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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신작단편/우정을 과장할 때 떠오르는 치기를 무릅쓰고 정연에게 편지를 쓰다/박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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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04회 작성일 09-12-2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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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우정을 과장할 때 떠오르는 치기를 무릅쓰고 정연에게 편지를 쓰다
 박금산




중학교 졸업하던 열일곱 살에 오시케 탔던 우리 집 장남은 산업용 엘리베이터를 꾸몄었다. 아파트 새로 짓는 데 가면 보이는, 속 시원하게 보이는, 노란 철 그물 상자 그거. 물건을 실어 나르고 인부들을 고층으로 올려 보내는 그거. 언젠가 정지 스위치가 불량 나서 25층 옥상까지 다이렉트로 뻗었다가 뒤로 확 넘어가버린 일도 있었다던 그거. 거기에 들어가는 정지, 하강, 상승 스위치 파는 장사치였다. 정연아. 장사치라고 말하니까 조금 삭막한 감이 든다. 너도 펭귄 끌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니까 말야. 형은 발명가라고 불러주면 좋아라 했다. 스위치 그게 커 봐야 주먹만도 못했거든. 꼬막 껍데기만한 거에다 포클레인 조정하는 레버 같은 걸 달아가지고 특허청엘 다니더니 증서를 받았다. 특허권을 딴 거였다. 기계가 좀 이상하다 싶을 때는 손끝으로 힘주어가며 버튼 누르고 있는 것보다 덤프트럭 브레이크 밟듯이 뭔가를 화락 낚아채버려야 순간적으로 안정이 찾아오는, 그런 심리를 겨냥했던 거다. 
어느 산업전기 회사에서 특허 값 야무지게 쳐주고 하청도 단독입찰 시켜서 일감을 무더기로 줄 테니 그걸 넘기라고 하더란다. 형은 배짱을 부렸지. 재벌 회사에서 꿀꺽하려 드는 거 보니까 몇 백 억은 영락없는 줄 알았다지. 달러 끌어다 붓고 선이자 떼이는 카드사채 당겨쓰고 하면서 무한 제작에 들어갔지. 특허가 기대 값을 했지. 만드는 대로 팔려나갔던 거다. 제작, 판매, 수금, 핑핑 잘 돌아갔어. 사이키 조명처럼 빙글빙글 리드미컬하게 잘 돌아갔어. 그런데 마진이 솜이었던 거야. 아차 싶었지. 특허 독점 효력 날아가기 전에, 늦기 전에, 마진 올리려고 판매가를 높였지. 그랬더니 수금길이 뻘밭처럼 미끄러워지더래. 수금이 안 되니 제작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됐지. 그 모양이 되어서……. 그렇고 그렇게 된 거지 뭐. 
무슨 놈의 고의부도가 그 모양이니. 어음 못 막았냐고 물으니까 그건 절대로 아니라는 거였어. 그런 식으로 살 거면 차라리 식칼을 통째로 삼키고 죽겠다는 거였어. 돈은 좀 챙겼냐고 하니까 셋방도 그대로 놓고 왔다 했어. 일수 도장 찍은 게 삼천만 원이 넘는데 그것도 몰라라 하고 왔다는 거였어. 배 째라였지. 빚이 얼마였기에 그랬을까. 아무튼 사채업자들한테 잡히면 작신 밟히는 거였지. 아이엠에프 다시 시작된다고 장담을 하더라만, 그게 다 땅 멀미지 뭐 다를 거 있었겠냐. 오시케 타다가 선원학교에 들어가서 일 년 수업 받고 바나나 실어 나르는 상선에 올라 상파울로니 부에노스아이레스니 싱가포르니 그런 멋진 항구에 정박해서 마도로스 수업을 받으며 쌓았던 버릇이 추억도 되고 이상도 돼버려서 뭍에서는 멀미만 죽어라 했던 사람이었어. 바다는 가만있는데 땅이 파도를 치는 거였지. 속이 울렁거리고 뒷골에 철심이 박히는 것 같고 먹은 밥이 죽이 돼서 변으로 나온다고…… 그 멀미가 암 기운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냐. 아버지가 좋은 걸 물려주고 미리 진작 가셨지. 
전날 마신 술에 얻어맞고 젓갈처럼 드러누워서 끊어진 필름을 이리 맞추고 저리 되새김질 하고……. 그러는 중이었어. 누가 문을 두드리길래 열어줬더니 형이 들어오지 뭐냐.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해 죽겠는데 이 인간은 저녁 될 때까지 내리 잠만 주질러 자는 거 있지. 나도 술 깨느라고 해 넘어갈 때까지 주질러 잤지. 잠에서 깨자마자 우린 술집으로 갔어. 형이 시바스리갈을 시키는 거 있지. 부도내고 왔다는 말은 안 했을 때였어. 좋은 술 먹는다고 막 들이부었는데 술이 바닥나니까 이 인간이 먼저 나가버리는 거라. 계산도 안 하고. 확 카드를 분질러버리고 싶었지만 어떡하니. 계산은 계산이니까 내가 카드로 쓰윽 긁었지. 집에 들어가서 물으니까 부도 직전이었대. 더러워서 도망쳐 버렸대. 
배 타던 때 얘기를 조금 더 하자. 형은 배에서 내린 다음 서너 달 요양 삼아 몸을 쉬었어. 맹장수술을 했었거든. 나는 대입 준비를 하고 있었고. 형은 다시는 배에 안 올라갈 거라고 하더라. 울렁거려 죽을 지경이라지 뭐니. 형은 시내로 나가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어. 하지만 어디에서나 거절당했어. 인테리어를 배우고 싶어서 가게에 들어갔더니 나이가 많다고 딱 자르더래. 택시를 하려니까 운전면허가 없더래. 기계 제도는 학원비가 장난이 아니야. 용접을 하니까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페인트 냄새에서는 신물이 나더래. 갑판부에서 미장공을 했더라지. 배가 크니까 배 안에도 별별 직업이 다 있었다는 거라. 키 잡고 지도 보고 그러는 마도로슨 줄 알았더니. 마도로스? 고독만 마도로스였지 뭐. 학교엘 다니려 해도 돈이 들고, 병원에 가려 해도 돈이 드는, 이 땅에선 발붙이고 살 수 없는 고독한 개인이었던 거야. 배 위에 있을 때는 밥도 공짜, 병원도 공짜, 팬티까지 공짜였대. 
왜 모아둔 돈이 없냐고 어머니한테 주정이었다. 좋이 십 년은 넘게 탔으니까 점방 하나 낼 돈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허공에 대고 부르짖으면서 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왜 자기 돈으로 학교를 다녔냐고 나한테 해코지를 하지는 않더라. 장남은 이래야 되는 거구나, 나는 그때 형한테서 배웠다. 고향에서는 살 수가 없겠더래. 바다가 보이니까 자꾸만 어디로 가고 싶어지더래. 큰물에서 노는 고기는 육질이 다른 법이라고, 형은 서울로 올라간다 했지. 난 이듬해에 대학에 입학해서 서울로 왔고. 우린 따로 살았어. 형은 조수만 수 년 했어. 포클레인 조수, 선반 조수, 지하 봉재공장에서 다림질 조수. 세월이 어찌 변했는지 형은 엘리베이터 스위치 회사 사장님이 됐지. 인생지사 물밖에 내 놓은 미꾸라지마냥 어디로 튀어야 물인지 먼지바닥인지 모르고 아가미 쩍 벌어지기 전까지는 용을 쓰고 몸 비틀어야 되는 거라고, 그게 인생이라고들 하니까 오시케 타던 열일곱 살짜리가 엘리베이터 스위치 발명가 된 거가 그리 수상한 일일 것도 없겠지. 선원학교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네가 직업학교에서 선반 배웠다가 이제는 펭귄을 기르고 있는 것마냥. 
내 방에서 지내라고 하니까 어긋난 심사를 부리더니 핸드폰을 바꾸고, 차를 중고로 새로 사서 나갔다. 차에 가발은 없었을라나. 이틀이 지났어. 안면 바꾸고 나갔던 양반이 부천 병원에 누워 있다고 간호사가 전화를 해왔는데……. 난 어떤 대학교에 조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어. 전철을 타고 부천으로 가는데 참말 부예가 나 미치겄드라. 병원비를 무슨 수로 감당하냔 말야.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가니까 형은 2인실 침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더라. 
“어? 왔냐?”
무지하게 태연했어. 어? 왔냐? 넉살이 아주 야무졌어. 왼팔에 링거를 꽂고 있더라. 왜 전화를 직접 하지 않고 간호사를 시켜서 사람을 놀래키고 지랄이야, 말은 못했어. 간호사가 전화를 했다고, 그걸, 환자가 전화도 못할 만큼 숨넘어갈 상황에 처한 거라고 접수한 장본인은 나였으니까. 부아를 질러봐야 뭐하겠냐. 탱자나무 울타리에다 얼굴 들이밀기지. 우리 탱자나무 울타리 넘다가 다리 많이 찔렸었잖냐. 
“멀쩡허구마?”
“피 뽑는다고 사람이 죽냐?”
“그람 전화를 직접 헐 것 아니여. 거그 전화도 머리 우에 있그만.”
각목이 있으면 칼 대신 쓰고 싶더라. 조교 아르바이트는 이제 물 건너간 거그덩. 퍼덕거리는 가슴을 꾹 누르고, 어떻게 된 건지 연유나 듣자 했지. 다방에서 티비 보다가 병원으로 갔다는 거였어. 축구를 보고 있었는데 피 모자란다는 자막 방송이 지나가더래. 머리가 휘까닥 하더라는 거야. 주저하지 않았다지. 식은 커피 원샷 하고 신호 무시하며 달렸다지. 꿍꿍이속이 있었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법은 없다고 말야. 목숨 구해줬으니 당연히 뒷돈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말야. 선원학교 다니던 시절의 버릇이 튀어나왔던 거라. 역이나 터미널 화장실에 가면 그런 전화번호 많잖아. 연애 한 번 하자는 전화번호, 돈 필요하면 만나자는 유혹, 신장 고가에 매입한다는 정보들. 그런 거 많이 보이잖아. RH 마이너스 오형 피에는 프리미엄이 붙었었대. 선원학교 다니면서 담뱃값이 떨어지면 형은 사설 병원으로 달려가서 피를 뽑았었대. 간호사한테 그랬다지. 맏형이 병원에 있다고 허믄 만사 제끼고 올 거이니까 전화 좀 넣어 줘……. 피를 많이도 뽑았나 보더라. 형은 연신 입술에 침을 묻혔어. 
“퇴원은 언제?”
“종합검진 받아보고.”
“뭔?”
“피 뽑아 줬응께 그 정도는 받아야 될 거 아니냐. 돈도 없는 가난뱅이더라.”
“비용은?”
“인마.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기본이지!”
의약분업 때문에 말이 많던 때였어. 의사하고 약사하고 환자하고 여당하고 야당하고 의대생들하고 약대생들하고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하는 동안 간호사들은 한가한 휴가를 보낼 수밖에 없던 때였어. 피를 받은 환자 부모님들이 검진을 받도록 해준다고 했나 봐.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남들은 의약분업 땜시 암에 걸려도 발 동동 구른다는디 헹은 참말 노났네?”
“의약분업? 그건 그거대로 허라 그러고 나는 나대로 살아야제. 의약분업 그거, 그게 말이 될 말이냐? 안 그런가 박 박사?”
형은 나한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 학교하고 병원에는 공짜로 가는 세상이 천국이라는 거야. 내가 그랬지. 이미 그 혁명은 역사에서 실패했다고 말이다. 형은 굽히지 않고 말했어. 
“돈을 내고 배우니까 졸업만 하면 돈 벌라고 눈을 까는 거란 말여. 병원 문 닫는다고 의사들 욕할 거가 아니란 마시. 근본부터 고쳐야 써. 우리가 세금 조금만 더 내면 될 거 아니여. 국회의원들 맹이로. 의사들을 다 공무원으로 맹그는 거라. 의료보험료에다가 의원 양성비 세목을 딱 박아가지고 한 달에 천 원이면 천 원, 오백 원이면 오백 원. 그렇게 해야 써. 사천만이 합쳐봐라 그게 얼매나 큰 돈이여. 그걸로 의대생들 장학금 줘감시롱 키우는 거라. 그라믄 우리가 이득이지 의사들이 이득이냐?”
“돈 벌라구 의대 가는데, 그라믄 누가 의대를 가?”
“그러니까 애시당초 의사들이 돈 잘 버는 세상이어서는 곤란하단 말이지. 돈 없어서 의대 못가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냐. 돈 없어서 못 배운 사람들 중에 똑 소리 나는 사람들 쌔부렀어. 쇠 깎아먹고 사는 사람들 봐. 머리들이 엔간히 좋은 줄 아냐? 용접을 얼마나 정밀허게 허는디. 사람 다리 뿌러진 거 붙이는 거랑 엘리베이타 와꾸 나간 거 붙이는 거랑 같은 이치 아니여. 쇠에도 결이 있고 뼈에도 순서가 있으니께.”
그러면서 형은 자기 중졸학력을 우습게 들먹였어. 선원학교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국비로 운영되는 1년짜리 직업학교였지 않냐. 우리가 중학교 졸업할 때는 고등학교로 승격된다는 말도 있었지. 너도 그래서 가려고 했었지. 친구들이 몇 명 거기 갔잖아.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느그같이 학교에다 돈 부어대믄서 공부를 배우니까 지식을 팔아먹는다는 말도 생겨나는 거라. 대학입네, 대학원입네, 유학입네 하고 돈 들여서 공부한 놈들이 그러잖어. 나라에서 학교를 공짜로 보내주고 학력 차별 없이 월급을 줘 봐. 누가 기를 쓰고 대학 갈라고 그러냐. 졸업해 봐야 돈도 안 되는 거 말이여. 그랑게, 공부가 좋아서, 문화창달에 꿈이 있는 사람들이, 진리탐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람 몸은 어쩌게 생겨서 이리 신비할까 궁금한 사람들이, 학교에 가야 되는 거라.”
“형!”
“응?”
“소크라테스가 뭐라고 했냐면 말야.”
“뭐라 그러디?”
정연아. 개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는, 아주 좋은 말이 있다. 아는 사람한테는 안 짖고, 모르는 사람한테만 짖는 개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는 말이 있어. 개만큼 지혜를 사랑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거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 미안하다. 먹물은 하여간에 문자 통을 궁그려야 말문이 트이거든. 내가 소크라테스랑 플라톤을 나직하게 말하니까 형은 말이지, 자기가 개소리 해서 기분이 나빠진 거냐고 나를 노려보는 거 있지. 내가 물었어. 
“결혼은 인자 물 건넜어?”
“니 먼저 해라. 부도 내 놓고 부조금 받아서 빚잔치 헐래? 한 오 천은 휘딱 걷힐 것인디.”
“그러니까 빨리 허라고 했잖어. 여자친구 집에서 날짜 잡자고 한단 말여.”
“그랑게, 니 먼첨 허라고.”
“도둑결혼을 허라고?”
“배웠다는 놈이 어찌 그리 사리분별이 없냐. 뭔 도둑결혼.”
“마흔 넘은 게 언제야. 서른도 안 된 막둥이가 먼저 해?”
“애기만 안 낳으믄 문제 없어야.”
“어엉?”
“서열이 깨져불잖냐. 니 아들한테 내 아들이 형이라고, 그래야 쓰겄냐?”
말도 안 되는 말을 씨석거린다 싶으면서도 가슴에 쨔안허니 파도 같은 것이 밀려오더만. 형은 장남이잖아. 쉽게 보이면서도, 서열 말이 나오니까, 오시케 막에 갔을 때가 생각나는 거였어. 중학교 졸업하고 이강막 그물도 못 당길 나이에 오시케 어장을 보러 댕겼으니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러웠겠냐. 그때 난 초등학생. 엄마가 가져다 주라고 한 여벌 옷을 가지고 갔었는데 한심이 극치였어. 조끼 윗주머니에 주머니칼 꽂고, 손에는 그물 꿰매는 바늘 들고, 머리카락에는 손톱만씩한 생선비늘 달고, 완전히 오리지날 뱃놈이 되어 있었던 거라. 옷 내밀면서 내가 울어버렸잖아. 형이 놀라면서 물었지. “왜 그냐? 아부지한테 뭔 일 있냐?” 형은 집을 걱정하는 그런 사람이었지. 
한 주가 지나가는 동안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어. 뽑은 피 새로 돌 때까지 누워있을 모양이라고 나는 형의 땅 멀미를 비웃고 있었어. 전화가 왔어. 
“오늘 뭐 하냐? 밤에 좀 올래?”
“시간 봐서.”
꼭 말이 그렇게 나왔어. 미워서가 아니라, 혹시 못 갈 사정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계산 때문에. 혹시 나 모르게 무슨 치료를 받고 있는 건 아닌가,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형이 말했어. 
“저녁 같이 먹을까?”
“가도 밤중일 걸 뭐.”
또 지랄이었지. 혼자가 얼마나 지루한 건지 알면서, 혼자 먹는 건 때우는 거지 밥 먹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 형이 핸드폰 던지는 소리가 요란했어. 아찔하더라. 형이 전화기를 다시 들더니 딱 한마디 하고 끊더라. 
“내일 검사결과 나온다.”
정연아, 살아가는 건 무슨 검사를 받아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그런 순간의 연속 아니냐? 네가 선원학교 시험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모두가 몰랐지. 너조차도 모르고 있었지. 넌 공을 차도 문전을 헤집고 다녔고, 구마가 쫓아올 때 달리기가 제일 느린 사람은 나였는데, 네 한쪽 다리 짧은 줄을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냐 말야. “정연이 선원학교에 떨어졌다더라.” 소문이 났었다.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더라.”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다리가 짝짝이라드만.” 나는 개소리 말어라 했다. 그런데 자꾸 보니까 네 걸음이 펭귄인 거라. 고독, 고독. 나중에 네가 고등학교 시험도 안 보고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는 얘기 들었다. 네 얘기는 전부, 어찌 된 건지 모두가 다 남들한테서 들은 것뿐이다. 뭐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았냐. 형 입에서 검사결과 나온다는 말이 나오니까 네 생각이 간절해지더라. 내가 옆에 있어줬더라면 넌 송곳으로 무릎을 작살내지도 않았을 거 아니냐. 모든 기다림은 초조하고 긴장되지. 운전면허시험 그깟 것도 혼자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이 얼마나 고독하고 작아지던지……. 네 생각을 하면서 형한테 가던 길이었다. 
밤에 전철을 탔지. 공교롭게도 네 생각이 제일 많이 나게 되는 일이 벌어졌지 뭐냐. 술이 좀 과했던지 이 아주머님께서 나한테 안겨 오시는 거였어. 인천행 전철이 좀 복잡하냐. 그 복잡한 전철 속에서 이 여자가 차 흔들릴 때마다 엉덩이로 나를 톡톡 받아대는 거야. 처음엔 피하려고 했지. 거짓말이다. 피하는 시늉만 했지. 횡재라 생각했지. 여자 옷에서 자글자글 풍기는 돼지갈비 냄새에 코를 박았지. 전철 안에서는 손을 쓸 수 없었어. 여자가 내리기만 기다렸지. 헌데 이 여자가 통간에 내릴 생각을 안 하는 거라. 엉덩이로 툭툭 치기만 하고 뒤도 안 돌아보는 거라. 내 배꼽 아래에서 열이 식었다 끓었다 발광을 하고 있었어. 병원이 있는 부천은 벌써 지나쳤고 다음 역이 제물포역이었어. 부천에서 제물포까지는 아홉 정거장이었다. 그 시간을 버텼으니 엔간히 오래도 참았지. 기어이 내가 수를 걸고 말았잖아. 
“어디까지 가시나?”
내가 말했어. 그랬더니 이 여자가 씩 웃는 거라. 막차였는데 말이야. 내가 또 말했지. 
“안 내릴려?”
흥. 말을 안 하는 거라. 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어. 이번에는 내가 친한 척하면서 손을 썼지. 어깨를 만졌단 말이다. 엉덩이로 사람을 그만큼 건드렸으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 그래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도 물꼬가 트이는 거 아니겠냐. 여자가 살매기 돌더라. 좋았지. 그랬는데 이 여자가 싸대기를 확 올리는 거여. 그럴 때는 정말 어째야 쓸까 잉. 창피하고 한심스러워서 얼른 내려 버렸다. 제기랄. 부천으로 가는 상행선은 이미 끊어져버렸더라. 
제물포에서 부천까지 걷는데 참말 인생 추접허드라. 지갑에 현금은 없고 신용카드 두 장이 있었어. 여자가 오케이 하면 여관비는 카드로 긁을 생각이었지. 심야좌석버스 같은 거 탈 생각을 왜 못했는지 몰라. 택시비를 만들려고 술집에 가서 “카드로 전표 끊고, 그 돈에서 만 원 제하고 현금으로 좀 줄 수 있나요?” 사정할 생각도 해봤다만, 어디 그게 통할 작전이냐. 차들 씽씽 달리는 도로 따라 걸으면서 네 생각 많이 했다. 성냥불 불똥 맞은 네 얼굴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거라. 
구마네 더듬으러 갔을 때 말이다. 구마네 집 어른들 서울 갔을 때 배밭골 가이가 놀러왔었잖냐. 우리 샤브레 내기를 했었지. 그 과자 포장지는 금딱지로 둘러쳐져 있었지. 도둑질을 하면서 왜 그렇게 웃었을까 잉. 웃는다고 뺨때리고, 웃음 안 참아진다고 대갈통 갈기고, 마당에서 우리 잔치를 벌였잖냐. 구마네 집이 갱본갓에 있어가지고 파도소리가 크게 들리니까 우리가 안 들켰지. 산 속에 있었으면 방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마당에서 들켜버렸을 거라. 너의 목소리, 들려온다. 
“콱 웃으먼 죽여분다 잉. 웃는 놈은 샤브레 하나여 잉?”
준배 목소리 들려온다. 
“씨리 하나썩?”
“웃지 마 시발아.”
네가 두꺼비집 차단기 내리고 가자고 그랬지. 들킬 때 들키더라도 누군지 모르게 도망쳐야 된다고 말이야. 전깃불 켜버리면 곤란하다고 하면서. 너의 목소리 또 들려온다. 아련하게 지금도 들려온다. 
“손 집어넣으면 황이다 잉? 잠 깨불먼 끝이랑게.”
준배랑 너랑 나랑, 우린 침을 삼키며 다짐했지. 살매기 더듬기만 하고 얼렁 나오기로 했지. 방에는 구마랑 배밭골 가이랑 대주랑 셋이 날날허게 누워 있었지.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준배가 오른쪽 네가 왼쪽 내가 가운데를 맡기로 했지. 우린 이불 속으로 각자의 방법을 써서 쓰윽 들어갔지. 꼬막만한 불알 달고 있던 그 나이에, 뭔 욕심이 그리 방정을 떨었을까나. 손이 방정이었지. 벗기고 잡지 뭐냐. 맨살을 더듬고 잡지 뭐냐. 땀이 나서 척척한 손으로 덜덜덜 떨면서 부라쟈를 당겼지. 호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걸 풀려고 무작정 잡아당겼지. 안 풀어지니까 부라쟈 뚜껑 속으로 손을 넣어 버렸지. 그랬으니 가이가 잠을 안 깨고 배겼겠어?
“야, 야, 니 옆에 누구냐?”
나는 가이가 나를 보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너를 보고 그러는 거였어. 
“구마야, 야, 야, 니 옆에 누가 있다. 누구냐?”
가이는 내가 구만 줄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였어. 나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어. 
너는 자는 척하면서 눕더라. 나는 웃통을 벗기 시작했지. 옷 색깔 들키면 끝이니까 말이다. 우린 옷이 많아 봐야 윗도리가 두 개밖에 없었잖아. 내 윗도리 색깔을 보면 가이가 나를 담박에 알아버렸을 거 아니냐. 웃통을 벗어제끼는데 가이 손이 내 가슴으로 오는 거라. 어마, 손가락 끝이 살매기 젖꼭지로 오는데 입이 쩍 벌어지더라. 발끝이 떨리고 숨이 가빠지더라. 무슨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더라. 그래서 기다렸어. 가이 손이 내 젖꼭지를 건드리는가 싶더니, 워메, 그 뒤로 사단났잖아. 
“니 누구여? 엉? 구마야! 구마야!”
내가 그 가이 입을 틀어막을라고 허는디 준배가 튀 나가드라. 웃통 벗고 맨살로 말이다. 맨살이니까 누군지 모르겠더라. 옳지. 이참에는 내가 튀었지. 
네가 안와서 준배랑 밖에서 보고 있었는데, 방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거였어. 네가 두꺼비집 차단기를 내렸잖아. 전기불이 안 들어오니까 성냥을 그었던 거겠지. 날이 궂어서 성냥불이 잘 안 붙는 것 같았어. 또 번쩍 불이 튀더라. 우리는 창문으로 가서 네가 어쩌고 있는가 봤다. 구마가 성냥이 잘 안 켜지니까 손으로 네 얼굴을 더듬더라. 너는 죽은 놈 맨치로 발랑 자빠져서 꿈쩍을 안 하고. 어?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몽유병인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빨리 와부리지 뭣허고 있냐고, 속에서는 애가 타 죽겄드라. 구마가 또 성냥을 긋더라. 이번에는 제대로 불이 붙었어. 구마가 성냥불을 횃불 맨치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네 얼굴을 보다가 우리 쪽 창을 보더라. 황당했는가 보더라. 다시 구마는 성냥불 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네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성냥불이 번져서 손가락을 태우니까 구마가 그걸 놔 버렸잖냐. 네 얼굴 위에서 성냥불이 쉬익 꺼지더라. 
“앗 뜩 썅.”
그 바람 타고 네가 튕겨 일어났어. 나랑 준배는 네가 방문 차고 나오는 거 기다렸다가 주달렸잖아. 에이 시, 에이 시, 야, 샤브레, 잉? 하면서 말이다. 구마 그것이 끝까지 쫓아왔었지. 보리밭으로 달려도 쫓아오고, 또랑을 건너뛰어도 씨근씨근 숨을 몰아쉬면서. 포기를 안 했지. 결국 뛰기를 멈췄을 때, 
“느그 왜 그냐? 엉?”
구마가 한심스런 말을 했었지. 우리가 뭔 말을 할 수 있었겠냐. 뭔 말을 할 것이냐. 더듬는 데 논리적인 이유가 어디 있겠냐 말이다. 네가 그랬다고 너한테만 따지는 게 나한테는 안심이었다. 너는 갱본갓에 깔려 있는 자갈만 주워 던졌지. 준배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서서 구마 눈치를 보고 있었고. 
“또 그럴 거여? 엉?”
구마가 꽥 지른 소리가 또 그 모양이었지. 너는 죽어가는 소리고 “안 그러께” 하더라. 지금 같으면 니가 좋은께 안 그냐, 그럼시롱 확 자빠트릴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말이여. 구마가 신발을 벗고 그 안에 든 모래를 털면서 말했지. 
“또 그러먼 학교 가서 소문 내분다 잉?”
그때 우리가 세상 물정을 모기 다리만큼만 알았어도 말이라, 일은 달리 끝나는 거였는데 그랬다. 소문 내 봐라, 우리만 나쁜 놈이냐? 니 꼬라지는 어찌 되겄어? 이렇게 막판으로 갈 수도 있었던 건데 말이여. 강간하는 놈들이 그런다고들 하잖냐. 신고 해 봐라, 나는 감방 가면 된다 이거라, 니년 꼬라지가 뭣 되겠어? 이 따위로 철판 깐다고. 허긴 우리가 강간하러 간 것도 아니고, 살짝 그냥 더듬기만 헐라고 간 것잉께 그거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만. 소문이 무섭기는 무서웠지. 
두 시간 있다가 또 갔잖냐. 그때는 문이 단단히 잠겨 있었지. 방안에서 번득번득하며 흔들리고 있었던 건 촛불. 차단기를 내려놨으니 전깃불이 켜지지 않았겠지. 그래도 우린 방문을 잡아 보았지.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하고 우린 돌아섰잖아. 혹시나 우리가 더듬으러 간 것이 좋았으면 또 문을 열어놓고 잘 거라고, 꿈이 야무졌었잖냐. 만져준다고 여자들이 다 좋아라 안 하는 거 그 때 우린 배웠지. 포르노는 남자들이 올라타기만 하면 좋아죽는 게 여자라고 가르쳐서 아이들한테 해롭다지. 리얼리즘 포르노가 나와줘야 될랑가 봐. 교육용 포르노도 좀 나와줘야 하고. 자고 있는 여자 팬티를 벗기고, 남자가 배 위에서 오만 지랄을 다 떨어도, 여자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팬티 찾으러 다니고 그러는 만화가 유행이었잖냐. 배밭골 가이가 깨버릴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전철에서 뺨맞고 처절처절 걸을 때 대밭골 그 가이 부라쟈가 생각나더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 애네 집들이에 갔었는데 가이가 애기를 낳아 키우고 있더라. 남편은 공단에 나가는 사람이라더라. 우리 그게 중학교 1학년 때였지? 성냥불 불똥 맞고 생긴 물집이 보름은 갔지 아마? 아직도 그날 밤 집으로 오면서 네가 묻던 말이 생각난다. “벗겼냐?” 나는 아니라고 했었지. 그러니까 네가 또 물었지. “빤스도 벗겼냐?”
제물포에서 부천까지 걸어가니까 두 시가 넘었더라. 형은 티비를 보고 있었다. 
“뭣 허다가 이 시간에 오냐?”
“정연이랑 놀았소. 검사결과 아직 안 나왔소?”
“내일 나온단다. 의사한테는 니가 가라 잉?”
“왜?”
“정연이는 뭣허냐. 산생이새끼.”
형은 말을 살짝 돌리더라. 시험에 떨어졌는지 붙었는지 보러갈 자신이 없다는 사람처럼 풀이 죽어 있었어. 산생이는 느네 아버지 이름이잖아. 네 아버지 이름이 나한테는 가물가물했는데 형은 습관처럼 너를 산생이새끼라고 불렀어. 
“펭귄 키운다대요.”
“세상 좋아졌다. 펭귄을 양식도 허고. 펭귄맨치로 삐딱삐딱 걷드니 출세했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떤 드라마 재방송이 끝나니까 형이 갑자기 팔에서 링거 주사기를 뺐어. 
“가자. 헐 일이 있다.”
“무슨?”
“가 보면 알어.”
링거 자국을 문지르면서 형이 병실 밖으로 갔어. 나는 따라나섰지. 그 간호사가 당직을 서고 있었어. 처음에 나한테 전화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 말이다. 형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어. 두 잔. 자기 것하고 간호사 것하고. 나는 형이 가 있으라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 있었어. 형은 커피를 오랫동안 마신 다음 내가 서 있던 엘리베이터 앞으로 왔어. 
“아무도 없지?”
“이 시간에 누가 있겠어.”
“타자.”
“왜?”
“타보면 알어.”
어쩔 수가 없었지. 형이 먼저 탔고 내가 따라 탔어. 형은 나한테 엘리베이터 문 닫는 단추를 누르고 있으라 했어. 밖에서 열었을 때 열리지 않도록 말이야. 
“망 잘 봐라 잉? 이건 분명 내 특허 스위치다. 내 상호가 없으면 작살내는 거여.”
형은 십자 드라이버로 엘리베이터 콘트롤 박스 커버 나사를 풀었어. 링거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는지 어깨를 들먹거리더라. 형은 조심조심 나사를 다 풀었어. 나는 손을 벌려 내밀었어. 형은 나사를 내 손에 주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았어. 형한테서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여러 순간을 형은 그런 표정으로 살았겠지. 상선을 탔을 때, 포클레인을 탔을 때, 조수 자리를 알아보러 다닐 때, 엘리베이터 부품 가게 점원으로 일할 때……. 아기처럼 순수해 보이더라. 컨트롤 박스 안에 들어 있는 스위치에 형의 회사 로고가 있었어. 산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형이 고안한 그림을 그려 만든 마크도 있었어. 특허를 냈으니까 스위치엔 정교한 무슨 기능이 있었겠지. 내가 알지 못하는. 형이 웃기 시작했지. 
“어? 어허허. 야, 야, 인마. 이거 우리 회사 거야, 우리 회사. 어?”
안심이었어. 안심이 되니까 마음이 급해지더라. 병원 경비한테라도 들키면 큰 낭패잖아. 
“빨리 닫아요. 확인했으니까 됐잖아.”
“가만있어 봐. 잘 되는가 보자.”
“나는 내려도 되지?”
나는 내려버렸어. 시험작동을 한다면서 1층을 누르는 거 보니까 겁이 나서 말이다. 우리 있던 곳이 6층이었어. 5층만 눌러도 시험작동으로는 충분했을 거 아니냐. 그런데 1층을 누르더란 말씀이야. 간덩이가 부었지. 형은 무슨 버튼을 눌렀어. 그걸 누르면 문을 열어놓은 채로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자. 내려간다 잉?”
엘리베이터가 슬슬 내려갔지. 형은 브레이크 레버를 잡고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일 미터쯤 내려갔을 때 브레이크를 당겼어. 턱 소리가 나더니 엘리베이터가 섰어. 층 중간에 걸렸던 거지. 형이 꼭 땅을 파고 들어가 있는 것 같더라.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형은 꼭 무덤 깊이만큼 내려갔던 것 같다. 내가 말했어. 
“이제 올라오지?”
“그럴까?”
형이 대답하면서 엘리베이터 밖으로 팔을 내밀고 6층 바닥을 손으로 잡았어. 나는 형이 폴짝 뛰어서 올라오려고 그러는 줄 알았어. 그런데 이게 웬 일이냐. 형이 올라온다고 했는데, 워메, 브레이크를 중립에 두니까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막 내려가는 거라. 순식간에 엘리베이터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어. 내 눈앞에는 형 팔만 달랑달랑 걸려 있었어. 일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졌던 탓에 내 눈이 환각을 일으켰던 거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까 형 팔은 없더라. 기름때 낀 굵은 쇠줄만 눈앞에 있고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았어. 
“헹! 헹! 어디 있어?”
나는 1층쯤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어. 
“야, 팔모가지 뿌러져 부렀다야. 의사나 좀 불러라.”
“알았어. 기다려.”
내가 간호사한테 가려고 하는 순간 형이 다시 말했어. 
“야. 됐다 됐어. 4층으로 내려와.”
4층에 내려가 보니 형은 안전하게 엘리베이터를 정지시켜 놓고 콘트롤 박스 커버를 닫고 있었어. 장난을 그렇게 쳤던 거라. 산업용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비상 스위치가 어떻게 해서 병원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게 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형네 회사 딱지가 붙어 있었으니 형이 만든 게 맞긴 맞았을 거다. 차라리, 그때 형이 사고로 죽었으면 내가 이렇게 불안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정연아, 이제 펭귄 얘기를 좀 하자. 내가 아는 펭귄은 두 종류다. 펭귄들이 삐딱삐딱 팔자로 걷는 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다리 길이에 균형이 안 맞아서 그러는 건 아니래. 사악한 펭귄들은 동료를 밀어뜨린대. 펭귄들은 물속에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대. 물 근처 얼음판 위에 펭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더라. 배가 고파서 물고기를 잡아먹긴 해야겠는데, 표범이 있으면 자기들이 먼저 먹히니까 망설이느라 옹기종기 모여있게 된대. 그러다가 어느 놈이 어느 놈을 살짝 밀어버린다지. 그 놈이 살아나면 바다표범이 없는 거고 그 놈이 가라앉아버리면 표범이 있는 거야. 그 놈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 모두가 바다로 뛰어든대. 
오시케 타던 우리 형이 선원학교에 합격해서 입고 온 제복을 보고 우리는 그가 해군 장교가 된 줄 알았잖냐. 형이 졸업을 하고 외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월급을 부쳐오니까 동네 어른들이 다들 아들 한 놈씩은 그 선원학교에 보냈지 않냐. 중근이 형, 남수 형, 진철이 형, 동화 형……. 중학교 성적이 형편없어서 떨어질 거라던 사람들도 몸뚱이 하나 가지고 더푹더푹 잘 붙었지 않냐. 너는 성적이 중상위권이라 절대로 떨어질 염려가 없다고 했었지. 담임선생님께서 원서도 깔끔하게 잘 써 주셨지. 
정연아, 왜 그런지 모르겠다. 내가 꼭 형을 바다에 밀어버린 것 같다. 의사 앞에서 형이 물었다. “유전이요?” 의사가 별말 않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 “백 프로 유전은 아니죠. 유전이 많긴 하죠.” 그러면서 의사가 나를 봤던 것 같다. 형이 검진을 주선해서 나도 받아봤는데 나는 아니라더라. 그래도, 삶이 어디 그러냐. 나는 신방을 알아보던 여자와 헤어졌다. 언제 어느 때 내 창자 한쪽에서 암이 불거져 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결혼을 미루고 연애를 계속 하려고 했는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언제든 다시 결혼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헤어지기로 했었다. 
명절 때가 되면 대목 본다고 시골에 안 내려온다는 얘기는 네 아버지에게서 들었다. 너 살고 있는 데 전화번호도 아버지한테서 얻었지. 네 아버지가 형 장례 치르는 데 많이 힘 써 주었다. 버릇대로 나는 네 아버지를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어느 순간 호칭을 생략하게 됐다. 네 아버지와 동갑이었던 아버지가 생각나고, 자꾸 네 생각이 나서 말이다. 넌 만나러 갔던 그 해 추석에는 나도 집에 안 내려갔다. 처음부터 널 만나러 가려고 했던 건 아니야. 형 산소에서 벌초하다가 왕벌에 한 방 당한 다음 산소를 깎다 만 사과처럼 만들어 둔 일도 그렇고, 제사 때 내려갔지 벌초하러 내려갔지,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다녀왔으니까 한번쯤 명절을 걸러도 좋다고 생각했지. 열 네댓 시간 차 막히는 도로에 앉아 스트레스 받을 것도 무서웠고. 주인집에서 전 지지는 냄새가 났어. 그러니까 어 생각이 났어. 너한테 가보기로 마음을 굳혔지. 
너 사는 북쪽 소도시에는 산이 많더라. 버스에서 내려 전화를 걸었지. 아가씨가 전화를 받더라. 네, 펭귄유통입니다. 펭귄…… 그 말을 들으니까 웃음이 나지 뭐냐.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생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 웃느라고 회사 위치를 한참 나중에 물었다. 직원 아가씨가 설명해주는 위치를 듣고 있을 때 눈앞으로 냉동차가 한 대 지나갔어. 가만히 봤더니 펭귄이 그려져 있는 거야. 나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탔지. 기사에게 너를 따라가 달라고 했어. 네 차는 보일락 말락 하는 거리에서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지. 
“저 냥반 운전이 베테랑이네. 카레이선가?”
“어디로 가는 거죠?”
“저 길로 곧장 가면 P시인데. 뒤도 안 보이는 차 타고 어찌 저렇게 휘비고 다닐까. 탑차는 우리도 잘 못하거든요. 뒤가 안 보이니까.”
“저것만 타고 댕기니까 그렇겠죠.”
“그 정도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죠.”
나는 뒤처진 자리에서 너를 보고 가는 게 좋았다. 그래서 잡지는 말고 그냥 따라가 달라고 기사에게 부탁했다. 네가 멈춰선 읍내는 꼭 군대생활 할 때 외출 나갔던 읍내 같더라. 다방도 많고 술집도 많고. 택시 기사 말 들으니까 그 근처에 부대가 많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P시면 서부전선의 중심 아니냐. 너한테 편지 했었다. 이등병 때. 너 군대 안 가도 된다는 얘기는 제대한 다음에 들었다. 준배 만나서 내가 투덜거리면서, 편지를 썼는데도 답장도 안 하더라고 말했더니 준배가 “군대 안 가는 거이 장땡인디, 그 새끼는 군대 얘기만 나오믄 지랄헌다니까. 넘들 다 가는 군대도 못 갔다고 친구들도 안 볼라고 헌당께.” 하더라. 
너는 냉동차 뒷문을 열고 소시지 박스를 내리더라. 넌 아주 딴 사람이 돼 있는 것 같더라. 만 원짜리 한 주먹 쥐고 장부 쓰고 물건 내리고 하는 것 보니까 나랑은 영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 어떡하니. 일점 오 센티면 티도 안 났었지. 여전히 네 두 다리는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더라. 그런데 이상하더라. 용기가 안 나더라. 네가 날 안 반기면 어떡하나 겁이 나더라. 난 택시를 돌려버렸지. 
정연아, 어두운 길 더듬어 다니면서 외상술 받으러 다니던 때의 고독을 말해야겠다. 받아다 놓은 술은 해거름판에 동이 났고, 부녀회 점방은 달거리로 옮겨다녔잖냐. 소주하고 라면, 새우깡, 국수, 밀가루, 콜라, 이런 것만 대청에다 놓고 장사를 했잖냐. 명권네 집에서 점방 볼 때 그 집 아저씨가 팬티바람으로 나와서 대병 반병을 통째로 주면서 얼른 문을 닫았던 날이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게는 분별이 있었지. 저 팬티가 벗다 만 팬티냐, 입다 만 팬티냐……. 이튿날 천대 들고 갱본에 가는디 밭에서 그 아저씨가 보리 베다 말고 허리를 펴면서, 품앗이 하는 아낙들한테 이러대. 
“아이 아아덜도 자고 이만침 허먼 됐겄다 허고 이불을 들씨는디 나명네 막둥이가 술 주라고 방문 앞에 안 와 있는가. 갸가 통 말을 크게 안 허잖어. 뿌시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본께 말리 앞에 서 있는 거여. 느그 아부지가 술 사오라드냐? 긍께 대답을 예 허는 거라.”
아낙들이 죽는다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어. 창피하고 화가 나서 나는 막 달렸어. 그러니 밤중마다 외상술 받으러 다니는 길이 얼마나 멀었겠냐. 부녀회 점방은 느네 집에서만 했으면 원이 없겠다 싶었지. 그 시절 내 고독은 네가 반틈 가져갔었다. 네가 사이다 병에다 한 간병 만들어서 담벼락 밑에 덤불 들추고 박아놨잖아. 내 아버지가 언제 술 사오라고 할 줄 모른다는 걸 너도 알았으니까 말야. 달이 작을 때는 안 서둘렀는데, 달이 너무 환할 때는 도둑질 하는 것 같아서 잽싸게 나꿔챘지 뭐냐. 첫 손길에 안 잡혔던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두 번째로 손을 넣기가 너무너무 무서웠다. 너 욕을 무지하게 많이 했지. 너를 욕하고 나면 덤불 속에 손을 넣기가 더 무서웠다. 이 속에 병이 없으면 어떡할까, 막막해서 말이다. 두 번째는 손을 넣지 않고 막대기로 덤불을 들춘 적도 있었다. 병 있어야 할 자리에 뱀이 있을 것 같아서. 쥐가 새끼를 낳고 있을 것 같아서.필사적으로 나를 해치려고 튀어오를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너는 나를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았었지. 
이젠 냉동차를 한 대 배당 받아서 사장이 됐다며? 내 상상 속에서 넌 펭귄을 키우고 있는 청년이다. 나는 빚이 이천만 원이다. 특허 있었던 형은 신용불량자라 은행에서 만 원도 못 빌렸는데 나는 대학원생 학생증 내밀고서 돈을 뭉텅이로 빌렸다. 캐피탈 회사에서 돈 빌리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았으면 형 수술이나 한 번 오지게 받게 했을 건데. 대개는 그 돈 다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 받는 데에 썼다. 검사를 받은 게 열다섯 번이다. 이상 없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기분이 좋다가도 한 달만 지나면 검사 신청을 해야 마음이 놓이고, 검사를 받을 때는 아니겠지 설마 싶다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은 죽도록 사람이 그리워진다. 내일은 열여섯 번째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우리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넌 한쪽 다리가 일점 오 센티 짧다는 통보를 받았었지. 정연아, 산다는 게 전부 이 모양으로 진단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인 거냐? 미안하다. 보고 싶다.


박금산∙1972년 여수 출생.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중편소설 「공범」이 당선되어 등단. 소설집 '생일선물', 연작소설 '바디페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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