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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특집/현실발언/갈증과 희망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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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89회 작성일 09-12-2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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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현실발언> 갈증과 희망의 목소리


강갑재(시인, 199년 ≪문예연구≫ 신인상)/구름-어느 그들이 겨울 햇빛을 말아 먹을 때는/우리는 차가운 그늘옷을 오래 입으며 배고파하거나/때 묻은 말들이 들쳐지지 못하도록/우산으로 가렸다.//다른 그들이 여름 햇빛을 쌈 싸 먹을 때는/우린 오랜만에 모자를 벗어 두고/땀 흘려 일을 하거나/낮잠에 빠져들기도 했다.//그런 그들이 천둥 번개로 무섭게 싸우는 날은/우린 가끔 어깨동무 새끼줄로/거리의 파도가 되고/지푸라기로 떠밀리기도 했다.//지금 그들은 허공에서 편을 지어/앞에서는 큰 목소리로, 주먹으로/뒤에서는 소곤거림으로/우리 하늘을 가리기만 하는데//가뭄으로 갈라진 가슴에다/시원한 말을 내려/아물게 하고/그 위로 푸른 하늘 찰랑이게 할 순 없을까.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나는 욕망한다. 금지된 기본권을-욕망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이다. 인간에게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살고 싶은 의지가 존재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요즘은 욕망을 욕망하지 않게 된다. 욕망하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정말로 문제인 것은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일반인들이 지닌 욕망이 지극히 기본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고,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이 자유롭게 모여 의견을 개진하고 싶은 단순한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보장받아야 하고, 그래서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이런 기본권이 침해받고 있다. 이런 권리가 점점 금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적극적으로 욕망해야 한다. 혼자 내뱉으며 ‘욕만’ 해서는 안 된다. 집단적으로,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욕망하자.

강영은(시인,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한국의 산야는 아름답고 고졸하다. 지나침이 없을 뿐더러 모자람이 없다. 전쟁의 상흔으로 황폐화 되었던 과거의 모습은 탄력성 있게 회복되어 금수산천이라는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조금도 유감이 없다. 이처럼 우리의 자연은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한 축복의 땅이었으며 자연적, 지리적, 생태적 조건은 자연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천혜의 터전이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삶은 핍절과 환난의 역사를 끊임없이 맛보아야 했고 안정과 번영의 길목에서 늘 뒷걸음쳐야하는 퇴행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무엇 때문일까, 나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길 소망한다. 바라건대 정부를 비롯한 국민 모두가 좀 더 이 땅의 자연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자연은 본질이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을 해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다. 국익차원의 사업이라 할지라도 개발이라는 현상이, 발전이라는 이름이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삶의 본질을 호도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자연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인간의 이익을 도모하고 문명의 발판이 된다 할지라도 자연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문명임을 섬세하게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정부는 밀어붙이기 식의 사업을 시행하기 이전에 여러 각도에서 실과 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물질만능, 금권만능에 기울어진 사고와 문화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낳을 수 있다. 눈앞의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발전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본질을 망치는 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본질과 현상이 조화를 이루는 정책을 실행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생각과 여론의 동향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여론을 잠재우기보다 여론을 이해하고 국민과 손을 잡는 화합의 정치를 실행해야한다. ‘민심이 천심이다’라는 말은 천자의 자리가 하늘과 백성이 내린 것이라고 하여 백성이 모든 정치적 행위의 주체임을 나타낸 맹자의 말이다. 또한 백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여겼으며, 백성 없이 국가가 없고 정치적 목적 역시 실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근대 민본사상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정약용丁若鏞은 백성을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파악하였다. 그는 본래 백성만이 있었으나 필요에 의해서 통치자를 추대한 것이며, 백성이 통치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치의 퇴폐는 민심과 천심이 떠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정부는 우리 민족의 정서적인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축제를 좋아하는 민족성을 갖고 있다. 군중이 어울려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에너지가 뜨겁기 때문이며 모이기를 좋아하는 것은 축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월드컵 축제, 올림픽 경기, 대륙 간 야구경기, 등등 즐겁고 기쁜 일만이 대상이 아니라 슬픔, 노여움, 아픔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한데 어울려 에너지를 분출한다. 축제의 일환이 된다. 정부는 좀 더 대범하게 열린 생각으로 군중의 집합을 일방적 잣대로 잴 것이 아니라 축제로 승화 시키는 국민적 정서를 보듬어 주었으면 한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국민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다.

강희철(문학평론가, 200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검열’과 ‘공안’소설의 르네상스-‘책임’이 ‘자유’를 만든다고 생각했던 오래된 국가의 도덕관이 있다. 이 말을 다르게 이해해 본다면, 오직 ‘억압’만이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도와준다는 것으로 ‘억압’을 긍정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 준다. 사실 이것은 무서운 ‘억지’ 논리다. ‘국가’의 안전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말이 되지만, 그 ‘안전’을 위해 다시 우리가 ‘검열’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 아니다. 국가가 ‘검열’을 많이 할수록 이 나라가 ‘안전’해 진다는 것은 무서운 폭력의 ‘억지’ 정당성이다. ‘고문’과 ‘검열’의 차이는 ‘정보기술’의 발전과정의 연속성 사이에서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처럼 과학기술에 무지했던 국가권력은 한 사람을 범인으로 낙인찍기 위해 ‘고문’까지 필요했지만, 이제는 개인의 이메일만 검열해도 그 사람의 ‘내면’과 ‘정치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점의 차이만 보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때리지 않고서, 설득하지 않고서도, 한 사람의 삶을 정보기술로 추적함으로서 개인을 위험스런 존재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국가는 이렇게 ‘공안’소설을 써대는 무서운 ‘소설공장’이 되어버렸다. 작가들보다 앞서 자본주의 안에서 ‘소설가’가 가장 적극적으로 창작할 수 있는 소설 작업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고명자(시인, 2005년 ≪시와정신≫으로 등단)/금수강산, 이만하면 여여如如하오니-우리 이제 그만 좀 개발합시다. 자연自然도 자연스럽게 늙어가도록 합시다. 스스로 잘 흘러가는 강물에 콘크리트를 씌우지 맙시다. 가시덤불에 쓸리고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불편한 강가를 걸어가게 합시다. 우리 삶도 시시때때 가파른 벼랑이고 흙먼지만 날리는 거친 들길과 같습니다. 자연自然을 통해서 삶의 본질을 배우게 합시다. 콘크리트 공원, 콘크리트 강, 콘크리트 지붕…… 잘 다듬어진 이곳에서의 휴식은 피곤하고 삭막하기만 합니다. 거대담론巨大談論으로만 치닫지 마십시오. 강을 덮어씌우려는 엄청난 돈으로 노숙자들의 문제, 도시 빈민층 문제,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문제, 외국인 노동자문제…… 이들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가 입힐 것인가를 해결하십시오. 소외된 이들에게 어떤 제도를 적용시켜야 이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십시오.

고명철(문학평론가)/이제야 우리는 깨닫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들 사이에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민주주의의 온갖 가치들에 대해 무심한 태도로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의 참뜻을 성찰하고 있지 못하다. 이웃을 배려하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맹목적 성장 제일주의가 아닌, 다소 느리지만 사람답게 사는 삶의 태도와 가치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토론에 너무나 인색하다. 한국사회는 광장 콤플렉스가 있는 것인지, 현 기득권 세력은 광장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입장이 자유롭게 드러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 한다. 어떻게 해서 쟁취한 한국 민주주의이던가. 밀실이 아닌 광장에서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가치들이 활짝 피고, 그것의 소중함을 나눠갖기 위해 그 값진 피와 땀을 흘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고미경(시인,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어머니, 촛불을 켜주세요-어머니,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갓 태어난 제 새끼를 잡아먹었다죠. 날마다 밤을 찢어대는 전투기 소리가 호랑이의 정수리를 뚫어댔다죠. 쇠붙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혈관 속을 떠돌다가 고막을 찢고 비명을 찢고 끝내는 새끼마저 찢게 했다죠. 어머니, 네온의 불빛들이 충혈된 눈으로 밤의 살점을 우적우적 씹어요. 말라가는 가로수들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해요. 양계장에선 레그혼들이 알약을 먹고 스물다섯 시간 알을 낳아요. 어머니, 벼랑에서 망루로 올라갔다가 불타 죽은 사람들은 꽁꽁 얼어 있어요. 영안실의 냉동고 속에 갇혀 이 지상을 떠나지도 못해요. 어머니, 입에 재갈이 물린 호랑이들이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며 끊어진 강물처럼 울부짖어요. 어머니, 누군가 제 정수리를 뚫어대는 거 같아요.

권경우(문화평론가)/트랜스포머의 시대를 사는 법-‘벽’이 있다. 도대체 넘을 수 없는 육중한 ‘산성’이다. 그 너머 누군가 있다. 그는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벽을 두드리고 발로 찬다. 벽 앞의 외침은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 누구나 공감할 만한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가치들이 대부분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등. 알고 보니, 벽 너머에는 ‘트랜스포머’가 살고 있다. 변신을 거듭한다. 노점상, 환경미화원, 대기업 사장, 국회의원, 서울시장, 대통령, 장로, 서민, 가난한 대학생, 기부자, ……. 아무리 외쳐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영혼 없는 로봇, 트랜스포머이기 때문이다. 이제 포기하자. 소통하지도 말지어다. 그렇다면? 우리도 트랜스포머가 되자. 그 어떤 억압과 폭력에도 쓰러지지 않는, 아무리 치사하고 더러워도 포기하지 않는, 극심한 조롱과 핍박에도 꺾이지 않는, 아주 건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트랜스포머의 삶을 구성하자. 그것만이 이 시대를 견디는, 아니 이기는 방법이다.

권동지(시인, 2008년 ≪시안≫으로 등단)/2009년-그 해에, 우리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왜 안달이었는지 모른다.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감자꽃이 피기 시작하였고 우리는 인동초를 좋아했다. 그 저녁에 우리들은 어디를 더듬어야 서로 환해지겠느냐 묻기도 했지만, 그 어둠을 밝히려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해엔 그래야만 했다. 왜 그리 사느냐 오래 붙들고 스쳐가는 때가 있었다.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만삭의 몸으로 이제 갓 태어날 애를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얼 입힐까, 걱정하는 것처럼 유치한 우리는 한통속 절망에 걸려들어야 하는 몸들이었지만, 떠도는 것이 어떤 말썽을 부르는 건지 알지 못했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였지만, 감자꽃이 피는 것을 싫어했고, 그 때 감자꽃이 피었고, 서로를 예감하기도 했지만, 그냥 놓아두고 보지는 않았다. 슬프다는 이유를 말했지만, 막연히 가라앉으면 괜찮을 거라, 그 때처럼 견디면 우린 서로 한통속에 들 거라 생각했지만, 그 해엔 그래야만 했다.

권현형(시인,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사람을 뒤에서 수직으로 방패로 내리치지 말라, 악마가 아니라면-신은 왜 사람의 얼굴을 몸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았을까? 얼굴은 깃발이고 표식이고 상징이다. 공룡을 탐사하던 고고학자들이 몸의 뼈를 발굴한 후 얼굴이 궁금해 공룡의 얼굴을 추적하던 다큐멘터리 장면이 묘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숨은 자들이여, 당신들의 얼굴이 궁금하다. 높이 내걸고 다니기에 어떠한가. 무엇인가 호소하는 이의 뒷모습, 무엇인가 갈망하는 이의 뒷모습, 무엇인가 열정을 다하는 이의 뒷모습, 무엇인가 분노하는 이의 뒷모습, 뒤통수를 뒤에서 수직으로 내리치는 방패여. 방패 뒤에 숨은 흰 손이여. 한 번도 삽질해보지 않은 곤쟁이 손가락으로 삽질을 지시하는 손이여, 방패의 배후여. 손으로든 방패로든 뒤에서 수직으로, 사람의 뒤통수를, 사람의 말을 하는 뒤통수를 내리치지 말라. 수직으로 내리치는 각도는 악마의 각도다. 악마가 아니라면 슬퍼하는 자의 뒤통수를 그토록 잔인하게 몰인정하게 내리칠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 방패 뒤에 숨은 당신들의 얼굴이, 손이 보인다. 악마가 아니라면 신이 그토록 높이 올려놓은 숭고한 얼굴을, 숭고한 눈동자를 보여 달라.

김광기(시인, 1999년 ≪월간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정치의 목적은 선을 행하기 쉽고 악을 행하기 어려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실현시키면서라도 정권이 국민 위에서 군림하게 되면 본래에 목적되었던 그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은 선의 축으로 국민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마땅한 일인데, 대개의 정치 관료들은 이러한 것을 가늠하고 있으면서도 정권을 자기중심축으로 펼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자리에 앉게 되면 그 동안 그 자리를 지나갔던 수많은 위정자들과 똑같은 우를 범하며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우직하고 소신 있게 행정을 펼쳐나가는 것은 좋은데, 제발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할 때처럼 귀는 좀 열어두었으면 좋겠다. 행복한 대한민국 건설은 우리 국민 모두 함께 하는 것이다.

김광렬(시인, 198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하다-소통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생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운 생을 누리려면 서로간의 소통이 필요한데, 우리는 요즘 서로를 이단시하면서 지내고 있다. 몸과 마음이 둘일 수 없듯이 마음의 실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과 사람도 기실 둘이 아니다. 오늘 밖으로 나오다 문 앞에 가녀린 몸을 떨고 있는 어린 새를 보았다. 어디 다친 곳이나 없나 싶어 집으로 들고 왔는데 어미 새 한 마리가 집안으로 쏜살같이 날아드는 게 아닌가. 문 밖에 도로 갖다놓았더니 데리고 창공 훨훨 자유롭게 날아간다. 자식을 사랑하는 정이 지극하지 않았다면 두려움을 무릅쓰고 집안까지 날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 등 돌리고 있는가. 벽을 만들고 있는가. 너와 내가,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아름다운 인연인데 왜 우리는 그 인연을 아름답게 승화시키지 못하는가.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서글프다. 이 시대에 우리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깊은 인연인가. 

김규나(소설가,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에 당선)/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는 1,000억~4,000억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 우주에는 그러한 은하계가 1,400억 개 정도 더 존재한다. 우주의 나이는 대략 137억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다. 지구의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나누어볼 때 인간은 고작 1분 17초 전에 태어났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면적은 바다를 포함한 지구 전체 면적의 4%에 불과하지만 지구는 급격히 파괴되고 있으며 전쟁과 분쟁은 그치지 않는다. 전 세계 곡물생산량의 70%가 육류소비를 위해 기르는 가축에게 소비되는 동안 굶주린 아이들은 3초마다 죽어간다.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우주의 중심은 ‘나’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은 ‘너’다. 모든 사람들의 유전자는 99.9% 동일하다. 높게, 넓게, 멀리 볼 일이다. 배려가 절실하다

김길나(시인, 1995년 시집 '새벽날개'로 작품활동 시작)/왜 민심을 두려워 하는가?-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사 이래 초유의 사태라 했다. 애도의 물결이 바다를 이루는 현장에 공권력이 높은 산으로 우뚝 선 풍경 또한 초유의 사태라 했다. 한없이 무력하게 산화해 간 ‘죽음’과 팽창일로의 살아 있는 권력과의 대비, 그 사이에서 갑자기 미망이 걷히고 의식이 맑아진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 애도의 물결에 합류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분향차례를 기다리는 애도의 긴 줄이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마치 인간띠로 이어지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길’인 것처럼 그렇게 침묵으로 뻗어 있었다. 그 침묵은 조용했으나 침묵 속에 내재된 발설은 비장했다. 법이 쳐든 양 손에서 공정성의 상징인 ‘저울’이 땅에 떨어지고, 불의(?)를 향한 척결의 ‘칼’은 번뜩이는 금속성의 위용과 함께 높이 들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만인의 애도의 침묵 속에는 ‘칼’의 부당함에 대한 의혹들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들끓었다. 또한 거기, 잃어버린, 또 잃어버릴 역사의 역행을 예감하는 두려움이 ‘칼’ 앞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어제를 부정하는 역행이란 그동안 이룩해온 공功을 허무는 일이며, 어제를 낭비해버린 소모이다. 권력의 분산이 권력집중으로, 권력의 탈 권위가 권위복원으로,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은 수도권 위주의 원점 환원으로……. 우리는 어제를 잃었다. 하여, 오늘의 이 길에서 내일의 지평을 바라보며 권력을 향해 묻는다. 왜 민심을 두려워하는가? 집단 무의식의 집결, 그 거대한 침묵이 묻고 있는 것이다.

김명원(시인, 1996년 ≪시문학≫으로 등단)/빛의 울음 속으로-바람의 늪을 건너갔는가. 친구들이여! 장대비로 쏟아지는 역사의 총탄을 피하지 않고 저 툭 진 세월의 틈으로 영영 파묻혔는가. 침묵하는 것이 가장 쉬웠던 그 시절, 소리 외쳐 저항하고 온몸으로 항거하였던 그대들! 하나뿐이기에, 너무도 소중하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민주주의의 목숨을 기어이 살려내고 만 그대들! 지하 감방에서 고문과 굴욕을 삼키면서, 옥상에서 처절히 뛰어내리면서도 민중의 힘이 살아있음을 증거해 낸 그대들! 그대들이 보여준 숭고한 힘에 눈물지으며 들끓던 6월의 잔인한 햇빛 속으로 우리가 거리로 나섰을 때, 진실 되고 엄연한 진리를 위해 우리가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외쳤을 때, 어찌 아프고 아프지 않았으랴. 그대들을 죽음으로 내 몬 현실의 벽을 향해 꽝꽝 못 치며 어찌 나의 비겁을 후회하고 후회하지 않았으랴. 약속하리다. 아류의 무리에 편승하지 않으며, 그대들이 남겨 준 민주에 후퇴를 반복하지 않으며, 안일해지는 나날을 깊이 성찰하며 살아갈 것임을. 귀 막고 눈감아도 가슴으로 들리는 그대들의 함성. 총칼 앞에 산화되었으나 언제나 다시 견고히 피어나는 무수한 꽃울음들, 진리의 성찬들. 그대들의 가르침을 우리 따라가리다.

김미령(시인,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지난 5월 29일 정토원에 그분의 따뜻한 분골이 안치되러 오시던 날, 아이 둘 시댁에 맡겨놓고 어둔 밤 혼자 봉하마을로 두 시간여 차를 몰았습니다. 진영의 작은 공단을 지나 컴컴하게 펼쳐진 논두렁 밭두렁 가를 누군가가 밝혀놓았을 촛불행렬을 따라 한참 걸었습니다. 밤공기는 얇은 옷에 비해 싸늘했고 불콰한 사람들의 노랫소리, 하모니카 소리, 흐느낌, 나부끼는 메모와 현수막들, 자원봉사자들이 건네 준 국밥 한 그릇, 그리고 손에 든 촛불의 온기에 기대 새벽 세 시까지 그곳을 배회하다 왔습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내 자신에게 쏟아지는 많은 질문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온몸이 마비된 듯한 이 통증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한 눈물이었는지, 눈물이 마르면 사람들은 어디로 흩어지는 것인지. 며칠 전 한 일간지 하단에 ‘4대강 죽이기 사업 저지 범국민대회’를 알리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여당과 보수단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정당과 시민단체의 이름이 지지명단에 깨알처럼 적혀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여기에 미처 실리지 못한 시민들 힘까지 합하면 부족할 게 없을 것 같은데 왜 안 되는 것일까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다수가 소수를 못 이기다니. 상식이 더 이상 상식이 아닌 것은 오늘일 만은 아닐 테지요. 역사는 늘 이렇게 흘러왔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아주 작은 비석 받침대엔 그가 생전에 남겼던 글 중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문장이 적히기로 했다지요. 요즘에야 이런 문장의 살아 꿈틀대는 힘을 절실히 알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저는 시인이기 이전에 시민인 것을요. 

김사람(시인,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부쳐서는 아니 될 편지-딸아. 서민들에게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단다. 하지만 가진 자들에게는 협박과 폭력 나아가 살인교사, 살인까지 미화될 수 있는 게 이 땅의 법이고 정치란다. 기득권자들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서, 뼛속까지 시커먼 내력을 숨기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를 통한 독재가 필요하며 한 번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그늘 밑에서 안락한 삶을 보장받는단다. 돈을 숭배하는 사람, 돈을 잘 버는 사람, 돈을 잘 벌 수 있게 유혹하는 사람에게 미래를 던지는 사람들을 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 돈과 권력 순일뿐이란다. 돈과 권력을 세습하기 위해 성적은 1등이어야 해. 민주주의와 개성, 도덕, 진․선․미와 같은 가치는 강력한 자석 주변에 달라붙는 한낱 쇳가루일 뿐이란다. 혹여,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침묵만이 살 길이란다.

김사이(시인, 2002년 ≪시평≫으로 등단)/개발과 이윤, 경쟁에 미친 정부가 불도저로 삶을 허물어버리듯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벼랑 끝으로 떠밀고 있다. 한 발 한 발 밀려나며 눈 깜짝할 새 살얼음 위에 섰다. 언제 깨질지 몰라 늘 불안한 현실이다. 정규직 노동자가 구사대가 되어 동료를 패고 쫓아낸다. 부자와 가난뱅이의 싸움이 아니라 가진 것 없는 자들끼리 싸움을 하고 서로를 짓밟아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비참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가 끔찍하고 놀랍다. 내 소유의 집이 아니어도 하루아침에 쫓겨날 걱정 없이 살고 싶다. 그 무엇 때문에도 차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끼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소박한 바람은 영영 이루어질 수 없단 말인가. 축대 깡그리 무너진 생존 앞에서 시가 길을 잃고 헤맨다. 정신없이 휘청거린다.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김석준(시인, 2001년 ≪시안≫으로 등단)/역사 앞에서 우리는 늘 겸허해야 한다-두목지杜牧之는 「아방궁부阿房宮賦」에서 “후세 사람들이 옛일을 슬퍼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한 그 후세 사람들을 그와 같이 슬퍼하게 할 것이다(後人哀之 而不鑑之 亦使後人而復哀後人也)”고 말했다. 이 말은  역사란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거울삼고 다시는 똑 같은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금언이다. 허나 우리는 너무 빨리 흥분하고 너무 빨리 잊는다. 우리는 늘 빨리 들끓고 너무 빨리 식는다. 하여 우리는 역사 앞에 겸허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역사는 반성하고 잊지 않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승만 이후에 씌어진 역사의 오류를, 친일 부일한 전범들을, 군사 쿠테타를 그리고 군부독재를, 혁신과 창의성을 고사시키는 이 사회의 비탄력성을 역사의 이름으로 다시 재판해야 마땅하다.

김시운(시인, 2000년 ≪시현실≫로 등단)/모래바람 속에서라도-낮말을 하는 이들이 없어서 새들이 멀리 날아간 시대인가? 밤말을 하는 이들이 없어서 쥐들이 멀리 달아난 시대인가? 오늘날의 사회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마치 풀포기 하나 없이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모래언덕에서 메아리가 사라진 사막 가운데에 홀로 앉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둠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빛을 모아 어둠을 몰아내야할 때가 바로 지금 아닌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어디를 헤매고 다니는지 모르는 세상이다. 그림자에 짓밟힌 허상과 껍데기뿐인 곳에서 홀로 서있는 것이 아닌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이야말로 이제는 진정성을 보여 주며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말들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언설을 듣고 그 참뜻이 있는 곳을 구분 못하는 이들의 귀에 대고 우리는 부르짖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김왕노(시인,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당대의 강가에서-진작 휩쓸려 흘러가버릴 것들이 휩쓸려가지 않고, 저렇게 모여 갑론을박하는데 진작 강바닥에 가라 앉아, 어두운 한 시절의 유물로 천 년의 물이끼 끼어야 할 것이, 저렇게 휘황찬란하고 도도한데, 무엇이 저들을 이 강가에 살게 하고 무엇이 저들을 사주하는지. 진작 강물에 휩쓸려 가버릴 것들이, 거머리같이, 진드기 같이 달라붙어 흡혈하여, 창백한 저 아이들의 꿈, 저 청년의 꿈, 저 주부의 꿈, 저 가장의 꿈, 저 남녀노소의 꿈, 저 풀의 꿈, 저 새들의 꿈……. 북방여치 같은 얼굴로 만나, 고려엉겅퀴 같은 얼굴로 만나, 신라의 토우 같은 얼굴로 만나도 좋았던 시절만 흘러가버린, 이 당대의 강가에서, 백제의 고구려의 가야의 하늘이 흘러가버린 강가에서, 우리가 꿈꾸는 것은 아나키스트. 당대의 저 시퍼런 물 앞에서도 끝없는 갈증이 일어나는 우리가 가라, 가거라, 이 씨발놈들아, 속 시원히 고함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함구하고 뒷걸음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비겁 때문, 시인이랍시고 허풍이나 떠는, 시인이 시인답지 못하기 때문, 내가 내답지 못하기 때문, 저 파란만장을 일으키는, 저 갑론을박하는 놈을 껴안고 논개처럼, 논개처럼 당대의 저 강물로 뛰어들지 못하기 때문, 우리도 씨발놈이 되어, 나마저 한 시대의 문장 속에서 아첨꾼이 되어 눈이 벌겋기 때문. 불 지나간 흔적은 남는다지만 물 지나간 흔적은 남지 않는 것이므로 당대의 강물아 넘치고 넘쳐나 모든 것을 휩쓸어가라. 그리하여 당대의 강가에 물새 발자국만 남게, 저 우둑한 시간 속에서 선남선녀가 걸어 나와, 이 나라 처음처럼 밭을 일구며 조약돌 같이 살게.

김유석(시인,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우리 동네 이장-이장을 새로 뽑았다. 2년 임기에 한 번 연임할 수 있는 이장. 마을을 대표하는 그의 권한이라곤 고작 하찮은 서류에 도장이나 눌러 찍어 주는 정도일 뿐 대부분 자질구레한 마을 일들을 치다꺼리하거나 주민들을 대신해 민원을 올리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칠순의 나이에 궂은일을 맡은 그는 하는 일도 없이 늘상 바쁘다. 조석으로 혼자 사는 노인네들 문안하는 일에서부터 막힌 하수구를 치는 일, 다툼 난 김가 이가를 화해시키는 일, 무상으로 나온 병충해 방제약을 공평히 분배하는 일 등. 이른 아침 마이크를 잡고 늦잠을 깨우는 이도 그이고 늦은 밤 가등 아래 그림자를 끄는 이도 항상 그다. 그 무엇보다 신망할 수 있는 점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가급적 많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가가호호 발품을 파는 행동이다. 소외감이 곧 냉소를 낳는다는 사실을 주지하다시피 꼼꼼히 챙긴다. 곧잘 몽니를 부리기도 했지만 소임을 다한 젊은 전임 이장을 불러 상의하기도 하고 아랫사람들의 비판도 건방지다 싶지 않게 받아들여가며 공명한 마을의 정통성을 이으려 애쓴다. 오늘은 서늘한 모정, 장기판 어깨 너머로 훈수를 두기도 하는 우리 동네 이장은 그 누구보다 백배는 낫다.

김인호(문학평론가,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현재 우리 사회는 문학이 숨 쉴 수 있는 환경인가. 점점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가 판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거대한 악령이 사람들의 목을 움켜잡고 항복을 요구한다. 몇 년 전 작가들이 악몽으로 그리던 세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파시즘이 호령하는. 문학하는 이들은 알고 있다. 지금 문학이 저항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결코 그 무엇도 자기반성 없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문학이 자기 방에 갇혀 문학 고유의 영역을 확장했을지 몰라도 이제 ‘예언’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것의 생명력을 자신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문학이 당대의 사회적 기운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라면, 그간 문학은 제 역할을 잊고 살아왔다는 게 분명하다. 성찰이 필요한 시대다. 그게 악몽이든 환상이든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채 멀리 날아가 버린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이제 문학은 텍스트의 미로에서 빠져나와 사회 현실로 연결된 통로를 찾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현실에서 자기 방에 갇힌 문학은 질식되고 만다. 문학은 저항을 통해 자라난다. 그게 형식이든 내용의 차원이든.

김일영(시인,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그가 오고 우리는 서둘러 미쳐갔다. 깨진 유리창으로 강도 같은 바람이 들어온다. 들어와 홑이불 속의 성욕과 피곤한 잠을 흔든다. 깨뜨린다. 깨뜨리고 부수면서 우리들의 발기한 생활까지 끄려 한다. 어둠 속에서 절벽처럼 바지를 내리고 이름을 받아쓰게 한다. 쓴다. 봉우리에서 풍경을 보는 근시의 눈동자여. 써준다. 가여운 중심이여. 올라오는 시간은 오래고 고되나, 내려가는 시간은 잠깐이다. 그래. 그때까지 바지를 내리고 쓰다만 이름을 지우고, 내 발기한 생활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다. 변방이 중심이 될 때까지. 근시의 입에서 진실이 나올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들의 당연한 말이 당연해질 때까지. 가난한 우리들의 꿈을, 우리가 버렸던 꿈들을. 바위가 스스로를 깨뜨려 씨앗을 받아 키우듯이 부서지면서, 미쳐가면서.

김재석(시인,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대학시절 학생들로 하여금 데모를 만류하던 교수는 자신의 입장을 제우스를 동굴에 피신시킨 레아의 마음에 비유하였다. ‘광주 시민의 불복종’이 있었던 다음 해에 조기를 차고 다니다가 학장실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하르트만의 가치론을 가르친 지금까지도 아이들에게 가치의 ‘고저강약론’을 풀어먹도록 해 주신 교수는 나 때문에 잠시 열 받았다. 그 시대에 몇몇 교수들은 해직을 당하거나 감금되고 몇몇 교수들은 어용으로 몰려 치욕스런 삶을 살아야 했다. 시대의 모순에 분노하던 젊은이들이 지금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곁눈질을 하고 있다. 나 또한 눈앞의 모순에 치이지 않을 말을 찾고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김자흔(시인, 2004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거다-체력은 완전 KO패. 조각난 건강퍼즐들을 다시 조립하기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것 같았다. 한 번 조각나버린 퍼즐은 제 자리로 꿰맞춘다 할지라도, 어딘가는 분명 미세의 틈새가 벌어져있을 터였다. 단 일 분의 망설임도 없이 읽던 책 한 권만을 들고 휴식 길을 나섰다. 일주일의 여정을 푼 곳은 묵호항이었다. 그 민박집 흔들그네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는 감청빛 바다에서, 뜻밖에도 하루에도 마흔 세 번이나 해지는 광경을 바라본다는 소혹성의 어린왕자를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길들인다는 건 무슨 뜻이니?” “그건 잊혀져 있는 일인데……. 그러니까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지.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단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책임을 지게 되는 거야.” 여우도 알고 있는 이 평범한 진실을 인왕산의 쥐박 씨만 쥐뿔도 모른 채, 스스로 명박산성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일말의 순간이었다.

김정남(소설가, 2002년 ≪현대문학≫에 평론, 2007년 <매일신문>에 소설 당선)/‘법과 원칙’이라굽쇼?-고 노대통령 시민영결식, 영정차량 운전사까지 소환하는 판국이다. 입건 후, 경찰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누구 지시를 받았나?’, ‘경복궁으로 진입하려고 했느냐?’, ‘청와대에 가려 했느냐?’(<한겨레>, 2009. 06. 15) 그를 간첩으로 오인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는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을 테러범으로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경찰특공대까지 출동하여 무자비한 강제진압을 할 수 있겠는가. 범죄 사실이 성립되지 않은 단계에서 끊임없이 혐의점을 유포하면서, 한 개인의 숨통을 조여 가는 수사 방식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법과 원칙’이 계속해서 죽음을 부른다면, 여기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정한 법과 원칙은 지금 대한민국 어디서나 전광석화처럼 몰아친다. 경제도 살려야 하고, 4대강도 살려야 하고, 그 삽질 정책으로 실업자들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살리고자 하는 것은 곧 죽이는 것! 사람과 생태만 죽이는 게 아니라 예술 교육도 고사 직전이다. 이론 없는 실기 예술, 통섭 없는 고립된 예술을 원칙으로 들이대며, 국립 예술학교의 예술 교육을 훼손하고, 가당치 않은 감사 결과로 총장을 사퇴시키는 등 대학의 자율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상식이 없으니 그들이 말하는 법과 원칙은 당연히 상식 밖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겐 잃어버린 10년이겠지만, 우리에겐 어떻게 되찾은 10년인가. 민주주의는 집과 같아서 나가봐야 그 고마움을 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우리는 지금 뼈아픈 민주주의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김정원(시인, 2006년 ≪애지≫로 등단)/중국의 고전 '대학'은 집안과 국가를 다스리는 혈구지도를 이렇게 말한다. “윗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말고, 앞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뒷사람에게 하지 말고, 뒷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앞사람에게 하지 말고,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왼쪽 사람과 사귀지 말고, 왼쪽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 오른쪽 사람과 사귀지 말라.” 정치는 국민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국민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일이다. 큰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경계하고 신중하며, 항상 중심에 서서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진정한 덕치의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종성(소설가, 1986년 ≪동서문학≫으로 등단)/지역문학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인천시의 ≪리토피아≫, 전주시의 ≪문예연구≫, 광주시의 ≪문학들≫, 대구시의 ≪사람의 문학≫, 대전시의 ≪문학마당≫, 부산시의 ≪신생≫, 포항시의 ≪포항문학≫ 같은 지역 문예지들은 지방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문예지들이다. 이들 문예지 말고도 지방에는 무수한 지역문예지들이 산재해 있는데 정부의 관심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지역문예지의 발전 없이 지방 문화 발전, 나아가 한국 문화 발전은 없다고 볼 때 지역문예지의 활성화 정책은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지역문예지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는 전국 지역문예지에 수록된 시, 소설 등을 평가하여 가칭 ‘연간 지역문학우수작품집’을 출간하거나 ‘전국지역문학상’ 제도 같은 것을 만들어 지역문학의 활성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김종태(시인,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진보와 보수가 상생하는 지평을 향하여-얼마 전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국가 중 4위라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작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여론 분열 양상을 보여 우려스러움을 피할 길 없다.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야 할 이성과 논리가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 갈등을 봉합하는 데에 더 많이 가진 자, 더 높이 사는 자들의 멸사봉공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승적 차원의 나눔과 사랑은 마음이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선진국 대열에 아직 서지 못한 우리나라가 지금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닌 듯하다. 보수가 복지와 분배 쪽에 더 많은 무게를 싣는 상황이 연출될 때 진보 역시 보수의 목소리에 한층 더 귀 기울일 것이다.

나여경(소설가, 200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모든 유기체의 살기 위한 몸부림은 본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능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지른 바보. 자신의 잘못을 알고도 모르는 척 인정하지 않고, 시정하지 않는 이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라고 말하며 마음의 감옥 안에서 백 년 동안의 고독보다 더한 깊은 슬픔에 빠진 이들. 이를 추락이라 부르면 과한가. 달리 표현할 적절한 어휘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잊지 말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것을……. 양 날개에 가득 내려앉은 오만과 편견의 분진을 떨쳐버리고 이제 날개를 펴자. 날개가 있다는 것조차 또는 펼칠 힘까지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말자. 우리 모두 음지의 탁수에 젖기 전에 양 날개를 활짝 펼 일이다. 어지러운 시절마다 보여주었던 저력의 날개를!

남태식(시인,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한때는, 불편했다, 어긋나던 길들이, 삐걱대던 걸음이, 체증으로 막힌 명치 뚫리듯 터지던 말들이, 받아쳐 붉은 말의 물 은근슬쩍 뿌리며 온 동네를 휘젓던 노골적인 안개가, 안개마을에서 말과 말이 부딪쳐 절로 꺼지는 땅 짚은 손 놓으며 우수수 쏟아지던 머리카락들이, 불편했다, 시계가 멎는다, 주방의, 욕실 거실 안방의, 광장의 시계가 멎는다, 자명종이 운다, 주방에서, 욕실 거실 안방에서, 광장에서 운다 동시에, 자명종이 우는, 지금은, 불안하다, 불편을 넘어, 멎은 시계가, 동시에, 동시에 우는 자명종이, 울고 울면서 죽지 않는 자명종의 입을 막으며 돌아눕는 길이, 길 안에서 길 밖으로 빠르게 틔는 돌들이, 쌓여 하늘까지 오르는 탑이, 강이 산이 바다가 바람이 구름이, 강길 산길 바다길 바람길 구름길 앞에 두고 우뚝우뚝 날마다 마주 솟는 절벽이, 마침내 하늘이, 절벽 사이에서 망연자실한 시인의 상상력이, 불안하다, 악! 

맹문재(시인,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활동 시작)/난쟁이는 누가 지켜야 하는가-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구의 한 재개발 지역에서 경찰이 농성자들을 과잉으로 진압하는 바람에 발생한 참사는 충격을 넘어선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고 시행 인가가 나면 세입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는 이 모순을 왜 막지 못하는 것일까?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주인공인 난쟁이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짓밟히고 있는 시대, 인권이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만 지킬 수 있음을 다시금 생각한다. 

박서영(시인,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풀들의 연대의식-매일매일 새로운 사건들로 시간의 일기장은 두툼해진다. 현대인의 일상이 단순하고 지루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우리의 의식이 타자에게 열려있을 때 받아들이게 되는, 감각하게 되는 충격이나 고통은 얼마나 다양할까? 타인의 두려움들이 내게로 와서 다시 나의 두려움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다. 어떤 매체를 통해 보는 순간 바로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게 되니까. 척박한 곳에서의 희망은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그 척박하고 황폐한 땅을 쉬지 않고 포클레인이 갈아엎어댄다면 언제 풀 한 포기 자랄 수 있을 것인가. 땅을 갈아엎었다면 다음엔 땅이 조금 쉬면서 큰 호흡 한 번 하게 해 줘야 한다. 그 틈에 슬쩍 풀들이 자라게 해 줘야한다. 한 번 자라난 풀들은 연대의식이 강해 잘 살아남게 될 것이다. 시골 텃밭에서 채소와 함께 잘 자라는 잡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엔 한두 포기 올라오더니 어느새 배추밭을, 고구마밭을 점령해버리고 만다. 조금만 부지런을 떤다면 채소는 채소밭에서 가꿔먹고, 잡초들은 이랑 넘어 자신들의 나라에서 잘 살아남게 된다. 현명한 농부의 손길에서 야채와 풀들의 나라는 서로의 국경을 지키며 살아간다. 광기와 광기가 만나면 둘 다 피투성이가 된다. 공존의 정치, 타인과의 소통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박완호(시인,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가시 돋친 혀로, 어제처럼 자유를 노래하리라-또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너의 이름을 외치게 될 줄이야!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다시 너의 노래를 부르게 될 줄이야! 자유여, 민주여, 그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한쪽 눈과 귀로, 움직이지 못하는 한쪽 팔과 다리로, 역사의 물줄기를 억지로 되돌리려는 어리석은 족속들아. 너희야말로 못된 어둠이라는 것을 정녕 모르는가! 듣고 또 보아라! 너희들 어둠의 심장을 갈기갈기 헤집으며 다가오는 새벽의 발자국소리를! 촛불의 황홀한 춤사위를! 꽃과 별과 사랑을 노래하던 시의 혀에는 어느새 하나둘씩 날카로운 가시가 생겨나고 있다. 가시 돋친 혀로, 우리는 어제처럼 다시 그리운 자유를 노래할 것이다.

박준(시인,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소멸하는 약력略歷은 저도 부러웠습니다. 생각보다 살만했던 광장의 ‘한 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本籍과는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번듯한 날들은 다 지나간 것이지요. 그 ‘한 때’가 소멸한 이곳에서, 같이 죽을 수 없는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는 일이 여전히 부끄럽고 여전히 미안해져 올 때 풀죽은 우리의 슬픔이 여는 길도 있겠습니다. 혹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무도,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우선(시인, 1981년 ≪현대시학≫ 추천완료)/나의 비원-강은, 강의 생명체와 사람이 함께 행복을 누리도록 정성껏 보살펴야 합니다. 위정자는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좀 더 따뜻이 배려해야 합니다. 표현, 집회 등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권력은 공정하게 운용해야 합니다. 교육은 국민 모두의 ‘미래의 희망’이게 해야 합니다. 시민단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활동을 보장·지원해야 합니다. 언론, 종교, 인사 등의 편중을 삼가야 합니다. 역사를 바로 보고,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모색해야 합니다.

서화성(시인, 2001년 ≪시와사상≫으로 등단)/잃어버린 시인-어느 시낭송회에 갔다. 독자보다 시인이 많은 그 곳에서 시인들은 죽었다. 거리마다 시인들은 많은데 진작,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인들은 죽었다. 오늘의 시인은 죽었고 내일의 시인은 죽을 것이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나 세상과 더불어 사는 그런 시인은 이 시대의 마지막 촛불이며 순수다. 한 편의 시에서 흥미를 잃은 지 오래다. 며칠 밤을 새워 자판을 두드린다 해도 시詩와 인人이 아니면 그 시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런 시가 너무나도 많다. 내 시도 마찬가지다. 시류時流에 억매이지 않는 자기만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언어가 없으면 시인이 아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이육사의 광야에서처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어 목 놓아 부르고 싶다. 퇴근하는 아들을 기다리는 노모처럼 오직 한 편의 시를 읽고 싶다. 지금은.

손제섭(시인, 2001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A에게,-약관弱冠이었을 때 친구여. 오! 오! 우리의 정의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로 시작하던 격문檄文을 쓰던 열정의 밤을 기억하느냐? 시월이 하순을 넘겼음에도 우리가 끙끙 진땀을 흘렸던 그 밤, 너는 나의 글에 대해 트집을 잡고 꼬투리를 달았지만 나는 거칠고 사나운 말로 종이를 채워나갔던, 너는 조용하고 반듯한 말로 내게 충고를 했지만 나는 함부로 네 의견을 무시했었던 그 밤. 돌이켜 보면 나의 거칠고 사나운 말과 너의 조용한 충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천명知天命이 되어 친구여, 어쩌면 그때 우리는 화엄華嚴세상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헛된 희망의 뿌리를 뽑고 서로서로 용납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평등과 자유의 터전 말이다. 세상은 의론이나 원리로 설명되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걸. 오로지 세상은 살아내야 하는 곳이고, 내 짐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 그 밤 격문에 적었던 난폭한 나의 생각이나 반듯하던 너의 뜻이 세상의 중심에서 흔들리고 있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손현숙(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저기 한 점 떨어지는 불꽃-나는 정치를 모른다. 아주 무식하게 말하면 내가 벌어 내가 먹고 산다는 논리다. 그렇지만 이건 조금 너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질 않는다. 대통령이 죽었다! 그것도 자살이라니. 최진실도 죽었고 장국영도 죽었다. 마릴린 먼로도 죽었고 헤밍웨이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을 내가 죽인 것은 아니다. 마음 많이 아파하면서 그들을 그리워는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가해자라는 가해의식은 없다. 그러나 왜, 나는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내가 죽였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 많이 무겁다. 내가 내 부모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오래도록 뇌리를 뜰 줄 모른다. 

신정민(시인,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바쁜 나랏일로 책 한 쪽 읽을 수 없는 분께 고함-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먹기 때문이고,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이 뭔가를 한다고 하기 때문이고,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이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든 부정적 일은 위정자의 ‘함(爲)’ 때문. 나라를 부강하게 한답시고 세금을 거두고, 운하를 판다, 뭐를 한다 하면서 법령을 만들고, 인위적인 다스림으로 백성을 못살게 하고, 수탈로 생긴 부와 인력으로, 물질 제일주의 가치관으로 내달릴 때 백성은 허탈감, 좌절감, 비열감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 부국에 요란 떨지 말고 순리를 따라야 나라가 잘 된다는 것. 나라를 다스릴 때는 억지로 함이 없는 정치여야 한다는 것.―'도덕경' 75장 

신지혜(시인, 2002년 ≪현대시학≫ 신인상)/하심下心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낮추라는 뜻이다. 지극히 자기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추어 분별하고 성찰하며 높낮이 없이 두루 섬기는 가장 큰 마음인 것,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천심인 민심이 삭제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하심下心의 결여에 있다. 예로부터 어질고 참된 인품의 소유자는 하심下心을 가짐으로써 만인의 공경을 받았다. 연일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들에 그저 답답할 뿐이다. 우리 국토의 몰지각한 훼손과 국가적 자존심을 상납한 무조건적인 사대주의적 발상들, 울부짖는 서민을 외면하는 소통불능의 현실이 암울하다.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통탄할 일이다. 어떤 연유를 막론하고, 대대손손 지켜온 우리 민족의 얼과 역사를 가꿔온 선조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유시연(소설가, 2003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플라톤의 사상과 공자의 도-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필자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겪으며 이상주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플라톤의 좌절을 엿보게 된다. 권력은 힘이다. 진정한 힘은 국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면 덕치를 해야 한다. 플라톤의 윤리학에서 덕은 용기이며 지혜이고 정의이며 절제이다. 인간의 이러한 덕은 조화와 일치의 세계와 같다. 이는 중용中庸의 도이다. 어느 면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공자의 사상과도 맥을 같이 한다. 공자는 이상적인 성인이 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 해묵은 정쟁의 도구로 등장하는 이념논쟁은 실재를 보지 못하고 허상을 보고 실재라고 믿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생각하게 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형상을 실재라고 믿는다. 즉 밝은 태양이 비치는 바깥세상에서 환히 드러나는 뚜렷한 사물의 현상을 모르고 현실세계에 묶여 자신이 보는 것을 참된 실재라고 믿는 것이다. 권력은 유한하고 역사는 길다.

유혜영(시인, 2001년 ≪미네르바≫로 등단)/촛불-우리의 자식들이 촛불을 켰다. 길이 안 보이나보다. 블랙홀 같다. 깜깜한 곳에서 짚을 지팡이 하나 마련하려고 일생 세금 내도, 손에 지팡이가 쥐어지지 않는다. 자식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 제일 아줌마 나라의 엄마로서 면목이 없다. 잘 먹고 잘 살라고 공부 시켰다. 진화가 빠른 아이들은 밥만 먹고는 행복하지 않나보다. 청량음료처럼 마음이 상쾌한 민주주의와 정의의 갈증을 느끼고 있다. 땀 흘려 키워준 모국의 어둡고 추운 곳에 빛을 나누고 싶고, 동강 난 조국을 걱정한다. 공부 많이 시킨 것을 탓하랴. 6.25전쟁 후에 너나없이 배 채우는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못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으로 권력도 사고 명예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피도 눈물도 없는 황금만능주의가 오만 가지 전쟁을 부르고 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이를 잃은 엄마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엄마들은 안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만이 잘 살고 있는 것을. 엄마들은 거대한 촛불의 물결을 보며 누가 저 불타고 있는 길목을 구출할 것인가, 작은 가슴을 졸인다. 가녀린 촛불을 끄는데 초특급 태풍이나 눈보라는 필요 없다. 우리는 작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 촛불을 끄고 있지.

윤지강(소설가, 1995년 ≪동서문학≫으로 등단)/잔혹한 희망-어딘가에 아름다운 거리는 없는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단 가로수가 잇달아 있고 제비꽃 빛깔의 석양녘은 젊은이들의 다정한 속삭임이 충만한.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六월」의 한 구절이다. 먹을 수 있는 열매는 고사하고, 서울은 전경들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인다. 명동거리를 데이트하던 어느 연인은 “왜 이곳에서 만나느냐?”는 전경의 나무람과 함께, 몇 시간이나 구금되어야 했다. 나는 그저 골방에서 자판이나 두드리는 소설가이다. 현실정치에는 그만큼 둔감했고, 정치를 몰라도 글을 쓰는 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도처에서 장마비에 떠내려가는 듯한 억머구리 울음소리에 나는 무력감을 맛본다. 이런 시대에 그저 글이나 쓰고 앉아 있는 내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진다. 소설가인 내가 정치를 몰라도 상관없는, 그런 사회를 갈구하는 것은 잔혹한 희망일까? ‘희망’이라는 낱말조차 부끄러운 시대에 내가 살고 있는 것인가?

윤홍조(시인,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벽을 향해 통곡한다-지난 해 우리나라에서 첫 우주인을 탄생시키려는 그 전야제 축하석상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달에 단 한 가지를 가져간다면 마실 물을 가져가겠노라고 첫 말을 피력했다. 얼마 전 선거를 치룬 국민들과의 첫 대면의 자리에서 대통령께서 무심히 쏟은 말은 안타깝게도 우리를 실망시키고도 남았다. 그날 그가 나라의 상징물인 무엇을 가져가겠노라고 답했다면 국민들은 그에게 열광했으리라. 그때 말문을 잃고 멍해버린 국민들의 의아한 표정을 그는 눈치나 챘을까. 나라의 소명보다 자신의 안위에 급급하는 한 사람의 필부를 보았을 뿐이다. 그가 명실공히 나라와 국민을 오매불망 생각하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면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말은 튀어나오지 않아야한다. 작금 우리를 힘겹게 하는 여러 현상들은 한 사람의 한계가 낳은 그 독단과 편견의 결과물일 것이다. 죽음에 경배하는 영웅 부재의 시대,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벽을 향한 천지간의 통곡소리여.

이경림(시인, 1989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은 비극을 넘어 무서운 미래를 예감케 한다. 물밀듯 밀려나온 조문객들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전직 대통령 개인에 대한 존경이나 인기 때문이 아니다. 그중에는 현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지 않는가? 그들의 슬픔은 노무현으로 대변되는 참으로 오랜만에 본 순수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권모술수의 정치에 시달려 왔던가? 전직 대통령이 다리를 걷어 부치고 농사짓고 자전거 타고 휘파람 불며 동네를 도는 모습은 우리의 이상향이었다. 그토록 많은 보통 사람들이 일 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봉하마을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군림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던 어느 왕조시대를 재연하려는 듯한 웃지 못할 현실에 대해 사람들은 불안하고 슬퍼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 정권은 깊이 새겨주었으면 좋겠다.

이덕규(시인,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타고난 머슴 MB-근대화 기수의 망령 하나가 21세기 백주의 광장을 점거하고 다시 구태의연한 산업화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불공정 시대에 특혜 받고 웃자란 CEO가 승승장구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 그거, 다 끝난 줄 알고 만세삼창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모두의 환상에서 비롯되었다. 일개 머슴으로 단기간 내 입지전적으로 부를 쌓은 그는 영웅이었다. 한때 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때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문화관광부를 장악했다. 그는 요즘 무슨 농촌계몽 드라마 주인공처럼 좌충우돌하고 있다. 그런 정신 오백 년 나간 배우를 장관으로 등용한 그는 한때 유능한 마름답게 머슴을 부릴 줄 안다. 독재자의 개발 논리에 의해 걸림돌이 되는 한 국가의 정체성을 불도저로 깡그리 밀어다가 쓰레기장에 매립하고 그 위에 아파트를 세울 때, 그도 충직한 머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냥 머슴이 아니었다. 앞서가는 머슴이었다. 그는 주인보다 한 걸음 앞서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실천에 옮길 줄 아는 타고난 머슴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민의 머슴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으로 중무장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기득세력의 기득권을 지켜주기 위해 그들의 뜻을 앞서 헤아리고 실천하는 그들만의 충실한 머슴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나 대견한가, 입지전적인, 전무후무할, 앞으로 우리 정치사에 오롯한 상징으로 남을만한 일을 정권 초기에 창출해냈으니 말이다.

이민하(시인, 2000년 ≪현대시≫로 등단)/우리들의 아프리카-넥타이를 풀며 책가방을 끄르며 원고지를 밀어놓으며, 우리는 밤마다 아프리카―실시간 인터넷 개인방송 미디어―에 모였다. 소 떼의 토네이도 속에서 온갖 새들과 태양이 사라진 2008년 여름. 밤의 연인들은 밀애를 보류했고 학생들은 미래를 보류했다. 2009년 아프리카. 해가 바뀌어도 해가 들지 않는 검은 대륙. 사람들은 촛불을 켜고 약속과 업을 미루고 광장에 모였다. 풀밭을 철거하는 차벽車壁 안에 갇힌 열대우림의 날들. 살수殺水와 화염 속에 뜯겨지고 태워지는 살들. ‘날으는 양탄자’처럼 마법魔法의 신문을 타고 다니며 무서운 번식력으로 국토를 물어뜯고 역사를 갉아먹는 적도敵徒의 땅. 한숨과 비명이 숨소리와 대화를 축내는 검은 초원 위에서 우리는 펜을 잃고 침묵마저 잃었다. 불면하며 쥐덫이나 만들 궁리를 하는 이 지루한 문장을 끝내야 우리는 다음 문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땅이 페스트로 물들기 전에! 사자의 탈을 쓴 쥐 떼들의 폭식증이 아이들의 눈과 귀와 입마저 모두 삼키기 전에!

이성혁(문학평론가, 1999년 ≪문학과 창작≫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반민주와 인권의 추락이 일상화되고 있다-신문을 읽기 힘든 나날이다. 초등학교보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는 국회, 방송을 전리품처럼 취급하는 권력자들, 용산의 희생자에게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고 도리어 건설 자본을 위해 수십조 원을 들여 땅을 엎으려고 하는 정부, 스티로폼을 녹이는 최루액을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을 향해 헬기에서 뿌려대는 경찰 등, 이 많은 어처구니없는 것들. 이쯤 되니 예외적인 상황이 정상적인 일상이 되어버릴 정도다. 정말 그렇게 되면 반민주와 인권의 추락이 나치 시절 독일처럼 사회의 암묵적인 공인을 받게 되어버릴 터, 그때엔 침묵하는 우리 모두가 반동적인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공범자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분노와 항의를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승하(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한말의 문장가요, 역사가요, 우국지사인 황현(1855~1910)은 「절명시」를 써놓고 아편을 술에 타 마시고 절명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합병조약안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황현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더니,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로 시작하는 시를 써놓고 9월 10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국운의 위태로움이 식민지 시대의 전개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현정권의 밀어붙이기식 정책들을 생각하니, ‘난리’에 버금간다. 멀쩡한 4대강 개발에 30조원이 든다고 한다. 할복이라도 해야 하거늘 나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금붕어처럼.

이영수(시인, 1998년 ≪문학동네로 등단)/나는 뭣고-참 많은 것을 보고 살았다. 아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았다. 속도에 미친 이 디지털 시대에 뭘 보고자 하는 걸까. 양방향 소통인가, 아님 일방적 소통인가. 우리에게 무슨 이해 못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진실은 어느 산 오솔길을 스치듯 넘어가는 바람 같을까? 넘어가다 언뜻 나뭇잎을 흔들며 배후를 보여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가. 요즈음 일방적인 빠름에 너무 혹해 있다. 그래서 나는 느림에 대해 말하려 한다. 늦게 가더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것이 내 바램이다.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슬퍼하는 것도 맘대로 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다시 거리에 등장하는 괴물버스와 거리의 아우성. 그들은 이미 지나간 오욕의 시간을 되돌려 살지 못해 환장한 사람들 같다는 느낌이 든다. 참 불편하다고 스스로 반문하는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의 보통사람이 분명 아니다.

이재무(시인,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과거들이 돌아왔다-나는 MB 정부가 들어서던 그 해 계간 ≪시와 반시≫ 봄호에 「과거들이 돌아왔다」라는 제목의 시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불길한 예감이 낳은 시편이었다. 예감은 예감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화되었고 갈수록 그 증세가 심화되고 있다. 과거들이 현재를 억압하고 미래를 유기하는 사태가 우리의 일상을 관철하게 된 것이다. 점령군처럼 돌아온 과거의 어깨들이 민의를 왜곡 굴절시키고 양심에 호소하는 입에 재갈을 물리더니 마침내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갔다. 사실상 정치적 타살을 자행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정치의 일방통행 즉 독재를 단 한 번도 용인한 적이 없다. 지금은 힘에 의존한 알량한 물리력으로 돌아온 늙은 과거들이 활개치고 있지만 과거는 과거이므로 이제 곧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빨리 본분을 깨닫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현재의 젊은(생물학적 연령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차원에서) 우리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책 속에 누워 자던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문구를 다시 책 밖으로 불러내야 한다.

이정석(문학평론가,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나는 분노한다. 그동안 어렵게 이룬 민주적 가치와 제도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이 막막한 현실에.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그러므로 나는 분노한다. 자의적인 법 적용과 공권력의 오남용으로 법치가 인치에 유린당하는 작금의 현실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며 공동체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사회다. 그러므로 재벌귀족ㆍ언론귀족ㆍ법률귀족ㆍ토건귀족의 카르텔이 지배하는 현대판 과두정치를 획책하며 민주적 제도와 절차를 사적 이익과 기득권 수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움직임을, 나는 분노로 경계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사회적 시장주의를 주창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정의와 분배와 기회의 균등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망동을, 나는 분노로 경계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공화국의 가치와 제도는 아직도 미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애써 일구어 놓은 민주적 가치와 제도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동시에, 그것을 보다 가치 있고 완성된 형태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민주공화국’을 위해 사유하고 창조해야 한다.

이정현(문학평론가,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특정언론을 통해 기만적으로 소통을 말하며 ‘국민을 위한’ 이라는 수식어를 남발하는 한나라당과 MB정부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지 않은 ‘합법적인 정부’다. 바로 이 자명한 사실이 슬프다. 정치는 언어를 가지고 행하는 가면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가면놀이의 주역들인 현 정부와 MB는 껍질 속에 틀어박혀서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했던 우리들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사랑이라든가, 정의라든가, 소통이라든가, 발음할 때마다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괴물들의 말을 아무런 수치심 없이 받아들이거나 체념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다만 분명하게 남는 것은 고통뿐인 것을, 알고 있느냐고 말이다. 인간은 패배를 통해서 배운다. 인간은 자신이 의도하는 만큼 빨리 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괴물의 언어와 소통불능의 현실을 통해 서둘러 배워야 한다. 발레리의 말처럼, 용기를 내서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무서운 사실을. 지금 우리의 언어는 견고해 보이는 괴물들의 질서에 균열을 가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초우(시인, 2004년 ≪현대시≫로 등단)/요보셔요 대통령님, 그리고 함께 가는 님들이여-요보세요 대통령님, 그리고 함께 가는 님들이여, 나무가 님들의 정부政府라 하면, 바람과 더불어 사는 게 나무라지만 새들과도 함께 사는 게 나무가 아닌가요. 아직도 당신들은 봄날만 이어지는 강남 투기 해제에만 안달인데, 새벽의 뻐꾸기 소리 듣고 긴 세월 누린 영화榮華를 제발 좀 잊어주고, 배고팠던 50년 전 유년을 떠 올려 주시고, 허기진 늦은 오후 산비둘기의 슬픈 울음소리도 좀 듣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서민들의 애환을 헤아려주고, 거기다 품 넓게 어깨 쳐진 예술가와 철학자의 그늘도 헤아려 주오. 까치 소리만 듣는 게 나무가 아니듯 들녘을 회오리치는 갈까마귀들의 말씀이나, 때로는 송골매가 당신들의 정수리를 휘저어 나는 뜻도 헤아려 받아 적어야지요. 비록 좁게 보이는 가슴이고 왜소한 몸매라지만, 겁쟁이나 소인배처럼 보이질 말고, 대양보다 더 큰 상대를 품어 안는, 그런 분이 되어 주소서. 꽃보다 더 아름다운 연둣빛 이파리들의 찬란한 세상을 위해서는 길 떠나는 기러기 혼자 나는 법 없으니, 혼자 맴도는 한 마리의 학鶴이 되질 말고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 또한 덩치만 큰 숲이지, 이 한 여름 잎도 없는 앙상한 나무 되어 그늘도 없고 바람 한 점 없어 가면 갈수록 답답하고 열만 차이니, 제발 제대로 한 번 나는 기러기 떼의 향도들이 되어 주소서. 팔월의 강풍과 엄동설한의 눈보라를 두러워하지 마오. 나무의 근육질 단단해지고 모양 또한 귀하게 될 것이며, 새벽의 뻐꾸기 소리 예사로 듣지 말고, 40년 전의 배고픈.

이태선(시인,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이빨 갈며 잠든 환자-시간이 지나면 넓고 깊어지는 것이 있다. 발효 또는 숙성된 것이 그것이다. 몇 달 전 5월의 봄날 아침, 뉴스 자막을 통해 일상적 뉴스 같은 뉴스의 자막을 보며 저게 무슨 말이야? 자신에게 혼잣말을 하며 뉴스를 보게 되었다. 뉴스는 사실이고 그 사실로 인하여 나는 내 개인사의 슬픔을 간직한 채 또 다른(나의 밖) 슬픔을 복습하고 그 지느러미 무턱대고 자라는 시간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덕수궁과 봉하 마을의 조문 행렬은 나의 지느러미와 더불어 너울거리는 물결 같아 나는 집안에서 멀리까지 슬픔을 더 헤엄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슬픔의 끝에 닿아야 거기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은 왜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슬픔을 학습하게 하는지. 아픈 가슴을 반복해서 아프게 하는지. 그들의 귀는 뚫려서 무얼 듣는지. 서울광장을 막고 아예 귀를 전경차로 틀어막고 마이웨이 하겠다는 태도를 보면, 나는 언젠가 병실에서 밤새도록 이빨을 갈며 잠자던 환자의 잠버릇이 떠올랐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환자의 무의식을 상상했었다. 얼마나 분한 일이 있으면 자신도 모른 채 저렇게 분을 삭여야 하는가, 라고. 의학적으로 웃기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 했었다. 그 잠버릇을 빌려 현 시국에 대해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다. 그 끔찍한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그나마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일찍이 “복지사회란(이상적인 나라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이어야만 한다” 라며 김수영이 꿈꾸었던 그런 사회가 나는 지금 그립다. 다행히 돌과 바리케이드보다 힘센 페이퍼 스톤을 행사할 날이 오면 나는 쾅 나의 힘을 행사할 것이다. 대안 없이 그날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다. 날마다 역한 냄새를 풍기며 정작 발효나 숙성은 되지 않은 채 지금 반찬 또 내놓고는 맛보라 할 것 같은 작금의 판이. 

임동윤(시인, 1992년 <문화일보> 시조, 1996년 <한국일보> 시 당선)/정치세력들의 양극화 골이 점점 깊어간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 그러다보니 국민은 불안하다.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위정자가 그립다. 한때,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을 가지고 말이 많았다. 대통령으로서 입에 담지 못할 언행이라고, 자질이 모자란다고, 싸잡아 비난들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는 국민보다 한 발 앞서간 사람이었다. 권위를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집 아저씨처럼 국민과 소통해왔기 때문이다. 여전히 권위만 앞세우고 소통은 전혀 없는 MB 정권. 이제부터 그가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만 한다. 과감히 권위주의를 버리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춰야만 한다. 그래야만 골 깊은 양극화를 줄일 수 있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장재원(시인, 2008년 ≪리토피아로 등단)/천 년 만 년 거듭거듭 살아나-민들레는 박명의 세상 구석구석을 밝힐 불씨를 날린다. 새 불씨는 공장 갈라진 벽 틈에서 촛불을 켠다. 위태한 옥탑방 지붕 위에서도 촛불을 밝힌다. 감옥 철문 밑에 깔려서도 촛불을 사른다. 모든 불씨는 유독 개똥밭 같은 곳만 골라서 봉화를 올린다. 나라 안 개똥밭이란 개똥밭에는 어김없이 횃불을 켜든다. 상개똥밭에서는 어깨동무한 채 별처럼 많은 심지를 돋운다. 그 가녀린 촛불 다시 불어 끄지 마라. 그 슬픈 촛불 심지 다시 깔아뭉개지 마라. 정의로운 물벼락에 실낱 같은 연기로 꺼지고 마는, 나라 위한 거친 말발굽 밑 애잔한 풀빛으로 사라지고 마는, 그 어리석은 민들레 불씨들. 천 년 만 년 거듭거듭 살아나 촛불, 촛불 켜드는 것, 보지 않았는가. 

전기철(시인, 1988년 ≪심상≫으로 등단)/유령들-오목한 밤 터널 안에서 소녀가 절규해요. 소녀는 보이지 않아요. 어둠 속에서 모든 사물들이 일어나 비명을 질러 소녀의 절규를 찾을 수 없어요. 가로수는 키득거리며 조롱하고 점방들은 칭얼대요. 걸어다니는 못이 찍어놓은 연화문을 따라 소녀를 찾아다녀요. 10층이고 20층 높은 빌딩 창문에서 떨어지는 눈! 눈! 눈! 절규를 닮은 피라미 눈! 광화문이나 종로를 어슬렁거리며 소녀의 절규가 웅크리고 있음직한 문에 비표를 찍어 놓고 돌아서면 어둠을 하얗게 말아 담뱃불을 빌리는 사람들 잘근잘근 잘 두들겨 패 잡은 개고기를 먹고 나온 사람들 피닭을 먹어 입에 피를 묻힌 사람들 이빨을 쑤시며 길에 떨어진 눈을 밟고 걸어요. 얼굴이 없어요. 터널 안에서 소녀가 절규해요. 터널은 역사의 반대편이나 철길 너머 얼굴을 찌그려 놓는 거울에 있어요. 절규를 닮은 아우성들! 한 꺼풀의 어둠을 걷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유령들을 뜯어먹는 개들이 으르렁거리고 비둘기들은 찌꺼기를 청소하느라 분주해요. 신발을 신지 않은 유령들이나 피가 모자란 유령들, 폴락의 숲처럼 엉킨 골목에서 기진맥진 도망 다니는 먼 흑룡강이나 앙가라강에서 온 유령들, 개들을 피해 교회의 지하실로 숨어요. 소녀가 절규해요. 보이지 않는 소녀가 절규해요. 영원히 죽는 방법을 모르는 유령들이 어둠의 휘장 너머에서 사람들이 뱉어 놓은 가래침을 먹거나 욕설을 먹으며 죽는 연습을 해요. 가끔 허기가 지면 네온을 먹고 펄럭이기도 해요. 오목한 밤 유령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밤, 개들에게 물어뜯긴 유령들이 지하도로 다녀요. 소녀의 절규가 걸어다녀요.

전성욱(문학평론가, 2007년 ≪오늘의 문예비평≫으로 등단)/문학이 무기가 되고 문인이 투사가 되는 시대는 불온하다. 그것은 생명을 섬기는 농부의 낫과 괭이를 살육의 도구로 역전시켰던 반역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불온한 시대의 문학이 삶의 평온을 바라는 가장 예민한 감성의 전위에 서지 않는다면, 그런 문학은 생명의 죽임을 방임하는 가장 야비한 무엇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은 곧바로 투쟁일 수 없다. 농부들의 손에 쥔 낫과 괭이의 거룩한 외침을 능가하는 위대한 문장이란 무엇인가. 루쉰은 한 젊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여부는 인간에게 있지, 글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소.” 무릇 세상에 참견하는 문학은 이 말의 참뜻을 깨달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 몇 줄의 문장들, 어딘가의 선언들보다 거리와 광장에 서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들에 더 큰 힘이 있다. 문학의 사회적 역량이란 바로 이 사실의 새삼스러운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정민나(시인,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역사-2009년 검찰의 이중 잣대로 희생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차를 묵묵히 뒤따르던 민심은 또 다시 분노하기 시작했다. 용산 철거민들, 새까맣게 떨어지게 한 절체절명의 옥상 모서리가 지워지지 않는 가운데 권력과 부자 정당의 이미지를 부풀리면서 비정규직 자들의 처우개선이나 언론 악법과 남북대화 등 대한민국 민의를 역행하는 일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하기 때문이다. 1954년 4사 5입 개헌을 강행한 대통령이 독재 집권의 첫발을 내딛은 이후, 1961년 직선제 개헌-3선 개헌-유신헌법 제정 등으로 5, 6, 7, 8, 9대 째 선출된 대통령과 12, 12 쿠데타로 정국 주도권을 움켜쥔 이 나라에서 부정과 폭력으로 권력을 탐했던 전직 대통령은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는 민의를 거슬리는 일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정숙자(시인,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우리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계절이 있다-시인이란 국가가 위급할 때 칼 대신 붓을 잡는 자이다. 남의 고통도 제 안에 들여 숙고하는 자이며, 못 다 울고 죽은 이의 피눈물조차 덖고 깨물고 삭이는 자이다. 바위인들 어찌 눈 코 귀 입이 없을 것이며, 바람인들 타는 가슴과 피와 살과 뼈가 없을 것인가. 그들은 다만 보았으되, 들었으되, 맡았으되, 알고 있으되, 영구-함구하는 대자연이며 대자유일 따름이다. 조선의 어진 왕은 몸소 민정을 살피기 위해 변복으로 미행도 감행했거늘, 어린 백성의 억울함을 덜어주려고 신문고도 안배했거늘 오늘의 ○○○은 왜 눈 코 귀 입을 사용치 않는 것인가. 혹시 우리 ○○○께서도 대자연이며 대자유인 바위와 바람의 덕을 흠모하여 닮으려는 것인가. 영명하고 성실하신 ○○○이시여! 어제까지의 일이야 뉘라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통촉하소서. 통촉하소서. 봉쇄된 광장을, 무시당한 촛불을, 신문고의 울림보다 못할 리 없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을 참작해 주오소서. 오백만 양민의 눈물이 강을 이루었으니 손수건 한 장 건네 주오소서. 선왕도 당신 치세의 국민이 아니었습니까. 차기 대통령한테는 당신도 선왕이 아니겠습니까. 영명하고 성실하신 ○○○이시여! 간절한 뜻을 저버리지 마오소서.

정준영(시인, 2006년 ≪시선≫ 시 신인상, ≪애지≫ 평론 신인상)/그 꽃-꽃은 진다. 꽃잎이 시들어 힘없이 떨구어 꽃은 진다. 꽃은 져서 짧았던 영화를 한 겹씩 누렇게 말려가며 꽃은 진다. 고개가 꺾이고 꽃잎이 찢겨져 줄기가 부러져 꽃은 진다. 피었던 것이 억울하여 꽃은 진다. 스스로 제풀에 힘없이 진다. 힘 있는 손으로 한 번 훑으면 꽃은 피었던 흔적도 없어라. 힘없는 것을 짓밟는 것에 꽃은 진다. 처참함을 마다 않고 꽃은 진다. 어이도 없이 꽃은 진다. 꽃은 힘이 없다. 그러나 꽃은 핀다. 꽃집에도 길가에도 낯모를 가슴에도 숨어서도 꽃은 핀다. 봉오리로 꽃잎으로 꽃은 핀다. 향기로 벅참으로 꽃은 핀다. 밤에도 낮에도 꽃잎을 연다. 겨울을 지나 먼동처럼 연한 살 그어진 꽃잎 위로 꽃은 핀다. 헛것을 쫓아내려 허공 중 팔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는 신기루 돌아서면 꽃은 핀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저 혼자만의 집중으로 꽃은 핀다. 부러진 칼날 위에 이리저리 제 얼굴을 비춘다.

정진경(시인, 2000년 <부산일보> 신문문예 당선)/국밥집 CF, 당신의 그 모습을 원합니다-침묵시위, 인류의 공용어가 소통되지 않는 정권을 민주주의 정치라 할 수 없다. 먹거리 자유를 위해 촛불을 켠 초등학생들을 수사 대상으로 삼고, 국민들이 소통하는 광장인 인터넷 댓글까지 장악하는 정권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다. 신뢰는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의 통행으로만 이루어진다. 학벌 없는 대통령을 공략하던 조․중․동의 야비한 패기,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회의 지도층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이 통탄스럽다. 대선 때, 국밥집 할머니 찾아가는 이명박 CF를 보면서 잘 만든 홍보물이라 여겼다. 정치적으로 이명박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이 되었을 때, 동지상고 야간을 나온 사람이라는 데에 희망을 걸었다. 고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서민들 마음을 헤아릴 거라는 믿음, 그런데 어느 대통령보다 서민을 더 멸시하는 그의 귀족주의적 태도가 온 국민을 분노하게 한다. 이명박 대통령님! 국밥집 CF, 서민을 살피는 자상한 그 모습을 원합니다.

조성심(시인, 2004년 ≪열린시학≫으로 등단)/민심은 천심이라 했던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를 타던 소탈한 웃음은 이제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습니다. 정치적인 이념을 떠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길을 택해야만 했던 그날 국민의 가슴속에는 파란 멍이 들었습니다. 오랜 친구도 마지막을 보지 못할 만큼 온몸 금 가 보는 이들을 아프게 했습니다. 역사는 말해 줄 것입니다. 당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역사로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 조선의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붕당정치는 치열한 정쟁으로 이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지역 계층 이념 간 심한 분열을 앓고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언론이 살아 숨 쉬는 그런 정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순애(문학평론가,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나는 평화가, 그리고 자유, 평등, 정의, 사랑, 정직, 신의, 유연, 꿈, 하늘, 자작나무, 아카시아, 그 꽃, 대나무, 매화, 강, 호수, 시내, 송사리, 빨래터, 손주를 업은 할머니가 서 있는 논둑길, 오솔길, 이슬, 선물 같은 것이 좋다. 힘, 권력, 차별, 경직, 억압, 강요, 전체주의, 획일주의, 폭력, 불의, 90도 각도로 등이 굽은 할머니가 종이를 줍는 쓰레기장이 있는 골목길, 권위적 장치, 굴복, 배반, 교활, 유언비어 앞에서 추풍에 낙엽 지듯 추락하는 생, 뇌물 같은 것이 있어서 나를 슬프게 한다.

채은(시인, 2003년 ≪시작≫ 신인상)/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따라서 지금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지금 이곳은 애석하지만 대한민국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따라서 지금 이곳은 명백히 대한민국이 아니다.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따라서 지금 이곳은 결코 대한민국이 아니다.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따라서 지금 이곳은 확실히 대한민국이 아니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따라서 지금 이곳은 대한민국이 절대로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 아무리 따져 보아도 지금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엔 대한민국이 없다.

천수호(시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새들도 다시 세상을 뜨는구나-극장에서 ‘대한 늬우스’를 다시 상영한다. 영화를 보려면 4대강 살리기 홍보 동영상을 봐 줘야 한다는 얘기다. 문광부의 이 친근한 개그정책이 여성비하의 내용을 담고 있다니 더욱 황당하다. 황지우 시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떠오른다. 새떼들의 대열에 끼여 함께 날아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주저앉아 우리는 또 그 대한 늬우스를 경청해야 하는가. 나날이 이렇듯 해괴한 기사들이 올라오니 새아침을 맞는 것이 두렵다. 고3 수험생인 딸아이도 입시에 대한 부담으로 아침이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제 둘째아이까지 수험생의 길로 내몰아야 한다. 고교 평준화를 해체하고 고교 입시체제를 부활시키려는 자율고 설립 계획은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부담이다. 이처럼 비창조적인 제도로 회귀하는 것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상천외한 기사가 떠오르지 않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살고 싶을 뿐이다.

최명진(시인, 2006년 ≪리토피아≫로 등단)/조기교육, 언론 장악, 재벌정치, 환경 파괴, 전쟁, 테러 등등 나라마다 잘 사는 나라 만들기 위해 참 애들 많이 쓰신다. 비관자살, 언론조작, 빈부심화, 환경오염, 고아, 난민 등등 그러기위해선 참 당연할 것도 많다. 어떤 불행한 노인네는 간밤에 포탄이 떨어져 다리가 잘려나가고, 어떤 땡 잡은 노인네는 간밤에 미끈한 다리 쓰다듬으며 나라일 걱정하고, 참 사람일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어떤 신문은 낚시나 가라하고, 어떤 신문은 집구석이 좋다하니 참, 어느 장단에 맞출까. 그냥 혼자서 놀아야 하나. 요즘 나라도 시끄러운데 딱히 나라 위해 할 일은 없고, 나라가 가르쳐준 기술이라곤 군대에서 총 다룬 것밖엔 없고, 전쟁이라도 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곤 싶은데 목숨이 아까워 그건 못하겠고, 대한늬우스라도 홍보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요즘 들어 정말 애국하고 싶은데. 기어이 삽자루라도 들어야 하나?

최서림(시인, 1993년 ≪현대시≫로 등단)/부끄럽다-대한문 옆 담벼락에 붙여진 쪽지에서 본 글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다수가 부끄러움을 아는 한 사람을 죽였다.” 잘못을 한 자가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사회가 부끄럽다. 잘못된 길로 가는 권력에 대해 침묵해온 것이 부끄럽다. 힘과 돈을 가진 자들을 위한 정치가 국민 모두를 위한 정치인양 내세우는 현실이 부끄럽다. 단지 소통만이 문제는 아닌데, 자꾸 소통이 문제라고 한다.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경쟁과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모든 것을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이 안타깝다. 진심어린 비판에는 귀를 막고 참고 인내하면서 침묵하는 다수는 자신들의 응원군인양 착각하는 무감각한 오만이 두렵다.

최옥정(소설가, 2001년 ≪한국소설≫ 신인상)/어지럽다. 오직 어지러울 뿐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자고 일어나면 큰일들이 터져 있다.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구체적인 물음에 부딪쳤을 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딱 꼬집어 말해줄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속 시원할까. 우리가 만나는 매체와 지식과 말들은 점점 삶과 멀어지고 있다. 참한 사람, 참한 제도, 참한 말들이 그립다. 더불어 연대와 자치라는 오래된 다짐도 떠올려본다. 선참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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