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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신작단편/혹/송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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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395회 작성일 09-12-20 23:51

본문

|신작단편|

송은일





1.
내도록 그의 이름을 몰랐으므로 레디삐라 불렀다.
레디삐가 순용의 가게에 처음 찾아온 날은 눈이 내렸다. 일요일 오후였고 소리를 작게 켜놓은 라디오에서는 영어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어깨며 머리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털며 들어서던 그가 레디삐네, 했다. 그리고 신발 다섯 켤레가 든 비닐봉지를 순용에게 건네주고는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들었다. 그의 신발들을 고친 한 시간 반 정도 함께 있었다. 그동안 순용은 레디삐가 이따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일 잘하는 사람은 참 아름다워요, 라거나. 자기 일 잘하는 사람 쳐다보는 건 아주 재미있어요, 라거나. 순용은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일만 했다. 컨테이너에 달린 창에는 수증기가 잔뜩 끼었고 밖엔 눈이 쏟아졌다. 이상하고 외로운 하얀 나라에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레디삐의 발등에 돋은 혹을 발견했다. 검은 양말을 앙증맞게 밀며 솟아있던 살구 씨만 하던 혹. 양말을 벗기고 그 혹을 만져보고 싶었다. 
몇 켤레를 가지고 오든 그 신발들의 수선이 다 끝날 때까지 컨테이너 안에 앉아서 기다리는 레디삐의 습관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말도 거의 없이 망연히 자신의 신발을 만지는 수선공의 손놀림만 쳐다보는 손님이었다.
오늘 레디삐의 진짜 이름을 알았다. 고윤초라 했다. 

2.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측면으로 찍힌 발등의 혹은 작은 무덤 모양이다. 정식 명칭이 결절종이라 했다. 피부는 연한 회색빛이고 그 속에 든 타원형의 결절종은 투명에 가까운 흰빛인데, 혹의 색은 발을 이루는 뼈나 힘줄들의 빛깔과 같았다. 혹은 그러니까 뼈의 일종인 것이다. 뼈를 깎는 아픔을 또 겪게 생겼네, 싶어 윤초가 설핏 웃으려는데 모니터를 통해 혹을 보여주던 밋밋한 표정의 의사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뼈의 변형 증세는 아직 없습니다만, 이대로 두면 조만간 주위의 조직을 압박하면서 통증도 느끼게 되실 겁니다. 수술을 하시죠.”
사진으로나마 발등에 달린 혹의 속내를 목격한 것은 처음이다. 이전에는 사진도 찍어보지 않고 곧장 혹을 도려냈는데 매번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재발했다. 이번에는 혹시 다를 지도 모른다.
“오늘 안에 수술해 주실래요?”
“응급 상황도 아니고, 불가능합니다. 보셨겠지만 현재 대기 중인 환자만도 서른 명이 넘습니다.”
오늘 기필코 혹을 떼어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 왔지만 그건 윤초 사정일 뿐 의사입장에서 보자면 응급상황이 아닌 게 분명했다. 백수 된지 4주째였다. 설상가상이라더니 어제는 집주인이 한 달 안에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오래된 이층 양옥을 헐고 오층짜리 원룸 빌라를 짓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발등의 불이 아니라 발등의 혹이 눈에 띈 건 오늘 새벽 변기에 앉았을 때였다. 때로는 콩알만 하다가 가끔은 앵두만 하고 어떨 때는 체리만한 크기가 되는가 하면 바람 빠진 물풍선처럼 푹 퍼져서 사라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혹이 호두알만큼 부풀어 있는 게 아닌가. 불쑥 커진 혹을 발견한 순간 질금질금 나오던 오줌이 뚝 끊겼다. 지랄! 욕이 나왔다.  
지방도시 신문사일망정 시험 치러 정식으로 입사했다. 입사 6년 만에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사태가 났다. 그만 둘래, 계약직이 될래? 라는 선택조건이 주어졌을 때 물에 빠질래, 사막으로 걸어갈래? 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때 그만 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윤초는 그렇게 못했다. 계약직이 되었어도 정규직이었을 때와 똑같이 일했으므로 그 다름을 크게 실감하지도 못했다. 일 년 한 차례 계약을 갱신할 때도 의례적인 것으로 여겼다. 계약직으로 4년을 마감하던 지난 3월 말, 회사로부터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통고를 받았다. 해고당한 전직기자한테 편집국장이 위로해준답시고 농담인양 말했다. 자유롭게 기사 써. 프리랜서가 된 거잖아.  
프리랜서는 모든 것에서 프리였다. 월례 기획회의, 주례 기획회의, 일일회의를 거쳐서 꺼리를 정하고 취재하고 쓴 다음에 데스크의 확인을 거쳤던 기사를 혼자 찾아 쓰고 납품해야 했다. 납품한 기사를 실어줄지 말지는 그들에게 달려있었다. 그래서 실업자가 된지 사흘째 된 날부터 발악하듯 기획꼭지들을 만들고 시놉시스를 첨부해 안면이 있던 매체의 데스크들에 보냈다. 안면에 대한 대접이었던가, 답은 쉽게 돌아왔다. 현재 진행 중인 기사들과 변별성이 없다거나 시의적절치 않다거나 의논을 해 보겠다거나. 어떻게 표현했든지 모두 거절하는 답신이었다. 열 곳엘 보냈는데 겨우 한 군데 이 지역 ‘주간신문’에서, 그나마 일단 기획한 기사 한 꼭지를 완성해 보내 보라는 답을 주었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설마 지면 몇 개 찾지 못하랴 여겼던 낯이 뜨겁게 저렸다. 
부슬비 날리는 4월 하순의 거리가 음산하다. 7,8년 전만해도 꽤 넓은 개천이 흐르던 자리였다. 그때 개천 저쪽은 산자락에 면해 있었고 아카시아와 잡목과 수풀이 우거졌다. 그 사이에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드문드문 박여있었다. 개천이 복개되고 그 위로 8차선의 도로가 생기면서 이 거리에 들어선 각종 의원이 수십 곳이었다. 의원이며 약국들을 따라 사람이 모이니 노점시장이 생겼고 옷가게들이 들어왔다. 신발수선 가게는 훨씬 전부터 이쪽 어름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컨테이너 박스가 건너편 치과와 이비인후과와 안과와 약국과 안경점이 든 6층 건물 옆 귀퉁이로 옮겨간 간 뒤 윤초는 그의 손님이 되었다. 수선공은 마흔 살은 넘고 쉰 살은 넘지 않았을 듯한 여자였다. 그의 왼쪽 볼과 목 부분에는 느릅나무껍질 조각을 떼어 붙인 것 같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수선소에 처음 갔을 때 그이가 손님을 정면이 아니라 측면으로 앉아 맞을 수 있게 된 가게의 구도를 그의 볼을 보고 금세 수긍했다. 그이는 거의 오른쪽 얼굴로만 손님을 상대했다. 
“밑창을 덧댈까 봐요. 뒷굽 갈구요.”
윤초가 약간 젖은 로퍼를 벗고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자 주인이 신을 올려놓으라는 듯 작업대 위에다 신문지를 깔았다. 신문지 위에 얹힌 연회색의 로퍼는 밑창이 절반쯤 닳았고, 젖은 부분이 진회색으로 변한데다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십년쯤 끌려 다니다 내버려진 신발 같지만 실제로는 두 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발등의 혹이 좀 더 커졌나 보네요.”
수선공의 읊조림에 윤초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에게 신발수선을 맡겨온 지 5년이었다. 그이가 신발을 보고 주인의 발 상태를 짐작하는 건 당연했다. 남의 발등에 신경 쓰지 않을 거 같은 사람들도 어이없을 만큼 쉽게 윤초 발등의 혹에 눈길을 주었다. 발등이 왜 그래? 아이구, 혹이 났네! 혹을 지적 받을 때마다 윤초의 몸 어딘가에서 혹들이 비온 뒤의 죽순처럼 돋았다.  
“그래서 또 수술을 하기로 했어요. 열흘 뒤에요.”
중얼거린 윤초는 신문지를 잔뜩 품은 작은 채 선풍기 밑으로 옮겨지는 자신의 신발을 한참 쳐다보았다. 윤초가 주간신문에 보낸 기획꼭지의 타이틀은 ‘삶의 현장, 그 빛과 그늘’이었다. 실업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기 싫어 미친 듯 기획서를 만들어 연달아 띄우다가 아홉 꼭지 만에 바닥났다. 내 바닥이 여기구나 싶었을 때 눈에 띈 게 자신의 혹과 혹을 덮고 있는 흉터였다. 그 순간 누군들 흉터 하나 없으랴, 싶었다. 그 흉터에 얽힌 상처가 있을 것은 당연지사. 혹이 무궁무진한 화제를 내장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그 첫 번째 취재원으로 떠올랐던 대상이 이 컨테이너의 주인이었다. 여자로서는 드문 신발수선장이. 능란한 손놀림. 그이 손을 거치면 새것처럼 반짝이며 되살아나는 신발들. 그이 몸에 짙게 새겨진 상처의 흔적. 윤초가 그의 흉터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은 흉함이 아니라 고립감이었다. 저이는 저 흉터에 갇혀 살겠구나. 이 상자가 저이의 감옥이거나 섬이겠구나. 
그 무렵 계획했던 결혼이 깨진 사건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결혼하기 위해 남자의 부모한테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남자의 모친이 며느릿감 발등의 혹을 발견하고 시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혹에 대해 묻지 않고 윤초 엄마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 물었다. 모친한테 그런 말도 했나 싶어서 남자를 쳐다봤더니 계면쩍게 웃으며 외면했다. 비위가 상했으나 그건 발등의 혹처럼 숨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고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가 이혼하고 재혼해서 무난히 살고 있노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동시에 이 여인의 아들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생각대로 되었다.  
어쨌든 지금 윤초가 그이를 향해 기획기사를 운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신발 속에 숨길 수도 있는 발등의 혹 하나를 자신에게 생기는 모든 액운의 핑계로 삼고 엄살떨며 살아왔지 않은가. 그이는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상흔을 얼굴이며 목에다 붙이고 있었다. 목 아래 몸에는 어느 만큼의 화상 자국이 있을지. 그런 그이에게 자신의 일이 무슨 상관이라고 취재 운운한단 말인가. 그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으려니와 하고 싶지도 않다. 그나저나 이사를 어디로 해야 할까. 이 도시에 더 있을 필요가 없어진 마당이었다. 컨테이너 밖에 내리는 빗발이 점점 거세졌다. 

3.
고윤초가 저녁을 먹지 않았을 것 같아 밥을 먹이고 싶지만 밥을 먹자고 하기엔 자연스럽지 못한 것 같아 술을 마시자고 했다. 차순용은 윤초를 데리고 먹자골목 안쪽의 ‘후야네’ 식당을 향해 5백 미터쯤 걷는다. 막연했지만 이런 순간을 오래오래 기다렸던 듯했다. 이게 혹시 사랑일까? 이십여 분전, 다녀간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윤초가 불쑥 나타나 찾아온 내역을 설명할 때, 떨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닐까. 걸음이 자꾸만 헛짚이면서 속이 떨린다.
후야네는 장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다가 들어선 두 사람을 보고 화들짝 반기다가 소리쳤다. 
“어머나, 내 손님을 어떻게 형님이 모시고 왔어요?”
후야네는 그냥 밥만 파는 밥집인데 단골이라면 고윤초가 밥해 먹기 싫을 때마다 여기 와서 끼니를 해결했다는 뜻이다. 
“우리 술 먼저 주고 안주 좀 만들어 봐. 배부를 수 있는 맛난 것으로.”
후야네가 냉장고 안쪽 깊은 곳에 둔 소주병과 깍두기 접시와 물잔 두 개를 먼저 가져다 놓아준다. 후야네는 깍두기와 열무김치를 소문나게 잘 담갔다. 덕분에 탁자가 여섯 개뿐인 가게에서 3,4천 원짜리  밥장사로 장애 가진 아이를 수발하면서도 근동의 아파트까지 장만했다. 물론 일 년 내내 쉬는 날이 거의 없이 가게를 여는 악착스러움 때문이기도 했다. 순용은 물 잔에다 소주 한 병을 정확히 반으로 나눠 따른다. 한 잔을 윤초한테 건네고는 자신의 잔을 들며 웃어 보인다. 장난스런 기분이었다. 간지러운 기운이 잔을 든 손끝에서 스멀거렸다. 
“이건 도원결의桃園結義도 아니고, 무슨 막가파 조직 입단식 같네요. 재밌어요.”
잔을 든 윤초가 도원결의라 하는데, 들어본 것 같기는 해도 순용이 알지 못하는 말이다. 보통 때 뜻을 모르고 듣는 말들이 있어도 불편해 본 적이 없는데, 도원결의가 막가파 조직 같은 뜻이구나, 짐작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오래도록 그의 이름을 대신해 불렀던 레디삐만 해도 그랬다. 레디삐가 ‘렛잇비’라는 아주 유명한 팝송의 제목이고 내버려두라는 뜻이라는 걸 알기까지 오래 걸렸다. 부끄러워 물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초가 온 몸에 흠집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하얀 표정으로 눈도 찡그리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다. 그 기획이라는 게 다급하긴 한 모양이다. 순용이 자기 몫의 소주를 비우고 잔을 내려놓는데 윤초도 동시에 잔을 내려놓다가 큭, 재치기를 한다. 귀엽다.  
“맵네요.”
진저리를 치며 중얼대는 윤초 때문에 순용의 가슴 속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후야네가 소주 두 병을 더 가져다 놓더니 양파를 듬뿍 넣은 불고기를 프라이팬 째 들고 와 탁자에 놓고는 순용 곁에 앉았다. 순용이 소개를 시키자 윤초가 엉거주춤 일어나 인사했다.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를 향해 박경옥이 손을 내밀었다. 방금 고기를 볶고 온 투박한 손에 잡힌 그의 손이 창백하다. 
“반가워요, 고윤초 기자님. 아이, 재미없고 복잡하다. 나보다 훨씬 어려보이니 그냥 이름 부를게요, 윤초씨. 근데 두 사람이 어떻게 이 시간에 나한테 같이 왔대요?”
순용은 경옥에게 전직 기자 고윤초가 자신을 찾아 온 경위를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난 경옥이 잔을 들었다.   
“하고많은 이야깃거리들 다 놔두고 우리 같이 재미없는 사람들을 이야깃감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게 이상하지만 어쩐지 짠하네. 술 마셔요. 맨 정신으로 그냥 하긴 쑥스러운 이야기들, 나하고 형님은 이따금 안주 씹듯이 나누는 이야기들인데 못 들려줄 것도 없겠지. 형님, 얘기하시구려. 어차피 우린 지금 술친구들이잖아.”
경옥은 시원시원하게 멍석을 깐다. 어쩌면 그 때문에 윤초를 이 가게로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없는 흉터라도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른 해 넘게 덮어쓰고 있는 흉터 얘길 못할 게 뭔가. 순용은 소주 한 잔을 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여중 일학년 겨울, 갓 설을 지낸 뒤였는데 집에 불이 났다. 내가 덮고 있던 이불까지 불이 붙었다. 그 전에 이미 질식해 있었던 나를 소방수가 구했다고 했다.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그날 불은 방화였다. 엄마가 재혼 하면서 나를 데리고 들어간 집에 여덟 살이 많은 의붓오빠가 있었는데, 망나니였다. 술만 처먹으면 패악을 부리는 종자들. 그 인간이 딱 그랬는데 그 무렵엔 돈을 내놓으라고 날마다 제 아버지며 우리엄마를 볶아먹었다. 그날 밤에 패악을 부리다가 나갔던 그 미친놈이 한밤중에 술 퍼마시고 들어와서, 그 밤중에 어디서 시너를 구했는지 몰라도 그걸 뒤엎어 쓰고 라이터를 켜버렸다. 잠결에 일어나 망나니 아들을 말리다가 같이 시너를 뒤집어썼던 아버지하고 그 인간한테 불이 붙으면서 집에도 불이 붙었다. 불길에 휩싸인 부자가 튀어나가다가 마당에서 쓰러졌다. 엄마는 정신이 없어서 딸도 잊어버리고 도망쳤다가 소방차가 들이닥치는 걸 보고서야 나를 떠올렸다. 
순용이 말하는 동안 묵묵히 듣고만 있던 윤초가 목이 마른 듯 술을 들이켰다.  
“아까는 매웠던 소주가 이젠 시원해요. 그리고 삶의 현장, 그 빛과 그늘이라는 타이틀로 연재 기사를 써보겠다고 기획했던 제 자신이 징그러워 진저리나요. 죄송해요, 차 사장님. 아까의 부탁, 취소할 게요. 사과드립니다.”
윤초의 뒤끝이 너무 무른 것 같아 순용은 순간 겁이 났다. 그래서 눙치듯 웃으며 얼른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금세 그렇게 달아나면 내가 섭섭하지. 당시 엄마가 붙든 일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이야. 불에 타죽은 새아버지가 수제화를 지었는데, 그 가게 일을 도와주면서 일을 익혔던가 봐. 감각이 있긴 했던가 보지? 내 치료비를 댈 만큼 벌었나봐.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 게, 스무 서너 살 무렵인데 엄마가 간암에 걸렸어. 수술 한 번 못해 봤지. 너무 늦게 발견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나한테 빚 남길 걸 무서워해서 그렇게 되기도 했어. 두 달 만에 엄마를 보내고 말았어. 혼자 남은 나, 엄마 일을 이어 하면서 엄마가 나한테 혼자 벌어먹고 살만한 기술을 익혀주었다는 걸 알았지. 고치고 깁고 갈고 닦고. 신기하고 재미있었어. 헌집 줄게 새집 다오, 하는 모래집 놀이 같았어든. 근데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일을 하면서 세상을 조금씩 배우게 되니까 연애를 하고 싶은 거야. 결혼도 하고 싶고. 애도 낳고 싶고. 연애도. 결혼도. 애도. 나한테는 턱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또 한 십년 걸렸지. 연애나 결혼이 어렵다면 애라도 키워볼까 싶어 입양 궁리도 했는데, 나 같은 여자는 그도 해당 안 되는 걸 깨닫기까지 말야. 사실 아직까지 욕심이 다 버려진 건 아니야. 진정으로 누구한테 안겨보는 것. 날 안고도 괴물 만난 듯이 놀라 달아나지 않을 사람을 만나보는 것. 그런 사람하고 아기를 낳아보는 것. 그런 꿈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거든.”
“성형수술을 하시면 어때요? 알아보셨어요?”
“알아봤지. 여러 번. 해봐야 거기서 거기래. 어느 한 부위가 완전히 오그라들어서 몸을 펴지도 못할 지경일 때 엉덩이나 허벅지 살을 떼어서 그 부위를 되살리는 건데, 내 몸엔 쓸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오그라든 부분은 없거든. 수술을 하자면 생존수술이 아니라 미용수술이 되는 거야. 집 몇 채 값을 쓰며 수술해 봐야 나아질 게 그리 없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무튼 그래. 내 몸에 얽힌 얘긴 얼추 여기까지야. 윤초씨는 왜 여태 혼자예요? 기자씩이나 하는 사람이 왜 연애한번 못해 본 추운 얼굴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했거든.”
윤초가 대답하기 전에 경옥이 냉큼 끼어들었다. 
“정말, 나도 그게 궁금했어. 주말에 혼자 나와서 밥 먹는 거 보면 참 추워 보이더라.”
“글쎄요, 추워 보여서 그런 걸까요? 연애라고 시작했다 싶으면 남자한테 금세 차여요. 한 달쯤 전에도 차였어요. 나를 제 손등쯤에 달린 혹처럼 여기던 작자였어요.”
“아이, 안 믿긴다. 말하기 싫어서 그런 거 같은데? 형님, 그렇게 보이죠?”
경옥의 엉너리에 그런 거 아니에요, 하면서 쩔쩔매는 윤초 모습이 안쓰럽다. 순용은 그렇지만 경옥이 있는 곳에서 윤초의 속내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할 말이 있다면, 때 되면 하겠지. 술이나 한 잔 더 하면서 후야네, 네 얘기 좀 해 봐. 오늘 우리가 좀 이상하게 어울리긴 했지만 후야네 너도 하고 싶은 말, 쌓인 말 많잖아. 지후한테 언제 다녀왔어?”
“우리 지후한테 지난 토요일 저녁참에 다녀왔지.”
아이 얘기만 나오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던 경옥도 요즘엔 많이 담담해졌다. 경옥은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 3년 뒤에 아이를 낳았다. 뇌성소아마비 장애아였다. 아기가 세 돌이 되었을 무렵 이혼하면서 그 아이를 혼자 키우게 되었다. 3년 만에 남편이 병신 아들과 병신 아들을 낳은 아내한테 넌더리를 내고 도망친 것이었다. 현재 열세 살인 아이는 요양기관에 맡겨놓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엄마가 가면 좋아서 방이 들썩들썩 하도록 괴성을 지르다가 기절도 한다. 너무 흥분해서 기가 막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아들을 안고 기 막혀 하다가 나올 때마다 경옥은 숨통이 막힌다. 경옥이 아이한테 다녀온 이야기를 듣노라면 순용도 숨통이 막힐 것 같아, 두 여자는 지후 때문에 함께 술을 퍼마신다. 그런 시절을 십 년쯤 함께 겪어왔다. 경옥은 제 얘기를 어제 김치 담근 이야기를 하듯이, 맨손으로 김치 담다 그 손으로 눈이라도 만진 듯이 눈물을 짜면서도 낄낄 웃어대며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더니 술잔을 홀랑 비우고 윤초한테 따지듯 말했다.  
“이런 재미없는 얘기들을 써서 신문에 내겠다고? 그걸 누가 보고 싶어 하겠어? 나 같아도 쳐다보기도 싫겠다.”
“그래서 제가 회사에서 잘렸는지도 모르죠. 남이 좋아할 법한 이야기를 찾아내지 못해서요. 그런데요, 두 분 사장님, 아니 형님들, 저도 두 분을 형님이라 부를래요. 암튼 글은요, 재미난 이야기만 쓰는 건 아니라고들 하잖아요. 글은 우리 사는 풍경을 옮겨놓는 것이기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나 텔레비전에도 흔히 아프고 슬픈 사람들 얘기가 나오는 것이구요. 문제는, 그런 아프고 슬픈 이야기들을 진정성이 느껴지면서도 읽을 만하게, 사실 여기서 재미 문제가 나와야 하는 건데요, 그렇게 쓸 수 있냐는 거죠. 가령 두 분의 이야기를 제가 쓰게 된다고 했을 때, 두 분이 그 글을 읽고 어떻게 느끼실지, 그런 게 제 문제인 거죠.”
“그럼 일단 한번 써서 보여줘 봐. 나 같은 사람 이야기를 내가 읽고 화가 나기보다 감동하면 성공하는 거잖아.”
마신 술이 얼추 두 병은 될 텐데 아직 꼿꼿하고 혀도 고부라지지 않은 윤초가 웃었다. 순용의 어머니가 그랬다. 오월이면 마당이며 뒷산에 아카시아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숨어서만 사는 순용에게 그 꽃을 따게 하고 술을 담갔다. 술이 채 익기 전부터 어머니는 때때로 국자를 들고 뒤란으로 갔다. 숨도 쉬지 않고 네댓 국자 쯤 떠 마신 다음에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사발로 퍼 마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취하지 못했다. 취하지 못하는 까닭을 찾으려는 듯 술독을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떠난 뒤 순용도 술을 담갔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이따금 술독을 들여다보았다.  
“신문사에서 일단 써보라고 해서 순용형님을 찾아간 건데, 경옥형님도 일단 써보라고 하니까 재미있네요. 암튼 오늘 밤에 마신 이 술에서 깨어나면, 일단 한 번 써볼게요. 우선은 한 잔씩 또 마시게요, 오늘 술은 제가 살게요. 오늘이 무슨 날이냐면요, 제가 첫 번째 실업수당을 받은 날이거든요. 앞으로 다섯 번은 더 받을 수 있구요. 한턱 쏠만하잖아요.”
한 십년 일하던 직장에서 떨려나는 심정이 어떤 걸까. 순용은 짐작하기 어려운 마음이지만 그의 기색으로 보면 아직 회사에서 떨려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참 눈물 나는 한턱이네. 그래서 궁금한 참에 물어보는 건데, 윤초씨 그거 쓰면 얼마나 벌게 돼?”
경옥은 순용이 묻고 싶어도 조심스러워 못하는 것들을 막힘없이 묻는다. 
“그 글 검토해 보겠다고 한 신문사가 워낙 가난한 데라서, 원고료를 조금밖에 못 받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되느냐고.”
“원고지 한 장당 오천 원? 아니 삼천 원? 곱하기 15 하면 그 값이에요. 기사 한 건에 원고지 15매 분량으로 잡았거든요. 채택이 되었을 경우에 해당되는 것들이지만요.”
“삼천 곱하기 15는 사만 오천, 오천 곱하기 15는 칠만 오천. 야! 미쳤냐? 이렇게 술이나 퍼 마셔야  늘어놓을 수 있는 내 일생이 고작 칠만 오천 원이라고?”
“형님들 일생이 아니라 제 글값의 수준이 현재 그런 거죠. 지금 제가 실업자잖아요. 한 번 자리 잡으면 훨씬 높아질 거예요.”
“그것도 천불 난다. 미친 것들이 멀쩡한 기자를 왜 짜르고 지랄들이야. 그 신문 당장 끊어버려야지, 아이고 천불 나.”
속에 인 천불을 끄려는 듯이 경옥이 술을 벌컥벌컥 마셔댄다. 윤초는 그런 경옥이 재미있는 양 실실 웃어댄다. 순용도 웃는데,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말이 떠올라 또 웃는다. 고윤초가 이야기 하나를 얻으려고 이 난리를 치르는데, 이야기 하나가 고작 칠만 오천 원이라면 혼자서라도 살만큼 벌기 위해서는 몇 개의 기사를 얻어야 하고 글을 얼마나 써야 하는 것일까.     
“제 얘기를 해 보라고 하셨죠? 근데, 저는 정말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요. 아, 있네요. 여기!”
윤초가 느닷없이 탁자 옆으로 발을 쭉 뻗었다. 회색 양말을 신은 자그만 발이었다. 지난번 순용의 가게에 찾아왔을 때 했던 얘기대로라면 사흘 뒤에 수술을 받게 될 혹이 밤톨 만하게 발등에 영글어 있었다. 경옥이 제 옆으로 불쑥 다가든 혹 달린 발에 눈을 치뜨다가 약간 물러앉았다. 혹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순용에게 보라고 비킨 것이었다.  
“그 혹 좀 한 번 보세요. 그게 아주 웃겨요. 완전히 제 맘 대로거든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아프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깟 게, 그깟 게 뭐라고 저는요, 그게 너무나 미워요. 그게 처음 생긴 게 제 동생이 태어나서 돌잔치 할 무렵이었어요. 아니 그때 처음 발견한 거죠. 그때 제가 여중 2학년이었는데요, 아! 우리 엄마도 순용 형님 엄마처럼 재혼했어요. 제가 엄마를 따라 들어간 그 집엔 망나니 오빠 같은 거, 없었고 고약한 언니도 없었어요. 아니, 오히려 내가 팥쥐 노릇을 했죠. 의붓언니가 콩쥐처럼 착했어요. 우리 엄마는 콩쥐 엄마 같았구요. 암튼 엄마가 새로 아기를, 아들을 낳았어요. 엄마가 낳은 아들이 그 집안의 대를 이을 독자였기 때문에 온 집안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 날 나는 내 발등에서 혹을 발견한 거예요. 혹이 어찌나 흉측하든지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엄마한테 바락바락 생억지를 썼어요. 그때 엄마가 뭐랬냐면요, 그깟 혹, 이마나 콧등에 난 것도 아닌데 왠 수선이냐고 했어요. 그러면서 덧붙였죠. 이러는 너는 내 이마에 붙은 혹 같다! 그 무렵에 첫 번째로 수술을 했죠. 이번에 하게 될 수술이 네 번째예요.”
제 볼록한 발등을 내려다보며 반쯤은 주정이 된 윤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옥의 손이 그쪽으로 다가들었다. 그리고 발에서 양말을 벗겨낸다. 호두 만하게 도드라진 혹이 나타났다. 핏기 없이 하얀 발인데 혹이 솟은 자리에만 거무죽죽한 흉터가 가로로 나있다. 혹이 칼자국을 껍질처럼 뒤집어쓰고 있었다. 윤초의 발이 안쓰러워 만져주고 싶은 순용에 앞서 경옥의 손이 움직였다. 혹을 매만지며 야아, 귀엽다 야! 한다. 

4. 
하반신이 마취된 자신의 몸을 또렷한 정신으로 관찰하는 기분은 기묘하다. 아랫도리가 낯설거나 둔중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분리된 것 같았다. 감각은 거의 없으되 소리는 들렸다.  3센티 정도 절개해 결절을 제거하고 결절종의 뿌리 부근을 레이저로 지진 뒤 봉합할 거라던 그 과정이 못내 궁금했다. 수술이 진행되는 모습을 앉아서 보겠다고 했다가 의사선생한테 주의를 듣고 누웠더니 양손을 결박했다. 간단한 수술이라면서도 네 명이나 되는 의료진이 윤초 발을 향해 고개 숙인 채 수술을 하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고 싶은데 윤초는 급작스레 졸렸다. 
“보세요, 선생님들! 하반신만 마취했는데 제가 왜 졸립죠?”
“잠깐 주무시게 조치했기 때문입니다. 주무세요. 수술 끝나는 시간에 맞춰 깨어나실 겁니다.”
내가 시끄럽다 이거지? 그렇지만 난 자기 싫어. 그게 없어지는 꼴을 기어이 보고 싶단 말이야. 소리쳤던 것 같았다. 깨어나니 병실인데 차순용이 곁에 있었다. 연황색 마직 상의의 옷깃을 목까지 세우고 청바지를 입은 그이는 가게에서 보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젊다. 
“깼어? 자기 몸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것도 모르고 잘 자대. 기분이 어때?”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중얼거리는 윤초에게 퍼뜩 기억 몇 토막이 떠올랐다. 사흘 전 밤의 한 풍경일 터였다. 차순용이 울고 있었다. 그의 목과 가슴팍을 골고루 만져보다 키스를 했던 것 같았다. 첫 키스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던가. 사실 지금 처음 떠올린 기억은 아니었다. 그날 밤의 술과 잠에서 깨어난 이후 몇 번 안개바람처럼 잠깐씩 스쳐간 영상이었다. 
“형님, 엊그제 밤에 우리 키스했어요?”
“우리, 키스라니?”
“형님하고 저 말이에요. 키스하고 나서 형님이 울지 않았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그날 밤 고윤초가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서 내가 집까지 데려다 이부자리 펴주고 잠든 거 보고 나왔는데.”
“그럼 그때 꾼 꿈이 지금 생각난 건가? 희한해라. 내가 형님한테 키스를 가르쳐주겠다고 달려들어 입 맞추는 장면이 떠올랐거든요. 아! 그날 밤 꿈이 아니라 방금 꾼 꿈인가 보네.”
“그런가 보네.”
선명한 꿈을 꾸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이라 긴가민가하지만 차순용이 아니라고 하니 아닌 것 같다. 입맞춤은 회식 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따금 해 온 장난이니 실제로 했대도 상관없었다. 맘이 쓰이는 건 차순용에게는 그 일이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장난이라 치기에는 환영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이 진하기 때문이다. 섹스는 물론 키스조차 모른다는 그에게 선생노릇을 하겠다고 나댔다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이가 아니라 하니 다행이다.  
“어쨌든 고윤초 꿈속에 내가 다 나타나다니, 고맙고 재미있네. 그건 그렇고 고윤초 기획기사를 백번은 읽은 것 같아.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악운처럼 다가와 운명처럼 삶을 지배하는 상처와 상흔. 하여 누구나 헌 신발이나 헌 옷을 깁듯 자신의 상흔을 기워가며 산다. 신기료장수 차순용의 손은 타인의 상처를 깁는 일에 미립이 났다······. ’아예 다 외웠어. 그래서 고윤초가 정말 그걸 하고 싶고, 해야 한다면, 내 이야기로 시작해도 좋다고. 혹 떼 낸 기념으로 그 말 해주려고 왔어.”
“고마워요, 형님.”
“고마울 것 없어. 일단 써와 보라고 하면서도 허락할 생각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고윤초 글이 재미있더라고. 뭐라고 할까,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기분. 나를 이만큼에다 놓고 저만큼에 있는 내가 보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갇혀있던 내가 풀려난 것 같은 이런 기분을 나는 정말 가방끈이 짧아서 모르겠지만, 감동했어. 글 잘 쓰는 것 같더라. 고윤초 같은 기자를 자른 신문사는 멍청해 그런 것 같지만 잘렸다고 말아버리기에는 고윤초가 아까웠어.”
“형님이 생기니 그 놈의 회사 욕도 내 대신 해 주고, 기분 좋아요. 회사 짤린 덕에 형님이 생겼으니 그놈의 회사에 오히려 고마워해야겠네요.”
“고맙기는 개뿔! 아무튼 휴가라고 생각하고 푹 쉬어.”
“쉬기는 하겠지만 푹 쉴 형편은 아니에요. 허락해 주셨으니 기사 송고하고, 음, 이사할 방을 알아봐야 하거든요. 삼주 안에 방을 비워주어야 해요.”
“아, 그걸 해결해야 하는구나. 그날 밤에 얘기 듣고도 잊어버리고 있었네.”
“내가 그날 이사 얘기도 했어요?”
“집에 들어가다가 계단에서 잠깐 넘어질 뻔 했을 때 그랬잖아. 이놈의 계단, 꼴 안 보게 돼서 시원하다고.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네가 한 달 안에 방 빼야 한다고 했어.”
이상한 꿈과 상상에, 별별 얘기를 다 했던 모양이다. 그날 밤 마신 술의 양이 그만큼 많기도 했지만 하루를 굶은 빈속에 마시기 시작해서 그랬을 터였다. 취재 때문에 시작된 자리였으나 편키도 했다. 두 여자가 가진 상처는 그들 자신에 의해서 풍화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들은 청승스럽지 않았다. 그들 얘기를 기사로 만들지 않아도 좋았다. 때문에 그 자리에서의 고윤초는 타인의 비극을 건드려 기사를 얻으려는 후안무치한 백수가 아니었다. 
“또 무슨 말을 지껄였을 지, 겁나네요. 암튼 제 걱정은 마시고 얼른 가게에 가 보세요. 오래 비워두면 안되잖아요. 아, 거기 옷장 속에 노트북이 있을 건데요, 그거 꺼내주고 가실래요?”
“방금 마취에서 깨어난 사람이 뭘 하려고?”
“마취된 건 다리뿐이었죠. 머리하고 손은 말짱해요. 정보신문이나 들여다보게요.”
“괜찮다면 고윤초가 이사할 방, 내가 좀 알아볼까?”
“아이, 아니에요. 지금 보증금으로 얻을 수 있는 방이 거기서 거기일 거고, 그런 방들은 사방에 많더라구요. 여기 앉아서도 어려울 거 없어요.”
“그래도 방은 직접 다니면서 보고 골라야지. 내가 알아볼 게. 이래봬도 내가 이 동네 토박이잖아. 몇 군데 알아보고 와서 설명해 줄 테니 고윤초가 골라. 그러면 되잖아.”
“형님 가게는요?”
“잠깐씩 비운다고 그 궤짝을 누가 업어가겠어? 좀 자. 저녁참에 맛난 거 많이 사서 올게.”
두 말 말라는 듯 시원하게 결론 내린 차순용이  병실을 나갔다. 이인용 병실인데, 옆 침상은 비었다. 혼자다. 엄마는 고등학생 아들 수발하느라 여념이 없을 터였다. 자신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기를 쓰며 살고 있는 친구들한테도 연락하지 않았다. 고윤초를 제게 솟은 혹처럼 여겼던 남자는 연락이 없다. 같은 계통에서 일하므로 고윤초가 해고되었다는 소문을 벌써 들었을 텐데, 지난번의 다툼을 결별 핑계로 삼고 있을 테고, 이미 헤어졌는데 네가 짤렸든지 말았든지 무슨 상관이냐고 편해져 있을 것이다. 잘 떨어져 나갔다! 윤초는 자신의 발을 뒤덮은 깁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결혼 4년 만에 이혼당하고 돌아와 엉겨 붙던 너도 나한테는 혹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늘 그렇듯이 고윤초는 혼자다. 휴가 같다. 발목부터 무릎 위까지 깁스를 한 채 맞이한 사흘 동안의 휴가.  

5.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은 고윤초가 정말 여기가 맞느냐고 묻는 듯 순용을 쳐다보았다. 제 전셋집의 보증금으로 당장 들어갈 수 있는 깨끗하고 조용한 집을 보여주겠다고 데리고 온 참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집 구경 먼저 해.”
“집주인은요?”
“늘 비어있다시피 한 집이야.”
당장 주인은 없지만 구경은 해도 되는 집이라는 사실에 안심했는지 먼저 들어선 윤초가 와아! 탄성을 터트린다. 거리 쪽으로 면한 거실 두 면의 상단이 유리벽으로 되어있는데 거기 바깥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와 있기 때문일 터였다. 
“텔레비전에서나 본 집이네요. 넓어서 텅 빈 것 같은. 그러면서도 있어야 할 것들은 어딘가에 다 숨어 있는 집. 멋있어요. 사방이 트인 넓은 창턱에 앉아 커피마시면서 일출도 보고 일몰도 보겠네. 이런 집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까요?”
무거운 다리를 외다리 목발에 의지해 질질 끌고 다니면서 집 구경을 하는 윤초는 연신 탄성을 질렀다. 제가 사는 집에 비하면 그럴 법도 했다. 삼사십 년쯤 되었을 네모난 양옥들은 이 도시에서 요즘 한창 퇴출당하는 중이었다. 윤초가 사는 집의 주인집처럼 요즘 이 동네엔 그 옛날에 마구잡이로 지은 집들을 헐고 5층짜리 원룸빌라를 짓는 게 유행했다. 한 층엔 주인이 살고 나머지 층들은 공간을 조각조각 만들어 사글세를 내주는 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순용도 비슷했다. 
30여 년 전, 불길에 휩싸였던 집을 갈 데 없었던 모녀는 떠나지 못했다. 순용의 몸에 붙은 흉터처럼 시커멓게 타고 그을린 집을 오래오래 걸려 수선해가며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고 개천 너머 낡은 집들에 살던 이웃들이 떠나도 순용은 떠나지 못했다. 떠날 수 없었으므로 이웃들이 비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집들을 한 채씩 몇 채 샀다. 집터를 담보로 은행 융자를 약간 얻어서 집들을 사고 그 빚을 갚아나갔다. 성형 수술을 하고 싶어 일 년을 하루같이 일했지만 성형수술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뒤이기도 했다. 자신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순용이 알게 된 것은 부동산업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집 앞의 개천이 일 년 만에 흔적도 없이 덮이더니 주변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순용도 변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6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살면서 아래층들에서 세를 받는 건물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주인이 어느 방을 세놓겠대요?”
빈 방 세 곳을 살피고 난 윤초가 부엌으로 와서 탁자 앞에 앉으며 물었다. 순용은 남의 살림 건드리는 여자처럼 조심스럽게 커피를 만들어 윤초 앞에 놓았다. 
“비어있는 곳은 아무데나. 어떤 방이 맘에 들어?”
“골라도 된다면 등산로가 보이는 방이 맘에 쏙 들어요. 반달 창도 멋지고 화장실도 따로 있고. 그런데, 부자들은 자기 집 쪼개서 세놓지 않은 거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르겠지. 혼자 살기 싫어서 세입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을 테고.”
120평쯤 된다는 공간에서, 옥상정원까지 통째로 차지하고 살지만 개천 건너의 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 집에 살 때의 차순용과 달라진 건 없었다. 혼자서 남의 빈집에 몰래 숨어들어 사는 것처럼 너무 조용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요, 형님. 이 집은요, 넓기는 해도 세입자가 들어 살 집은 아닌 거 같아요. 독립적인 여백이 없다고나 할까, 빈 방들조차도 집주인을 위한 공간인 것 같거든요.”
“그런 거는 사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 아닌가? 또 집주인하고 가족처럼 어울려서 살면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것이고.”
“형님도 참, 혈육들하고도 어울려 살지 못하고 떨어져 살기 일쑨데 생판 남들끼리 어떻게 가족을 이뤄요. 운 좋으면 친구가 될 수 있겠지만 친구도 예의와 거리가 분명해야만 할 거구요. 그 예의와 거리조차도 세입자와 집주인 관계에서는 만들어지기 어렵죠.”
단정하듯 말하며 커피 향을 맡고 있는 윤초에게 가령 내가 집 주인이라면 들어와 살겠냐고 묻고 싶지만 순용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맘을 들킬 것 같았다. 들키면 달아나 버릴 게 뻔했다. 전세금을 받겠다고 한 것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고 말면 이 집에서 어떻게 살게 될까. 윤초가 이사를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순용은 온통 그와 함께 사는 상상만 했다. 그 상상이 온 집안에 가득 스며들어 이제 윤초가 없는 집은 집도 아닐 것 같았다. 
“주인하고 친구가 되면 거리, 예절 같은 거 굳이 필요하지 않은 거 아닐까? 서로 간섭하는 일 없이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윤초의 맘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하는 말이지 함께 살면 아마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었다. 윤초를 위해 아름다운 책상을 들여 주고 싶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해주고 싶어 하지 않은가. 그의 발을 만져주고 그의 신발을 챙겨주고 안아주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 해주다보면 받고 싶은 것도 생길 터였다. 그날 밤처럼 키스해 주길 바랄 것이고, 만져주고 안아주길 바랄 것이고 눈물을 닦아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의 드나듦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될 것이고 그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쓸 것이다. 아마도. 온갖 상상 끝에 그런 생각까지도 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같이 어쩌다 같이 살게 되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런 갈등들이 생기고는 하니까. 그리고 화해하고 함께 살게 되곤 하니까. 
“집 주인이나 있다면 이야기 나눠보면서 생각이라도 해 보겠지만, 없으니까, 그냥 갈래요. 작고 허름하더라도 속편하게 살 수 있는 내 집 알아 보러요. 그런데 형님은 이 집 주인하고 어떻게 아세요? 뭘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집 주인이라고 순용이 말하려는 참에 윤초가 움찔하더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왼손으로 전화기를 열어 귀에 대며 왼눈을 찡긋한다. 오른손으론 어깨에 사선으로 멘 가방에서 길쯤한 수첩과 볼펜을 찾아낸다. 네 국장님, 고윤초입니다. 안녕하시죠? 네에. 그렇죠. 네. 객원이요? 그렇죠. 네. 그러면요, 네. 제가 가릴 입장인가요. 그렇게 할 게요. 그런데, 지금 당장 찾아뵐 처지가 아닙니다. 간단한 수술 한 가지를 했는데,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어서요. 네. 열흘 뒤에 푼다고 하더라구요. 네. 우선 두 꼭지 정도는 가능하구요. 네. 깁스 푸는 대로 찾아가 뵐게요. 네. 그때 봬요.
전화기를 접어 식탁에 탁 놓고 거친 손길로 수첩과 볼펜을 가방에 쑤셔 넣은 윤초가 커피 잔을 양손으로 잡고 골똘하게 들여다본다. 표정이 밝지 못했다. 
“왜 그래? 무슨 전환데?”
“형님 이야기 보낸 신문사 편집국장인데, 그 꼭지를 연재하겠대요. 그런데, 객원기자를 하라네요. 그래야 연재하겠다고요.”
“객원기자가 뭐하는 건데?”
“신문사 소속기자가 아니면서 그 회사 이름만 빌려서 기사를 쓰는 기자예요.” 
“안 좋은 거야?”
“현재 제 처지로 보면 좋다고도 안 좋다고도 말하기는 어려워요. 원고료를 기사 쓴 만큼만 받는 거니까요.”
“그럼 좋은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걸 잘 모르겠어요. 이미 바닥인데, 바닥에서 뭔가 새롭게 모색해 보자고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는데, 객원이란 한 마디에 그렇게 홀랑 넘어가서 앞뒤 없이 허겁지겁 받아들일 일이었는지. 아! 이 집 주인 이야기를 하다 말았잖아요. 집 주인이 누구, 아니 형님하고 어떻게 아신다구요?”
“내가 여기서 살고 있어. 내가 집주인이야. 그러니까 고윤초만 괜찮다면 이사 와서 편하게 살아도 돼. 고윤초도 잘 알잖아. 내가 만날 가게에 나가 사는 거. 나는 집에서 밥 해 먹는 일도 드물어. 거의 윤초 혼자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만약 이사를 온다면.”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순용이 말하는 동안 윤초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 같다가 장난스런 표정이 되어 웃을 것 같더니 웃지 않는다. 사흘간의 입원으로 원래 희던 얼굴이 더 희어지며 수척해 졌는데, 웃지 않으니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인다.  
“혼자 살기엔 좀 넓은 집이기는 하네요. 그래서 세입자 들일 생각을 하셨겠구나, 이해가 돼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댁은 세입자가 살기에는 부적당한 거 같아요. 공간의 구조가 그렇게 느껴지거든요.”
“이리 이사는 못 오겠다는 말이네.”
“이사를 와야 맛인가요? 형님들하고 알게 된 것만으로도 신난 일이었는데요. 오늘은 그만 갈게요. 집에 가서 좀 쉬고 제가 이사할 집은 오후에 알아봐야겠어요.”
그러니 저를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레디삐. 우선은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이다. 
“그럼 데려다 줄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사흘간 연습했는데도 목발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요.”
집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윤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용은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너무 성급했다 싶은 후회로 가슴이 저렸다. 건물을 나오면 택시 승강장이었다. 빈 택시가 줄지어 있는 것을 본 윤초가 걷기 불편하다면서 맨 앞에 있는 택시 속으로 들어가 목발을 끌어들였다. 
“그냥 저 혼자 갈게요. 요새 가게를 너무 자주 비우셨잖아요. 고맙습니다.”
시선을 내리 깐 채 몇 마디 하더니 문을 턱 닫는다. 택시가 쑥 앞으로 달려 나갔다. 1킬로도 안 되는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겨놓고.



송은일∙199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200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 되어 등단했다. 장편소설 '아스피린 두 알', '불꽃섬', '소울 메이트', '도둑의 누이', '한 꽃살문에 관한 전설', '반야', '사랑을 묻다'. 소설집 '딸꾹질', '남녀실종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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