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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신작시/나팔꽃 외 1편/손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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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섭
나팔꽃 외 1편
강변의 풀이 유난히 푸르고 물줄기가 환한 날이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야겠다고 그의 허리에 감긴 팔을 풀 때였습니다.
그가 내 팔을 잡아끌더니 손등을 꽉 깨물었습니다.
순간 속눈썹이 이슬 한 방울로 무참해졌습니다.
정직하게 찍힌 윗니 네 개와 아랫니 다섯 개의 문양,
붉은 나팔꽃 한 송이가 내 손등에서 피어났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말을 내 뱉었지만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손바닥에 나의 손바닥을 겹치고 나의 손가락을 걸었습니다.
깍지 낀 두 손,
한 줄기 운명선이 실버들의 어느 잔가지를 타고 오를지 궁금했습니다.
여울목에서 일렁거리는 실버들 그림자처럼 불안하기도하였습니다.
강물은 내내 흘러갔습니다.
나는 발목을 감고 있던 젖은 풀숲을 헤치고
더듬거리며 강물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나팔꽃 한 송이 내 몸 안에 아직 시들지 않고 피어 있습니다.
간월도
천수만 옆구리 근처로 아슬아슬 물이 차오른다. 물 위로 보잘 것 없는 섬 하나 뜬다.
철버덕거리며 바다를 밟고 간다. 섬 허리에 줄쳐진 물 자국에 묻은 시간을 물고 집게 한 마리 제집으로 숨어든다. 뒤꿈치가 젖는다. 젖은 채, 시린 발의 누군가를 생각한다. 고무신 한 짝 들고 맨발로 훌쩍이며 가던 그 아이, 엎드려 있다.
조그맣고 까칠하다.
축축해진 발목 위로 물비린내가 타고 오른다. 내 안에 섬 하나 옮겨 놓는다. 외롭고 추운 그 아이, 웅크리고 있고. 슬몃슬몃 지는 해. 전생에도 한 번 와 본 자리 같다.
손제섭∙ 2001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그 먼 길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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