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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젊은시인집중조명 해설/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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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82회 작성일 09-12-21 00:11

본문

|해설|
흘러내리는 피부와 ‘맑은 뼈’의 시간
  ―이용임 시의 상상력
  장이지|시인




1. 피부와 피부자아의 주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피부가 흘러내려 심령사진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인물들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용해성의 신체 이미지들은 자아를 감싸고 있는 심리적 봉투가 약화되었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피부는 골격을 감싸고 신체를 하나로 묶어줌으로써 자아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는 그와 같은 피부의 기능에 착안하여 ‘피부자아’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피부자아는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아기의 자아가 신체표면의 경험을 바탕으로 심리적 내용물들을 담아주는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정신적 형상이다. 
모든 심리적 활동이 생물학적 기능에 의탁한다면, 피부자아는 피부의 다양한 기능들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피부는 흔히 수유, 육아, 언어적 환경을 통해 모아진 좋은 것들을 담아주는 주머니로서의 기능, 외부와의 경계면이자 자극막이로서의 기능,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장소이자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있다. 이러한 피부의 기능에 의탁하는 피부자아가 손상되었을 때는 몇 가지 불안을 야기한다. 피부자아의 담아주는 기능의 결여는 확산적이고 자리 잡을 수 없고 가라앉힐 수 없는 욕동의 흥분에서 비롯되는 불안 속에서 ‘대리 껍질’을 찾으려는 증상이 나타난다. 자극막이의 과도함은 박해나 누군가 자기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한다는 심리적 침범에 대한 편집증적 불안을 초래한다. 보조적인 자극막이의 역할을 하는 대상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불안은 약물에 대한 의존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이때 약물중독은 자아와 외부 자극들 사이에 안개, 혹은 연기의 방벽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 자극막이는 표피 대신에 진피에 의해 추구될 수도 있는데, 근육에 대한 관심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피부자아의 손상은 유일한 존재라는 느낌을 주는 자기의 개별성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열증에서는 모든 외부 현실은 흡수하기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현실 감각의 상실을 대가로 자기의 단일성에 대한 감정이 유지된다. 그밖에 신체의 파편화나 해체에 대한 불안도 피부자아의 손상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용임의 근작들은 피부와 피부자아의 주제를 환기시킨다. 그녀는 ‘흘러내림’이라는 용해성 이미지에 집착하며 ‘살’이 묽어지고 ‘얼굴’이 녹는 현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존재의 윤곽이 점점 옅어지다가 사라지며 ‘뼈’만 남은 상태에 귀착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세계와 자아의 경계면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이 모든 사항들을 종합해 보면 그녀의 시들은 피부자아의 훼손이라는 징후적 상상력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녀가 피부의 상상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용해성의 신체
이용임은 등단작인 「엘리펀트맨」(2007)에서도 왜곡된 신체에 대해 관심을 보인 바 있다. 그 시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엘리펀트맨」(1980)과 상호텍스트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영화 속 ‘엘리펀트맨’은 다발성신경섬유종이라는 병에 걸려 얼굴의 피부가 흘러내려 기형이 된 경우이다. 이용임은 다발성신경섬유종이라는 병명을 지우고 기형과 소외를 관련짓는 영화 속 우화를 더 부각시킨다. 따라서 시 속의 ‘엘리펀트맨’은 영화와는 달리 사물을 집는 기능이 있는 코끼리 코를 하고 있다는 동화적 상상력을 휘감고 있다. 그런데 그 시에서도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이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이때의 ‘흘러내림’은 아직 용해적인 비전으로 나아가기 이전이지만, 다발성신경섬유종의 기형적인 쳐짐 현상을 환유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작의 용해성 이미지와 이어져 있다.
라플랑쉬Jean Laplanche는 인간 주체가 스스로를 이론화하고 자가 상징화하는 존재라는 점을 정신분석적 인식론의 전제로 내세운 바 있는데, 이 왜곡된 신체에 대한 관심, 특히 용해성의 신체에 대한 관심도 정신분석적 인식론의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용해성의 신체는 무엇을 이론화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명은 ‘현상들’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손가락에 물을 묻혀
이마로부터 당신을 지운다

윤곽이 무너지고 살이 묽어지고
뼈가 비자 노래가 울린다
―「붓꽃」 중에서

반쪽은 키스
그대에게 열리는 하나의 표정
온몸을 흘러내리는 응달
나는 반쪽부터 흩날린다
―「연인」 중에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대부터 잃는다
―다시 「연인」 중에서

색을 흘리며
계절은 바뀝니다
조금씩 탈색되는
내 몸 속 하늘 어깨로 몰고 다니던 구름 찢어진 바람 새 울음소리
―「정전」 중에서

뭉글뭉글
얼굴이 녹는다
일곱 개의 구멍에서 물이 새어나온다
―「장마」 중에서

열기를 잃어버린 것의 내부에
손가락을 넣어 녹인다
―「눈빛」 중에서
(※ 이상의 밑줄은 인용자의 것임.)

이용임의 시에는 유독 윤곽을 지우는 행위, 살이 액화되어 흘러내리거나 얼굴이 녹는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흘러내리는 것은 신체가 아닌 것들에도 적용되지만, 그럼에도 그와 같은 이미지들은 신체의 한 부분과 인접하여 현시된다. 또한 그것들은 어느 정도 상실을 암시하는 어휘들을 수반한다. 물론 이 모든 현상들이 시적 화자의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윤곽이 지워진 경계선 장애의 상태에서 시적 화자와 대상 사이의 구분은 이미 무의미하다. 「붓꽃」에서 시적 화자는 ‘당신’의 형상을 물기(“물을 묻혀”)로 지운다. ‘당신’의 형상이 지워지자 노래가 시작된다. 

광장에 그려놓은 그림자
태양을 정수리에 단 붓끝이라 하자

끌고 갈 발목이 없어
광장의 뼈에 스민 병이라 하자

도무지 시들지 않는 계절이다
무성하게 피어나는

새의 목청마저 뒷산으로 떠난다
검고 짠 한 덩이 슬픔이 말라붙은 

대낮이라고 하자
―「붓꽃」 앞의 인용에 이어진 부분

「붓꽃」은 사물시처럼 보이지만 ‘붓꽃’의 형상에 ‘당신’의 형상이 겹쳐 보이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에서의 사물시라고 할 수 없다. 「붓꽃」에서 이용임은 이 이중적인 형상을 세 개의 보조관념으로 규정한다. “태양을 정수리에 단 붓끝” “광장의 뼈에 스민 병” “검고 짠 한 덩이 슬픔이 말라붙은//대낮” 등이 그것이다. 그녀는 「그림자」에서도 이 절대은유(환유)의 연쇄를 수사학의 차원에서 펼쳐 보인다. 「그림자」에서 ‘도착倒錯’은 “촛농처럼 흘러드는 땀” “움푹 파인 병색” “작은 발로 납작 매달린 끈끈이주걱” 등으로 환유적 활강을 거듭한다. 그것은 수사학의 차원에서는 무한한 연상의 자유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폭력에 가까운 정신적 혼란을 감추고 있다는 것에 대한 표지이기도 하다. 「붓꽃」의 시적 화자는 ‘도무지 시들지 않는’ 기억으로 인해, 끊임없이 ‘무성하게 피어나는’ 그리움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곽이 무너지고 살이 묽어지고” 하는 것은 대상인 당신의 형상이면서 시적 화자의 형상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는 독백의 방식으로 이와 같은 고통을 호소하지만 듣는 이가 없으며, 자신과 대상이 혼돈되는 모호한 상태를 정신적으로 잘 뿌리치지도 못한다. 
혼란과 혼동은 「연인」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서로의 눈 속을 더듬는 손가락
발뒤꿈치의 속삭임
반쪽은 밤
나는 반쪽부터 아프다
연주되지 않는 음악이 울리는
마른 살갗을 미끄러지는 혀
포개어 죽기에는 너무 먼
지구 반대편의 계절
나는 반쪽부터 여윈다
그대라는 병중病中에서 느리게 일어나
맨발로 정원에 나간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대부터 잃는다
―「연인」 중에서

‘그대’는 더 이상 어떤 외부적인 신체가 아니다. ‘나’(시적 화자)와 ‘그대’는 한 몸이다. 그들은 몸을 절반씩 분할하여 가지고 있다. 그들은 촉각적인 접촉을 통해 소통한다. 보통의 연인들이라면 이 촉각에 의지하는 매만짐은 피부로의 리비도적인 투여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연인」에서 상호 성기적인 만족에 도달하는 성 관계는 없다. ‘그대’는 질환으로서만 시적 화자와 함께 있다. 시적 화자를 감싸안아주던 연인의 살갗은 병적인 싸개로만 남아 있다. ‘그대’의 상실은 시적 화자의 자아를 외부 자극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자극막이로서의 피부자아가 슬픔과 고통을 주는 싸개로 변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행복했던 기억들은 시간이 경과해 감에 따라 피부 안에 보존되지 않고 새어나가 버린다. 피부, 촉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외부 현실, 시각의 세계에 기댈 법도 한데 시적 화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시각’에 의해 세상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외부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대’를 잃었다는 것을 자인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에 의탁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불안은 「안개주의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당신의 코가 사라진다
물렁한 벽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검은 방에서
채 스미지 못한 내 체취가 흘러나온다
당신의 입술이 사라지자
망설임은 맨발로 배회한다 허공을
눈 가리고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당신의 귀가 하나씩 흘러내린다
나의 목소리가 차가운 물방울로 고인다
당신의 심장까지 도착하지 못한 말들이
천천히 얼어붙는 사이
당신의 눈에 담긴 내가 녹는다
손발이 뭉그러지고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숨결이 아득한 윤곽이 되는 동안
당신은 뼈만 남은 얼굴이 된다
바람도 없이 삭는
당신은 검었다가 희었다가 이제 투명하다
당신의 부스러기들이 창을 가득 메운다
불투명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저벅,
저벅
―「안개주의보」 전문

「안개주의보」에서 용해적인 비전은 더 나아가 신체의 해체라는 아이디어로 발전한다. 그리고 해체된 신체는 ‘안개’를 만들어낸다. 이 시에서 시각에 의탁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불안은 “눈 가리고 뛰어가는 뒷모습”에서 우발적으로 돌출한다. 눈을 가린다는 것은 명백하게 보는 것의 거부를 의미한다. 이 시에서 시각은 상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정도의 기능만을 수행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신체가 해체되고 나서 생성되는 ‘안개’는 창을 가득 메우고 ‘불투명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 풍경 속에는 사실 시적 화자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안개에 가려져 있다. 그와 시적 화자 사이의 모든 추억이 소멸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안개주의보」에서 ‘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안개 자체가 아니다. 안개는 오히려 훼손된 피부자아의 기능을 대신하는 보호막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의의 대상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지려는 기억, 그 소멸 자체인 셈이다.

3. 유리로 된 피부
이용임은 용해성의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때에도 피부자아의 손상이라는 주제에 매달려왔다. “어리면서도 늙은, 늙으면서도 아이같은/뼈마디마다 옹이가 박혔어”(「일기예보」)라든지 “붉게 부풀어 기형이 된 결절들이/단단한 옹이 위에서 가늘게 떨었다”(「키스」)와 같은 구절들에 현시하는 ‘옹이’의 이미지 역시 피부자아의 취약한 부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옹이’까지는 아직 괜찮다고 할 수 있다. 더 좋지 않은 것은 관통에 대한 불안이다. 그것은 시적 화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와는 달리 시적 화자가 사회적 삶에 참여하게 될 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정전」은 관통에 대한 불안이 작동하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연기를 마시는 여자가 되고
나는 목이 아픕니다
혀가 길어지고
말이 짧아집니다
나는 동그란 웃음소리를 이빨 사이로 
툭, 툭 뱉을 줄도 알아요
그럴 때마다 시야의 어느 구석은 어두워지고
그대들 중 누군가 반드시 우기에 진입합니다
나는 먹구름을 부르는 꽃의 얼굴을 알고 있어요

(중략)

스콜성 기후대로 변태하고 나서
나는 눈이 아픕니다
익사하지도 않는 귀신들이
무덤 속에서 기른 손톱을 치켜세워
하늘에 구멍을 뚫으려 하기 때문이지요
닿지 않는 것을 꿈꾸는 자들의 혀는
고금 이래 같은 색인 적이 없었습니다
형벌처럼 툭, 툭
안으로 말리는 웃음소리

둥그렇게 둘러앉아 고기를 구우며
립스틱이 묻은 담배를 돌려 피웁니다
그대들의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는 화장장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십니다
―「정전」 중에서

「정전」에서 혀가 길어지고 말이 짧아지는 현상은 시적 화자가 사회적 언어생활에 미숙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언어생활의 미숙은 시야가 어두워지는 현상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시각에 의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시적 화자는 ‘눈’이 아프다고도 한다. 물론 그것은 고기 굽는 ‘연기’ 때문이지만, ‘연기’ 역시 ‘안개’와 마찬가지로 시각에 의탁하는 것에 대한 불안을 나타내는 장치이다. 시적 화자의 언어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 ‘우기雨期’는 찡그림과 울음으로 대변되는 얼굴 표정의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이 모든 사회적 삶은 시적 화자를 힘들게 한다. 불멸의 귀신들이 손톱을 세워 하늘에 구멍을 뚫으려 하기 때문에 자신의 눈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박해에 대한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얼핏 비논리적인 설명으로 들린다. 그러나 구멍이 뚫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시각에 의탁하여 외부 세계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서로 연동한다는 점에서 그 설명에는 보이지 않는 논리구조가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애착욕동인지도 모른다. 시적 화자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고기를 구우며 ‘립스틱이 묻은 담배’를 돌려 피움으로써 배가되는 친밀감에 대해 마지막 연에서 언급한다. 피부자아의 경계면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사회적 삶에서는 타인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며, 정신적 삶에서는 감각과 감정에 매달린 채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정전」의 시적 화자는 ‘그대들’에 대해 ‘다른 색’의 ‘혀’를 가진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그대들’의 집단에서 이탈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시적 화자의 몸속 ‘어둠’은 ‘그대들의 세계’로 전이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은 손쉽게 시적 화자에게로 감염된다. ‘나’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연기’를 흡수하여 피부자아의 대리로서의 보호막을 만들어내야 한다. 
관통에 대한 불안은 이용임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유리나 창의 이미지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때 유리나 창은 깨지기 쉽고 너무 투명해서 불안한 피부자아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체적인 이미지를 끌어온다면, 피부와 뼈대 사이에는 유연한, 자아의 ‘살’이 있는데, 그것이 경화되는 것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피부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근육의 2차적 피부라고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병리는 심리적인 살 대신 불안한 빈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창과 유리는 피부가 용해된 후 출현하는 변형된 피부이자 ‘뼈’에 다름 아니다. 「비」, 「장마」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리로 만든 마음을 들고 꽃들이 번지고 있다
유리로 만든 대궁을 부러뜨리며 새 한 마리 날아가고 있다
유리로 만든 소리가 울리고 있다 유리 천정 아래
유리의 감옥에 갇힌 눈동자에 스미고 있다
투명함을 남기고 휘발된 물기가 고이고 있다
아래로 자라는 풍경 속에서
유리 고깔을 쓴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나무 위에서
유리로 빛나는 잎들이 얇아지고 있다
―「비」 전문

이 시는 ‘비’를 노래한 사물시이다. 이 시에서 비는 ‘유리’라는 보조관념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유리’는 다시 다른 사물들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비유를 생성한다. 비 웅덩이가 생기고 거기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역상으로 비치는 풍경에 대한 묘사는 신선하다. 「비」는 사물시이기 때문에 ‘비’ 너머의 은유적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비’를 묘사하기 위해 동원한 언어들이 다른 많은 가능성들을 제치고 무의식의 저편에서 의식의 세계로 왜 튀어 나왔는지에 대해 물어볼 수는 있다. 「비」에서 유리는 ‘마음’을 구성하는 질료이며(제1행) 잘 부서진다(“부러뜨리며”). 그리고 그것은 울음이나 유폐(제4행)와도 관련이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유리는 “얇아지고” 있다. 그것은 피부자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는 ‘비’에 대한 노래이지만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시인의 심적 상태를 슬며시 드러내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한편 「장마」는 피부자아의 변형으로서 ‘창’의 이미지를 내세운 작품이다. 「비」도 「장마」도 액체성이라는 의미요소를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용임의 용해성 편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노래가 사탕처럼 진득거린다
양 귀에서 날개를 펴고
활짝 날아가는 시간들
가는 뼈를 남기고 콧구멍이 사라지자
우리는 모두 하나의 표정이 된다

나는 당신을 그대를 그 골목의 농담濃淡을 기억하지 않아요

시간은 차가운 왼뺨만 보이고
스쳐 지나가고
일만 분의 일 프레임만큼 느린
내 눈 속 풍경은 곧 사라질 궤적이고

와글와글 우리는 가라앉았어요 즐겁게
뒤로 감춘 손으로 얼굴을 돌리며

창문은 맑은 뼈를 세우고
당당하게 서 있다 한 면으로
내가 있고 저 편으로는
습기로 가득한 계절
―「장마」 중에서

「장마」에는 기억과 사회적 삶이 뒤섞여 있다. 2인칭으로 호명되는 옛 연인에 대해 시적 화자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호기를 부려보지만 시적 화자가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흡사 어떤 중독의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시적 화자는 그 기억으로 인해 현재적 삶에서 항상 시차를 느낀다. ‘차가운 왼뺨’은 시간의 것이라기보다는 기억 속 ‘당신’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문장 성분들의 배열을 교란시키는, 언어의 인접성을 조작하는 환유이다. 시적 화자는 ‘당신’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않다. 어쩌면 자유로워지기 싫은 것이 본심인지도 모른다. 시적 화자는 곧 사라질 눈 속 풍경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시적 화자는 술자리에 둘러 앉아 사람들에 매달린다. 그녀는 내면을 바라볼 때 ‘나’가 되며 외부 현실로 돌아올 때 ‘우리’가 된다. ‘우리’는 하나의 표정이 됨으로써 감정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장마」 역시 애착욕동이라는 주제를 배면에 깔고 있다. 그녀는 타인들과 함께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사회로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 망설임의 시간을 ‘맑은 뼈’의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하다. ‘맑은 뼈’란 물론 창문이다. 창문은 세상과 시적 화자 사이의 경계라는 점에서 피부자아의 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이나 근육이 아닌 뼈로 된 피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때의 ‘뼈’로 된 피부는 살집처럼 푸근한 것을 잃어버린 채 경화된 심적 상태를 반영하면서, 한편으로 죽음의 상태를 암시한다. 시적 화자는 창문 너머 습기로 가득찬 세상, 창문마다 ‘어제의 얼굴’이 매달려 있는 세상을 바라본다. 창문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습기로 뿌옇게 흐리거나, 흐르는 물방울로 풍경을 일그러뜨린다. 이 미학적인 장치마저 사라진다면, 다시 말해 당당하게 서 있는 ‘맑은 뼈’마저 없다면 자아는 지지대를 잃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따라서 ‘맑은 뼈’의 시간은 지극히 위태롭고, 위태로워서 경건하고 아름다운 시간이다. 슬픔은 창문 너머 장마처럼 지루하게 이어지고 그 슬픔을 되씹는 자아는 심리적 봉투로서의 피부자아에 상처를 입은 채, 죽음과도 같은 상태의 환멸과 정화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4. 요약과 보충
이용임의 시에서 액화되어 흘러내리는 신체는 자아의 개별성을 훼손한다. 용해성의 피부는 ‘나’와 타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나’의 추억들을 잘 담아내지 못한다. ‘나’는 사회적 삶에서는 타인들에게 매달리는 애착욕동에 고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정서적 삶에서는 감각과 감정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이용임은 흘러나가는 기억들에 집중한 나머지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의 시는 독백적인 방식으로 되어 있으며, 그녀의 시에는 시각에 의탁하여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안개나 연기, 습기의 이미지들로 나타나곤 한다. 이용임 시에서 눈은 시각적 기능보다는 기억의 통로나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녀는 용해되어버린 피부자아의 대리껍질로서 자주 창․유리의 이미지를 동원한다. 그러나 그 대리껍질마저도 내용물을 감출 수 없고 깨지기 쉽다는 점에서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그녀는 ‘뼈’의 이미지를 통해 그녀 스스로가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 점점 수척해져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버팀은 고통보다는 오히려 고통 속에서 성숙하는 승화의 국면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자」에서처럼 여전히 지나간 기억에 대한 집착이 뒤통수를 후리지만 이용임은 ‘도착到着’을 ‘도착倒錯’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신적 성장을 확인한다(“도착倒錯은[…]//마음의 잔손들이 분주한 색이다 오래오래 그늘을 거느리고 이내 키가 훌쩍 자라는 것을 본다”). 고통이 있어야 비로소 고혹적인 글쓰기가 시작된다고나 할까.
이용임은 2000년대 중반의 ‘미래파’ 논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등단한 신인이다. 미래파가 감각적 사유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면 이용임 역시 그 자장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미래파가 질료로서의 문화에 탐닉하는 경향을 보여 왔던 것에 비해 그녀는 좀 더 내성적이고 차분한 자기만의 목소리를 다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돋보이는 지점은 사랑에 대한 집착이라는 어찌 보면 ‘전통적인’ 분야를 신체의 용해라든지 옹이나 유리로 된 자아라는 독창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점이다. 또한 그 주제와 방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미래파 이후의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그녀가 가장 먼저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게 한 비결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피부와 피부자아의 주제는 경계의 결여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현대인들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심리적 자아와 신체적 자아, 자기에게 속한 것과 타인에게 속한 것 사이의 경계들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경계선 장애를 겪고 있는 현대인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약화되었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심리적 봉투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대리 껍질’을 고안해 내는데 이용임은 그와 같은 기제를 시적 상상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심리적인 내용물과 관련된 환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용기容器’와 관련된 환상이라는 점에서도 그녀의 상상력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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