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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서평/‘아비’와 ‘적자’의 ‘신성가족’사는 어떻게 반복되는가?/강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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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71회 작성일 09-12-20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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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 <빨래터>(문이당 2009)

■이대환, <큰돈과 콘돔>(실천문학사 2008)


‘아비’와 ‘적자’의 ‘신성가족’사는 어떻게 반복되는가?

강희철|문학평론가

<빨래터>와 <큰돈과 콘돔>이란 소설을 읽었다. 두 권의 소설을 읽었던 만큼, 두 번의 감동이 일렁였다. 앞의 소설은 근대를 살아야 했던 가난한 서민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네 들의 순박한 삶과 마주하게 해주었고, 뒤의 소설은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탈북을 해야 하는 북한 동포들의 험난한 인생사와 마주하게 해주었다. 내가 잊었던, 모르고 지냈던 경험들을 감동적으로 복원해내는 소설의 힘은 언제나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 소설들이 ‘복원’해낸 감동은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강조한 이미지에 대해 느끼는 ‘개인’만의 강렬한 감각, 푼크툼(punctum)이란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지점에 놓여 있다. 흔한 예를 들어 죽은 부모를 ‘복원’한 사진을 보는 그러한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닌 것이다.

소설은 더구나 사진과 같은 이미지가 아닌 ‘담론’이기에, 소설을 골라 읽는다는 것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어쩌면 대단한 자만일 수도 있게 된다. 이에 대해 라깡의 말을 허락도 없이 왜곡하여 설파하자면, 담론의 시선이 당신을 배제할 것인지 포섭할 것인지를 고르고 있지, 당신의 시선이 담론을 고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경이로움이 선택이 아니라, 내려지는 축복의 문제이듯이.

이것은 독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한 문제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작가는 ‘소설’의 창작자이기는 하되, 적극적인 ‘담론’의 생산자로 볼 수는 없다. 가장 탁월한 담론의 ‘선별’을 하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더라도 그것은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이지, ‘생산’의 문제가 되지 못한다. 만일 작가가 담론의 생산자라면 타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체의 ‘권능’을 지녀야 하나, 전혀 그러하지 못하다.

작가든 독자든, 이 모두는 결국 ‘언어’라는 ‘대타자’의 권능을 경유하지 않고 생산할/읽어낼 것을 갖지 못한다. 여기에서 저자/독자가 어떠한 ‘대타자’의 권능을 경유하는지 살펴보는 지점에서 두 소설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두 소설은 ‘신성가족’사 안에서만 말할 수 있는 독특한 주체의 형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점에서 닮아있다. 이것은 아마 이 두 소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대중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들, 아니 크게 서사를 봉합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이야기의 신성한 ‘주체효과’라 해도 될 것이다. 이 효과의 드라마틱함에 매료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담론의 강력한 힘이라면, 이 ‘효과’의 과정을 의심하는 까다로운 독자/저자가 될 때 그동안 다양하게 소비한 것 같던 취향이 능동적인 소비의 문제만은 아님을 의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항상 우리의 윤리와 실천의 문제를 압도하며 하나의 강령으로 반복되어 오던 오래된 담론, ‘신성가족’사는 진부하지 거듭되는 문제들, 갈등들을 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떠안으며 새롭게 변모한다. 그 진부한 것의 새로움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1. 신성가족, 그 ‘아비’의 ‘적자’들이 들려주는 삶의 운명성:이경자의 <빨래터>

이 세상의 성실한 ‘아비’들은 자신을 닮은 훌륭한 ‘적자’를 생산하기를 꿈꾼다. 이 꿈 안에서 ‘적자’들은 이미 자라나 있다. ‘적자’들은 그런 점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별하다. 이미 자라날 길들이 주어져 있는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자는 아비의 모든 것을 알아보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나 보다. 그런 박수근과 그 아들의 삶을 다룬 이경자의 소설 <빨래터>(문이당, 2009)는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그 능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간다.


누군가 침묵하고 있는 성남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가 이미 박수근의 그림이라는 걸 알아차린 1초에도 못 미치는 순간에서 조금 지난 뒤였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을 보면 기억에도 없는 육친을 느낌으로 알아보듯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중략)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유전자와, 함께 산 세월과, 깊은 경외심의 소관이었다.

―<빨래터> 17~18쪽


오직 가족만이 자신의 가족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그래서 ‘적자’로 가장 ‘아비’의 삶을 충실히 따르게 된 중년의 성남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서사의 흐름이 된다. 하지만 성남의 ‘시선’ 안에서는 박수근의 삶을 제대로 조명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증명하는 전지적인 작가의 목소리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적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화자’의 서술은 본능적으로 아비를 알아본다는 성남보다도 더 ‘적자’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성남의 어린시절을 회고하면서도 화자는 성남 스스로가 어린시절에 알지 못했던, 아비의 따뜻함을 조목조목 친절히 설명한다. 이미 박수근의 삶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는 오고 가는 버스값을 아껴 국화빵이나 엿가락이나 눈깔사탕을 사들고 와서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교과서를 뜯어 붙인 봉지에서 빵과 엿가락을 꺼내 오순도순 먹었다. 한군데 오르르 모여 있는 두셋의 머리를 보면 그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정성을 다해 아이들이 보고 읽을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 「광개토 대왕」, 「김유신 장군」 같은 그림 동화를 만든 것도 그래서였다.

―<빨래터> 111쪽


화자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미리 알고 서술하지만, 어린 시절의 성남은 아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돈을 벌지 않는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는 무능력한 가장으로만 성남의 눈에 비추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비를 닮아가는 오랜 과정으로서의 단순한 인정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누구보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적자’의 인정투쟁은 결국 성공한다. 그러나 곧 실패한다. 아비를 너무나 철저히 닮아서, 자신의 독창성 그만큼 사라져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는 훌륭히 아비를 뛰어넘지 못한 만큼 기존 화단에 자신의 실력을 조망 받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화풍을 충실히 따르는 ‘적자’가 비루한 인물이 되는 것도 너무나 낭만적으로 성남만 조망하는 ‘신성가족’사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적자’의 비루함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가족의 한 ‘타자’는 아예 지워지기도 한다. 우리는 ‘적자’들만을 양산하는 이야기에 감동하는 있다는 사실 자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 화가의 기적과 그의 삶을 충실히 복원하며 사는 아들만이 남은 소설의 서사에서 똑같이 화가로 성장한 ‘장녀’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가난한 ‘아비’와 가난한 ‘아들’의 인생사와 달리 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학을 다닌 특이함만큼 그녀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그들의 삶을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유지하게 위해 ‘장녀’를 서사에서 작가가 일부러 지운 것이라 단순화 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장녀의 소설 밖의 실제 인생 자체가 6.25 전쟁이라는 비극을 생생히 겪었던 경험자라는 점에서, 지워진 장녀의 인생은 좀 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의 것과 동일하게 삭제되었다는 확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장녀’만큼이나 ‘전쟁’의 상처가 지워져있다. 전쟁은 우리를 국가라는 아버지를 잃은 고아처럼 만들기에 가족의 경이로움을 만드는 서사에서 가족의 문제보다 큰 상처를 떠올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된다. 다만 어떻게 박수근과 아내가 절실한 사랑을 해왔던가의 배경으로서만 ‘전쟁’의 기원이 잠시 복원되고 있을 뿐이다.

박수근 화백이 살았던 엄청난 시대적 혼란에 주목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박수근을 단지 가족사의 아버지로만 기억하도록 서술이 강요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박수근이 살았던 1914~1965년이란 시대는 다만 ‘화가’라는 꿈 하나만으로 버틸 수 없던 시대였다. 특히 6.25 전쟁 당시 북한에서는 박수근이 순박한 그림만 그렸음에도 ‘반동분자’로 낙인 받았다는 것은 그가 교조적인 사상을 거부할 수 있었던 예술가적인 고집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 이 소설에서는 그가 문단사람들과 갈등하며 술을 마셔야하는 고집보다는 오직 그림만을 그리는 경건한 기적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우리는 작가의 의도라는 것에 따르는 충실한 ‘적자’가 되지 않는 길, 적어도 까칠한 ‘서자’되기가 가능해진다. ‘전쟁’, ‘딸’과 같은 소재들이 겨우 찾을 수 있는 희미한 흔적으로만 그려진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도 ‘적자’의 존재만이 부각되는 악순환의 이야기가 단순한 감동의 서사라는 ‘의미’로만 비추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2. 자본주의의 ‘신성가족’ 되기, 디아스포라와 여성이 상처를 지우는 마법:이대환의 <큰돈과 콘돔>

무언가를 실천하려는 자신감은 오캄의 면도날(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 가장 적합한 것을 우선시하는 원칙)과 같아야 할 필요가 있어왔다. 모든 것들, 특히 정치적 원칙들은 다양한 입장들을 끌어들이는 세부적인 것들을 고려해서는 확실한 입장을 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고 적합한 원리를 기본명제로 삼아 다른 부절적한 원리들을 면도날처럼 쳐내버려야 한다.

이러한 명료한 정치성이 ‘소설’에 적용되었을 때, 소설은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실천 장치가 되기도 한다. 거기에다 작가의 다양한 배경지식까지 겸비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소설쓰기의 ‘교본’ 역할을 담당하기까지에 이를 수 있다. 이대환은 그의 장편소설 <큰돈과 콘돔>(실천문학, 2008)의 ‘작가후기’에서 “한국의 상당수 젊은 소설들은 ‘엄격한 직책’을 팽개치는가.”라며,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작가정신은 현실에 복귀하고 상업주의와 야합하지 않는 일이 급선무라 강조한다.

그렇게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소설쓰기의 전범으로써 젊은 세대의 소설가들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을 가르치고자 했던 치열한 실천성에서 비롯된 ‘자신감’일 터이다. 그 작가의 자긍심은 우리가 알면서도 외면해왔던 ‘새터민’들, 흔히 탈북자라고 하면 더 잘 알아들을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타자들을 주요소재로 삼아 어떻게 우리 현실을 제대로 조명하는 소설이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름이 두 번이나 바꾸어야 했던 한 탈북 여성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간추리면서 소설의 내용을 탐색해보면, 원래 불리던 이름은 ‘숙이’로, 평범한 북한의 시골 처녀였다. 그런데 비싼 북한 장연골짜기의 산개구리를 말려서 중국에 직접 팔아 큰 이윤을 보려는 생각에 국경을 아무 생각 없이 넘어섰다가 공안에게 들켜 원하지도 않았던 탈북자란 운명에 놓이게 된다.

숙이는 무조건 도망해야 하는 삶에서 그나마 삶을 안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리봉규’란 사내를 만나지만, 자신의 탈북자 신세를 악용하려는 나쁜 사내들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한다. 리봉규는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해내지만, 공안에게 덜미가 잡혀 용정감옥에서 사형집행을 받게 된다.


총각의 늙은 어머니가 추위를 기다렸는지 졸라댔다. 이번 겨울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결혼해주면 진짜 신분증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큰돈과 콘돔> 84쪽


총각의 늙은 어머니의 권유로 숙이는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 조건으로 신분을 보장받는다. 그래서 얻어진 이름이 ‘소희란’, 그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기에 이미 사형이 결정된 리봉규의 아기를 지운다. 숙이는 이제 새로운 신분을 얻어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게으른 남편은 점점 일조차 하려들지 않는다. 거기에다 성적인 욕구의 노리개로 아내를 바라보기만 한다. 신분증을 얻기 위한 결혼이기에, 삶은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남한의 한 선교회의 도움을 얻어 다시 새로이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건 험난한 모험을 시작한다. 그래서 숙이는 드디어 험난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벗어나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그래서 보험설계사가 되고, 북한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탈북을 하게 되었다는 김금호란 사내와 가정까지 꾸리게 된다.


그녀의 머리 위로 드러나는 정면 벽에는 ‘새터민 보험설계사 표창숙 여사 초청 특별강연’이라는 검은색 작은 글씨 밑에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푸른색 큰 글씨로 글려있다. 조금 아까 지점장이 연단에 올라 인사를 하는 동안 그녀는 맨 앞줄 복판에 앉아 그것을 쳐다보았다. 미리 강사와 상의하진 않았으나 ‘탈북’이라는 낱말이 들어간 것보다 훨씬 세련돼 보였다.

―<큰돈과 콘돔> 99쪽


“현재 저에게 유일한 속박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가난도 아니고 신랑도 아닙니다. 북쪽에 있는 저의 일가친척입니다. 그래서 보험설계사 명함에 나온 저의 이름은 한국에서 받은 주민 등록증이나 자동차면허증에 있는 저의 이름과 다르게 찍혀 있습니다. 우리 상부에서 저의 사정을 리해해주시고 허락을 해주셨던 겁니다. (중략) 한국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을 ‘표창’하지 않습니까? 이 생각이 나서 ‘표창숙’이락 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지어주신 본명에서도 끝자가 ‘숙’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당장에 저를 만나도 ‘우리 숙이’하고 껴안으실 겁니다.”

―<큰돈과 콘돔> 101쪽


한국에서 숙이는 중국에서의 소희란에 이어, 표창숙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타자’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디아스포라의 처절한 삶을 살았던 숙이가 이제 한국에서 강연을 하는 성공한 사례로서의 ‘탈북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한 여성이었기에 가능해진 강연이었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탈북자로 혹은 디아스포라의 삶에서 벗어난 기억을 지우지 못한 여성으로서 그녀는 결코 강연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강연’을 할 위치에 놓이더라도 그녀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두서없이 말하는 타자가 말하는 ‘내용’은 감동이 아니라 고통의 흔적이라는 인상만으로 남을 것이다.

고통스런 탈북의 여정들을 청자들이 들을 만한 드라마로 만들어 내는 것은 숙이가 자신의 상처를 덮어냈기에 가능해진 발화방식이다. 끔찍함을 끔찍함으로 들어냈을 때 누가 숙이의 처절한 목소리를 ‘강연’대상으로 불러들일 수 있겠는가?

감동적인 강연은 숙이가 가정을 가지게 된 ‘신성가족’의 삶에 안주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안주하지 못하던 디아스포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에서는 아직까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디아스포라들의 삶을 보여준다. 하지만 소설은 그들의 삶으로 서사를 끝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사의 주체들은 타자로서의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신성가족’이 된 디아스포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이와 김금호와 같은 인물만이 디아스포라들의 상처들을 지워야하는 만큼 더욱더 강력한 신성가족이 되길 희망한다.


“북의 아내여, 부러진 발목은 다 나았소? 미안하오. 허옥희여, 부디 행복을 찾아다오. 자유마저 버려야 하는 내 심중을 이해해주오. 이게 전부야.”

어쩌면 허옥희의 목소리는 강형섭의 그것 같았다.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언니, 언니는 또 어떡해”

(중략)

“내일, 서울 가야 돼, 오늘 밤, 강 선생이 자기 손으로 자유도 세상도 버리셨대.”

그녀가 와락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통곡을 깨무느라 파르르 전율하는 온몸을 그는 어쩔 줄 몰라 부둥켜안았다.

“우리, 아이 갖자.”

그녀가 꺽꺽 뱉어냈다.

“그래, 그래. 강 선생님 닮은 똑똑한 아이 하나 낳자.”

―<큰돈과 콘돔> 259~259쪽


목숨이 위태로웠던 과거의 상처가 아물게 되는 과정을 따라 숙이의 삶을 이해해 볼 때, 우리는 디아스포라들의 삶이 결국 앞서 살펴 본 소설 <빨래터>와 같이 ‘신성가족’사를 만들어내는 효과로서 이 소설을 이해해 볼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의 삶에 적응한 한 부부는 원래 북한, 사회주의국가의 일원이었다. 김일성에서, 신과 돈으로 대체된 새로운 이질적인 ‘아비’에게 끊임없이 헌신을 다하고 기독교라는 마음의 안식처까지 찾게 됨으로써 ‘신성’한 가족으로 거듭나게 된다. 안정된 가족으로 한국에 정착하게 되고, 믿을만한 남편을 가진 ‘여성’은 이제 타자로서의 자신의 모든 기억들을 탈각시킨다. 정말 ‘결혼’은 과거의 상처를 지우는 특별한 도구일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지만, 탈북자들에게는 안정된 가족꾸리기만이 디아스포라의 삶을 잊는 도구가 되는 것인지는 이 소설의 결말에서 자살을 하고야 마는 한 탈북자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자신의 겪었던 처절한 상처까지도 극복되게 하는 이 힘은 이 소설에서 ‘신성가족’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은 분명하다. 서사의 끝까지 살아남아 한국의 기형적인 자본주의 안에서 펼쳐지는 습속들을 견디며 또다시 행복을 꿈꿔야 하는 사회주의의 디아스포라들인 숙이와 김금호. 그들이 이 자본주의의 적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받는 투쟁을 하려하지 않는 한 디아스포라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 새로운 삶에 안착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자 행동으로서 그들은 누구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적자’가 되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하면서 희망을 일궈내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로 장식된다. ‘아이 갖기’에 대한 희망은 감동적이지만, 상처는 그만큼 잘못된 방식으로 지워지고 있다. 이렇게 상처가 왜곡되는 것은 최초의 디아스포라로 상정 될 수 있는 유태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타지에 적응하기 위해 했던 피나는 노력은 결국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냉혈한 ‘고리대금업자’ 혹은 성공한 ‘은행가’의 모습으로 상징된다. 현재의 디아스포라로서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는 표창숙이 후기 자본주의의 한 상징인 ‘보험설계사’로 그려지는 것은 참혹한 필연이 아닌가.

3. 진부한 것들은 오히려 견고하다

‘견고한 것들은 모두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고 경고했던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간명한 비유 역시 ‘오캄의 면도날’이기에 맑스 자신의 비판적인 저서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맑스의 이론자체가 마치 ‘대기’가 되어 모든 삶들을 이 ‘대기’의 팽창으로만 해석해 내려했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아비’찾기의 서사에서 ‘적자’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던 전형이었다. 언제나 깊숙이 찌르려는 노력만큼이나 칼을 밀어 넣은 자기 손바닥을 깊게 상처 입어야 하는 양날로 보여주는 단순한 논리의 효과는 그렇게 효과만큼이나 역효과를 낳는다.

우리는 그동안 진부하다고만 생각했던 ‘신성가족’의 서사, 그 ‘대기’와 같은 특성을 너무나 무시해왔다. 그것들이 점유하고 있는 토대의 중심축은 견고하며, 디아스포라라는 타자까지 신성가족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말할 수 있는 자의 독특한 특권 때문이다. 이것은 엄연한 공식, 긍정적인 인문학자들에게는 스피박의 저주라고도 불리는 ‘하위주체는 과연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독특한 특권의 문제는 오직 권력적인 주체만이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두 소설은 꼭 읽어야 할 ‘텍스트들’이다. 소설텍스트들은 언제나 이런 것에 대한 대답을 이미 준비했었고, 항상 그 대답에 대한 답변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귀 기울이지 않아왔다.

텍스트들에서 우리는 분명 ‘하위주체’들을 보았다. 하지만 진부한 주체의 목소리만이 ‘하위주체’를 다룰 수 있기에 진부한 목소리가 ‘하위주체’를 끌어들임으로서 스스로 진부하지 않는 것으로 변신하는 무서운 권력적 주체들의 포섭 노력 또한 보았다. 하위주체들은 권능을 가진 주체들의 목소리들 속에서 흔적으로만 보이지고 서사나 담론의 영향을 통해 ‘오인’되는 존재로만 남게 된다. 허나 그것은 지워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 소설의 담론, 그 결말이 될 수 없는 것들. 그 잔여물들로나마 ‘타자’의 흔적들이 있다고 말했음에도 왜 지워진 것이라 말하게 되는가? 예술문단의 제도적 체계 밖에서 잉태된 예술가 박수근을 끌어안아 우리의 전통적인 작가로 인정하게 된 지금까지 근대사가 보여준 무서운 경로들이다. 박수근은 정말 ‘전통적인’ 화가였을까?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탈북한 한 ‘여성’이 그 무지한 순박한 시골처녀에서 벗어나 똑똑한 보험설계사가 된 우수한 성공사례에 비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탈북자의 ‘고통’은 그가 해결해야할 개인의 문제일 뿐인가?

제도적 교육을 따르지 않았던 화단의 이방인으로 폭음 속에 질병을 쌓아가다 죽어야 했던 박수근과 한국에 안착하자마자 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그보다 먼저 자신의 목숨을 끊기로 한 탈북자 강형섭은 시대가 만들어낸 넓은 의미의 제도에 안주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로 그 함의를 묶어볼 수 있을 것이다.

‘신성가족’사의 동일성 안에 포섭되어 오직 권능적인 주체만이 서사의 결말에 놓인다고 볼 때, 타자로서의 디아스포라들은 결코 제대로 다뤄지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 받는 타자들은 어떻게든 권능적인 주체의 목소리를 전유할 때만, 변형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체’의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전유해 그 고통을 논리적으로 표현했더라도, ‘타자’로서 살았던 고통은 전시된 박람물로만 가치를 지니게 됨을 우리는 앞서 살펴본 것들이다. 박수근의 고통도 숙이의 고통도 다 ‘신성가족’사 안에서 신기하게도 ‘감동’ 혹은 ‘경이로움’으로 변이된다.

우리의 출발점은 이 ‘신성가족’사의 반성에 있다. 아직도 그 권위를 잃지 않는 제도로서의 문학, 그리고 제도로서의 국가가 아직도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것을 문제적 개인을 통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여실한 증명으로서 두 소설은 우리에게 동떨어져 보이는 과거사를 왜 마주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소설은 왜곡된 주체효과만을 서사의 결과로서 봉합해서 내보이지만, 그 창작의 노력들에 의해서 우리는 지루한 현실을 ‘갱신’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새롭게 소설을 읽어낼 때, 제도적인 ‘문학’또한 새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진부한 것들을 계속해 진부한 것으로 읽어낼 때조차 소설텍스트의 ‘갱신’은 앞으로도 놀라워질 것이다.


강희철∙2009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경성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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