躍하는 것이다. 도약이 위험한 이유는 출발점은 명확하지만 착지점을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도약은 등 떠밀려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내적 필연에 따른 자발적 행위라는 점에서 어렵다.


껍데기를 쓴다 껍데기 속에는 집과 아내와 자식이 있다

적으나 숨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껍데기 속에 속을 감춘다

드러내면 새삼 다시 질 너무 큰 짐

드러내면 금새 날아 갈 참 많은 꿈

껍데기를 쓰고서 껍데기 속의 집이 불안하다 불안은 밖이

아니라 집 속에서 더 깊어지고 욕망의 그늘은 잠 속에서

더 짙어지는데

―「껍데기가 불안하다」 부분


시인은 자신의 ‘껍데기’를, 아니면 자신이 ‘껍데기’에 지나지 않음을 뼈저리게 인지하면서도 ‘짐/꿈’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차마 버릴 수 없는/차마 날릴 수 없는’ ‘이중성’에 붙들려 자신을 “뻔뻔한 껍데기”라고 비하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비하는 ‘짐/꿈’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이 진정한 자아를 구현하는 방법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태식 시인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닫힌 문 앞에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사이, 길 가던 비가 슬금 들어와 밤새 안자고 귀를 당긴다. 역 앞 장기 투숙하던 하숙집에서 짐 꾸리는 사이, 문득 꼭꼭 숨겨 잊었던 씨나락 자루 가슴팍 도리며 터진다.”(「사이-2008 망종, 서울」)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남는 문제는 이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허망한’, ‘낯익은’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저 때때로 추락하는 나, 밀어 올리는 건 땅이 아니다 산이 하늘이 아니다 날개 없는 안개, 강이 가볍게 밀어 올리듯 안개, 또 나를 밀어 올린다 한 언덕 넘어서면 다시 한 언덕, 그 숨찬 언덕 넘어서는 건 너와 나 매몰차게 가르는 저 곧은 선의 힘이 아니다 잠 속에서 허둥대며 절뚝일 때마다 왁자하게 몰려오는 저 잿빛 바다, 저 잠의 숲이다

―「안개가 나를 밀어올린다」 전문


남태식 시인은 ‘안개’가 “나를 밀어 올린다”고 의미심장한 고백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발견은 “저 곧은 선의 힘” 결코 생의 추진력이 아니라는 예리한 인식에 의해 뒷받침되기에 더욱 그 의미가 남다르다. 생각의 도약, 도약은 그 자체로 불연속적이다. 그것은 직선이 될 수 없으며 한 번의 시도로 완결될 수 없다. “잠 속에서 허둥대며 절뚝일 때마다” 시인은 ‘도약’이 필요한 시점에 다다랐음을 직감적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 존재를 정위한 이상에는 어차피 ‘몸의 자리’보다 ‘마음의 방향’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혼란과 불안의 와중에서도 필자는 남태식 시인의 ‘원천’이 단순한 회귀처回歸處가 아닌 언어의 무진장 보고寶庫가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백인덕∙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못질>, <오래된 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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