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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신작시/울고 있는 갈대 뼈 외 1편/김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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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임
울고 있는 갈대 뼈 외 1편
갈대숲을 걷다가 갈대 흰 뿌리를 보았다
타원형으로 휘어진 둥근 뼈에 나란히 뚫린 작은 숨구멍들
안쪽 깊은데서 피리 소리가 딸려 나올 것 같다
강바람이 한 호흡을 불어넣자 갈대들이 뿌리를 부풀려 피리를 분다
소리의 방향으로 호젓한 길이 열리고
먼 과거로부터 날아오르는 새 떼의 날갯짓처럼
오래 흐르다 목이 쉰 강물의 울음처럼
내가 듣지 못한 내 안의 소리가 딸려 나온다
갈대의 몸을 빌려 바르르 떨고 있는 내 마음의 얇은 떨판
언제부턴가 길을 잃은 울음이
소리 내지 못한 울음이, 자기공명음을 만들어
파동의 무늬를 음각으로 새기며 푸른 지느러미 흔들어 온다
메아리가 뿜어내는 온갖 소리들로 내 숨결이 가빠오는 갈대숲
얼마나 먼 곳에서부터 더 아득한 곳으로 떠나려 하는지,
내가 움켜쥘 수 없는 시간들이 물빛 그림자를 거느리고
공중으로 빠져나간 뒤 피리 소리는 다만, 깊어지고 있다
소나무 성자
금강 소나무가 육탈을 했다 발치에 쌓인 몸의 껍질들
천장天葬의 하늘에 모여든 독수리 떼처럼
햇살들이 나무의 가슴과 허벅지살을 쪼아 먹었다
마른 몸뚱이에 툭툭 불거진 옹이들이 조용하다
죽어서도 우뚝 선 붉은 수간樹幹
비웠고 마저 비워서 이제 날아갈 일만 남았느니
미움과 사랑만큼이나 마음을 찔렀던 수많은 아픔들이며
마지막으로 들이쉰 숨결이며
나이테를 훌훌 벗어놓고 제 집을 찾아갔다
벌레들이 일제히 구멍을 뚫어
구들장을 들이고 지붕을 올리기 시작했다
금강소나무 한 그루 제 몸의 문 열어놓고 선 채로 갔다
김정임∙2002년 ≪미네르바≫로 등단,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푸른별선인장, 달빛 문장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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