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35호(2009/가을)/젊은시인집중조명/비 외 6편/이용임
페이지 정보

본문
이용임
비 외 6편
유리로 만든 마음을 들고 꽃들이 번지고 있다
유리로 만든 대궁을 부러뜨리며 새 한 마리 날아가고 있다
유리로 만든 소리가 울리고 있다 유리 천정 아래
유리의 감옥에 갇힌 눈동자에 스미고 있다
투명함을 남기고 휘발된 물기가 고이고 있다
아래로 자라는 풍경 속에서
유리 고깔을 쓴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나무 위에서
유리로 빛나는 잎들이 얇아지고 있다
붓꽃
손가락에 물을 묻혀
이마로부터 당신을 지운다
윤곽이 무너지고 살이 묽어지고
뼈가 비자 노래가 울린다
광장에 그려놓은 그림자
태양을 정수리에 단 붓끝이라 하자
끌고 갈 발목이 없어
광장의 뼈에 스민 병이라 하자
도무지 시들지 않는 계절이다
무성하게 피어나는
새의 목청마저 뒷산으로 떠난다
검고 짠 한 덩이 슬픔이 말라붙은
대낮이라고 하자
연인
반쪽은 무덤
동참할 수 없는 눈보라
나는 반쪽부터 짙어진다
뼈만 남은 손목으로 날개를 저으며
고치를 찢고 나비가 난다
반쪽은 잠
내가 볼 수 없는 꿈
나는 반쪽부터 무거워진다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손마디
여보세요 여보세요
반쪽은 키스
그대에게 열리는 하나의 표정
온몸을 흘러내리는 응달
나는 반쪽부터 흩날린다
서로의 눈 속을 더듬는 손가락
발뒤꿈치의 속삭임
반쪽은 밤
나는 반쪽부터 아프다
연주되지 않는 음악이 울리는
마른 살갗을 미끄러지는 혀
포개어 죽기에는 너무 먼
지구 반대편의 계절
나는 반쪽부터 여윈다
그대라는 병중病中에서 느리게 일어나
맨발로 정원에 나간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대부터 잃는다
정전
연기를 마시는 여자가 되고
나는 목이 아픕니다
혀가 길어지고
말이 짧아집니다
나는 동그란 웃음소리를 이빨 사이로
툭, 툭 뱉을 줄도 알아요
그럴 때마다 시야의 어느 구석은 어두워지고
그대들 중 누군가 반드시 우기에 진입합니다
나는 먹구름을 부르는 꽃의 얼굴을 알고 있어요
밤마다 심해로 내려가
하루 동안 더 길어진 혓바닥으로
바닥을 핥습니다
딱딱한 소금 알갱이가
입안에서 굴러다닙니다
미각만 남기고 사라지는 아, 탄식 섞인
조금은 높은 웃음소리
어제의 음색을 기억하느라
내 몸의 어느 내장이 어두워집니다
성대수술을 한 강아지처럼 앞발을 내딛고
후, 후 조그맣게 웃어봅니다
안으로 퍼지는 소리들
밖에는 아무것도 낚아채지 못하는 바람이
긴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으며 웁니다
색을 흘리며
계절은 바뀝니다
조금씩 탈색 되는
내 몸 속 하늘 어깨로 몰고 다니던 구름 찢어진 바람 새 울음소리
스콜성 기후대로 변태하고 나서
나는 눈이 아픕니다
익사하지도 않는 귀신들이
무덤 속에서 기른 손톱을 치켜세워
하늘에 구멍을 뚫으려 하기 때문이지요
닿지 않는 것을 꿈꾸는 자들의 혀는
고금 이래 같은 색인 적이 없었습니다
형벌처럼 툭, 툭
안으로 말리는 웃음소리
둥그렇게 둘러앉아 고기를 구우며
립스틱이 묻은 담배를 돌려 피웁니다
그대들의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는 화장장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십니다
장마
창문마다
흰 손들이 어제의 얼굴을 발라놓는다
우리는 저렇게 둥글게 앉아 있었지요
뭉글뭉글
얼굴이 녹는다
일곱 개의 구멍에서 물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저렇게 둥글게 앉아
술을 마셨지요
투명한 잔들과 손목들의 무도회였지요
(그래서 뭐?)
노래가 사탕처럼 진득거린다
양 귀에서 날개를 펴고
활짝 날아가는 시간들
가는 뼈를 남기고 콧구멍이 사라지자
우리는 모두 하나의 표정이 된다
나는 당신을 그대를 그 골목의 농담濃淡을 기억하지 않아요
시간은 차가운 왼뺨만 보이고
스쳐 지나가고
일만 분의 일 프레임만큼 느린
내 눈 속 풍경은 곧 사라질 궤적이고
와글와글 우리는 가라앉았어요 즐겁게
뒤로 감춘 손으로 얼굴을 돌리며
창문은 맑은 뼈를 세우고
당당하게 서 있다 한 면으로
내가 있고 저 편으로는
습기로 가득한 계절
눈빛
열기를 잃어버린 것의 내부에
손가락을 넣어 녹인다
마를수록 미끄러워지는 풍경
무너지기 쉬운 색을 이고
견고한 것들이 서 있다
가벼울수록 무거워지는
흥건함으로 사라지는
몸빛을 안으로 들이는
저 긴 시간을 바라본다
숨을 참고 오래 잠을 자도
나의 내부는 고요하다
한 가지 어둠이다
빛을 머금은 탈색 앞에 서면
낯은 죽은 꽃빛이 된다
빛과 그늘로 날카롭게 찢어놓은
저 살풍경 속에서
조금씩 젖은 터럭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림자
도착到着은 발아래 길이다 시작은 한 걸음 앞
집착은 뒤통수를 후리는 태양
도착倒錯은 촛농처럼 흘러드는 땀 움푹 파인 병색이다 작은 발로 납작 매달린 끈끈이주걱이다
핥으니 꺼져버릴 것 같은 담장이다 언저리까지 하얗게 불탄 여름 하늘이다
손톱을 오므린 꽃이다 말라비틀어질 대궁이다 머리 풀고 앓으면서도 영그는 씨방이다 푸석한 흙속으로 길을 내는 실뿌리다
마음의 잔손들이 분주한 색이다 오래오래 그늘을 거느리고 이내 키가 훌쩍 자라는 것을 본다
시작메모
스콜이 내리는 밤
1.
우산이 무겁다고 느꼈다.
2.
젖은 옷을 쥐어짜며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온 집에 불을 켠다. 바깥은 컴컴하다. 노란 형광불빛이 새어나오는, 내 집은 유리로 만든 상자 같겠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나는 생각한다. 저 빗속에 서서 누군가 내 집을 바라보며 할 상상을. 오르골처럼 뚜껑을 열면 달콤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온기와 웃음이 새어나올 것이라 생각할 때 그이의 심장에 들이칠 슬픔을. 손목이 아프다. 우산이 너무 무거운 까닭이다.
3.
길고 지리한 꿈인 양 장마는 늘 그러했다. 그렇게 긴 꿈을 꾸고 일어나면 삶은 열대야와 모기떼의 극성이었다. 목이 마르는 폭염을 바싹 마른 그림자를 탈탈 끌고 걸어가는 한낮. 그런데 올해의 장마는 무섭다. 죽어라 울부짖으며 제 몸을 땅으로 내동댕이치는 저 격렬한 비극. 잠 못드는 자의 충혈된 눈처럼 파국이 예감하고도 양손을 꼭 움켜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스스로 깨지고 망가지며 얇아지는 것들의 목숨을 건 고공비행을 생각한다. 죽을 자리를 향해 몸을 던지는 순교자들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위선을 생각한다.
4.
찻잔을 앞에 두고 모로 누워 죽은 사람이 만든 음악을 듣는다. 죽은 사람이 남겨두고 간 속삭임을 산 사람의 손가락이 연주하는 것을 듣는다. 살아있는 동안 끝없이 자신을 망가뜨리고 끝없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나 끝끝내 죽지도 못하고 살아남은 저주받은 영혼의 뺨을 만진다. 무언가를 견디는 최고의 자세는 모로 눕는 것이다. 모로 누워 온몸을 웅크리는 것이다. 눈물이 땅으로 떨어져서 스미도록 가만히 버려두는 것이다. 나는 너무 오래 모로 누워 있어서 허리가 아프다.
5.
비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망가지는 것들에 내 마음을 주었다. 그것이 나와 닮았다고 느껴서일까, 살아남겠다는 저 몸부림을 나는 질투한 것인가. 나는 언젠가부터 시계의 전지를 갈아 끼우는 일을 멈추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천천히 느려지다가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 집의 모든 시게는 제각각의 시간을 가리키며 멈춰있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시계바늘을 보며 이렇게 홀로 천천히 말라붙어 가다가 이윽고 지워지리라, 생각한다. 꽃이 피었다. 모르는 사이 그늘에 꽃잎 몇 장을 남기고 사라지듯이. 어느 날 다른 계절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리듯이. 삶을 울부짖는 자, 삶에 환희하는 자, 삶을 춤추는 자, 삶을 노래하는 자, 삶에 고백하는 자, 삶을 명상하는 자, 삶을 바라보는 자, 그 모든 목숨들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 모든 눈부심을 사랑했다. 그 모든 황홀함을 견디며 나는 시를 쓴다.
이용임∙1976년 경남 마산 출생. 2007년 <한국일보> 시부문 당선.
추천0
- 이전글35호(2009/가을)/젊은시인집중조명 해설/장이지 09.12.21
- 다음글35호(2009/가을)/기획/정우영의 시평 에세이 ③/정우영 09.12.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