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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③/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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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③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의
지속으로 기록하는 자
하종오의 시집 <입국자들>
송찬호의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백무산의 시집 <거대한 일상>
잘 익은 생각들을 빛나는 시어에 담아 멋지게 한 편으로 빚어내는 시인들을 보면 절로 감탄이 튀어나온다. 때로는 자못 경건해지다 못해 위축되기도 한다. 나는 왜 저런 시와 사유를 발휘하지 못하고 휘발하고 마는가,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시인들을 나는 ‘시장詩匠’, 곧 시의 장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 시장詩匠인가? 장인은 순간을 살되 영원을 기약하는 사람들이다. 여러 분야에서 온갖 장인들이 역사에 맺혀 놓은 장인정신의 결실들을 보자.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의 지속들인가.
시도 마찬가지이다. 시를 짧은 길이의 순간적인 기록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아니다. 시는 사물이든 삶이든 사유든 깊고 오래도록 삭인다. 그런 뒤, 그것의 서사성을 압축해서 핵심을 콕 집어 드러내 기록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느낌을 일초의 영원이라 부르고 싶다. 시는 일초에 영원을 헤아려 담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장詩匠은, 일초에 영원을 헤아려 그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의 지속으로 기록하는 자이다. 시인은 많지만 시장은 드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장에게 시는 숙명적인 업業의 고달픈 진저리일 것이지만, 그저 그런 시인에게 시는 자기 공명의 적절한 표현수단일 따름인 것이다.
장인이 작품 하나에 평생을 걸듯이 시장도 단 한 편의 시에 목숨을 건다. 시장에게 시는 한 편, 혹은 한 권의 시집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그의 전 생애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한 시장의 생애는 그대로가 한 편의 시이다. 그 시의 마감은 그래서 그의 목숨이 끝나는 순간 찾아온다.
‘시장’들의 시는, 경륜과 시업이 단단하게 뭉친 결정結晶들로 빛나고는 하는데, 그 결정들이 바로 한 권의 시집이다. 이 시집들은 대체로 미답未踏의 경지를 밟고 서 있다.
나는 이번 계절에 그런 시장들을 만나볼 참이다. 그런데 약간 멈칫거리게 되는 점은 ‘동의’ 부분이다. 내가 만든 조어인 ‘시장’으로 호명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면, 나는 시인들께 결례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래 망설일 수가 없다. 순간에서 영원을 보는 시의 장인들을 따라 내 발걸음도 이미 길을 떠난 것이다.
1. 하종오, 묘사보다 감동적인 진정성의 다큐멘터리
최근 하종오의 눈은 온통 이주민 혹은 탈북자에 쏠려 있다. 처음에는 국내의 이주 노동자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이젠 ‘국경 너머’까지 내다본다. 그의 시선은 몽골과 중국, 연변,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아우른다. 전방위적이다. 단순히 삶의 이전移轉을 말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역사를 읽고 환경을 보고 미래를 진단한다.
<입국자들>에서 보이는 선지자적인 눈초리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 사람의 생애와 한 가족의 미래를 명료한 다큐멘터리처럼 읽어낸다. 어찌 보면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이고 관찰자적이다. 때로는 전지적인 그의 시선이 불편할 만큼 감정선을 압박하기도 한다. 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집요하게 끊임없이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현실이다, 피해가지 마라, 하고 우리 의식을 명료하게 붙잡아 둔다.
몽롱하고자 하는 우리 내면은 그리하여 예기치 않은 통증으로 휘청거린다. 처음 그것은 연민처럼 다가오지만, 가슴에 부딪칠 때에는 달라진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우리의 삶과 이주민의 삶, 저 사막화해 가는 몽골족의 삶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놓인 처지만 다를 뿐, 팍팍한 삶과 중노동과 허기진 눈초리가 판박이처럼 닮았다.
남한에선
북한 출신 젊은 여자가
밥을 해먹고 집 나와서
돈 벌러 성큼성큼
식당에 나가고 있다
황사바람 부는 봄날
북한에선
남한 출신 늙은 여자가
배가 고파 집 나와서
나물 캐러 비칠비칠
들판에 나가고 있다
황사바람 부는 같은 날
중국에선
북한에서 도망친 남자가
골방에 숨어 끔벅거리고 있고
남한에서 놀러온 남자가
거리를 나다니며 킥킥거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 없는
가난한 중국인들은 일하러 가고 있고
몽골에선
양을 키우는 청년이
초원이 모래에 덮여 점점 줄어드니
한국 가서 공장 다녀야겠다고 작정하고 있다
―하종오, 「국경 너머」 전문
황사 바람 부는 봄날, 남한과 북한과 중국과 몽골에서 벌어지는 일은 한 가지다. 사람들은 오로지 먹고 살 걱정만 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국경이란 말은 물리적인 경계를 제외하고는 별 의미가 없다. 국경 너머 이쪽과 저쪽에서 다 바라는 삶은 남한에서의 안정적인 돈벌이이다. “남한에서 놀러온 남자가/거리를 나다니며 킥킥거리”는 그런 삶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삶의 허위와 허울을. 남한에서 이주민 혹은 탈북자로 산다는 것의 굴욕과 설움이 어떠한지를.
이주민이든 탈북자든, 혹은 몽골 거주민이든 그가 누구든 간에 이 시집에 나오는 인물들이 하염없이 눈 두는 곳은 「속울음소리」, 「이주」 같은 시에서 보이는 ‘한데’이다. ‘한데’는, 허허롭게 한갓진 곳이거나 초점 흐린 눈으로 멀리 보는 어떤 곳 혹은 바깥의 차가운 곳이다. 대체로 능동적이거나 적극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체념과 포기의 공간이다. 나는 이 ‘한데’를 최근 하종오 시의 핵심으로 읽는다.
여름날 한가로운 그늘에서 빠져드는 한뎃잠은 시원한 청량의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한겨울 잠들 곳 없어서 지하보도 같은 데서 옹송그리고 청하는 한뎃잠은 기왕에 남은 에너지마저 앗아가 버린다. 하종오에게 ‘한데’는 애초에 그렇게 갖고 있었던 한갓지고 여유로운 평화의 시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한데’가 자본주의라는 허울과 현혹이 덮쳐오면서 차갑고 어두운 악다구니의 시공간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강물 마른 강줄기를 훑어보는 중년남자는
눈물 실컷 흘려본 지
오줌 시원하게 눠본 지
오래되었다, 고 중얼거린다
아버지 월북하기 전 청년 적에
마을 아저씨들이 자식을 목욕시켰다던
강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마을 아이들이 소에게 먹였다던
강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마을 아주머니들이 빨래를 빨았다던
강물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중년남자는 강가에서
눈꺼풀이 자꾸 처지고
아랫도리가 자꾸 저리다
강바닥이 강물을 놓쳤으니
중년남자가 북조선에서 탈출하기 전에
세상을 뜨신 늙은 아버지한테서 들은
고향마을은 이미 아니다,고 중얼거린다
어디 가서 정착할지 몰라
멀리 흙먼지 이는 들판으로
중년남자는 걸어간다 터 벅 터 벅
―하종오, 「강가에서」 전문
‘한데’는 어쩌면 강에서 강물이 사라지듯 회복할 수 없는 원시적 이상향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데에서 자면서도 한데를 그리워한다. 역설의 그리움이다. 사람들이 이토록 그리워하는 ‘한데’의 복원이 하종오 시의 잠재적 지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 실컷 흘려본 지/오줌 시원하게 눠본 지/오래되었다, 고 중얼거”리는 탈북 중년남자처럼 ‘한데’의 복원은 요원하다. “마을 아저씨들이 자식을 목욕시켰다던” “마을 아이들이 소에게 먹였다던” “마을 아주머니들이 빨래를 빨았다던” 그 평화로운 연대의 시공간은 “강바닥이 강물을 놓”친 것처럼 이미 말라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종오는 여기까지 쓴다. 여기에 어떤 계몽이나 희망 섞인 비전을 깔아놓지 않는다. 진정성의 울림만 열어놓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 가슴 아리다. 그의 시선 처리와 함께 특징적인 서술방식이라 여겨진다.
최근 하종오 시에서 눈에 띄는 점은 시선이다. 시선이 중심을 향한다기보다 늘 바깥을 향해 열려 있다. ‘한데’뿐만 아니라, 하늘 끝이라든지 막연한 어느 곳을 바라보는 화자들이 많다. 관조의 시선이다.
시선이 이렇기 때문에 시가 객관적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역으로 시에 빠지는 걸 방해하기도 한다. 3인칭으로 씌어지는 많은 시들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아픔을 본다. 느끼는 게 아니라, 본다는 것은 나의 통증이 아니라 타자의 통증이다. 결국 모든 관계는 타자일 수밖에 없지만, 감성적으로는 타자의 고통이 곧 나의 통증으로 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2. 송찬호, 판타지를 넘어서는 리얼한 신화세계
송찬호는 우리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동화의 세계 혹은 원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아니, 펼쳐 보인다기보다 스스로 만든 그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 길은 쉬 열리는 길이 아니어서 그의 안내 없이는 접근하기 쉽지 않다. 미시적인가 하면 거시적이어서 토란 잎 한 장 위에 온 세계가 펼쳐지기도 하고 나팔꽃 이야기 같은 게 우리를 태우고 미래로 날아가기도 한다. 그는 말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자연계일망정 찬찬히 들여다보라, 쟁쟁한 삶의 울림들이 얼마나 절절하게 드러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고.
한때 나는 낯선 것들을 병치함으로써 생기는 부조화에 심취한 적이 있다. 그 간격에서 떨리는 격렬하고 애매한 어긋남은 매혹적이었다. 송찬호 시도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그 형용하기 어려운 무소통의 소통 방식에 귀를 열어 놓고는 하였다.
하지만 지금 송찬호는 달라졌다.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시가 아니라, 동화와 신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참 의미 깊은 것은 그의 시적 동화가 어디선가 많이 본 그런 익숙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불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모든 시는, 그가 ‘스스로 찾아낸’ 동화이며 이런 동화들이 모여 독특한 송찬호만의 신화세계를 엮어낸다. 만일, 그의 동화가 여기의 삶 속에 펼쳐진 자연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느 먼 나라 혹은 옛 신화로 이어졌다면 그의 시는 아류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 매여 있지 않은 녹슨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 변 꽃을 따 먹고 있다
에구, 철없는 쇳덩이야
오목눈이 울리는 뻐꾸기야
쪼르르 달려 나온 장닭 한 마리
대차게 기관차 머릴 쪼아댄다
민들레 여러분, 병아리 양말 무릎까지
모두 끌어올렸어요? 이름표 달았어요?
네 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
민들레는 달린다
종알종알 달린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
―송찬호, 「민들레역」 전문
곽재구의 사평역은 꼭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져 사람들이 답사 코스로 찾곤 한다는 전설을 드리우고 있다. 리얼한 사평역이다. 반면에, 송찬호의 민들레역은 누가 봐도 허구임이 분명하다. 거기가 어디지 하고 찾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판타지 민들레역이다.
그러나 나는 민들레역 찾아보고 싶다. 그만큼 송찬호가 그리는 세계는 다사롭고 강렬하다. 잊고 산지 오래 된 동화 나라가 갑자기 절절하게 다가온다. 마치 마술 같다. 나도 민들레처럼 “병아리 양말 무릎까지/모두 끌어올”리고, “이름표 달”고 기다린다. 이때 선생님의, 저 “네 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 하는 신호는 얼마나 가슴 설레고 떨리는 순간인가. 이로부터 미지의 세계가 눈앞에 벅차게 펼쳐지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기차역만 보면 이제 민들레역을 떠올릴 것 같다. 황간역 다음의 추풍령역 쓱쓱 지우고 그 자리에 민들레역 세운 뒤, 아주 오랫동안 민들레역에 머물 것 같다.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 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 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 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 기라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 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 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 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 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슬며시 내미는 기라
―송찬호, 「늙은 산벚나무」 전문
이 시는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의 한 절경을 보여준다.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훈훈함이 놀랍도록 정겹다. 「민들레역」이 동화라면, 이 시는 신화이다. 잘 보면 곰과 산벚나무는 곰과 산벚나무가 아니다.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 곰과 산벚나무라고 불리는 인간들이 거기서 한 세계를 살고 있다.
이 시의 단초는, 중동이 썩어 꺾여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 있는 산벚나무 가지에 핀 꽃일 것이다. 산행하다가 마주친 산벚나무 곰발바닥 가지에서 발화된 연상은, 늙은 곰을 불러내고 산벚나무와 얽힌 사연을 이끌어낸다. 거기에 관찰자를 살짝 얹혀 신화의 세계와 현실계를 오묘하게 포용한다.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오묘한 신화의 세계는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 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슬며시 내미는” 순간, 마술처럼 현실이 된다. 경이驚異이다.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이와 같은 경이로운 발상과 참신한 상상력으로 싱싱하다. 넘쳐나는 신화로 눈부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나 할까.
3. 백무산, 치욕마저 껴안는 긍휼의 시선
긍휼矜恤은, ‘가엾게 여겨 돌보아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나는 백무산의 시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휴머니즘이라고 묶어버리기엔 무언가 성이 안 차고, 자비나 사랑으로 둘러치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감성적이다. ‘긍휼의 시’가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이 개념은 그의 초기작인 생동하는 노동시와 중기쯤의 불교적 혹은 불교생태적 사유의 시까지 포괄한다.
그는 어떤 경계를 지우거나 넘어오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넓혀 그 경계를 포섭, 확장하는 시적 사유를 전개한다. 그러나 사유 이전, 그에게는 언제나 ‘긍휼’이 있었다. 살아 뛰는 밥을 먹고자 할 때도, 인간의 시간을 탐구할 때도, 길 안의 길과 길 밖의 길을 찾아다닐 때도 그의 심저에서 긍휼은 늘 빛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투사의 눈빛만 쫓거나 혹은 불교의 이미지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면裏面과 너머, 그늘을 두루 살피는 혜안이 필요하다. 백무산은 관념과 실제를 넘나드는 자유로움의 폭이 넓고 크다. 사물을 끌어들이되 사물의 겉만 보지 않는다. 그는 안쪽과 바깥쪽, 옆과 앞뒤 등을 함께 아우른다. 공시성과 통시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이다. 선지자 혹은 견자의 풍모이다.
두 여인의 고향은 먼 오스트리아
이십대 곱던 시절 소록도에 와서
칠순 할머니 되어 고향에 돌아갔다네
올 때 들고 온 건 가방 하나
갈 때 들고 간 건 그 가방 하나
자신이 한 일 새들에게도 나무에게도
왼손에게도 말하지 않고
더 늙으면 짐이 될까봐
환송하는 일로 성가시게 할까봐
우유 사러 가듯 떠나 고향에 돌아간 사람들
엄살과 과시 제하면 쥐뿔도 이문 없는 세상에
하루에도 몇 번 짐을 싸도 오리무중인 길에
한번 짐을 싸서 일생의 일을 마친 사람들
가서 한 삼년
머슴이나 살아주고 싶은 사람들
―백무산, 「가방 하나」 전문
아, 얼마나 따스한가. 나도 화자를 따라가서 한 삼년 같이 머슴 살아주고 싶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국에 와서 오십 년을, 그것도 한센병이라는 천형의 병 앓는 이들 머슴으로 살다가 “더 늙으면 짐이 될까봐” 고향으로 돌아가신 분들 아닌가. 그는 이들을 “한번 짐을 싸서 일생의 일을 마친 사람들”로 표현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평생의 업을 이룬 사람들인 것만 같다. 살아 있는 예수, 혹은 살아 있는 보살이라고나 할 이런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 견딜 만하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로도 우리에게 드리운 거대한 일상을 걷을 수는 없다. 거대한 일상은 이들도 어쩔 수 없을 만큼 큰 그늘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 거대한 일상과 그늘로 인해 왜소해지고 불행해진다.
그런데 그 거대한 일상을 조직하는 것은 누구인가. 다른 누구가 아니라, 우리들이다. 우리의 노동이다. 탐욕과 아집에 볼모잡힌 우리의 노동은 그러므로 더이상 “신성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노동이 “역사도 정치도 세계도 저항도 허공도 그 무엇도/일상 아닌 것 없는, 거대한 일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일상의 거대한 그늘은 무엇인가. 치욕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언한다. “저 치욕과의 대면이 이제 일상이 되리”라고.(「치욕」 중에서)
내려가는 지하 계단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모두 번제물을 받아든 듯 스테인리스 그릇 하나에 두 손 모으고
정성스레 벽을 향해 걸어가 언 바닥을 깔고 앉는다
지상을 받치는 큰 지하 기둥 앞에는 잘 차려입은
한 여자가 찬송가를 이어서 부르고 있다
따로 담지 않고 밥과 국과 반찬이 뒤섞인 짬밥 그릇에
경전 암송하듯 고개를 처박고
바쁘게 입을 놀리고 있다
국을 퍼담는 사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기만 보인다
밥을 퍼담고 반찬을 담는 사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기만 보인다
찬송을 부르는 여자는 지나가는 행인들 눈에나 보일 뿐
허기진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행인들 눈에도 저들이 보이지 않는다
순종하고 무릎 꿇는 것은 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베푼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밥 퍼주는 사람들도 허기져 있다
찬송가 부른 여자도 허기져 있다
모두가 자기 허기를 경배하고 있다
허기진 자기 사랑에 열중하고 있다
허기만 때우면 된다
허기 종교다
허기 종단의 부흥회다
―백무산, 「허기」 전문
치욕은 치욕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허기를 동반한다. 허기는, 실은 가장 무서운 현실 인식이다. 아니, 인식 이전에 본능이다. 본능이므로 허기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다. 사람들은 흔쾌히 치욕마저도 감수한다. 무료 배급소에서 “국을 퍼담는 사람들 눈에/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기만 보인다/밥을 퍼담고 반찬을 담는 사람들 눈에/사람은 보이지 않고 허기만 보인다.” 그러다가 허기가 좀 꺼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른 그 자리를 뜬다. 치욕과 굴욕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몸의 허기는 웬만큼 해소되었다. 적어도 굶어죽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 문제는 정신적인 허기이다. 자본주의 문명이 발달될수록 정신적인 허기는 깊어진다. 인성이 아니라, 물질과 돈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피폐해진 정신의 허기는 좀체 채워지지 않는다. 채우고 채워도 도리어 갈증만 깊어질 뿐이다. 거대한 일상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밥 퍼주는 사람들도 허기져 있다/찬송가 부른 여자도 허기져 있다/모두가 자기 허기를 경배하고 있다/허기진 자기 사랑에 열중하고 있다.” 허기의 종교가 만연해 있는 것이다. 병리사회이다. 병리사회이므로 이곳에서 산다는 것은 백무산의 선언대로 치욕이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백무산은 시 「순결한 분노」에서 말한다. “순결한 분노는 사회적 명상이”라고.
백무산 시집 <거대한 일상>은 이렇듯 치욕과 긍휼의 시선이 교직된다. 치욕의 현실이되 긍휼로 껴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긍휼의 실천이 백무산의 꿈이라고 보면, 백무산은 선지자라기보다는 천생 리얼리스트일 수밖에는 없다.
4. 시대적 우울을 물리치는 시장詩匠의 시들
이런 시인들이 바로 시장詩匠이다.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흐름이 독자적이면서도 매혹적이지 않은가. 장인정신 못잖은 대단한 공력들이다. 하종오, 송찬호, 백무산 시맥詩脈이 각기 스스로 굵다.
나는 서두에서 이 시집들이 “미답未踏의 경지를 밟고 서 있다”고 썼는데, 과장이 아니다. 하종오는 이주민의 삶과 행적을 다큐멘터리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독보적이고, 송찬호가 신화로 엮어내는 자연과 현실 세계는 풍요롭다. 그런가 하면 백무산은 치욕을 견디는 긍휼의 시학에 철저하다.
요즘 들어 시가 시시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야말로 재미없고 보잘것없다는 것이다. 시장詩匠의 시도 그럴까. 궁리해 본다.
시장의 시는 시시時時하다. 당대의 전모를 핵심적으로 반영한다. 시장의 시는 또 시시是是하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직감적으로 안다. 한편 시장의 시는 시시示示하다. 사물을 꿰뚫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시장의 시는 또한 시시矢矢하다. 화살처럼 날아가 사물을 찢어놓는다.
땀 빼고 넋 빼던 여름은 가고 오곡이 익는 가을이 온다. 시시하지 않은 시장詩匠의 시로 마음을 익혀 정신의 깊이를 두터이 하자. 시대적 우울과 대면하는 힘이 놀랍도록 커질 것이다.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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