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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신작시/안개 속의 풍경* 외 1편/김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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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안개 속의 풍경* 외 1편
우리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떠도는 낙엽
안개를 건너며 너는
찬밥 같은 내 손에 입김을 쥐어주며 물었어
바다를 떠돌다 만난 나뭇잎들은
너무 깊이 젖어 있어 서로를 부를 수 없겠지
돌아갈 수 있는 것들은
눈동자를 가진 것들 뿐
안개 밖을 보던
최후의 눈동자에 물기가 배기 전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죄 없이 죽은 숨결처럼 바람도 없이
안개는 누구를 위해 바다를 숨겨두는 것일까
추억이 있는 것들만 눈을 가진 안개 속에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제 언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그러나
우리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떠도는 낙엽
안개가 걷히면 가라앉을 낙엽
*Theodoros Angelopoulos의 영화 제목.
사철나무 그늘 안에서
사철나무 아래
버려진 냉장고가 비석처럼 서서
대문 쪽을 바라본다
깨진 병 조각들이 얼음처럼 떠 있는 마당에는
그늘 삭는 냄새가 난다
나는 그레이드 라일락 향의 길을 따라
어둠이 새까맣게 기어 다니는 방에서
무덤인 듯 시간도 없이 잠을 잤다
가끔 벽을 뚫고 고함소리, 물건 부서지는 소리
소리들이 사라져도 쉼 없이 늙어 가는 그녀는
종이며 버려진 전자제품의 고용인이다
그녀 꿈속에 다녀오는 밤은
내 몸에서도 그늘 낳는 냄새가 났다
매연이 담긴 이슬, 사철나무 잎 위에서 숨죽이고 있을 때
나는 그레이드 라일락 향을 마당에 뿌린다
엉킨 꿈속으로 리어카를 따라간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냉장고가 오늘은 비를 맞는다
먼 데 있던 추억이 찾아오는지 혈색이 좋다
벽 너머 그녀의 인기척이 사라진 것은
라일락 동산에서 보리를 뽑아
바람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단을 건너온 바람이 싱싱한 라일락 향을
더러운 마당에 내려놓고 가고는 한다
향기가 다 하고 나면 그녀가 돌아올까
나는 이제
시멘트 화단에 갇힌 사철나무 그늘이 주인인 이 집에서
향기를 뿌리지 않아도 잠들 수 있지만
오늘은 햇빛이 버린 골목길을 거닌다
김일영∙1970년 전남 완도 출생.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5년 대산창작기금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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