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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2009/가을)/신작시/칡넝쿨 외 1편/강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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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칡넝쿨 외 1편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을 한다
백 년만에 보는 햇볕 아래에서
파삭파삭 스펀지 같은 구멍을 내며
푸른 불빛으로 뼈가 탄다
웃대웃대 또 그 웃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외증조부모님의
한 때 아이를 낳고 생각을 하던
엉치뼈와 두개골
하얗게 숯이 된다
그 숯덩이, 내 호흡의 시원이었던
불에 탄 하얀 숯덩이 잘게 부수어
무섭게 타오르는 유월 염천의
칡넝쿨 위에 뿌린다
얽히고 설퀴고 살았듯
그렇게 사시라고,
강물처럼 목숨줄 이어준
칡넝쿨로 환생하시라고
까마득한 외증손이, 백 년만에 만나
칡넝쿨 위에 뿌린다.
태안선*에서
―천년 후의 시인에게
오랜만에 개경開京에 불(火) 보러 가는 길
갑판을 비추는 열엿새 푸른 달빛에
송악산 만월대가 선연합니다
주문이 넘쳤습니다만
늘 그랬듯 이번에도
뜻대로 싣지 못했습니다
개경의 안영 호安永戶에 사기 한 꾸러미
최대경 댁崔大卿宅에 사기 팔십
남경의 대정인수隊正仁守에게 사기 한 외畏
유장명 댁柳將命宅에 사기 한 꾸러미
그러나 배에 실린 물건들은
결이 고와 송상宋商들도 탐낼만 하겠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유영하는 파도물고기무늬 완은
수동리 앞바다를 품고 있고요
새구름무늬 완은
탐진의 깊고 아득한 하늘인데
그 하늘에서 홰치는 봉황이 상서롭습니다
아, 용운리 사당리 토담 아래 피던 국화
찬서리 속 군자의 기품이
어찌나 당당한지요
이제 서해바다에 먼동이 희붐하게 터져 옵니다
파도가 살아나고 있어
조금 염려가 됩니다만
그래도 마음이 배부른 것은
내 고향 탐진의 바람과 햇살과 흙,
고려 제일 탐진 도공들의 혼이 배인
탐진사기를 싣고 가기 때문이지요.
갈매기들 낮게 나는 고군산열도에
안개 휘몰아 갑니다
배는 서서히 태안 앞바다로 향하고
나는 가슴이 떨려옵니다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탐진의 하늘과 바다와 기품이
내 손에서 빚어지다니요
아, 그런데
벌써 계치 골짜기, 용문천 들녘이 그립습니다.
* 태안선:고려 초기 강진에서 청자를 싣고 개경으로 오가던 배로 태안 앞바다에서 인양하였다.
강경호∙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함부로 성호를 긋다 외 다수, 연구서 최석두 시연구, 평론집 휴머니즘 구현의 미학. ≪시와사람≫발행인 겸 주간, 광주전남현대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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