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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2009/여름)/신작시/술병들의 묘지 외 1편/고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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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58회 작성일 09-12-20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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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자
술병들의 묘지 외 1편


기억을 떠올리려는 망자의 입술들이야 평생 어두운 쪽으로 기울던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바라만 봐도 취기가 올라 내 등에 업혀 이발소를 간 마지막 아버지 머리를 깎고 면도를 했지 칼도 먹히지 않는 늙은 낯가죽이라고 아가씨가 면상을 찌푸렸어 여기 와서 보니 죽음은 너무 반듯해 깍듯해 한번 핀 목숨이라면 영원을 피웠어야지 물고늘어질 것 하나쯤 남겨두었어야지 상석을 올리는 대리석 위로 네모 반듯한 팔월 태양, 나는 펄펄 끓고 말았어 한번도 꿇어앉아 본 적 없는 내 무릎이 펴지질 않는 거야 과장된 슬픔이 뒤늦게 찾아 온 거야 

저 많은 병나발은 누가 다 불었을까 산더미만큼 쌓인 빈 소주병의 아가리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망자들의 땅에서는 도무지 자음모음이 잡히질 않는다 산사람은 하나도 보이질 않고 심심해진 망자 하나가 生을 재현해보다 낮술에 취해 우는 소린가 “술 한잔하세요” 죽음을 이룬 아버지가 무덤 속에서 껄껄 웃는 말, 저승으로 건너갈 수 있는 딱 한마디 이승의 말, 투명한 말씀을 공손히 따르고 빈 병은 버린다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들은 여기 공원묘지에 버려진다





무일푼의 영혼들에게 


지친 눈으로 숨을 고르던 여기, 부산역이 당신의 마지막 주소지입니까
하루의 일과인 듯 오로지 바라만 보았으니  
바라보다 눈멀고 귀 멀어 마침내 입이 굳어버렸으니
바닥난 목숨이라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  
느티나무 벤치 아래 먼지처럼 쌓여있군요 
사기 당하고 누명 뒤집어쓴 일들 하루종일 중얼거렸지만 
광장의 군중은 밀물처럼 멀리 달아나 버려 
비둘기나 쓰레기통을 붙잡고 억울한 속마음을 털어놓으셨군요 
지금은 맨발로 앉아있어도 발이 시리지 않는 계절입니다 
신문지를 덮고 새우잠 자던 이 땅에서 당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처럼 푸르른 날입니다 
쌓아야할 벽돌과 나사 망치와 못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
결재를 기다리는 문서 더미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내도 피곤을 몰랐던 찬란한 날입니다   
손 흔들어주던 모두를 위하여 무쇠처럼 일만하던 그런 눈부신 날입니다 
저녁 어스름이 저기 계단을 딛고 내려오고
아내 같은 뒷모습이 걸어가면 무작정 따라가기도 했겠지요
장대비는 쏟아지고   
씻기지 않는 오욕이 뼛속을 파고들어
어디 앉지도 눕지도 못했던 천형의 밤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驛舍 건너 5부두에서 미친 바람이 불어닥치면 
껴입을 옷도 덧신을 양말도 없이
눈감으면 영원히 잠들 것 같은 고요한 밤   
누구를 함부로 원망하지 않았던 노숙의 밤  
겨울보다 차갑고 싸늘한 눈초리에 등 떠밀려  
별을 건너 먼 나라로 건너가신 겁니까
무일푼의 영혼들이시여 
한 장 두터운 구름을 깔고 누우신 하늘 거기 포근합니까
그렇다면 이 메마른 땅을 용서하소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거늘   
한 마리 벌레도 죽음 앞에선 행복해야 하거늘 
당신을 비통하게 한 무례한 생명들을 용서하소서 
먼 하늘나라로 당신을 홀로 보내고 살아가는 자들을 용서하소서


고명자∙2005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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