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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신작단편/수선화/유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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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08회 작성일 09-12-20 23:54

본문

|신작단편|
수선화
유시연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마당 초입에 있던 은행나무가 안보였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레둘레 살폈다. 어디에도 은행의 흔적은 없었다. 근 두 해를 넘치다 싶게 열매를 매달았었는데 누군가 뽑아간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서툰 내 후진 실력 때문에 초입에 서 있던 은행나무는 두세 번인가 범퍼에 받히는 사고를 겪어야 했다. 잘 키워주는 주인이나 만난다면 매 번 범퍼에 부딪히며 생채기를 입는 일이야 당하지 않겠지. 나는 애써 자위하면서도 내심 서운했다. 
그 시골집을 구입한 첫 해 남편과 유실수 몇 그루를 사다 심었다. 석류와 모과나무는 애초에 뿌리가 말라비틀어진 것을 잘못 사와서 죽어버렸고, 그나마 살아있는 게 은행과 매실과 사과나무였다. 사과와 매실은 어린 묘목이라 꽃이나 피웠지 열매는 맺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달랐다. 첫 해부터 똘똘한 열매를 줄줄이 매달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해에도 알찬 열매를 남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게 대견하고 고마워서 오며가며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라이터에 불을 붙여 물었다. 담배를 피기 시작한 건 십오개 월쯤 전에 만난 태호가 권해서였다. 담배를 처음으로 입에 댔는데도 기침을 한다거나 어색하지 않아서 태호는 체질이라고 놀려댔다. 당신은 골초가 될 관상이야. 태호는 느물대며 웃었다. 태호는 줄담배를 피웠다. 기침을 하고 가래침을 아무데나 뱉어내면서도 담배를 줄이지 않았다. 태호는 어떤 모임에 초대받아온 손님이었는데 그때 나도 초대를 받은 터였다. 태호의 첫 인상은 너무 평범해서 기억을 못했는데 두세 번인가 초대한 선배 언니의 소개로 다시 인사를 나눈 후에야 기억할 수 있었다. 둘 다 싱글이니 잘해봐. 나 볼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니가 나 대신 문단속 잘하고 가 알았지? 선배는 두 사람을 남겨놓고 휭하니 가버렸다. 어색함을 깨뜨리려고 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다. 쇼팽의 녹턴이었는데 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음악 별로예요?”
“우울하네요.” 
태호는 상대방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당신이 더 우울하네요. 나는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맥주병이 서너 병 비워지자 태호가 뜬금없이 물었다. 
“남편과는 어떻게 헤어졌어요?”
“죽었어요.”
그렇게 말해놓고 나서 나는 스스로도 놀랐다. 그래 어쩌면 이미 나의 마음 안에서 남편은 죽은 사람이었다. 그게 편했다. 그날 밤, 나는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고 깨어나니 태호는 없었다. 나중에 물으니 불가마에서 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뿜어냈다. 담뱃잎이 입안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좋았다. 다시 두 개비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집안은 엉망이었다. 황토방은 부엌 아궁이를 통해 쥐가 들어와 휘젓고 다녀서 여기저기 흙부스러기가 흩어져 있고, 쌀자루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방마다 쌀알이 흩어져서 빗자루로 쓸어낼 엄두도 못낸 채 나는 맥이 빠져버렸다. 오 년 전 남편이 노후에 은퇴하면 살 요량으로 이 집을 구입했다. 첫 해에는 주말마다 내려와 마당에서 숯을 피워 바비큐 파티를 했다. 텃밭에는 온갖 채소와 참외 수박 묘목까지 사다 심었다. 참외는 두더지가 속을 파내 먹었고, 채소는 미처 솎아주기도 전에 꽃을 피웠다. 연보라색 무꽃에 흰나비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무를 못 먹어도 좋다고 생각할 즈음이 나에게는 인생의 절정기였다. 아름다운 대상을 바라보며 그것을 감상하고 느낄 환경에 대해 무한히 감사의 마음이 솟구칠 때 다른 한편에서는 인생의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거의 일 년여 만에 다시 이 집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다. 보일러실 기름은 바닥이었다. 겨울을 용케도 버텨준 집이었다. 배가 고파왔다. 오전 11시쯤 출발해서 여태 아무것도 안 먹었다. 텃밭에는 냉이와 달래가 지천이었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집뒤채로 돌아나갔다. 머위가 뒤란을 가득 채웠는데 남편은 유난히 머위나물을 좋아했다. 살짝 데쳐 돼지고기 삶은 것을 된장에 싸먹으면서 남편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아했고, 당신 덕분에 백 살은 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었다. 머위 잎은 푸지게도 자랐다. 한 움큼 뜯다가 일어섰다. 배고픈 게 사라지고 마음은 텅 비어버린 들판처럼 휭하니 바람이 지나갔다. 들판에는 객토가 한창이었다. 누런 먼지가 시야에 가득했다. 멀리 십 리밖 면소재지 건물들이 낮게 엎드린 채 변함없는 일상을 채우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궁이를 열어젖히자 타다만 쓰레기가 가득했다. 연기를 빨아내는 전기선이 고장 나서 이 주 전에는 불을 피우다가 매캐한 연기만 실컷 마시고는 잠시 기절하기도 했다. 황토방 벽마다 틈새에서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남편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감한 날이기도 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이 시골구석에 정착할 꿈을 꾸었을까. 밥 짓는 냄새가 올라왔다. 머위 잎을 끓는 물에 데치고는 된장에 양념을 했다. 혼자 밥을 먹다가 갑자기 체하는 느낌이 들면 얼른 수저를 내려놓아야 했다. 몇 번이고 체해서 고생한 경험을 떠올리며 나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밥알을 씹었다. 뒤뜰에는 돌나물과 쑥이 자잘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뭐하고 있소―. 
밥을 먹고 있는데 태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태호와는 선배 언니 찻집 이후 계속 만나는 관계였다. 함께 밥을 사먹은 횟수는 꽤 되었다. 한 끼 밥을 같이 먹는 게 백 번 만나는 것보다 더 가까워진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태호는 평소에 전화가 없다가 술을 마신 날 새벽에는 연락을 했다. 자다가 몇 번 그의 전화를 받았다. 보고 싶네. 한 마디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안 건 최근이었다. 
“당신에게 나의 의미는 뭐야?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뭐 그런 말쯤 한 마디 하면 안되나.”
“사랑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나. 적어도 긴 시간 사귀어보아야 알지, 만나자마자 좋아합네, 사랑합네, 그건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야.”
태호의 말에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렇다면 당신과의 만남은 어떤 의미지? 계속 만나고 밥 같이 먹고 술을 마시고 하는, 일상적인 행위라도 무심하게 스쳐지나갈 수 없는 어떤 진정성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좋아한다는 최소한의 감정적 교류가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태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는 마음이 가면 몸이 가고 몸이 가면 마음도 가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끝내 뱉어내지 못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남편에 대한 원망이 솟구쳐 올랐다. 이상하게도 남자와의 관계가 절망적일 때 남편이 생각났다. 나쁜 놈, 나를 이렇게 내몰다니. 평범하게, 아주 평범하게 살다가 백 년 해로할 줄 알았던 나는 어느 날 남편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모든 가치관이 뒤바뀌는 경험을 해버렸다. 지금까지 고수해온 도덕적 가치나 인생관,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뒤죽박죽 엉망이 돼버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사안에 대해 믿지 않기로 했다. 
태호가 보고 싶었다. 가장 힘겨울 때 태호가 옆에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단지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것, 그게 인간의 한계이자 구원이었다. 담배를 마당에 던지고 천천히 일어나 텃밭으로 나갔다. 텃밭 귀퉁이에 노란 수선화 무더기가 흔들렸다. 이른 봄 매화가 피고 나서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수선화 무더기는 뜰 군데군데 주인이 손을 보거나 말거나 저 스스로 열심히 꽃을 피워냈다. 꽃을 보노라니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남편이 수선화 알뿌리를 한움큼 사와서 심을 때 나는 얼마나 잘 견디며 꽃을 피우나 보자며 약간은 냉소적으로 대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남편에게서 남자다움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과일나무나 좀 사다 심지. 그 말을 하며 남편의 취향에 대해 조금은 불만을 토로했다. 남편은 작고 자잘한 것들을 좋아했다. 집안 꾸미기도 아기자기한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여백을 좋아하는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동떨어진 기대심리는 막연하게 깊은 심층의 바닥에 알게 모르게 허전함과 실망을 키워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남편이 던진 그 말에 나는 지지 않고 당신은 여자로 태어났어야 해, 라고 응대를 했는데 그것은 서로에 대한 결점을 꼬집는 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남편이 과일나무를 사다가 집둘레에 심기를 원했다. 과일나무 울타리는 남편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과일나무 울타리는 나의 바람일 뿐 그는 별로 관심 없어 했다. 귀찮아. 몇 번의 채근에 남편은 몹시 성가셔했다. 남편에게서 세상의 바람을 막아줄 튼실한 울타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번번이 빗나갔다. 내가 그에게 과도한 기대를 한 만큼 남편도 나에게서 그것을 바랐다는 것을 지금에야 알 것 같다. 남편의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은 때때로 예기지 않은 곳에서 갈등을 일으켰다. 남편은 가끔 때 아닌 뭐하고 있어, 라거나 저녁 메뉴는 뭐야, 같은 문자를 보냈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해 시간이 흐르면 마음에 앙금이 남는 듯했다. 물론 추측이지만 그런 사소한 일들의 반복이 겹쳐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는 삐쳐서 말을 안했다. 일방적인 침묵은 고문이었다. 나는 남편이 좀 더 소탈하거나 무심하기를, 좀 더 남성답기를 내심 갈망했다. 남자답다는 게 뭔지 나 자신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서 막연히 좀 무뎠으면 싶었다. 
남편의 기억을 털어내려 고추대궁을 뽑기 시작했다. 지난해 봄에 심은 고추대궁은 말라버린 채 땅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죽은 뒤에 쓰러지거나 소멸되는 것은 인간뿐인 듯싶었다. 죽은 뒤에도 꼿꼿하게 땅에 서 있는 나무는 신기한 종족이었다. 한참 엎드려 일을 했더니 등허리가 축축해졌다. 허리를 곧게 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서녘 하늘에 길게 노을이 걸려 있었다. 휴대폰 시계에는 오후 5시 56분이라고 찍혀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르다니……. 태호는 항상 바쁜 것 같았다. 문자를 해도 제 때 답장이 오거나 전화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관계가 신통했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참았다. 누군가 그리울 때 그것이 여자 친구이거나 혹은 이성 친구일 때 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참는 버릇이 있었다. 운전을 하다가도 졸음이 오면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름대로의 자기 단련이었다.  
태호와는 밥 때가 되어 주로 만났다. 태호가 사는 오피스텔 근처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태호는 나를 만나는 날에도 운동화를 꺼내 신고 공원에 가서 몇 바퀴를 돌았다. 멋모르고 따라 나섰다가 본의 아니게 걷기 운동을 하게 되었다. 나무 의자에 앉아 태호는 지난밤 마신 술기운이 남은 푸스스한 몰골로 담배를 꺼내 물며 살을 빼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살을 빼려면 우선 술을 줄여야지.”
“그게 맘대로 되나.”
“아님, 밥을 제대로 해먹던가.”
내 말에 태호는 씩 웃었다. 
“다음에 내가 밥 해줄게.”
태호는 나를 보면 항상 그 말을 하면서도 아직 한 번도 밥을 해준 적은 없었다. 입버릇처럼 밥해준다는 말을 들은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나 팔 개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태호와는 두 번인가 다퉜다. 그것을 꼭 싸웠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몇 번 참다가 결국 메일로 편지를 보냈다. 
―당신에게 저의 의미는 뭔가요. 저는 당신을 바라보는데 당신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당신이 늦은 밤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 제 기분이 어땠는지 아세요? 아직도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나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다소 유치한 글이었다. 태호는 화가 많이 나있었다. 그가 의외로 발끈해서 전화를 했다.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생각하나? 나는 당황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도 매너없이 화부터 내고 난리야, 여자 마음 좀 풀어주면 어때서. 전화를 끊고 나서 마음이 허전했다. 태호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에게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태호가 화를 내는 게 좋았다. 생동감이 있고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가질 수 있어서 그랬다. 한편으로는 태호가 발끈했다는 사실이 우습고도 재미있었다. 남편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잉꼬부부라고 믿었던 날들이었다. 남편과 합의 이혼을 하고 나서 그와 싸운 기억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생경해서 나는 무엇이 문제였지, 곰곰 따져보기까지 했다. 굳이 싸워가며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되도록이면 갈등관계로 진입하기 전에 미리 배려하고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남편은 안으로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긴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었다. 
―태호 씨, 뭐해요? 나 지금 시골에 와있는데 퇴근하고 올 수 있어?
문자를 보내면서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금방 소식이 왔다. 
―할 일도 다 끝났는데 어떻게 가는지 방법을 알려줘.
나는 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오는 방법을 알려줬다. 때로는 태호에게 기대어 인생을 열어가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태호는 내가 매달리면 도망갈 것처럼 말했다. 
“전에 알던 여자가 있었어. 여자와 어느 정도 알고 지내자 이 여자가 나를 송두리째 감옥에 가두려 하는 거야. 하루에도 문자를 백 통씩 날리고. 그거 죽겠데. 그래서 그만뒀어.”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내 목을 옥죄는 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어, 숨을 쉴 여백을 줘야지.”
“당신도 내가 집착하면 도망가겠네.”
“그렇겠지.”
“너무 이기적이다,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도망칠 궁리부터 하냐고.”
“그게 남자야, 오래 지속되려면 서로 독해야 해.”
“어렵다, 어려워, 무슨 남녀관계가 그렇게 계산적이야?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좋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면 될 것을.”
“당신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래.”
“그래, 태호 씨는 연애 경험 많아서 내공이 쌓였다 이거지. 차암 편리하네.”
태호가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상기했다. 섹스가 끝나면 그는 담배부터 찾았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는 불을 붙여 나에게도 권했다. 그의 담배 피우는 태도에서 관계 뒤의 허망함을 느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그의 영혼은 나에게 묵직한 괴로움을 안겨줬다. 그것은 고통이고 쓸쓸함이고 외로움이었다.
―좀 외로워.
태호에게 외롭다고 문자를 날렸다가 모욕에 가까운 답을 받았다. 
―외로움의 본질은 말로 표현하는 게 아니야. 
사랑은 상처를 하나씩 수선화 알뿌리처럼 가슴에 심는 거라고 생각했다. 겨울을 견뎌낸 알뿌리만이 봄에 노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자 태호가 올 시간이 가까워옴을 알고 찻물을 준비했다. 차 맛은 남편이 가르쳐줬다. 차 맛을 음미하는 것, 서예작품을 볼 줄 아는 것, 그림의 구도를 파악하는 것, 낚시와 분재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반기를 차지한 습벽은 남편과의 생활공간에서 익힌 것들이었고,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나는 그것을 자기화하고 있었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 차를 울궈내는 과정을 보며 태호는 투덜댔다. 
“인스탄트 커피에 길들여져서 전통차를 마시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복잡하게 보여, 시간 낭비 같고.”
“차 마시는 시간은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야, 그래서 다도라 하지, 도를 닦고 자신을 수련하는 것, 현대인에게는 그게 필요해.”
석 잔째 차를 미처 다 비워내지 못하고 태호는 배부르다며 손을 내저었는데 살 빼고 싶으면 차 맛에 길들여지라고 나는 기어이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왜 연인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고, 구속하려 하고,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차량의 바퀴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신발을 끌고 나갔다. 들판이 조금씩 어두움에 잠식되어 가고 노을은 보라색에서 짙은 코발트색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뜰의 수선화는 제 빛깔을 잃고 어둠 속에 검은 덩어리로 흔들렸다.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거의 일 년여 잠을 못 잤다.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났고 몸무게는 갑자기 10키로가 빠져버려 피부는 탄력을 잃었고 한꺼번에 건너 뛴 세월처럼 노화가 왔다. 시력이 제일 심각했다. 시력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자 문자를 확인하는 데도 안경을 벗어야 했다. 안과에서는 노화라고 하고 안경점에서는 노안이 왔다고 다초점 안경을 권했다. 무엇보다도 얼굴의 주름살이 문제였다. 
택시에서 내린 태호가 보였다. 후드 달린 구겨진 검정색 자켓이 후줄근하게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같은 차림새였다. 나를 보자 미소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웃음에 인색한 남자, 대화에 인색한 남자, 상대방의 기분이라곤 아랑곳 않는 남자가 태호였다. 
“그 검은 색 좀 벗어던질 수 없어?”
“왜 상복 같아서? 가톨릭 사제들은 늘 검은 옷을 입고 있잖아.”
“검은 옷은 죽음을 상징한대. 세속에서의 죽음, 욕망으로부터의 죽음, 자기를 온전히 신에게 봉사한다는 의미에서의 죽음…… 뭐 그런 뜻이 있다던데 그렇다고 당신이 평생 그렇게 살 것도 아니잖아.”
“못 살 것도 없지, 나에게 토끼 같은 자식이 있기를 하나 여우같은 마누라가 있기를 하나, 세상에서 제일 자유로운 영혼인 걸.”
“그래서 당신은 평생 혼자 방랑자처럼 살 거야?” “걱정 돼? 성희 씨가 나를 책임져 준다면 또 모르지.” 
“글쎄, 난 자신 없네요. 당신이라는 사람, 종잡을 수 없잖아.”
태호의 손에 들린 흰 비닐 봉투를 받아들며 안을 살폈다. 맥주와 소주 마른 오징어랑 땅콩이 들어 있었다. 술꾼은 어딜 가나 티를 낸다니까. 나는 혼자 구시렁대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둠이 완전히 땅으로 내려와 있었다. 멀리 가로등이 보이고 면소재지 불빛들이 조금씩 알록달록 피어났다. 밥 생각없다며 태호는 묻지도 않았는데 미리 선수를 치더니 담배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는 태호가 라이터를 붙여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가늘게 솟아올랐다. 남빛 하늘에 별이 촘촘했다. 달이 동쪽 하늘에 걸려 있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이 교교한 정적을 낳았다. 상현달, 하현달, 보름달…… 무수히 많은 달을 보아왔다. 새벽에 잠깨어 마당을 서성대거나 고속도로를 달려 시골집으로 내려올 때 달은 항상 따라다녔다. 어두운 하늘에 걸린 달을 쳐다보며 혼자라는 삶이 주는 무게를 실감하곤 했다. 바쁘게 일을 하는 중에도 꼭 하늘을 쳐다보는데 늦은 밤이나 새벽하늘에 걸린 달은 내 가슴에 고즈넉하게 들어와 앉아 어둔 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사랑이란 수선화 알뿌리를 가슴에 묻고 겨울을 나는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오늘 낮에 뜰에 핀 노란 수선화를 보며 생각한 거야. 겨울 추위를 이기며 봄꽃을 피워낸다는 것, 그게 사랑이라구.”
“오늘 따라 성희 씨 이상하네, 왠 센티멘탈.”
“사랑은 상처이기도 하고 영광이기도 해. 노란 수선화꽃무더기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잖아.”
그 말끝에 울음이 차올라 흐느껴 울었다. 태호가 내 어깨를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가슴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댔다. 언제나 도망가고자 하는 남자, 가깝게 다가서려다가도 도망갈 채비를 하는 태호를 보면서 나는 많은 외로움과 쓸쓸함에 빠져들었다. 
태호를 의식하며 얼른 눈물을 그치고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하현달이 나뭇가지 사이에 적요롭게 떠서 조금씩 몸피를 줄이고 있었다. 꽉 찼던 달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는 느낌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마음을 무참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꽉 찼던 달, 온전했던 가정, 완벽하다고 믿었던 가족 관계…… 나는 다시금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상실감은 단순히 배신이나 분노, 미움의 차원이 아니라 살아온 삶이 뿌리채 흔들리는 것 같은, 실존에 대한 고통이었다.     
“술이나 한 잔 하지. 아님 우리 찜질방 갈까.”
“이 시간 찜질방 문 여는 데 있을까. 다 닫았을 걸.”
그러고 보니 태호를 따라 찜질방에도 몇 번 갔다. 찜질방이라고는 생전 갈 엄두를 못 냈는데 태호를 따라 다니다보니 이제는 온천욕이나 불가마를 선호하게 되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인지 가끔은 몸이 찜질방을 원하는 것 같았다. 태호가 찜질방에 가서 감기가 낫듯 나는 몸살기가 있거나 피곤하면 찜질방이 생각났다.   
문화적 조건이란 우스운 것이다. 어느 사이 나는 태호의 페이스대로 자신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고 있음을, 그리하여 익숙해져 있음을 알고 매우 놀랐다. 
“손님을 언제까지 마당에 세워 두실라나. 술이나 마시고 밤새워 놀까.”
“그래요, 둘 다 실컷 마시고 오늘밤은 태호 씨에게 주정이나 할까보다.”
나는 앞서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호기심어린 말투로 대꾸했다. 태호가 뒤따라 들어오며 내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당신이 주사를 부린다고? 기대되는데, 성희 씨는 내가 보기에 결벽증 환자같은데, 도덕적 결벽증, 그래서 처음에 당신에게 데이트 신청하고 나서 첫 번째로 응답이 와 놀랐어. 두 번째로는 당신을 원했을 때 거부하지 않아서 놀랐지. 그래서 이 여자가 많이 외롭구나, 싶더라구.”
“그래서 너무 쉬운 상대라 실망 했나요?”
“그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지. 별 다른 뜻은 없어.”
태호 앞에서 취하고 싶었다. 취해서 흐느적대고 싶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나서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선명한 이성은 나의 바람을 외면했다. 
“나는 요즘 내가 살아 있는 게 고마워, 봄꽃을 볼 수 있어서.”
“꼭 죽을 사람처럼 말하네.”
“죽어버릴려고 했지, 다리 난간에서 푸른 강물로 뛰어내릴까, 산꼭대기에서 계곡으로 몸을 던질까. 가장 쉬운 방법은 아파트 옥상이었어. 선배 언니가 아파트 옥상 난간에 발을 내밀었다가 정말 뛰어내릴 것 같아서 일층으로 이사했다는 말 들을 때 이해가 되더라구.”
“죽는 얘기 그만하고 술이나 받아.”
태호가 두터운 도자기 컵에 맥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오징어를 찢더니 땅콩을 오징어 살점에 말아 내밀었다. 나는 입으로 받아먹었다. 
“성희 씨 남편 죽은 게 아니라 이혼했다는 말 들었어. 거짓말을 해야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나.”
“남의 상처 들쑤셔내지 말고 태호 씨 이야기나 해봐. 부인과 왜 헤어졌는지, 혹시 바람 피다 들킨 것 아냐?”
“그건 아냐, 그 얘긴 묻어두자.”
태호는 일어서더니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갔다. 법원에서 만난 남편은 윤기가 흐르고 건강해보였다. 일 년여를 혼자 산 남자의 궁핍함은 어디에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직감적으로 여자와 함께한다는 느낌이 왔다. 일 년여 별거를 하면서 남편도 나도 서로간에 대면한 적은 없었다. 그냥 잊고 살았다. 문득문득 남편이 생각날 때는 여자의 그림자도 함께 따라왔다. 이층 로비에서 환하게 미소 짓던 남편을 본 이후로 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다내려놓았다. 남편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가 몹쓸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죽을 죄인은 아닌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상처 준 것 있으면 용서해.
나는 복도 의자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율무차를 마시며 말했고 남편은 미안하다고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미안함으로 끝난 관계였다. 스무 해 가까이 이어온 관계가 단지 미안함으로 끝난 사실에 나는 우울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오래 웅크려 있었다. 전화기가 몇 번 요란스럽게 울려댔지만 받지 않았다. 남편을 사랑했던가. 단지 한 집에 함께 산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남편에게서 정인이 아닌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오빠나 동생, 혹은 친족 같은 느낌이 든 이후로 부부생활도 뜸해졌다. 가족애와 사랑은 별게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아니라 남편이 오래 전에 나로부터 마음이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방을 얻어나가면서 남편은 말했다. 오래 전 오륙 년 전부터 마음이 떠났다고. 맙소사. 그렇다면 사랑없이 의무적으로 살았다는 거야? 부부간에 꼭 사랑으로만 사나. 남편의 마지막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나의 마음을 베어버렸다. 단 한 순간도 사랑없이는 안 살아. 그러니 더 이상 당신과 함께 할 이유가 없어, 당장 방 구해서 나가. 나는 그렇게 남편과 헤어졌다.
시골집은 퇴락해서 흙덩이가 군데군데 떨어져 뒹굴고 마당에는 풀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름이 짙어갈 무렵 마당은 온통 풀들이 점령해서 풀들의 집 같았다. 한 해를 방치한 집은 처음 두 해동안 남편과 가꿨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야성으로 돌아가 있었다. 태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서움이 밀려들었다. 혼자 주말에 내려온 밤이 생각났다.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청승스럽게 들려 무서웠던 밤이었다. 누워 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무섭기도 하고 바람에 풀이 스치는 소리에도 나의 귀는 예민하게 움직였다.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오전 내내 늦잠을 자고는 그 후 다시 혼자 내려오지 않았다. 꼭 티를 내야 하나. 여자 혼자 방에 두고 진짜 재미없네. 태호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며 소주병을 열었다. 맥주와 소주가 뒤섞여 취기가 돌았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휴대폰을 했다. 태호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나뭇잎이 스산하게 몸을 떨자 내 몸도 서늘해졌다. 무서움이 왈칵 몰려들었다. 논두렁길을 따라 버스가 다니는 큰 길 쪽으로 걸었다. 개가 짖었고, 조금 후 여러 마리의 개들이 짖었고, 다시 얼마 후 동네 개들이 어둠을 물어뜯었다. 어둠이 소리에 묻혀 깊어가며 저 스스로의 상처를 핥느라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걷다 보니 멀리서 병원차의 경적 소리가 울려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 사이 저수지로 흘러드는 개울가 근처에 서 있었다. 몇몇 사람이 왔다갔다 했고, 119 구급차가 멈춰서더니 들것이 내려졌다. 문득 불안을 느꼈다. 태호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진 채였다. 혹시, 나는 불안한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개울 근처로 가까이 다가갔다. 119 복장을 입은 남자 서너 명이 누군가를 등에 업고 들것에 싣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실루엣이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들것 주위에 물이 흥건했다. 눕혀진 사람의 팔이 맥없이 쳐져 있고 검은 머리카락이 밖으로 흘러내렸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동네 사람들 여럿이 나와 서 있었고, 누군가를 태운 119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죠? 누가 다쳤나요?”
그 중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노파가 힐끗 쳐다보더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이네, 색시는 어디 살우.”
“할머니, 조오기 산자락 끝에 초록지붕 집 있죠, 거기 이사 온 사람이에요.”
“어, 서울에서 왔다는 젊은 색시 말이우?”
“네.”
“그럼 집들이를 하던가 해야지, 누가 왔다는 소리는 들었어. 지난 가을 과수원집에 사과를 몇 상자 팔아줬다지…… 마른 고추나 뭐 참깨 같은 것 필요하면 말해, 장날 내다 팔기도 하니까.”
“할머니 집이 어디예요?”
“색시 집에서 보면 안보여 마을 안짝에 있거든. 다음에 내 놀러갈게.”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누가 물에 빠졌나요?”
나는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젊디나 젊은 것이 죽기는 왜 죽나, 죽을 힘이면 살겠네.”
“죽으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저 혼자나 죽지, 허벅지 높이밖에 안 되는 도랑물에 빠져죽겠다고 뛰어든 건 무슨 심보람,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죽을 팔자면 접시물에도 빠져죽는다는데, 다 귀신에 씌어 그런 거야, 에이, 오늘밤 잠자기는 다 글렀네.”
할머니 말에 육십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꾸를 했다. 나는 옆에 서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태호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태호는 오래 전 소주에 수면제를 30알이나 털어 넣었다가 토해낸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 한 번, 서른 살 때 한 번, 그렇게 수면제를 먹고 병원에서 깨어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려줬다. 
사람들이 하나 둘 가버리고 낚시꾼으로 보이는 사람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나는 태호가 원망스러워졌다.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니 태호가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밤 마실 다녀오시나, 다 큰 처자가, 흐흐.”
“놀랐잖아, 나 혼자 두고 어딜 갔다 왔어, 매너 꽝이네.”
“여기 하늘 아래 요람, 집 뒤 무덤에 누워 있었어.”
“무섭지 않아?”
“무섭긴, 어차피 삶과 죽음은 함께 가잖아.”
“나원참, 도를 닦으셨네.”
“그렇게 기가 약해서 혼자 어떻게 세상을 이겨나가나. 자꾸 나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하지 마.”
“그래, 당신 잘났어, 누가 동정하래? 나를 무시해도 되는 거야, 평생 그렇게 잘난 맛에 살지 그래.”
태호에게 마구 화를 냈다. 태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여 나에게 내밀었다. 담배를 받아 연기를 들이마셨다 내뿜으며 나에게 실망했지, 추해보이지, 물었으나 태호는 인간적인 데 뭘 그래, 너무 자학하지 마,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해서 맥이 빠졌다.  
태호가 나를 가만히 안았다. 
“가끔 이렇게 누가 안아만 줘도 절망하지 않고 살 것 같아.”
“성희 씨는 감성적인 데가 있어, 그 나이 되도록 낭만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야.”
“낭만성? 그냥 우아하게 살고 싶었는데 인생이 나를 우아하도록 가만 놔두지 않네.”
“묘지에 가볼래,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한 번 친하게 지내봐, 인간은 삶을 배신해도 영혼은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알았어, 어디 삶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가르치는지 듣고 싶네.”
태호 팔을 잡고 일어섰다. 태호가 큰 걸음으로 앞장섰다.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가 태호 팔을 꽉 붙잡았다.
“무섭니?”
“무슨 걸음이 그리 빨라, 같이 보조를 맞춰 줘야지.”
“서울년들 걸음걸이처럼 좀 걸어봐, 시골 영감 걸음 걷듯 하지 말고.”
“서울년 걸음걸이가 어떤데, 나도 중학교 다닐 때 시오리를 걸어다닌 내공이 있는 사람이야, 그래도 태호 씨 걸음은 너무 빨라. 나랑 보조를 맞추기 싫은 거지?”
“…….”
집 뒤 묘지는 이씨 문중 땅이었다. 전에 이 집에 살던 여자와는 묘지 문제로 갈등관계가 있었다. 집 가까운 곳에 묏자리를 쓰려면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여자가 강경하게 반대를 해서 이씨 문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몇 가지 짐을 갖고 주말에 내려왔을 때 묘를 관리하는 이씨 문중 사내가 음료수를 들고 와 잘 지내보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냥 묘지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려다가 전에 살던 여자 흉을 봐서 인상이 구겨졌다. 그래서 묘지는 더 이상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더니 그 후 얼굴을 맞닥뜨려도 아는 체도 안했다. 
묘지는 다섯 기 정도 조성되어 있었다. 한 번도 집 뒤 묘지 정상에 와본 적이 없었다. 초입에 잠깐 산책 나왔다가 얼른 도망치듯이 돌아오곤 했다. 
“여기 누워봐, 진짜 편안해.”
태호가 양쪽에 봉분이 있고 그 가운데가 널찍하게 비어 있는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태호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인기척 때문인지 풀벌레 소리가 뚝 그쳤다. 묘지 주위는 산이고 묘지 뒤쪽은 과수원이었다. 지난 11월 과수원으로 산책을 갔다가 사과를 따고 있는 늙은 부부를 만나 사과 한 상자를 샀다. 할아버지가 직접 나무에 달린 사과를 골라 따주었다. 금방이라도 물이 뚝뚝 배어나올 것 같은 싱싱함이 붉은 사과에 가득해서 기분이 좋았다.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다음 주인가 당장 사과 사러 가자고 해서 친구 차로 내려와 세 상자나 사가지고 갔다. 금방 따낸 사과에서는 푸른 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았다. 껍질은 탱탱했고 베어 물면 터져버릴 것처럼 신선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바람소리가 지나갔다. 움찔 몸을 떨었다. 태호가 팔을 뻗어 팔베개를 해줬다. 태호 팔을 베고 누워 사람이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섹스가 없어도 팔베개 해주는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좋겠어.”
“몸과 마음은 함께 가는 거야. 둘 다 중요해.”
“그런 것 말고 남녀간에 우정이 존재한다고 믿어?”
“힘들겠지.”
“솔직해서 좋긴 한데 좀 섭섭하다.” 
“어디 갔었어? 무서움 타는 사람이.”
“요 앞 방죽에.”
“거긴 왜?”
“어떤 여자가 물에 빠졌대.”
“죽었어?”
“물 깊이가 허벅지밖에 안된대. 보통은 무릎 깊이이고, 어쩌다 자갈을 채취한 곳만 그렇대.”
“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느껴지는군.”
“그렇지, 생목숨을 끊는다는 게 어디 쉬워, 자살하는 사람은 진짜 독한 사람이야.”
“오죽하면 죽을까, 함부로 타인의 삶에 대해 재단하지 마. 죽음이 삶보다 나은 사람도 있으니까.”
“…….”
태호와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현달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달은 그대로인데 구름이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달빛을 애인 삼아 소주 한 잔 하지.”
태호가 말을 마치고는 팔을 빼더니 일어나 비칠거리며 걸어갔다. 
“같이 가.”
문득 무서운 느낌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태호를 놓칠세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태호는 힐끔 쳐다보며 귀신이 무서워, 라고 말하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충동적인 태호의 행동에 기분이 언짢았다. 축축한 밤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비스듬히 경사진 무덤 위에서 집 울타리께를 지나 여름 홍수 때 고랑이 깊게 패인, 지금은 없어진 옛 산길을 지나 올 때는 으스스했다.   
묘지가 끝나는 지점과 마당의 경계선쯤에서 태호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두칠성이야. 내일은 날이 끝내주겠군.”
태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태호 시선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니 별들이 깨알처럼 흩어져 있고 주먹덩이 같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덮칠 것처럼 푸른 하늘에 떠 있었다. 나는 태호 허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고르지 못한 태호 숨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태호가 돌아서더니 내 어깨를 정면에서 안았다. 나는 태호 얼굴을 어루만졌다. 까실한 느낌이 손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태호 입술이 덮쳐왔다. 눈을 감았다. 바람이 멈추고 풀벌레 소리도 뚝 그치고 오직 외롭고 쓸쓸한 두 영혼이 내뿜는 거친 숨결만이 어둠속에서 뒤채일 뿐이었다. 고통스럽던 기억이 저만치 물러나고 있었다. 나는 격랑에 휩쓸려 그대로 떠내려가도 좋다고 생각하며 태호에게 몰두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뿌연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래, 이 순간에 충실할 거야. 뼛속까지 시린 슬픔과 모래알갱이를 씹는 것 같은 팩팩함을 견딘 날들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받아들였다. 따뜻함을 갈망하는 시간만이 존재했다. 오래 홀로 마른 강을 맨발로 걷던 밤, 휴대폰 스팸 문자에서도 반가움을 느끼고 온기를 느꼈던 순간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호가 먼저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그의 등이 어둠속에서 거대한 벽이 되어 가로막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순간적으로 흡 하고 숨을 멈추었다. 담배 연기를 허공에 불어올리는 태호의 등이 너무나 낯설고 고독해보였다. 그의 등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났다. 옆구리가 쓰리고 아팠다. 태호는 여전히 웅크리고 앉은 자세로 담배 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지난 번 등산 갔을 때 바위에서 실수로 떨어졌어. 그때 죽는구나 싶었지.”
“그때 심정이 어땠어.”
“한 시간가량 꼼짝않고 누워 있는데 살아온 전생이 한순간에 보이더라고. 갑자기 눈물이 흐르대.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안도감이랄까. 착하게 살아야겠다 싶은 맘도 들고…… 아, 갑자기 커피가 땡기네, 우리 커피 한 잔 할까?”
“잠은 언제 자고? 올빼미 족 아니랄까봐.”
“자고 싶을 때 자면 되는 거지, 졸리면 자든가.”
태호의 그런 태도, 마치 남의 말 하듯 무심하게, 혹은 마지못한 듯 대답하는 태도는 언제나 허전함을 키웠다. 끌려가는 황소처럼 자신의 주관적인 의사표현이 아니라 항상 아니면 말고 식의 대답에 맥이 풀렸다. 다시 한 번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달의 위치가 바뀌어 서쪽으로 꽤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결국 서쪽으로 사라지는 달처럼 인간의 삶도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둘기 울음소리가 고요한 어둠에 파장을 일으키며 들려왔다. 밤에 듣는 비둘기 울음소리는 청승맞았다. 저 들판 끝으로 맨발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황토빛 땅은 언제나 심경을 어지럽게 하면서 야성의 본능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맨발로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들판 끝에 다다르면 생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을까. 끝없이 걷고 또 걸어 세상 끝에 다다를 수 있을까. 나는 막연히 어딘가로 열려 있을 것만 같은 그 길 위에 서서 망연히 어둠에 잠긴 들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과수원과 묘지쪽을 향해 지나갔다. 멀리 들판 끝으로 부옇게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불 테지. 신발을 벗고 흙바닥을 몇 발자국 밟았다. 눅눅한 밤이슬이 발바닥에 감겨왔다. 맨발로 어둠의 시간을 건넜던 밤, 그 두려움의 시간이 이제는 마디마디 굳은살이 되어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음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나는 차갑고 눅눅한 황토빛 흙덩이가 발바닥에 감겨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푸른 새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유시연∙22003 ≪동서문학≫ 단편소설 신인상 당선.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2008년 문화예술위원회 3분기 우수도서 선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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